32.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배우는 게 많아
"오라버니, 축하드려요."
"공자님, 축하드려요."
무영은 서하린과 모용혜의 축하를 받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커다란 장원을 바라봤다.
강악과의 대련이 끝난 직후, 무영은 뇌룡대 전원이 머물 수 있는 장원을 구입했다.
비록 신선주를 팔아 모은 돈과, 표중산이 예전에 무영에게 받은 돈의 거의 대부분을 사용했지만, 이제야 근거지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오라버니, 어서 들어가 봐요."
서하린의 재촉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장원은 들인 돈에 비해서 상당히 규모가 컸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 꽤 큰 전각들이 보였다.
무영과 두 여인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때까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뇌룡대가 벅찬 가슴을 안고 장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악과 당백형도 뒤따랐다. 당백형 앞에는 당비연도 함께였다.
강악과 당백형은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무영이 장원을 구입하는 데 꽤 많은 돈을 지원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내민 돈이었지만 사실 속내는 조금씩 가지고 있었다.
"흐음. 여기가 앞으로 내가 머물게 될 집이로군."
강악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슬쩍 웃었다. 강악은 상당한 액수를 제공하는 대신 장원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강악은 당분간 무영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했기에 당백형의 조언을 받아 흔쾌히 돈을 내놨다.
장원이 위치한 곳은 무한의 변두리지역이었다.
인적이 드물고 근처에 인가가 거의 없어 상당히 조용한 곳이었다. 매일 수련을 해야 하는 뇌룡대나, 뇌기를 풀풀 날려야 하는 강악에게는 좋은 환경이었다.
"네놈도 아예 이리로 옮기는 게 어떠냐?"
강악이 당백형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당백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하지. 난 너처럼 독불장군이 아니거든."
사실 손님으로 무영의 장원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내면 강악과 수시로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당백형의 뒤에는 당가가 있고, 강악을 피해 장원에 머물지 않을 핑계로는 아주 적절했다.
"끄응. 아쉽구나."
강악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당백형을 신경 쓸 겨를도 별로 없었다. 강악의 머릿속에는 온통 신선주와 무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번에 벽을 넘어서면 기어코 벼락을 맞고야 만다.'
강악은 다시 한 번 전의를 불태웠다.
"공자님, 장원에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용혜의 제안에 무영이 잠시 고민했다.
대부분의 장원에는 이름을 크게 써서 편액을 다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이름난 무가의 경우는 그 편액이 가문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뇌룡장은 어때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좋은 이름이긴 하다. 뇌룡대와도 맞는 부분이 있고, 하지만 왠지 그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좀 그렇지 않아? 공자님이 뇌룡이라는 사실을 되도록 숨겨야 하는데 장원의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 버리면 안 되지."
모용혜의 말에 서하린이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좋은 이름이라도 있어?"
"글쎄......"
서하린과 모용혜가 고민하는 사이 일행은 장원에서 가장 큰 전각 앞에 도착했다.
"휴우...... 규모가 정말로 크네."
무영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살짝 뒤에서 쫓아오고 있던 표중산이 즉시 대답했다.
"예전에 꽤 이름 높았던 무가가 쓰던 장원이라고 합니다."
표중산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무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런 무영의 마음을 눈치챈 표중산이 급히 말을 이었다.
"정협맹이 무한에 자리를 잡으면서 차차 몰락했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정협맹이 무한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지라 무가의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무가가 돈을 버는 방법은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일정액의 돈을 받거나, 직접 상단 혹은 사업체를 운영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자의 방법을 주로 쓴다. 전자의 경우 사파나 뒷골목의 파락호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정협맹의 등장으로 돈줄이 말라 버린 무가들이 다수 몰락했다는 사실은 꽤 유명했다. 무영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장원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우뚝 솟은 전각들이 당시 이 무가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왠지 쓸쓸하군.'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연무장 쪽이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연무장과 개인적으로 약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연무장은 장원 깊숙한 곳에 있었다. 예전 무가의 위세를 말해주듯 연무장의 규모 또한 상당했다.
무영은 살짝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크기라면 뇌룡대 전원이 마음껏 수련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했다.
"좋은 장원이군요."
무영의 말에 강악과 당백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훌륭한 장원이었다. 전각의 위치도 아무렇게나 정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 아래 세워졌다.
"고작 그 돈으로 잘도 이런 장원을 구했구나."
당백형이 표중산을 보며 말하자 표중산이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나저나 이제 장원까지 생겼으니 본격적으로 뭔가를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당백형의 말에 무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신선주를 만들어 파는 것은 당분간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야 돈을 무영 혼자 벌어서 나머지 백여 명이 먹고 사는 것밖에 안된다.
"잘 알겠지만 무한의 상권에 끼어들기란 정말로 어렵다. 정협맹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야."
