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90년 전 비행기타고 도쿄 출장다닌 금광업자 우영희
[뉴스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9년 도쿄~대련 정기 항로 개설…초특급편은 도쿄~경성 6시간 주파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2.11.
1929년 9월 도쿄와 경성을 잇는 항공 여객노선이 개설됐다. 오사카, 후쿠오카, 울산을 거치는 노선이었다. 1938년 초특급편을 이용할 경우, 경성에서 6시간 후면 도쿄에 도착할 수있었다. 사진은 1935년 무렵의 하네다 비행장/‘世界畵報’1937년 2월호</figcaption>
1938년1월22일 아침 금광업자 우영희는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그가 향한 곳은 여의도비행장이었다. 동료 K와 함께 ‘더글라스’ 18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오전 11시5분 정각에 이륙했다. ‘상계(上界)는 청명하얏고 백운(白雲)상 높이 난 은색 ‘뽀듸’(바디)는 눈이 부실만치 빛나며 서북상으로 흘러드는 일광(日光)은 보온설비를 한 기내의 온도에 지지아니할 만치 따뜻하얐다.’ 우영희 앞으로 ‘백색 면포를 펼쳐놓은 듯한 강’ ‘송이밭을 보는 듯한 농촌의 초가지붕’이 지나가더니 눈 덮인 추풍령이 들어왔다. 비행기는 이어 대구와 울산비행장 상공을 거쳐 현해탄을 건넜다.
우영희가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더글라스 DC 2 프로펠러 여객기. 승무원 3명, 승객 14명을 태울 수있는 소형비행기였다.</figcaption>
◇기내식으로 샌드위치 서비스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기내식으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하늘위의 점심식사’를 마친 그의 눈앞에 큐슈 지방의 산들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 그 때, 난기류를 맞닥뜨린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먹은 음식은 물론 누런 위액까지 모두 게워낸 그는 기진맥진했다.
후쿠오카 간노스(雁巢) 비행장에 내린 우영희 일행은 세관 검사와 도항 검사를 마치고 도쿄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오른쪽은 태평양, 왼쪽엔 도시와 산들이 스쳐갔다. 비행기는 3시간만에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오사카나 나고야 비행장에 중간 기착하는 편도 있으나 ‘초특급’은 하네다공항까지 논스톱으로 날아갔다. 도착시간은 오후 5시였다. 경성 출발 6시간만에 도쿄에 도착한 것이다.우영희가 광업전문잡지 ‘광산시대’ 1938년5월호에 기고한 ‘동경기행-內地 광업계의 동향’에 나오는 내용이다.
1930년 9월 여의도 비행장의 평양 기생. 이들은 경성 조선극장에서 열린 조선각도명창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서 비행기편으로 경성에 왔다. 경성 기생들이 이들을 환영하기위해 비행장에 몰려나왔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0년 9월 22일자</figcaption>
◇2박 3일 거리를 6시간만에 주파
20세기 전반 현해탄 건너 도쿄로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2박3일은 걸렸다. 경부선 열차로 부산에 내려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배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시모노세키에 내렸다. 도쿄까지는 열차로 열몇시간 더 달려야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경성과 도쿄를 6시간만에 연결하는 항공 여객기 서비스가 있었다. 엄청난 티켓값을 지불해야했고 프로펠러 소형기라서 추락 위험도 무릅써야했지만, 비행기를 선택하는 승객이 있었다.
경성과 도쿄를 잇는 항공노선은 1929년 4월1일 민관(民官) 합동의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가 정기 우편, 화물 수송 업무를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그해 7월 도쿄~오사카~후쿠오카, 9월 후쿠오카~울산~경성~다롄을 연결하는 항공여객 서비스가 출범했다.
