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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20) 2023. 12. 17
헌신의 본을 보인 사람들
느헤미야11:1-2, 7:4
<급격한 도시화>
한국 사회는 1960년대 이후 진행된 산업화에 따라 인구가 도시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1960년에는 28%의 사람이 도시에서 살았는데, 2020년에는 82%의 사람이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농어촌은 고령자들이 가득한 지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시는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활동의 중심지로서 사람들에게 편의와 풍요로움을 제공하고, 경제적 발전과 기회 제공, 교육 및 의료 시설의 집중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급격한 도시화는 많은 부작용도 가져왔습니다. 주택 부족으로 인한 가격 상승, 교통체증, 환경 오염, 사회적 격차 등의 부작용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지방 균형 발전’이 시대적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역으로 지금도 급격환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텅 빈 예루살렘>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해야 했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안의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7: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B.C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완전히 망한 이래, 느헤미야가 다시 성벽을 완성한 지금까지(B.C 444년), 142년 동안 성벽이 없는 예루살렘에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쳐들어올 경우, 막아줄 어떤 보호 장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살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사명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감당해 내었습니다.
두 번째 사명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을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느혜미야가 52일 만에 감당하였습니다.
이제는 세 번째 사명이 남았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읍을 이전과 같이 사람 사는 도시로 만드는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도로, 그리고 신앙의 중심지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거기에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에 살기를 거부한 이유들>
주석학자 매튜헨리는 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안에 살면 거북스럽고 부자유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라 늘 제사와 예식이 있고, 많은 행사가 있고 규제가 많음으로 생활에 여러 가지 불편이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피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주변에는 공격형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모르는 전운이 감도는 도시이기에 불안해서 거주를 머뭇거렸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참으로 합당할 수도 있습니다. 성벽은 완성되었으나 성내는 아직 폐허 상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광대한 지역임에 비해 거주자가 너무 적어 유사시에 성을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미개척지인 예루살렘에 거주한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위험한 일이었으며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그 성안에 들어가면 경제 활동을 마음대로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랍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입니다. 종교적 제한과 윤리적 요구, 도덕적 책임 등이 성전을 중심으로 강조되기에 이윤을 남기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이들에게 양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저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각자의 고향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갖추어 놓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루살렘 성읍 안으로 이주하기는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행정복합도시를 세종시에 만들었지만, 완전히 이주하기보다는 다양한 이유로 출퇴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습니다.
<헌신의 본을 보인 사람들>
이때 헌신의 본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지도자들의 모범입니다.
1절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 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 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지도자가 솔선수범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따르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군대에서도 지휘관이 솔선수범해야 부하들이 존경과 신뢰로 따릅니다.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하고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정작 그들의 행위를 보면 자신들이 가르치는 말씀과 다르게 위선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4)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정신적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물론 바리새파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지만, 일반적으로 성서 역사학자들은 길게는 바빌론 유수 이후 에스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에스라의 가르침을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레위인이 기록한 회개문서에 서명하였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섯 가지 언약을 맺었습니다(느10장).
첫째, 이방 사람들과의 통혼을 금지하겠다고 언약했습니다.
둘째, 안식일과 안식년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언약하였습니다.
셋째, 성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공급하겠다는 언약입니다(성전세, 나무 벌목).
넷째,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언약입니다.
다섯째,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겠다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유다이즘’의 시작입니다(‘포로 귀환 공동체’로써 타민족과 구별 짖는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 유대교의 시작).