당백형의 말이 옳다. 무한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표중산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상권을 정협맹이 틀어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표중산의 말에 당백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주로군."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신선주가 있습니다."
무영은 표중산을 쳐다봤다. 표중산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표중산은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은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앞에 엎드려 있는 흑의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흑의인은 은왕의 눈길을 느끼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슬슬 판을 벌여야 하지 않겠느냐?"
은왕의 말에 엎드린 사내가 머리를 바닥에 쿵 찍었다.
"그, 그렇습니다!"
은왕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한데 너무 조용하구나."
흑의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동료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지켜봤다. 마치 공처러 동그랗게 뭉쳐서 온몸의 피를 쏟아내고 죽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기에 지금 느끼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흑사맹과 정협맹을 비교하면 누가 위인가?"
"저, 정협맹입니다."
은왕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은왕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흑의인은 여전히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흐, 흑사맹에 힘을 조금 실어주면 됩니다."
은왕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게 하면 간단하겠어."
은왕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슬쩍 던졌다.
풀썩.
흑의인은 눈앞에 떨어진 비단 주머니를 깜짝 놀라 바라봤다. 은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결국 흑의인은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작은 패(牌)가 하나 있었다. 옥으로 만들었는지 초록빛을 띤 패였다. 그 패와 함께 있는 것은 사람 눈알만한 은빛 덩어리였다.
'으, 은환!'
그것은 은환이었다. 크기로 보아 그 효능이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흑의인은 조심스럽게 녹패를 살폈다.
녹(綠).
흑의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떨리는 손을 억지로 진정하며 패를 뒤집었다.
림(林).
림자를 확인한 흑의인의 눈이 경악으로 찢어질 듯 커졌다. 이것은 녹림왕을 상징하는 패였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은왕은 어느새 녹림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은환을 이용해 녹림을 움직이라는 뜻이로군.'
흑의인은 깊이 부복한 후, 조용히 물러났다. 이건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자신도 동료처럼 피가 쭉 빨린 공이 되어 죽어갈 수는 없었다.
녹림왕 엽광패. 천하에 산재한 수많은 녹림도들을 하나로 통합한 인물이다.
오랫동안 각자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산적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당당하게 녹림이라 불리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엽광패는 특유의 힘을 최대한 살리는 무공으로 수많은 산채의 채주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엽광패 아래에는 산적답지 않게 머리를 잘 굴리는 소명학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소명학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수많은 산채들을 녹림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당금 무림에서는 그 누구도 녹림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녹림은 압도적인 머릿수로 그 세력을 과시했다.
게다가 녹림왕 엽광패는 십대고수에 발을 걸칠 정도로 강했다. 십대고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산채들이 뭉쳤으니 그 누가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모든 녹림의 주인인 엽광패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턱을 괴고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봐, 군사. 이거 대체 뭐하는 놈이 보낸 거야?"
엽광패의 말에 군사라 불린 소명학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놈이겠지요. 주군께서도 읽어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소명학의 말에 엽광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한에 사는 화무영이라는 놈과 그 일당이라......"
엽광패는 서찰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군. 우리 녹림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무슨 청부단체쯤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소명학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마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한 것 같습니다."
"머리를 써?"
"살수단체는 그 자체로 치밀한 정보조직입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의뢰인의 신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죠. 즉, 이놈은 뒤가 구린 놈입니다."
"호오, 역시 군사야."
엽광패는 한 번 감탄해 주고는 다시 서찰을 읽었다. 이번에는 눈에 흥미가 살짝 돋아났다.
"그래서 의뢰금은 얼마나 돼?"
"금으로 천 냥입니다."
엽광패의 눈이 커졌다.
"금으로 천 냥? 정말이야? 은을 잘못 본 거 아냐?"
"확인해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손에 들고 계시면서."
엽광패는 다시 서찰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분명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의뢰금으로 황금 천 냥을 지불하겠다는 말을.
황금으로 천 냥이면 은으로는 이만 냥이다. 이건 정말로 큰 돈이다. 아무리 녹림왕이라 해도 혹할 정도로 큰돈이다.
하지만 소명학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그리 의뢰금이 큰 건 아닙니다."
"뭐? 군사가 요즘 살 만한가봐? 황금 천 냥을 돌처럼 보게?"
"무한은 정협맹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일을 벌이는 건 아무리 우리가 강하다 해도 상당히 껄끄러운 일입니다."
소명학의 말에 엽광패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제가 조금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 화무영이라는 놈이 대체 누구인지."
"그래? 누군데? 누구기에 황금 천 냥을 덥석 내놓을 정도야?"
엽광패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어렸다. 소명학은 그런 엽광패의 눈을 한 번 살피고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장수입니다."
