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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설교 115(칼빈)
사람이 가장 쉽게 속고 하나님에게 그의 영광을 강탈하는 두 가지 것들.
욥기 31:24-28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어제 우리는 욥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의 재판관이시며, 그 앞에 우리가 나와 회계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력을 소유한 부자가 하는 방식으로 그의 평판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 어리석은 생각도 가지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유한 자들은 항상 주제넘음으로 우쭐될 것이고, 우리는 복수하기에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발아래 짓밟히게 될 것을 알며, 그들은 고통을 당할 것이고, 해를 입을 것이며, 욕을 먹고 굴욕을 당할 것입니다. 그처럼, 욥은 사람들에게 행하기를 자제했고, 그들에게 악을 행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 안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내가 만일 악이 현세에서 지지되면, 우리는 인내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인데, 정의가 눈이 멀고 혹은 등을 돌리기 때문에, 종종 분노하게 되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에 의해 그의 백성을 시험에 처하게 하시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사람의 손을 피할 때 우리가 어떤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주의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불붙이는데, 정의를 부패시키는 자는 신성모독의 죄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이 허락된 것으로 생각할 때 그 때 우리는 자신을 속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 대범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더욱 슬프게도 노하게 되시고, 그 때에 그의 저주가 우리를 대하여 더욱 증가되고 강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는 결코 고아를 짓밟지 않았고 혹은 약한 자들을 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후, 욥은 그가 그이 확신을 금에 두지 않았고, 혹은 그의 부에게 ‘내가 네 안에서 안식한다,’ 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는 심지어 그의 재산이 증가되었을 때 즐거워하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항상 더 일찍 말해졌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즉, 욥은 상세하게 어떤 덕을 언급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완전하게 선한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규칙을 언급하는데, 왜냐하면 율법의 일부를 성취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그렇게 행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또한 우리의 전체 삶의 모든 국면을 그가 명하신 것에 의해 규제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욥이 집 없는 자들과 가나한 자들을 향하여 무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듯이, 그는 이제 그가 교만함이나 주제넘음으로 우쭐대지 않았고,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더 높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특별한 덕목인데, 우리가 특히 사람이 자랑할 것을 조금 가졌을 때, 우리는 그의 어리석은 오만함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우쭐대고 매우 높이 생각하는 왕들이나 군주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자마자, 그는 자신을 높이고 그의 날개를 폅니다. 그리고 그 결점은 남자들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특징이고, 사실 우리는 여인들이 돈을 소유하자마자, 그들의 과시(허식)가 날개를 달고, 그들의 가식이 증가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의 얼굴의 표정은 변할 것이고, 그는 그의 이웃을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려고 하고, 말할 때, 그는 그의 입을 부분적으로만 열 것이고, 입을 열지라도, 그것은 그처럼 큰 교만함을 드러낼 것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때, 거의 모든 곳에서 보이는 교만함입니다.
자, 사람들이 많은 양의 금과 은을 소유하고 욥이 소유한 그러한 소유물들을 가졌다면, 그가 그의 부가 증가하고 있다고 선언했을 때, 무엇이 일어날까요? 그처럼 사람이 금과 은으로 가득한 금고를 가졌을 때, 절도 있고 겸손하게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어렵고, 그의 금과 은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욥이 부하다는 것을 알 때, 헛된 주제넘음으로 소경이 되는 것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은 욥 안에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항상 그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의 마음을 그것에 쏟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그의 부를 소유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욥이 자신에 관하여 선언하는 것을, 그는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시편에서 우리가 읽듯이,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 62:10). 즉, 그것들로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신뢰하지 말며, 오만해지지 말라. 그것이 또한 바울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엡 5:5). 왜냐하면 탐욕스러운 사람이 즉시 그의 위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없이, 많이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그의 소유물 때문에 존경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이 사람을 지배할 때, 그는 이중의 우상숭배로 짐이 지워집니다. 하나는 그가 재력이 없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실망시키고 계시는 것이라고 그가 생각하는 것이고, 그가 부하다는 것을 그가 알 때, 그는 거의 하나님을 경멸하는데, 만일 그가 잘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짧게 말해, 그것은 술에 취하는 것과 같은데, 술 취한 사람처럼, 그는 그가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사하게, 사람이 부하고 그의 재산을 뻔뻔하게 이용할 때, 그는 더 이상 그가 필멸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서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자신을 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욥이 여기서 그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 신실한 자들에게 그를 위해 요구하시지 않는 것, 즉, 그들의 마음을 그들이 비록 그것들 안에서 풍성할지라도 재산에 넘겨주지 않도록 요구하시는, 어떤 것에 대하여 주장하지 않는 것을 유의합시다. 둘째로, 우리는 이것이 사람들 안에서 매우 드문 덕목이라는 것과, 우리는 우리의 완전한 주의를 그것에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유의합시다. 큰 어려움 없이 그리고 우리의 모든 노력을 그것에 기울이는 것 없이, 그처럼 행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산이 우리를 휩쓸어 가지 않고, 우리를 소경이 되게 해서 우리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그것들에 두지 않을, 그런 절도(modest)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삼가기 위해 노력합시다.
