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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21]
어린이날 노래 (1948년)
작사·윤석중 작곡·윤극영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에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들어가는 말
해마다 5월이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동요가 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과 동요 작곡가 윤극영의 노래인 5월의 노래로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로 시작하는 <어린이날 노래>이다.
위 두 사람은 <나란히 나란히>, <기찻길옆>, <고기잡이> 등 국민동요를 만들어 낸 단짝 동요인이었다.
특히 2025년 올해는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선언이라는 평가를 받는 어린이날을 선포한 지 103주년을 맞는 해여서 이 노래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사회에서는 5월의 한 날을 선택하여 <어린이날>로 함께 지키지만 교회에서는 오래 전에는 5월의 첫 주일을 <꽃주일>로 지켜왔었다.
‘동심의 세계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란 말이 있다.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게 담겨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위의 <어린이날> 노래의 가사 중에 ‘푸른 하늘’, ‘푸른 벌판’, ‘오월은 푸르구나’ 등 ‘푸르다’라는 의미의 낱말이 4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푸르다’라는 낱말은 단순하게 색깔을 뜻하는 것을 넘어서 청춘, 희망, 꿈, 자유 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 어린이들이 청춘를 구가하고 희망과 꿈을 찾아 이루며 자유의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어야 함을 뜻한다.
어린이들에게 ‘장차 미래의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일꾼이 되자’는 내용과 더불어, 경쟁과 반목이 아닌 ‘서로 손잡고 정답게 나아가자’라는 협동과 상호존중을 담은 노래 가사가 너무 멋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린이를 노래한 동요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동요가 가장 아름다운 가사와 음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아름다운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면서 자란다면 어린이들은 미래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작사·윤석중 (尹石重, 1911~2003)
윤석중은 한국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며 대한민국 초대 방송위원장이다.
1,300여 편의 동시를 썼으며 그중 약 800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집 <윤석중 동요집>을 펴냈으며, 잡지 <어린이>의 편집장을 지냈다. 아동문화단체 <새싹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의 아동문학가로 아명은 노마, 호는 석동(石童).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도 보통학교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할 정도였다니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낭중지추였던 듯하다.
첫 동시를 발표한 것이 14세 때인 1925년 데뷔작의 제목은 ‘오뚝이’였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극 ‘올빼미의 눈’이 선외가작으로 뽑힌 다음, 같은 해 <어린이>에 동요 ‘오뚝이’가 입선되었으며,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가 당선되면서 천재소년예술가로 불렸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12월, 정진숙, 민병도, 조풍연과 함께 을유문화사를 공동창업했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 등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에는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그는 1956년 1월 3일 조풍연, 피천득, 어효선, 홍웅선 등과 새싹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어린이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고, 1961년 장한어머니상을 제정했다.
1964년 마해송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해송문학상을 제정했다.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1978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또한 외부활동도 활발해서 1970년에는 어린이 회관 고문을, 1979년부터 2년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1981년부터 1984년까지는 초대 및 2대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3년 12월 9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향년 92세에 지병으로 눈을 감은 그는 12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6년에 그가 모은 도서 8,555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국민학교 내지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 치고 윤석중의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듣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거의 모든 학년의 교과서에 교육과정이 바뀌더라도 반드시 들어가는 명곡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어린이날 노래와 졸업식 노래가 바로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
1948년 발표된 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의 '어린이날 노래'는 해방 후 첫 음악 교과서(1954~55년)에 실렸지만, 현행 교육과정이 적용된 2018년부터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서 제외됐다. 사진은 1964년판 음악 교과서 10쪽 '어린이날 노래’
작곡·윤극영 (尹克榮, 1903~1988)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곡가, 그리고 아동문화운동가. 본관은 해평(海平). 동요 반달의 작곡가로 잘 알려졌기 때문에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03년 9월 6일 한성부 북부 관광방 대안동계 소격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42번지)에서 태어났다.
교동공립보통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웠다.
1923년 일본 도쿄도에서 소파 방정환이 조직한 색동회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중 희대적이게도 조선어 가사를 붙인 노래들을 작곡하여 어린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힘썼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 종로구)로 돌아와 1924년 8월에 ‘다알리아회(또는 다리아회)’라는 어린이 합창단을 처음으로 창단하였다.
이후 동요 반달, 설날, 고드름, 따오기, 꾀꼬리 등을 작곡하고 동시에 아동문화운동에 힘쓰며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임을 표방하였다.
1926년에는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음악교사로 활동하며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게 되었다.
광복 후 중화민국에 머물다가 지린성 용정시에서 복역하였고, 1947년에 직할시인 톈진시에서 손수레를 이끌다가 극적으로 대한민국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아이들에게 창작동요를 널리 알리는데 계속 공헌하였으며, 창작동요 탄생 60주년인 1984년 제61회 어린이날에는 KBS에서 윤극영을 초청해 ‘푸른하늘 은하수 60년,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을 방영하였다.
1987년 12월 이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 차례에 걸쳐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1988년 11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 민주묘지 앞 삼거리에 있는 윤극영가옥을 보존해 현재도 개방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3리 학곡마을 선산(선영)에 아내 오인경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 어린이주일의 원래 이름은 <꽃주일>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사는 꽃처럼 아름다운 어린아이들을 위한 어린이주일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린이주일의 원래 이름은 <꽃주일>이었다.