이후 400년간을 ‘신구약 중간기’(말라기부터 예수님 탄생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바벨론 유수 이후 이스라엘 역사 요약(年代) 남유다의 멸망(BC587) 바벨론 유배 ⇒ 페르시아 고레스 칙령(귀환) ⇒ BC332년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헬라)군대에 의해 페르시아 멸망 ⇒ BC176년, 마카비 일가의 봉기로 독립, 하스몬 왕조 ⇒ BC63년 로마에 의해 점령⇒ AD395년 동서 로마 분할(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 아랍 지배(636-1099) ⇒ 십자군 통치(1099-1291)⇒ 맘루크 지배(1291-1516)⇒ 오스만제국 지배(1517-1917) ⇒ 영국 신탁 통치(1918-1948) ⇒ 이스라엘 독립: 1948⇒전쟁 중? |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는 BC2세기 경, 유다 마카비 시대에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운 하시딤(Hassidim, 경건한 사람들)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견해입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헬레니즘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별다름 없는 방식으로 살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제국으로부터 유대교가 조직적인 박해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하시딤 중에서 보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킴으로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자신들만의 거룩한 공동체를 형성코자 했던 사람들이 ‘에세네파’(세례 요한)입니다. 이 두 세력 모두 하시딤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교를 세속과 박해로부터 지켜내려고 결단을 내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절 그들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자신들도 모르게 위선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지도자로서의 모범 상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우려되는 바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민족의 고난과 함께 한 교회였습니다. 식민지 시절 해방의 소망을 주었고, 수많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습니다. 산업화 시절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민주화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강단에 선 설교자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고, 거룩한 행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교회 성장에만 눈이 멀어 회개 없는 축복만을 남발하고, 삶의 변화는 없고 직분만 있는 위선자들을 대량으로 양산해 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의 신뢰를 잃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목회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강단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바 높은 수준의 삶을 성도들에게 권면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본을 보이는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는 설교자의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고서 실망합니다. 소위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벧전5:2~3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사도 바울은 항상 스스로 성도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고전4:15~16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여러분,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면 백성들은 기쁘게 따라갑니다. 지도자가 희생하면 따르는 자도 희생합니다. 그러면 고통이 축제가 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그 도시는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둘째, 제비를 뽑아 ‘인구의 십일조’로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1절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 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 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은 예루살렘 성안에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일조로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잠언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할 때도 제비뽑기를 합니다. 땅을 분배할 때 각 족속들이 서로 좋은 땅을 가지려고 하자 제비뽑기를 한 것입니다(수15장).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할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미리 왕으로 정하시고 12,000 대 1의 제비뽑기를 통해 그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삼상10장).
제자들이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선택할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행1장). 물론 이때는 제비뽑기 전에 두 사람의 후보를 미리 선발하고(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과 맛디아), 그 두 사람을 놓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결국, 제비뽑기라는 것은 사람이 후보자를 세웠지만,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이 제비뽑기의 결과에 백성들은 순복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고 소원과 일치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철저히 순복하였던 것입니다. 즉 뽑힌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기꺼이 들어갔습니다.
셋째,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그들은 지도자들도 아니었고, 제비 뽑힌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 7: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거창고등학교를 유명 명문 학교로 성장시킨 전영창 교장의 철학과 가르침이 담긴 유명한 ‘직업선택 십계명’은 제자들의 사회진출에 큰 교훈과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전영창 교장이 가르친 이 십계명은 거창고등학교 강당 뒷벽에 걸려 있습니다. 졸업생과 재학생은 이 십계명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제3대 교장으로서 만 20년을 섬긴 전영창 교장의 십계명은 돈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느11~12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이주민의 숫자를 계산해 보면 성인 남자만 3,044명이 됩니다. 여기에다가 여성들과 어린이들까지 합할 경우 1만 명 정도 됩니다. 이 1만 명은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기 때문에 유다 전체의 인구는 10만 명 가까이 된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이들이야말로 포로 귀환 이후에 영영 맥이 끊어질 뻔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무려 400년 가까이 계승해 온 새 역사 창조의 주역들입니다.
<맺는 말씀 - 축복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2절에는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내용이 나옵니다.
2절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말씀은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자원하여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갈 때, ‘주제에, 혼자 믿음 있는 척하네’ 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0분의 9의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는 지도자들, 제비 뽑혀 순종하는 사람들, 자원하는 헌신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축복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의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때로 내가 앞장서서 일하지 못하더라도 나 대신 앞장서 일하는 성도들을 보거든,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도교회 성도 모두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록에 기록되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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