더욱이, 우리는 사람이 그의 소유물을 신뢰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유의합시다. 왜 그럴까요? 고유하게 하나님의 것인 명예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죽고 무능력한 대상에게 주는 것은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범죄가 아닙니까? 자, 그의 재산을 뻔뻔하게 이용하는 자, 그는 내가 이미 진술했듯이 그것들을 신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때, 그의 명예를 빼앗기고, 움직일 수 없는 금과 은이 그것을 소유합니다. 그것은 괴기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의 피난처 아래 우리 자신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웁시다. 바울이 탐욕스러운 자들을 부르듯이(엡 5:5), 우리는 신성모독적이고 전적인 우상숭배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또한 욥이 ‘내가 내 마음을 금에 두었다면, 만일 내가 많은 금에게, “내가 너를 신뢰한다”라고 말했다면’ 라고 말했을 때, 분명하게 하려고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욥은 그 자신과 그의 돈 사이에 대화를 합니다. 이제 사람이 그의 가슴이나 금고를 열 때, 그의 재산에 말을 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마치 그가 그와 더불어 어떤 사람을 가진 양 그것을 행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말과 더불어 욥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유물들을 신뢰할 때, 부 안에서 발견되는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매우 잘 표현합니다. 왜? 마치 그들이 은밀한 명철을 소유하고, 금과 은과 더불어 계약을 소유한 것처럼 있습니다. 금과 은이 말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마디 말함이 없이도, 그들은 욥이 여기서 언급하는 효과를 소유하는데 실패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조물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우리의 신뢰를 두도록 격려를 받는 모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예를 빼앗고 있으며, 그로부터 그것을 강탈하고 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그것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혐오합시다. 동시에 우리는 욥의 정죄를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우리 자신을 그와 비교합시다. 만일 그가 헤아릴 수 없는 가치로 있고, 자신을 높이고, 그 자신의 영광을 찬송하며,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어떤 수치를 받을 것인가! 욥은 큰 보화를 소유했고, 금은을 많이 축적했지만, 그는 마치 가난한 양 겸손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다면, 우리가 적은 부 때문에 우리 자신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습니까!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큰 부요함으로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더하여서, 부한 사람이 교만하게 되지 않고 인자하고 온유하게 남아있는 것을 지속하고, 주제넘게 되는 것이 없이, 마치 그가 어떤 사람보다 더 낫지 않은 양 사는 것은 큰 시험임을 유의하십시오. 그것은 좋은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높이에 이르지 않았을 때, 우리가 큰 덕을 얻었다고 생가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네바 도시에서 혹은 전체 나라에 있어 욥과 같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든 가장 부유한 사람들을 함께 모을지라도, 그들은, 말하자면, 그가 소유한 것과 비교하여 아무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들의 재산을 자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과 같지만, 오직 그들이 욥이 소유한 것과 그들이 소유한 것을 비교한다면, 양파의 껍질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사람들을 그가 하시듯 낮은 지위에 두실 때, 그것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그들이 더 큰 부요함을 소유한다면, 그들은 그것 때문에 파멸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이 그들의 몰락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높아지려 해서, 그들은 그들의 목을 부러뜨릴 것이라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합시다. 그처럼, 우리 주님이 그처럼 높이 일어나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에 의해 우리의 복지(welfare)와 안전을 확보하시는 것을 유의합시다. 왜냐하면 속담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행운을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비록 우리가 일어날 기회를 소유하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우리의 상태는 존재할 수 있는 만큼 낮다는 것을 우리는 보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자연에도 불구하고 위대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소유했다면 무엇이 일어났겠습니까? 비록 그것이 낮고 불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로 더 큰 인내로 우리의 상태를 견디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가난한 자들 중에 가장 가난한 자들조차, 그것들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래서 그가 그들을 짧은 끈을 매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들이 그런 시련에 의해 훈련되지 않았다면, 가능했었던 것과 같이, 그들이 교만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그들로 깨닫게 합시다. 