어린이 주일은 '꽃주일'이라고도 칭하는 것은 1870년 미국의 한 조합교회에서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꾳,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한다.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들의 가능성과 꿈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실시되었다.
사실 자라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교육되느냐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직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 조차도 이들은 아무 대책없이 방치되고 있었기에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회 근대사에 의하면 1856년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첼시의 제일 유니버설교회 찰스 레오날드 목사가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정하고 부모들의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미국 최초의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살리스트(Universalist)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 H Leonald)목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레오날드 목사는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일을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 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교단을 달리하는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 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있다.
이처럼 6월 둘째주가 어린이 주일로 결정된 것은 일년 중 꽃이 만발한 가장 아름다운 이 시기가 푸르고 아름다운 어린이들의 이미지와 가장 잘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의 한국은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했던 것은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었다.
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윤극영 등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색동회는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 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어린이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러면서 많은 어른들이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도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한국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25년부터 5월 첫 주일을 꽃주일, 1956년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다.
이는 1946년부터 지켜오던 5월 5일 어린이 날과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어린이 주일의 근본 취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게 된 것은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교회 각 교파에서는 어린이주일에 교회마다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꽃과 같은 어린이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자는 운동으로 시작한 어린이주일은 꿈과 내일을 잉태하는 푸른 계절이 어린이들에게 오게 하자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어 둘째 주일을 부모께 감사하는 어버이주일로 이어가고 있다.
★ 어린이날 유래
한국의 어린이날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1922년에 시작되었다.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일본 도요대학 문학과에 재학 중일 때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귀국해서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년운동을 주창했다.
특히 ‘어린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1922년에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여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해주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1927년 5월 첫 주일로 변경하였고, 1946년 5월 5일,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5037호)으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공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어린이날’은 전 세계적으로 어린이의 권리와 복지를 증진하고, 그들의 행복과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는 날이다.
리뷰
[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로 시작하는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이 작사하고 윤극영이 작곡한 대표적인 어린이날 노래다.
윤석중은 ‘1946년에 발표된 이 노래를 처음에 안기영이 작곡했으나 그가 월북하는 바람에 1948년에 윤극영이 다시 작곡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1947년 2월에 ‘어린이날전국준비위원회’에서는 어린이날의 노래를 현상 공모했는데, 당선작이 없어 심사위원에게 작사와 작곡을 일임했다.
윤석중이 작사하고 안기영이 작곡한 ‘어린이날 노래’가 그것인데, 안기영은 나흘 동안 중앙방송국을 통해 노래를 지도했다.
그 결과 그해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에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작년에 제정된 어린이날 노래를 각 단체에 배부한다’는 경향신문 1948년 4월 29일 자 기사로 보아 1947년과 1948년에는 안기영이 작곡한 노래가 행사에서 불린 듯하다.
본래 안기영이 작곡한 ‘어린이날 노래’는 사장조에 4분의 4박자인데, 윤극영이 작곡한 바장조에 4분의 2박자의 노래로 1949년에 대체된 것을 당시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인 1946년에 ‘어린이날전국준비위원회’에서는 또 다른 ‘어린이날’ 노래를 마련했다.
작사자와 작곡자가 명시되지 않은 채 ‘어린이신문’ 1946년 4월 27일 자에 수록된 이 노래는 사장조에 4분의 2박자로 진행되다 후렴에서 4분의 4박자로 바뀌는 것이 특징이다.
“아름답다 우리 강산 삼천리강산/빼앗겼던 우리말을 찾은 동무야”로 시작해서 “무궁화 피고 피듯 씩씩한 동무/우리들 어린이날 만세 부르자”라는 후렴으로 이어지는데, 광복을 맞이한 기쁨을 끌어들여 어린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그즈음에 어린이날 관련 노래가 여럿 등장하여 어린이날을 기념했다.
“이 세상 어린이가 서로 손을 잡으면”으로 시작하는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의 ‘어린이 노래’(1947년), ‘다른 하나의 어린이날 노래’라며 소개된 윤복진의 ‘오월의 노래’(1950년), “우리들은 새나라의 착한 어린이”로 시작하는 강소천 작사, 박태현 작곡의 ‘어린이날 노래’(1952년) 등을 들 수 있다.
또 1925년부터 일제가 어린이날 행사를 금지한 1937년까지 “기쁘구나 오늘날 오월 일일은/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라는 ‘어린이날 노래’를 ‘조지아행진곡’ 곡조에 얹어 매년 어린이날 행사에서 불렀다.
올해(2024년)는 ‘어린이 해방 선언문’이 공표된 지 백 년이 되는 해이다.
방정환 생가에서 거리 행진을 하는 등 다채로운 어린이날 행사가 기획되었다.
온 세상이 푸른 오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푸르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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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정 / 단국대 정책경영대학원 원장·대중음악사학자
첫댓글 장희진: 꽃주일이라는 표현 너무 이쁘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60-70년대엔 꽃주일로 어린이주일을 보냈답니다.
어린시절 주일학교의 추억이지요.
박윤: 동심으로 곱고 싱그럽게 일으켜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
Tu Hyun Kim: 어린이들은 우리들의 희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