"약장수? 군사, 지금 나랑 장난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약장수입니다. 한데 그 주변에 있는 자가 문제입니다. 의뢰는 분명히 화무영과 그 일당을 박살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엽광패가 다시 서찰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기 그렇게 되어 있군."
"그게 문제입니다. 화무영, 그놈과 함께 있는 건 다름 아닌 당백형입니다."
순간 엽광패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당백형? 천수독왕?"
"그렇습니다."
"끄응."
엽광패가 몸을 뒤로 살짝 뉘었다. 의자에 몸을 조금 파묻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젠장! 고작 황금 천 냥으로 정협맹을 들쑤시고 그놈과 싸우는 건 너무 손해잖아!"
소명학이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엽광패는 서찰을 옆으로 휙 던져 버렸다. 서찰은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마치 비도처럼 소명학에게 쏘아져 나갔다. 소명학은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좋다 말았네."
엽광패는 이번 의뢰를 그냥 포기학로 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고 녹림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런 피해를 감수하면서 고작 돈 천 냥에 움직일 수는 없었다.
소명학은 그런 엽광패를 보며 다시 웃었다.
"한 번 의사타진을 해 볼까요?"
"아, 됐어. 그 돈으로는 절대 안 돼."
"돈을 좀 더 올려달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황금 오천 냥 정도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습니까? 우리 녹림에도 꽤 쓸 만한 자들이 있으니까요."
"오천 냥?"
엽광패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황금 오천 냥이면 은으로 무려 십만 냥이다. 이건 몇 대가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막해나 금액이다.
게다가 소명학의 말대로 녹림에는 꽤 쓸 만한 자들이 많았다. 녹림의 수 자체가 워낙 어마어마하니 그 중에서 쓸 만한 자들만 뽑아도 수백이 넘어간다.
그 수백 중에서 또 골라 뽑으면 아무리 십대고수라 해도 부담이 갈 정도의 강자가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그 중에서는 엽광패와 힘이 아닌 의리로 묶인 놈들도 꽤 많다.
"한데 오천 냥을 순순히 내줄까?"
"그러니 협상을 해보는 거지요. 뭐, 한 삼천 냥 정도를 예상하고 협상을 해볼까 합니다."
엽광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하자. 삼천 냥이 어디야. 그것도 황금으로. 으하하핫!"
엽광패의 웃음소리가 산채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참 그렇게 웃고 있는데, 녹의를 입은 수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쩔까요?"
수하의 말에 엽광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날 찾아올 사람도 있었나?"
수하는 안절부절 못하며 손을 내밀었다.
"저...... 손님이 이걸 가져다 드리라고......"
수하의 손에 있던 녹색 패가 순식간에 엽광패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엽광패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끄응. 데려 와라."
엽광패의 말에 수하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산적답지 않게 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했다. 누구라도 엽광패 근처에 있으면 그렇게 된다. 이 산채에서 엽광패과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소명학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명학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엽광패가 손에 든 패를 슬쩍 던졌다. 소명학은 그것을 받아 확인하고는 엽광패와 마찬가지로 안색을 굳혔다.
"그들이군요."
"그래. 뭐,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예상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잠시 후, 흑의에 복면까지 뒤집어 쓴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비단주머니 하나를 엽광패에게 던졌다.
엽광패는 주머니 안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은환?"
"은왕께서 녹림왕께 드리는 선물이요."
흑의인의 말에 엽광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은왕이 원하는 게 뭐지?"
엽광패는 녹패를 다시 흑의인에게 던지며 물었다. 흑의인은 녹패를 받아 품에 갈무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정협맹을 흔드시오. 조만간 흑사맹이 움직일 거요."
엽광패와 소명학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은왕의 명은 절대 어길 수 없다.
"뭐, 어쩔 수 없지. 이 약은 고맙게 받았다고 전해 주도록."
엽광패의 말에 흑의인이 공손히 포권을 취한 후, 사라졌다.
잠시 대전에 침묵이 흘렀다.
"후우. 이건 뭐, 일이 좀 꼬였네."
엽광패의 말에 소명학이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었다.
"꼭 그렇게 꼬이기만 한 건 아닙니까. 의뢰 성공률을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할 일, 돈까지 받고 하게 되었으니까요."
"뭐, 그건 그렇군. 그럼 한 번 타진해 봐. 돈은 무조건 선금으로 받아 실패해도 보상은 없다. 그게 녹림의 규칙이라고 우겨."
"당연한 말씀을."
소명학은 환하게 웃은 후 밖으로 나갔다.
엽광패는 소명학이 나가자 눈을 빛내며 은환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제 더 이상 십대고수의 말석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필요가 없겠군. 으하하하!"
엽광패는 산채가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계속 울려 퍼졌다.
무한에 새로운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의 중심에는 뇌룡장이 있었다.
