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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2.28 03:30
중세의 유럽 농민들
▲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영국 농민들이 수도 런던으로 진격해 귀족 저택인 ‘사보이 궁전’을 차지하는 모습. 이때 사보이 궁전은 불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유명한 고급 호텔인 사보이 호텔이 1889년 들어섰어요. 1900년 영국 화가 ‘앨프리드 가스 존스’가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프랑스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한 달째 이어지고 있어요. AP 등에 따르면 프랑스 농민 단체 '전국농민연맹(FNSEA)'은 지난달 29일 오후 2시(현지 시각) 농민들이 트랙터를 이용해 파리로 향하는 모든 간선도로를 차단하겠다고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어요.
프랑스 농민들이 이전부터 쌓아온 불만이 폭발한 거예요. 이들은 유럽연합(EU)의 강력한 환경보호 규제가 농업을 위축시키고, 프랑스 정부가 값싼 수입품과의 경쟁을 방치하고 있다는 등 불만을 제기해 왔어요. 그런데 지난달 18일부터 정부가 환경보호를 이유로 농업용 경유 면세 혜택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하자 결국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어요. 농민 시위는 인접국인 독일, 폴란드, 루마니아 등으로 퍼져 나갔어요. 26일에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위치한 EU 집행위원회 근처 도로를 트랙터로 가로막는 농민 시위도 벌어졌답니다.
농민 시위는 역사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자주 만들어 왔어요. 과거 전근대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농민이었죠. 이들은 지배받는 계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세금을 내면서 나라를 지탱했어요. 이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난다면 나라를 뒤흔들 수 있었어요. 유럽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농민 반란과 그 의미를 알아볼까요?
흑사병에 세금에… 더욱 팍팍해진 삶
유럽의 중세는 신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시대였어요. 따라서 신의 뜻을 이해한다는 교회가 모든 삶의 기준을 세웠어요. 도덕규범을 비롯해 상업 규칙이나 임금까지도 교회가 정했어요. 당시 농민들을 '농노'라고 불렀는데, '농민과 노예'가 합쳐진 말이에요. 평범하게 농사짓는 대다수 백성의 삶은 노예와도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던 거죠.
그런데 시대는 서서히 변했어요. 14세기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인구가 절반 이상으로 줄었고, 오랜 전쟁으로 농촌은 황폐해졌어요. 그 와중에 살아남은 농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땅 주인인 영주에게 내야 해서 삶은 더욱 힘겨워졌답니다. 그런데 농민들은 전염병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덮치는 것을 보면서 '신 앞에 인간이 동등하다'고 느꼈어요.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도 추락했죠. 상황이 달라지자 농민들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어요.
신과 지배층에게 묵묵히 복종했던 농민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어요.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 영국 '와트 타일러의 난(1381)' 등 농민 봉기가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죠. 중세라는 시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전쟁 비용도 대신 내라? 농기구 들고 반란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여 년 동안 휴전과 전투를 반복하며 이어졌어요. 프랑스 왕위와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지방의 주도권을 두고 영국이 프랑스와 벌인 전쟁이에요. 전쟁 초반의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는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에드워드가 프랑스 농촌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아 큰 피해를 줬어요. 영국이 전투에서 이기자, 프랑스 농민들은 영국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프랑스 왕과 영주들의 몸값과 전쟁 비용을 대야만 했어요. 그러나 기근과 전염병 때문에 그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결국 1358년 프랑스 북부의 보베 지역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자크리의 난'이에요. 당시 '자크'가 대표적인 농민 이름이었고 ''자크리'는 농민들이라는 의미로 쓰였대요. 대리석 산지인 보베 지역은 원래 농민들이 돌 캐는 일을 하면 군역과 부역은 면제해 줬어요. 그러나 귀족들이 전쟁 피해를 메우려고 농민들에게 무제한으로 노역과 재산을 징발하겠다고 하면서 반발이 일어났어요.
농민들은 농기구를 들고 기사와 귀족에게 대항하기 시작했어요. '자크리'는 처음엔 수십명이었지만 며칠 만에 수천명으로 늘어났어요. 반란은 순식간에 노르망디, 일 드 프랑스, 샹파뉴 등 북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어요. 안타깝게도 이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진압군은 보름도 지나지 않아 농민 2만여 명을 학살했어요. 이후 약 2개월 동안 잔인한 진압이 이뤄졌죠. 그러나 자크리의 난은 농민과 귀족을 차별하던 중세 봉건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았어요.
왕 앞에 진격해 "아담·이브 때 노예 있었나"
영국에서도 농민들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어요.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백년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심각했어요. 당시 영국 교회는 전체 국토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흑사병이 돌자 그 많은 교회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부족해졌어요. 그러자 농민에게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다른 땅으로 이동도 금지했어요. 영국 왕실은 백년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15세 이상 전 국민에게 인두세(人頭稅, 사람 머릿수에 매기는 세금)를 부과하기로 했어요. 가난한 농민에게도 부자와 같은 액수의 세금을 매기는 것이죠. 농민들은 세금을 더 낼 수도 없었고 불합리성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어요.
농민 봉기는 1381년 영국 에식스주(州) 브렌트우드 지역에서 일어났어요. 납세를 거부하는 농민들을 체포하려고 온 징세관에게 저항한 거예요. 도시 빈민도 들고일어났어요.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임금이 상승하자 1351년 제정된 '노동자 조례'로 임금은 흑사병 이전보다 낮게 주도록 강제했기 때문이었어요. 농민 봉기에 한 달 동안 10만명 이상이 동참했어요. 이를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고 불러요. 점차 불어나는 각 지역 봉기 세력을 통합하며 지도자로 떠올랐던 '와트 타일러'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거죠.
와트 타일러는 개혁적인 성직자였던 존 볼과 손잡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했어요. 반란 세력은 영국 수도 런던까지 입성해 '농노제 폐지' 등을 요구했어요. 그러나 타일러는 살해당했고 농민들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면서 반란은 끝이 났어요. 국왕은 반란 주도자들을 처형하고 동참한 농민들까지 엄히 처벌했어요.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노제를 폐지한 국가예요. 와트 타일러의 난 자체는 실패했지만, 농민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던 거죠. 와트 타일러와 함께 반란을 지도했던 존 볼은 "태초에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누가 귀족이고, 누가 농노였는가"라고 말했대요. 마치 고려 시대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하죠? 이렇게 중세 시대가 흔들리면서 모든 사람이 존엄한 권리를 지니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답니다.
▲ 135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난’에서 갑옷을 입은 귀족 기사를 여러 농민들이 둘러싸며 도끼로 내리쳐 공격하고 있어요. 당시 역사책 ‘프루아사르 연대기’에 실린 삽화. /위키피디아
▲ 26일 오전(현지 시각)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유럽연합(EU) 본부 격인 EU 집행위원회(EC)가 위치한 벨기에 수도 브뤼셀 도심 도로를 막는 시위를 펼치고 있어요. 농민들이 EU 농업 정책 등에 반발하며 이날 EU 회원국 장관이 모이는 회의에 맞춰 벌인 시위예요. /AP연합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장근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