우리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 주님이 무엇이 우리를 위하여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가 그의 손에 그것을 소유하시며, 그것이 선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을 아시는 때 그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의 요약이고, 욥이 그의 확신을 금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부자임을 보았을 때 오만하게 되지 않았다고 말해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가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할 가치가 있는데, 즉, 그의 손이 큰 양을 획득할 수 있을 때, 그 부가 사방에서 그에게 흘렀을 때, 그가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는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 욥은 필멸의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 것보다 자신을 위해 더 주장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주를 소유했을 때 오직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나무토막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기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답변으로, 그는 여기서 모든 종류의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유의합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이 슬퍼지는 것과 부한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은 자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본래 악하지 않은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어 주 너희 하나님 앞에서 너희가 즐거워할 것이다’(신 12:7 참고)고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소유물들을 수여하시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탱할 재력을 소유한다면, 그것이 우리로 즐거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듯이, 그 종류의 즐거워함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나 그 자체에 대하여 정죄되는 것에서 멀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움과 믿음의 표인데,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그가 우리에게 제공하신 것에 따라 그에게 감사하도록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여기서 맹목적인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그들의 소유물에 휩쓸려가는, 그 종류의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그래서 하나님을 망각한 후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약함을 기억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그들의 소유는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돌이키는 정신이 없는 기쁨, 예상과 어긋난 기쁨이고, 우리를 취하게 해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욥이 여기서 의도하는 것입니다. 짧게 말해, 그는 그가 그의 마음에 대한 그런 통제를 해서 부가 그에게 왔을 때, 그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았고, 만일 그가 그것들 안에서 즐거워했다면, 그것은 그를 부요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에 있었고, 동시에 부는 그의 지복(felicity)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는 주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안에서 사람들은 오류에 빠지고, 만일 일시적인 것들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것으로부터 그들은 더 높은 것으로 움직이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의 복지와 지복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로부터 분리될 때, 우리는 왜곡되고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재화들, 모든 기쁨들, 모든 명예들이 오직 우리를 정죄하기에 이바지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지(welfare)와 지복(felicity)에 대한 문제들에 있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했던 이유입니다. 이제, 반대로, 우리는 사람들이 썩어질 것들로 점령된 것을 보며,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을 그들의 신으로 삼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금과 은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명예와 평판을,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즐거움을 예배합니다. 만일 사람이 부하게 되기를 구한다면, 그는 부하게 될 때, 그가 행복할 것으로 상상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을 잊고 그를 버립니다. 위엄과 명예에 있어 높이 세워지길 구하는 사람은 그때 사로잡히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무관심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다른 정욕에 자신을 넘겨주는 호색가나 어떤 사람을 그는 즐거움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잘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것에 즐거워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갈망해야 하는 때, 썩어질 것들에 강조를 두는 것을 봅니다. 그처럼 욥이 그의 소유 가운데 즐거워하지 않고, 그가 부했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에 즐거워했다는 것을 유의합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더 개인적인 용어로 진술되지 않았다면 충분히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인데, 그 말 자체들이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그를 속이기에 충분히 현명했던 것처럼,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위선자 노릇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오직 부분적으로 자신들을 알 때 그들의 교활한 계교로 그들이 항상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하게 우리는 부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오, 가장 탐욕스러운 모든 사람들과 가장 그들의 지상의 소유물에 몰두한 자들은 이 변명을 하고 소리로 항의할 것입니다: ‘오, 나로 말하면, 나는 나의 부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나는 나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오직 그를 자랑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위선으로 넘쳐흐르는, 항상 그들의 더러움을 가리기 위해 얼마간의 아름다운 말들 찾으려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부를 즐거워하지 않는’ 그 말에 대한 더 완전한 해설을 우리가 필요로 한다고 내가 말한 이유입니다. 