무영은 결국 장원의 이름을 뇌룡장(雷龍莊)이라 지었다. 원래는 다른 적당한 이름을 찾고 있었는데, 강악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렇게 되었다.
자신이 함께 기거하는 장원인데, 이름이 최소한 뇌룡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무영도 뇌룡장이라는 이름이 싫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의 별호가 되어 버린 뇌룡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것을 널리 내세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무한에 돌아다니는 소문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뇌룡장이었다. 뇌룡장이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선주 때문이었다. 신선주에 대한 소문은 이제 무한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실체를 직접 접한 사람들이 늘어났기에 소문이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신선주를 만든 사람이 바로 뇌룡장에 있다는 소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는 굉뢰번천장 강악이었다. 뇌룡장에 굉뢰번천장 강악이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무한이 한바탕 발칵 뒤집혔다. 그만큼 강악이 가지는 파급력이 대단했다.
사람들이 강악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독불장군처럼 홀로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조직이나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서만 다니던 사람이 장원에 정착했더니 사람들의 이목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 두 가지 소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바로 정협맹이었다. 정협맹은 오래전부터 굉뢰번천장을 영입하기 위해 애써왔다.
물론 정협맹만 그런 것은 아니다. 흑사맹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혈마맹에서까지 강악을 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강악을 설득하지 못했다.
한데 느닷없이 무한의 한 장원에 주저앉았으니, 당연히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정협맹에서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남궁명이었다.
"대체 그놈이 무엇이기에......"
남궁명은 있는 대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이 보기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다. 별 것 아닌 놈 때문에 이렇게 맘고생을 해야 하니 이만저만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또 뭔가......"
남궁명의 짜증을 북돋는 또 하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서찰이었다.
"오천 냥?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고작 산도적 주제에! 게다가 선금? 뭘 믿고? 흥."
서찰 안에는 의뢰금을 황금 오천 냥으로 올려 달라고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황금 천 냥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한데 오천 냥이라니. 게다가 선금으로 달란다. 산적을 누가 믿고 선금으로 돈을 지불하겠는가.
"설마, 뒤를 잡힌 건 아니겠지?"
남궁명이 가장 불안한 것은 바로 그거였다. 혹시 추적을 당해 의뢰자가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건 제대로 목줄을 잡히는 거였다.
"그럴 리가 없지."
남궁명은 상당히 치밀한 방법을 이용해서 녹림에 접근했다. 누구라도 자신을 역으로 추적하지는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끄응, 맹주님께서 기대를 하고 계실 터인데......"
남궁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녹림을 움직이는 것은 꽤 쓸만한 패였다. 녹림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녹림과 함께 자신의 또 다른 패 하나를 쓸 생각이었다. 그것은 맹주조차 모르는 패였다.
"녹림이 그냥 성공해 주면 좋겠지만 그걸 바랄 수는 없지. 그나저나 어쩐다......"
남궁명은 고개를 저으며 지필묵을 들었다. 천 냥으로 안 되면 돈을 조금 더 쓰면 된다. 하지만 오천 냥은 아니었다. 남궁명이 움직일 수 있는 돈의 한계는 이천 냥이 전부였다.
"이걸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수를 생각할 수밖에."
남궁명은 왼손으로 붓을 들고 조심스럽게 서찰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인 남궁명이었지만, 왼손으로도 능숙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누군가 봤다면 왼손잡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서찰을 완성한 남궁명은 그것을 서탁 앞으로 내밀었다.
스윽.
서탁 앞에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림자는 서찰을 집어 삼킨 후, 꺼지듯 사라졌다.
"후우....... 짜증나는군."
남궁명의 한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뇌룡장에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며 무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로 무림에 완전히 발을 들이고 말았구나.'
홀로 약장수로 떠돌았다면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 돌아다니며서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고, 무림인과 시비가 붙어도 피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온전히 무림에 발을 들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수하를 거뒀고, 그 수하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할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게다가......'
무영은 힐끗 옆을 쳐다봤다. 당백형과 강악이 주거니 받거니 신선주를 마시고 있었다.
십대고수라는 이들과 인연이 깊게 얽혔다. 이제는 정말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무림에 깊이 발을 들였다고.
일단 발을 들였으니 피할 생각은 없었다.
"이놈아, 뭐하느냐. 거기서 청승 떨지 말고 여기 와서 같이 한 잔 하자."
무영은 강악의 호탕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선주 한 병을 다 비웠는지 바닥에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늘 치는 그게 끝입니다."
무영의 말에 강악과 당백형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치사하게 왜 이래!"
강악이 소리쳤다. 당백형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는 강악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무영은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앞으로 신선주는 두 분 다 하루에 한 병, 그 이상은 없습니다."
