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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2) 2024. 12. 22
일곱을 택하라
행6:1-7
<부흥하는 교회, 그러나>
많은 협박과 수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갔습니다. 12명이 120명으로, 120명이 3천 명으로, 행4:4에 보니까 남자의 수만 5천 명에 이르렀다고 되어있습니다. 행5:14에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수를 셀 수가 없어서 ‘큰 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숫자는 많아도 조직화되지는 않았기에 실제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은 추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짧은 시간 내에 급성장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문제에 직면한 교회>
교회가 부흥하면 뜻하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본문에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대인인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순절에 맞추어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왔다가 자기네들이 살던 곳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어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더 정확하게는 아람어를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면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대인들과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디아스포라들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한 원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행하는 매일 구제 즉 봉사의 대상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제외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도 히브리파 유대인이었기에 아무래도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더 신경 썼을 것입니다. 그 결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서 히브리파 유대인을 향한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헬라 지역인 길리기아의 다소(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그는 자기가 헬라파가 아니라 히브리파라고 이야기합니다. 빌 3장에 보면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헬라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모국어가 히브리어라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히브리어를 하고 살았고, 히브리 문화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자기는 헬라 지역에서 태어났어도 히브리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그는 분명히 헬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헬라 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통 히브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정통 유대인의 신앙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헬라 문화를 너무 잘 아는 바울을 택하신 것입니다. |
<일곱을 택하라>
원망을 들은 사도들은 대책을 세웠습니다.
2~4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자신들이 나서서 구제와 봉사에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해결 방법은 대신들의 일을 분담해 줄 충성스러운 사람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답은 이미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하나님처럼 받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모세에게 가져왔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책임감으로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세도 지치고 백성들 속에는 자꾸 소외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으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제도를 세워 백성들을 돕게 합니다(출18장).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생각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제와 봉사를 전담할 사람 일곱을 세우고자 했지만 그들에게 그 어떤 직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때 ‘일곱 명의 집사’가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집사’(deacon)라는 명칭이 이곳에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냥 일곱 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웠을 뿐입니다. 그것이 후에 ‘집사’라는 직분으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집사’라는 직분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사도행전 21장입니다.
행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이것은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목에 있던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에 잠깐 머물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빌립을 ‘일곱 집사 중 하나’라고 소개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에서 뽑힌 일곱 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집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집사라는 직분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직분으로 인정된 것은 오랜 후의 일입니다. 빌립을 ‘전도자’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집사’가 단순히 구제 사역을 담당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사도들과 함께 폭넓은 사역에 동역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일꾼을 세우는 방식입니다. 사도들이 지명하지 않고, 성도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일꾼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국주의 사회에서 ‘혁명적인 일’입니다(주권재민). 교회의 신앙공동체가 민주주의 사회의 원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누가가 뽑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소개했다면 금상첨화였을 듯싶습니다.
이렇게 평신도 스스로 자신들의 일꾼을 뽑게 한 이유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지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들이 뽑은 지도자이니 존중하였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뽑은 일곱 명의 지도자에게 ‘안수’함으로 권위를 더해 주었습니다.
셋째, 사도들이 자신들이 집중해야 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4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명령이 무엇인지를 다시 기억하였습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잠시 자신들의 본질적인 사역을 잊고, 구제하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결국 여러 원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본질적인 사역에 집중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첫 번째 사명이기도 합니다(교단 정치에 깊이 개입, 너무 많은 모임과 인간관계 조심, 취미 생활 집착, 이중직 목회의 위험 – 말씀 묵상과 준비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
또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본질이 아닌 일에 집중하다가 갈등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외형적인 사업에 치중하거나(바자회 하다가 분쟁이 난 교회), 직분을 명예나 권세로 알고 서로 다투다가 교회에 분쟁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과 뒤바뀐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선교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자신들의 본질적인 사명을 깨달은 사도들은 과감하게 일을 분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고 ‘구제 사업’을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가장 쉬운 문제 해결 방법은 중단하는 것). 그러나 구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를 세워 그 일을 전담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갈 2:9-10을 보면, 가장 먼저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를 만나 악수를 하면서 부탁한 사역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최우선적 사역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세울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하는가입니다.
어느 대통령의 말씀처럼 ‘인사가 만사’입니다. 사람을 잘 세우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도들은 그 기준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이는 세상적인 기준과 너무도 다릅니다. 세상은 그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가(학위).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지위, 명예가 얼마나 높은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은 기준이 전혀 다릅니다.