그처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그가, 그것을 행하시는 것에 의해, 우리 아버지이심을 보여주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는 충분한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가 형제적인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손 안에, 우리가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우리 이웃을 돕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기탁물로서 우리가 소유하는 소유물들을 두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더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이들 지상적인 것들에 매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해합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대하면, 우리는 또한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하신 영생을 기대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는 썩어질 것들을 주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를 티끌과 진흙같이 대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들 안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부에 주는 자들은 속담과 같이 구렁에 사른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과 같이, 그들이 한 발을 자유롭게 빼면, 다른 발이 더 깊이 빠지고, 그들은 그것에게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확신을 이 세상에 두는 자들과 동일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수 없고, 그들은 걸려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딥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들이 빠진 웅덩이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제공하시고, 우리를 하늘의 생명으로 부르십니다. 마치 그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 것처럼, ‘서둘러 나에게 오라, 세상을 짓밟고, 그것에 매달리지 말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권고를 주의하면, 우리는 오직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분투하길 바랄 것이 확실하고,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의해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오직 그 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즐거움도 없을 것임을 유의합시다. 시편이 말하듯, ‘주는 나의 기업, 나의 몫과 내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시 16:5). 만일 우리가 지금 이 만족을 소유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재화를 상실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것으로 이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그만을 우리가 소유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상실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말해지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창 15:1). 그들 말들과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길 원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하나의 방식이나 다른 방식 안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이 없이 그에게 고정되게 하시를 원하십니다. 그처럼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부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는 부요한 때에 그리고 궁핍한 때에 그의 마음이 이 세상의 것들에 묶여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는 부요한 때에 하나님이 제안하신 길을 따르는 것에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에 의해 그리고 그의 이웃을 향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의해 그것을 입증하며, 그는 궁핍한 때에 만일 그에게서 그가 소유한 모든 소유물을 빼앗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인내함으로, 그리고 이 결론에 이르는 것에 의해 그것을 입증합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그의 은총 가운데 있다는 것은 나를 위해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평화롭게 있어야 하는데, 그 안에서 나는 나의 완전한 안식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부를 즐거워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욥이 의미하는 것과 그가 그의 본으로부터 배우도록 우리에게 원하는 것의 총체적인 요약입니다. 이 기쁨은 또한 그것과 함께 감사를 가져온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어떤 것을 가졌을 때, 우리는 또한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의 아낌없는 선하심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진술은 또한 교만을 정죄하는데, 우리가 부를 즐거워하는 것에 금지되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 때, 그처럼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높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에게 교만하지 않도록 그리고 마음을 높이지 말도록 권고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권고하라’(딤전 6:17). 거기서 바울은 내가 이미 설명한 것, 즉, 겸손은 매우 드문 덕목이고, 부한 사람 가운데 거의 발견되지 않는 덕목임을 지적한다. 사람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도록 하는 교만의 부재를 지적한다. 이제, 우리는 여전히 그 교만이 제하여지고 우리 마음이 완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큰 어려움이 없이 그리고 초인적 능력이 없이 그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효과적인 치료제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부는 우리를 휩쓸지 못할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그나 그의 은혜에 어떤 애정을 가져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바울이 탐욕을 우상 숭배라고 다른 구절에서 말한 것에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엡 5:5; 골 3:5).
(욥 31: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