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는 보기 드문 '백제의 노래'다. 물론 백제인들이 불렀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이기도 하다. 또, 시조 형식의 원형을 보여주는 노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는 얘기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全져재 녀러신고요. 즌대랄 드대욜셰라.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
여음은 삭제해버리고 본문만 3행으로 재배치해 보니 과연 시조 형식의 원형이 드러난다. 하지만 고문인 탓에 언뜻 그 뜻이 다가오지 않는다. 현대문으로 고치는 작업을 아니 거칠 수 없다. 물론 분분한 해석의 차이를 모두 다 수렴할 수는 없으므로 필자 임의의 현대석을 할 수밖에 없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아 멀리멀리 비추소서.
온 시장에 가셨나요. 험한 곳 디딜까 두렵습니다.
모두 내려놓으소서. 당신 가는 곳이 어두워질까 두렵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여인은 망부석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제야 정읍 시내 '정읍사 공원'에서 본 여인 조각상에 '망부상(望夫像)'이라는 제목이 붙은 까닭이 헤아려진다.
우리나라에서 '망부'는 단순히 남편(夫)을 기다린다(望) 정도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망부석의 대표인 <치술령곡>의 박제상 부인처럼, 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마침내 돌이 되고 말았다는 비극을 전제로 한다. 즉, '정읍사 공원'의 여상에 그런 제목이 붙어 있는 것도 <정읍사>의 여인이 돌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의 암시이다.
'험한 곳'에 들어서면 가족과 이별하게 돼
남편들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험한 곳'을 디뎠기 때문이다. 물론 '험한 곳'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문학적 비유다. '험한 곳'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읍사>의 내용은 전체가 바뀐다. 그런 뜻에서, <정읍사>의 노랫말은 뛰어난 시적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남편은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몸을 아끼지 않고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그리되었을 수도 있고, <공무도하가>의 남편처럼 과감한 도전을 꿈꾸다가 실패했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강도를 만나거나 주색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다. 지금은 과정보다도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돌이 되는 지경에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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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내장산이 보인다. 내 남편은 지금쯤 저 산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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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읍은 <정읍사>로 끝나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망부석'의 여인만이 아니었다. 동학군은 1894년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벌어진 황토재 전투에서 처음으로 관군을 완파하지만, 끝내 30~40만의 피해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 중에는 남장을 한 여인들도 부지기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사사로운 일 때문이었든 역사적 진통 때문이었든,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람들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정읍은 노래 <정읍사>와 동학혁명의 비극적 내력 때문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널리 그 슬픔을 세상에 퍼뜨렸다. 그래서 정읍사 공원, 전봉준 고택, 고부 관아 터, 황토재 전적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들을 두루 돌아보는 답사자의 마음은 왠지 무겁고 답답하다.
단풍으로 유명한 정읍 내장산, 1894년 가을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단풍을 뽐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