무영의 단호한 말에 당백형과 강악의 얼굴에 약간의 심통이 돋아났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설 줄 알았느냐?"
당백형이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강악도 그 뒤를 따라 힘차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신선주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신선주는 무영의 거처 뒤에 있는 공터에 놓여 있었다.
무영은 두 사람이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당백형도 그렇고 강악도 그렇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느낌이 좋았다.
'어쩌면...... 스승님의 그림자를 보는 건지도 모르지.'
무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왠지 하늘에 스승님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흥, 나를 뭐로 보고."
당백형은 무영의 거처 뒤뜰에 발을 들이며 중얼거렸다.
"응?"
뒤뜰에 도착한 당백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강악역시 마찬가지였다. 뒤뜰에는 예전에 있떤 커다란 항아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집채만 한 바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이놈이 감췄구나."
당백형과 강악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치사하게 감췄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누구인가. 십대고수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찾으면 그만이지."
강악이 그렇게 말하며 감각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신선주에는 독특한 뇌기가 섞여 있었다. 일단 뇌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강악의 감각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기대하지."
당백형은 강악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뇌기하면 강악이라는 것은 당백형도 인정하는 바였다.
강악은 집중하자마자 눈을 떴다. 신선주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찾은 건가?"
강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백형의 표정이 조금 더 환해졌다.
"어디지?"
강악이 손가락들 들어 바위를 가리켰다.
"저 바위?"
강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악은 속으로 경악했다.
신선주는 바위 안에 있었다. 바위 속에서 신선주 특유의 정제된 뇌기가 느껴졌다. 어찌 바위 속을 파내서 안에 술을 보관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괴물은 괴물이군."
강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위에 다가갔다. 당백형도 그 뒤를 따랐다.
바위의 구조는 간단했다. 바위 윗부분을 잘라내 두껑처럼 쓰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내겠지만 두 사람은 다르다. 아니, 어느 정도 경지에 든 고수라면 이 정도 바위 들어올리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흥! 이따위 것."
바위는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 정도였다. 강악은 바위 앞에 서서 천천히 내력을 움직였다. 그러자 강악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악은 바위 윗부분까지 올라간 후, 바위에 살짝 발을 댔다. 뚜껑 아래쪽에 발을 디디고 양 손바닥을 뚜껑부분에 살짝 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위는 강악의 손바닥에 쩍 달라붙었다. 내력의 절묘한 운용이었다.
강악은 입가에 슬쩍 웃음을 걸고 내력을 움직여 바위 뚜껑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악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끄응......"
강악의 입에서 결국 용쓰는 소리까지 튀어 나왔다. 하지만 바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힘을 썼을까. 강악은 결국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익! 이렇게 된 거 박살을 내 주마!"
강악이 손바닥을 번쩍 들어올렸다.
빠지지지직!
강악의 손바닥에 뇌기가 요동쳤다. 강악이 그것을 막 내려치려는 순간, 당백형이 고함을 쳤다.
"그만!"
있는 대로 내공을 실어 친 고함이라 강악은 깜짝 놀라 손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려 당백형을 바라봤다.
"뭐, 뭐야?"
강악이 당황스런 목소리로 묻자, 당백형은 싸늘한 눈으로 강악을 노려봤다.
"바위 안에 있는 술을 모조리 쏟아버릴 생각인가?"
당백형의 말에 강악은 그제야 아차 하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커, 커험. 그, 그럼 네가 한 번 해 보던가."
강악의 말에 당백형이 혀를 한 번 차고는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조금 전 강악이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당백형은 강악과 다르게 바위의 구조를 조금 살폈다.
"흐음, 돌려야 하는 구조인가?"
당백형은 바위에 손바닥을 대고 내력을 끌어 올렸다. 힘만으로 열 수 있는 것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강악이 열었어야 한다. 강악은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내공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흐읍......"
당백형은 강하게 힘을 줘 바위를 들어올리기도 하고,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 바위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강악까지 올라와 함께 힘을 썼지만, 여전히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젠장! 포기다! 그냥 박살내고 안에 있는 술 먹는 게 낫겠어! 윗부분만 날려 버리면 되는 거 아냐!"
강악은 그렇게 말하며 당백형이 채 말릴 새도 없이 손바닥을 내리쳤다.
쩌저저정!
강렬한 소리와 함께 바위에 뇌전이 터져 나갔다.
"이, 이럴 수가......"
"이 바위, 대체 정체가 뭐야?"
두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방금 강악이 내리친 부분을 쳐다봤다. 강악의 그 강력한 장법으로도 바위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건 믿을 수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강악은 그렇게 외치며 다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빠지지지직!
이번에는 손바닥에 모이는 뇌기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마치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강악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강악이 손바닥에 모든 뇌기를 모아 막 내리치려는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두십시오!"