◇백리길 인천 왕복 후 경성 상공 선회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 비행기가 1929년 8월 도쿄~다롄 여객노선 시험비행을 위해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네덜란드 비행기 제조사인 포커(Fokker)여객기였다. 이 비행기는 새 노선 홍보를 위해 기자 초청 시승회를 가졌다. 29일 오후3시 여의도비행장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인천 월미도까지 날아갔다가 경성 상공을 한바퀴 돌고 착륙했다. 동승 기자는 ‘백리 길 인천을 왕복하고 사십리 이상의 경성 주위를 선회하고 돌아온 동안이 겨우 32분! 스피드의 위력을 새삼스러이 놀라지 아니할 수없었다’(‘30분에 경인왕복’, 조선일보 1929년8월31일)고 썼다.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 일본에 의해 군용비행장으로 개설됐다. 국내 첫 비행장이었다. 1929년 동경~대련 노선이 개설되면서 울산, 대구, 청진, 광주,신의주, 함흥 비행장이 잇따라 개설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이 도쿄에서 비행기편으로 귀국,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다. 조선일보 1936년 10월18일자</figcaption>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마라톤 우승자’손기정
여객기를 타고 여의도에 내린 최고 스타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이다. 그는 1936년10월17일 오후 2시27분 여의도 비행장으로 개선했다. 비행장은 도착 2시간전부터 수천명의 군중이 몰려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우렁찬 도작예보의 ‘싸일렌’소리와 함께 멀리 동북 간방으로 푸른 구름을 헤치고 한 마리의 솔개미처럼 안계(眼界)에 나타난 기체(機體)! 이것을 발견한 순간 모였던 관중의 입에서는 ‘저거다! 비행기가 보인다!’하는 환호가 폭죽소리처럼 터져 나왔다.’(‘불후의 榮冠은 찬연! 세계 마라손왕 개선’,조선일보 1936년 10월18일)
손기정이 귀국한 항공 코스도 예의 도쿄~경성 구간을 그대로 밟았다. 손기정은 16일 오전9시 도쿄 발 오사카 행 비행기에 올라 오사카에 잠시 내렸다가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잤다. 17일 오전10시50분 발 비행기로 울산 비행장에 잠시 내렸다가 경성에 도착했다. 30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입시 응시하러 후쿠오카서 비행기 원정
1930년대 치열한 입시 경쟁 풍속도에 비행기가 등장한다. ‘상급학교의 입학시험 관문 돌파의 희망도 현재와 같은 비상한 경쟁률로는 한 곳만 수험하는 것은 위험하야 벌써부터 두곳, 세곳 수험하는 것은 일종의 수험계의 풍속인데, 이러한 풍속의 절호의 중개자로 비행기가 등장하였다. 어디까지든지 1931년식이다.’(‘高商 시험을 치르러 비행기 타고 날아와’, 조선일보 1931년3월24일)
도쿄 제일중학 졸업생 하나가 1931년 2월21일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에 와서 고등학교 입시를 본 뒤 다음날 간노스 비행장에서 경성행 여객기에 올라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다음날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商) 입시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경성고상은 광복후의 서울대상대 전신인 명문이었다.
◇'유행의 첨단’ 평양 기생도 여의도 비행장에
1930년 평양 기생들이 경성 조선극장에서 열리는 조선 각도(各道)명창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유행의 첨단 평양 名妓들이 비행기로 입경’이라는 기사였다. ‘조선 각도(各道)명창대회에 참가하는 평양 기성(箕城) 권번의 선수와 응원기생 10명은 20일 평양으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경성에 날아왔다. 비행기도 못타본 시내 각 기생들 권번에서는 이를 환영하노라고 여의도비행장에서 일시 때아닌 꽃밭을 이뤘는데, 선착된 4명은 한경심 장학선 강산월 정옥엽으로 붉은 입술에서 기염이 비행기를 오르듯 만장이나 되었다 한다.’(조선일보 1930년9월22일자) 기자는 당시 유행하던 ‘자동차 드라이브’처럼 비행기 유람이 유행할지도 모르겠다고 비꼬았다. 기차로 대여섯시간 거리인 평양~경성간에도 비행기를 타는 승객이 있었던 모양이다.
◇폭풍설로 불시착해 목숨 잃을 뻔
당시 티켓값은 얼마였을까. 1929년 7월 여객기 첫 운항 당시 도쿄~오사카 구간은 3시간 비행에 30엔(원), 오사카~후쿠오카편은 35엔이었다. 경성까지 편도 티켓만 100원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당시 신종 직업인 전화교환수 월급이 25원~50원, 백화점 점원이 20원~30원, 신문기자 월급이 50~60원하던 시절이었다. 비행기 여행은 보통 샐러리맨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금광업자 우영희는 요즘 돈으로 치면 수십억, 수백억이 오가는 비즈니스를 하느라 비행기를 종종 이용했던 듯하다. 앞 기고문에서 ‘지금까지 나의 항공은 수십회에 달하였으나’라고 쓴 것만 봐도 그렇다. 우영희는 세달전 ‘광산시대’1938년 2월호에 기고한 ‘90만원에 팔린 오북(吾北)광산내용공개’에서도 광산 매매를 위해 도쿄에 비행기를 타고 왕복했다고 회고했다. 1936년 2월 도쿄~평양 구간을 탑승했는데, 큐슈 근방에서 폭풍설을 만나 불시착했다. ‘그때의 위험, 간단히 말하자면 산 것이 천행(天幸)’이라고 쓸 만큼 위험천만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