첫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3절, 5절).
‘성령 충만’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성령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 충만’을 감정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그래서 성령을 마치 자동차에 채워 넣는 기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쳐서 성령을 소진하면 그것을 다시 채워 넣기 위해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원에 가서 채워 넣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성령 충만은 인생의 운전대를 아예 성령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성령님이 기름을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운전대를 성령님께 맡겨 드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 없이, 자신의 감정적인 호불호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쉽게 탈진하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자격은 무엇보다도 바로 성령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자기 방법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전도 여행 중 아시아로 가려고 계획을 다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과감히 자기 계획을 접고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건너가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비록 마게도냐(빌립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지만, 불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실라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전문성이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여전히 교회에서도 그 방법, 그 경험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경험과 지혜가 충만한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 충만한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지식’과 구분됩니다. 즉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지혜 있는 사람’을 정의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저는 일부 스스로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집불통’과 ‘막무가내’ 이미지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아주 몰상식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 충만’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입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루는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는데 “기름기가 적은 고기를 주십시오”하고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갖고 온 고기에 기름(지방)이 너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부탁을 받은 종업원이 가져와서 그것을 보니까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가 당황하고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고기는 운동을 안 한 소를 쓰나 봅니다. 할 수 없지요. 제가 먹고 운동하지요.” 그리고 씩 웃으셨답니다.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게 뭐냐? 내가 미리 주문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기를 줄 수 있느냐? 주인 나오라고 해’라고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난처한 그 종업원의 입장을 배려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똑하기도 해야겠지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도 조직과 사역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있고 열정도 있고 마음도 순수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 설득하고 다독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함께 일할 수 있게 합니다.
셋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교인들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불편해도 싫은 소리를 하지 싫어 무조건 참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착한 사람 콤플렉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둠을 물리치라는 뜻이고, 부패를 방지하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적당히 타협하며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빛이 드러나듯이, 의를 행하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5:16(산상수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런데, 4절 말씀 가운데 저의 주목을 끈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는 말입니다. 스포츠 선수들은 스카우트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월드컵에 나가기 위해 외국 선수를 귀화시켜 출전시키는 국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꾼은 스카우트가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느 대형교회에서 훌륭한 일꾼으로 잘 섬기던 분이 왔다고 바로 우리 교회의 장로로 모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강화도에 순무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씨를 다른 지역에 심으면 그 맛이 안 난답니다.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지역마다 지역 특산물이 있음). 교회의 분위기도 교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의 일꾼은 우리 가운데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직분자가 세워지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딱 맞는 분을 보내 주셨다고 여기시기 함께 협력하시고 서로 섬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전원 헬라파 사람들이 선출됨>
그 결과를 본문 5절~6절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5~6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명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선출된 7명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살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모두 히브리식 이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해외로 디아스포라 되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해외 현지에 적응하기 쉽도록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에는 히브리파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아니면 헬라파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절대다수는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히브리파 유대인이요, 헬라파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파 유대인이 압도적인 인적구성 속에서 선출된 7명의 집사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다수였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소수에 불과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자진하여 표를 몰아준 것이었습니다.
감동입니다. 인간집단의 속성상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헬라파가 문제를 제기하면 보통 ‘그럼 4대3으로 하자.우리가 조금 더 많으니까 히브리파 넷, 헬라파 셋!’ 이런 게 보통 교회에서 많이 하는 일 아닙니까? 꼭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원 다 헬라파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성숙한 교회였습니까? 자기 이익을 따져서 한 게 아니라, 교회에 가장 유익한 길이 뭔가, 이렇게 빠진 과부들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길이 뭔가를 생각하며, 전원 다 헬라파로 뽑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초대교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일곱 일꾼을 세운 결과>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해졌습니다. 구제하는 일은 일곱 명의 일꾼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말씀에 전념하고 기도에 전념하게 되니까 가르침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을 봅니다.
둘째,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셋째,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 - 한두 명의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집단적으로 초대교회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란 유대교의 성직자들로서, 신학자 Jeremias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에는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제사장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죽이려고 위협하던 자들이 제사장들인데, 그 제사장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원망의 문제를 슬기롭게 잘 해결했습니다. 창조적이고, 신앙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사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다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동역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들만 독주하는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목회자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교회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과감하게 위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임원들이 주체적으로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본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을 되새겨야 합니다. 말씀 사역, 기도사 역에 집중해야 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우선 배려하는 것입니다(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배려해야).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주님께서 어떤 일을 맡겨주시든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여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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