"커억!"
그 외침은 강악에게 집중되어있었다. 강악은 갑작스럽게 뇌기가 흩어지는 충격으로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이, 이번에는 또 뭐냐!"
강악은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에는 정말 깜짝 놀랐다. 강제로 뇌기가 흩어져 버린 것이다. 경악에 찬 강악의 눈에 무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강악은 멍한 표정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그러다 바위 박살납니다."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바위로 다가가 바위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무영의 발에서부터 뇌기가 일어나더니 점점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팔을 통해 손으로 몰려갔다.
파지지지직!
무영의 손에서 흘러나간 뇌기가 바위로 스며들어갔다. 한동안 뇌기를 불어 넣던 무영은 이내 손을 떼고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손을 올렸다.
무영을 중심으로 막대한 기운이 움직였다. 강악과 당백형은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 점점 짙은 경악이 담겼다.
"후우우......"
무영은 막대한 기운을 바위에 쏟아 부은 후, 숨을 길게 내뿜으며 한 발 물러섰다.
"오늘은 한 병 더 드리죠. 하지만 내일부터는 안 됩니다."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바위 뒤로 걸어갔다.
당백형과 강악은 너무 놀라 무영이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었다. 바위 뒤로 돌아갔떤 무영은 어느새 신선주 한 병을 가지고 나타났다.
"받으십시오."
무영은 신선주를 강악에게 건네고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강악과 당백형은 멍한 눈으로 그런 무영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다시 거처로 돌아온 무영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강악과 당백형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었다.
"후우, 이제 대충 정리를 했으니, 다시 시작을 해야지."
아무리 장원을 얻고 근거지를 마련했다 해도, 또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다고 해도, 무영은 약장수였다.
그것만큼은 평생 변해선 안 되는 자신의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스승님과 약속한 자신의 길이었다.
뇌룡장은 규모가 큰 만큼 아직 비어 있는 전각도 많았다. 장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많이 뽑아 몇몇 전각은 채워졌지만, 그래도 많은 전각이 아직 놀고 있었다.
무영은 별로 상관없었지만 표중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모든 전각을 사람으로 꽉꽉 채우고, 장원을 더 크게 확대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어쩌면 무공보다는 그쪽으로 더 맞는 분인 것 같아.'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표중산은 무공 수련도 열심이었지만 장원의 일에 훨씬 더 열정적이었다.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장원을 구입하기도 전부터 상권에 발을 들일 준비까지 끝마쳤을 정도였다.
무영은 표중산 덕분에 장원에 대한 일은 일체 신경 쓰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다시 산에 가야지.'
앞으로는 산에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꾸준히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무영에게 수련은 신선단과 신선주를 만드는 것이다.
어차피 뇌룡대에게 줄 신선단도 만들어야 한다. 이번에는 고통이 없더록 제대로 순화한 신선단이 필요했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중첩은 별로 못하겠지만......'
중첩을 많이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거야 차차 하면 되는 일이다. 처음에 기운이 약한 신선단으로 시작하는 것이 어쩌면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
"후우, 어쨌든 마무리가 중요하니까."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침상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요즘은 명상하는 시간을 좀 더 늘렸다.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아련히 사라지는 깨달음의 끈을 잡기 위해서였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배우는 게 많아.'
지금 잡으려는 깨달음의 끈도 당백형이나 강악과 어울리다가 발견했다. 물론 뇌룡대와 정협맹 사람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무영은 이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스승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 눈을 감았다.
엽광패는 쓸 만한 수하를 모조리 끌고 무한으로 향했다. 엽광패가 있던 곳은 강서였으니 호북 무한까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엽광패는 일단 포양호로 가서 그곳의 수채 몇 군데를 박살냈다. 순전히 배를 얻기 위해서였다.
수적들은 녹림처럼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이렇다 할 고수가 없었기에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엽광패가 직접 나섰으니 덜 맞고 덜 죽기만을 바라야 했다.
그렇게 포양호에서 수적 몇과 배 몇 척을 얻은 엽광패는 수하들을 모조리 배에 태워서 무한으로 향했다. 엽광패가 거느린 부하의 수는 이백 명이 넘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인상이 더러웠다.
험악한 인상에 무기까지 든 자들이 이백 명이나 평지로 이동하면 금세 눈에 띈다.
그렇기에 배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물론 엽광패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소명학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었다.
강을 타고 무한까지 가는 길은 매우 순조로웠다. 중간에 수적을 한 번 만나긴 했지만 가뿐히 박살내고 길을 재촉해 예상보다 빠르게 무한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엽광패는 부하들이 배에서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소명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약속된 시간까지는 사흘이 남았는데 어쩌죠?"
소명학의 말은 무한으로 들어갈 건지, 아니면 근처 다른 곳에 머무를 건지를 묻는 것이었다. 당연히 엽광패도 알아들었다.
"우리는 녹림, 산적이다. 산적은 산에서 살아야지."
엽광패의 말에 목적지가 정해졌다. 목적지는 무한 근처에 있는 작은 산이었다. 비록 작기는 했지만 이백 명 정도 숨기엔 아주 적당했다.
먹을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산에서 사냥을 하면 될 테니까. 산에서 살던 자들이라 사냥에는 익숙햇다.
다만 사흘 동안 산적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문제가 되겠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자, 가자."
부하들이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엽광패가 나직이 명령하며 앞장섰다. 소명학이 재빨리 엽광패 옆으로 따라붙었다.
엽광패가 산이 어디 있는지, 무한이 어디 붙어 있는지 알 리가 없다. 소명학이 길을 잡아줘야 했다.
소명학은 미리 무한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를 마쳤다. 어디에 수로가 있고, 집이 어떻게 있으며, 정협맹의 위치가 어디인지까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당연히 근처의 어디가 가장 지내기 괜찮고 숨기 좋은 산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소명학은 일행을 그 쪽으로 안내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남궁무학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흑사맹이 뭘 어떻게 해?"
남궁무학의 말에 남궁명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대답했다.
"흑사맹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사흘쯤 후에 이곳 무한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사흘 후?"
남궁무학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뭔가 조금 이상했다.
"규모는?"
"천 명 정도입니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천 명 정도라면 당연하다. 정협맹의 힘은 그리 녹록치 않다. 보유하고 있는 무사의 수만 해도 천 명이 훨씬 넘는다.
그것도 무한 본명에서만 그렇고, 분타까지 합하면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다.
게다가 저력이 있다. 수많은 무가들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싸움에서 크게 피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금세 힘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동방극은?"
"참전한 듯합니다."
마염공 동방극. 현 흑사맹주이자, 십대고수의 일인이다. 그가 온다면 상황이 조금 다르다.
"흐음, 조금 부담이 되는군."
정협맹이 동방극이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는 정협맹에는 아직 십대고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사들의 전체적인 질이나 무공 수준은 상당히 높고, 십대고수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무인도 많지만, 정작 십대고수는 없었다.
현 정협맹에서 가장 강한 자는 당연히 맹주인 남궁무학이지만, 남궁무학은 남궁세가 내에서는 최고수가 아니다. 남궁세가의 최고수는 좌우쌍위니까. 물론 좌우쌍위도 십대고수는 아니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십대고수라 해도 혼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흑사맹은 대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남궁무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야. 마염공은 생각보다 대단한 자야."
그것은 남궁명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쳐들어오는 쪽은 흑사맹이다.
그들은 무한까지 오느라 피로가 쌓인 상태일 것이고, 정협맹은 편히 쉬면서 최상의 상태로 적을 맞이한다. 당연히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피해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하면, 중간에 기습이라도 할까요? 아니면 함정이라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흠, 한 번 고려해 보자꾸나. 장로들을 소집해라. 이 일을 알려서 그들의 힘과 머리를 빌려야지."
사실 정협맹의 장로들이 셋만 있어도 충분히 동방극 정도는 막을 수 있다. 그런 장로가 무려 열 명이나 있다. 그것이 바로 정협맹의 저력이었다.
무영은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오늘은 하루 종일 산에서 약초를 채집할 생각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갈히 몸을 씻고, 정성스런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산에 올랐다. 일단 산정에 올라 산의 기운을 만끽한 다음 채집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정성스런 걸음은 최근 무영이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정성스럽게 걷다보면 몸에 기운이 충만해지고, 산에 기운이 충만해진다.
그럼 자연스럽게 산에 난 나무나 풀들에도 기운이 충만해지고, 약초의 질이 크게 향상된다.
무영은 기분 좋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성을 한껏 담은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확실히 땅을 디디며 앞으로, 위로 나아갔다.
정상까지는 금방이었다. 산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뿐더러 아무리 정성을 다한 걸음걸이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영의 걸음은 보통 사람이 뛰는 것보다 월등히 빠르기 때문이다.
산정에 오른 무영은 눈을 감고 양 팔을 천천히 벌렸다. 그렇게 산의 기운을 한껏 만끽하려던 무영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응?"
산의 기운에 불순한 기가 섞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피 냄새도 났다.
"쩝, 오늘은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네."
피 냄새가 난다는 것은 누군가 사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냥을 하면 필연적으로 산 여기저기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기운을 해치게 된다. 무영은 되도록 최선의 상태로 약초를 채집하고 싶었다.
"다른 산으로 가야 하나."
이 근처에는 산이 몇 개 있었다. 무영은 그 산들을 주기적으로 돌아가면서 올랐다. 오늘은 이 산을 오를 차례이기 때문에 오른 것뿐이지 다른 산으로 가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무영은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순한 기운이 너무 많은데?"
일단 산정에서 한 번 산과 하나가 되었었기 때문에 산의 기운을 훨씬 민감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무영은 본래 기감이 둔한 편이지만, 이렇게 산에 올라 약초를 채집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무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불순한 기운이 응집된 곳으로 향했다. 어쩌면 산에 뭔가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로잡아 줘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산과 교감을 이루면서 약초를 채집할 수 있을 터였다.
무영은 조금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결국 불순한 기운이 모인 곳에 도착했다.
무영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내들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를 감추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 사내들도 무영을 발견했다. 그들은 험악했다. 얼굴도, 성격도.
"뭐야? 이런 외진 곳에 손님이라니! 으하하하!"
산적 중 하나가 크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 난 흉터가 웃을 때마다 일그러졌다.
이백 명이나 모여 있는 곳이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아도 온통 험상궂은 사내들뿐이었다. 무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작은 산에 이렇게 많은 산적들이 있을 이유가 있나?"
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굳이 작은 소리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산적들은 무영의 말을 똑똒히 들을 수 있었다.
"뭐야? 감히 나보고 산적이라고 한 거냐?"
산적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커다란 도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무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영에게 가장 익순한 무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산적이라 답할 것이다. 무영은 십 년 동안 스승님과 함께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집했다.
사실 무영이 신선단을 만드는 방식은 약초를 따고 고를 필요가 없으니 이산 저산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산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 여러 산을 돌아다닌 것이다.
무영은 오악은 물론이고, 꽤 유명하다는 산에서부터 이름 없는 야산까지 상당한 곳을 돌아다녔다.
사실 그렇게 하려면 막대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스승님과 함께 걸으면 이상하게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왜 그런지 알지만......'
아무튼 그렇게 산을 돌아다니다 보니 산적을 만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당연히 산적들은 무영과 무영의 스승을 그냥 두려 하지 않았꼬, 무영의 스승 또한 산적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싸웠지.'
무영은 당시의 일이 떠올라 슬쩍 웃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피 터지게 싸웠다.
하지만 어떤 산적도 무영을 이길 수 없었다. 무영이 특별히 강력한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무영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무영은 꽤 많은 산적들과 싸웠고, 몇몇 산적들은 무영의 손 아래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미친놈이 갑자기 왜 처웃어?"
산적은 안 그래도 험상궂은 인상을 더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빠르게 무영을 향해 다가갔다. 산적의 키는 무영보다 목 하나가 더 컸다. 산적은 무영 앞에 서서 무영을 가소롭다는 듯 내려 봤다.
"일단 가진 거 몽땅 내놔. 옷도 다 벗어. 그럼 살려는 주지."
산적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들고 산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놈이 또 웃어?"
산적의 손바닥이 무영의 뺨을 향해 비쾌하게 날았다.
쐐액!
쩍!
산적이 손바닥이 정확히 무영의 손바닥과 마주쳤다. 무영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산적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꺼어어......"
산적은 손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거대한 충격에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말과 행동을 보아하니, 손에 인정을 둔 적이 한 번도 없는 모양이군."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부여잡고 허리를 숙인 산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스윽 밀었다.
"커어억!
산적은 무영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눈을 까뒤집으며 그대로 무너졌다. 무영은 그 산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산적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죽진 않았으니까 데려가."
무영의 말에 산적들의 몸에서 일순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 이놈! 이제 죽었다고 생각해라!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자비를 바라지 마라!"
산적의 외침에 무영이 피식 웃었다.
"언제 자비를 펼친 적은 있고?"
무영의 말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산적 셋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도가 들려 있었고, 도는 무거운 바람소리와 함께 무영의 정수리를 단번에 쪼갤 듯한 기세로 날아왔다.
쩌저정!
무영은 손을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 산적들의 도를 박살냈다. 산적들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뒤로 날아가 버렸다.
이백 명이나 되는 산적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방금 뛰쳐나간 세 명은 상당한 실력을 가졌다. 웬만한 산채의 채주급을 넘어설 정도였다.
한데 그들이 단번에 나가 떨어졌다. 그것도 무기가 박살나서.
그제야 산적들은 심상치 않은 상대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목이 필요해. 저런 놈은 두목이 해결해야지.'
산적들의 마음이 공통적르오 떠오른 생각이었다. 상대는 고수였고, 고수는 고수가 상대해야 한다. 산적들의 고수는 녹림왕 엽광패였다.
잠시 그렇게 대치가 이어졌다. 무영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산적들은 사냥을 하겠다고 빨빨거리고 사라진 두목을 기다렷다.
휘이잉.
시원한 산바람이 주변을 한 번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첫댓글 즐~감!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