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정부인 권씨 행장(先妣 貞夫人 權氏 行狀)
선비(先妣)의 성은 권씨(權氏)이고 가계는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며 본래 고려태사(高麗太師) 김행의 후예이다. 김씨는 신로 신라 왕실의 성이었으나 그것을 고쳐 권(權)으로 하였는데 사실이 사전(史傳) 및 보첩(譜牒)에 있다. 10세를 지나 문탄공(文坦工) 한공(漢功)에 이르러 더욱 크게 들어났고 문탄공으로부터 아래로 벼슬을 계속하여 아름다운 발자취가 쇠퇴하지 않았다.
고조의 휘 촌(村)은 봉렬대부(奉列大夫) 지양산군사(知梁山郡事)였으며 증조 휘 계우는 수의위부사용이었고 조 휘 금석은 봉훈량 행 전옥서봉사였으며 고 휘 시민은 생균생원이었다. 비는 초계정씨 통정대부 충주목사 휘 종아의 따님으로 보문각 제학 팔계 선생 휘 준이 그 증조부이시다. 홍치 경술년(1490년)시월 계축에 부인을 낳았다.
어려서 정숙하고 단아하며 영민하였고 방직과 봉제를 익히지 아니하고도 능히 하였으며 어버이를 받듦에 좌우에 어김이 없어서 일족이 칭송하였다. 나이 이십에 이르러 우리 선부군에게 시집왔다. 부군께서는 평소 높은 뜻을 가지고 생계를 다스리는 데에는 달갑게 여기지 않아 가문으로 부인이 들어오고는 바로 집안 일을 주관하였는데 마음을 다하여 조리하며 부지런하고 절약하며 게으르지 않았고 전취(前娶) 소생을 어루만지고 돌보며 자애로움에 틈이 없었다. 또 서출이 많음에도 모두 한 집으로 모아 기르며 그 주리고 배부름을 때맞추었고 비록 그 어렵고 궁핍하여도 부군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다. 부군께서 평소에 제사를 정성껏 하므로 뜻을 다하여 받들었고 깨끗하고 청결하게 몸을 다하여 추위와 더위에도 끊이지 않았다.
부군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그대는 진실로 덕 있는 사람이다. 뒤에 반드시 보답을 받을 것이다.”
고 하였다.
전취(前娶) 소생의 누님이 시집갈 때에 부군께서는 이때 벼슬로 서울에 있어서 돌아올 수 없었다. 부인이 혼자서 준비하여 이에 결한 바가 없이 혼례를 치르니 부군께 누가 되지 않게 한 것이 이와 같았다. 대저 부군께서 평소 세세한 일로 마음에 유의하지 아니함에도 시종 그 뜻을 이룬 것이 모두 부인이 이루었던 것이다.
부인을 잃음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호읍(號泣-큰소리로 울음)하여 수척해졌고 장제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셨다. 이로부터 외롭게 우리들을 이끌고 문호를 지키며 손님과 제사를 이바지하였고 아랫사람을 부리고 집안일을 경영함에 모두 조리가 있으니 사람들이 군색함을 알지 못하였다. 또한 많은 가문과 혼인하며 왕래와 출입이 번거로워 그 끝이 없었음에도 접대함에 게으르지 않았고 아래로 종복의 미미한 일에 이르기까지 또한 마음 쓰지 않음이 없어서 문을 지나가는 사람이면 한 사람이라도 그 마음을 미워하는 이가 없었다.
부군께서는 서출의 따님이 있었는데 종시 어루만지고 가르쳤으며 그 시집갈 때에는 모든 경비를 부인이 갖추어 내어 그것을 감당하며 난색하지 않았다. 백형의 집이 서울인데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여러 해 함께 살았으나 자애와 가르침 모두가 지극하여 가정에서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향리에서는 모두 감탄해마지 않았다. 우리들을 어루만지며 기름에 비록 자애를 다하였지만 항상 학문을 쫓게 하며 원근의 자질이 훌륭한 사람을 대느라 여력이 없었다. 나의 오늘날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부인의 가르침과 단속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내가 스스로 이른 것이 아니다.
만년에 내가 다행히 임금의 은택을 입어 여러 번 주읍을 관장하며 부인을 봉양한 것이 거의 20년인데 매양 선부군에 이르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넘침과 지나침에 뜻을 끊고 남음을 꾀하지 않아서 옷과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음이 있으면 문득 남겨 두려 하지 않았다. 또 일찍이 한 번이라도 공무와 관련된 말로 청탁 같은 부탁을 하지 않았으니 내가 당시에 죄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부인이 준 것이다. 성품이 또한 영리에 박하여 항상 내가 곁에 있으면서 떠나지 않기를 원하였으며 관작에의 나감과 물러남에 심히 개의치 않았다. 인자함은 족척(族戚)을 화목하게 하였고 자애는 향리를 덮었으며 지극한 은혜가 내림을 만나면 오직 그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구제함에 있고 없음을 근심하지 않으며 몸을 굽혀 힘을 다하며 늙으심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대개 하늘에서 얻은 것이 그러하였다.
중년에 병이 많더니 크게 늙으심에 미쳐서는 건강이 쇠하지 않아 그 마지막 병환에도 신명이 어지러워지지 않았다. 생활에 잊음이 없더니 최후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옛날에 병으로 진주(晉州) 아문(衙門)에 있을 때 궤 안에 유계(遺誡)를 두었으니 만약 혹 따르지 않아 후회함이 있게 되면 사람들이 도리어 이 어미를 비루하게 여길 것이다. 너는 그것에 의거하여 따르고 잘못되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
이는 큰 병고를 당하여 죽을 먹지 않고 바로 밥과 소채와 국을 먹는 것은 성명(性命)을 손상함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역시 평소에도 일찍이 말씀하시던 바이다. 아! 말을 차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루를 지나서 생을 마치니 만력 3년(1575년) 10월 병술이었고 향년 86세였다. 다음해 정월 정미에 선부군 묘소 옆에 합장하였다,
융경 정묘년(1576년)에 내가 2품의 반열로 부인이 정부인에 봉해졌다.
자녀와 혼인은 선부군의 행장에 있기에 다시 장황하게 하지 않는다. 관(祼)이 1년 전에 죽으니 부인의 슬퍼하심이 특별히 지극하였는데 이에 병이 잦음에 이르렀다. 백세의 수를 누리지 못하리라고는 뜻하였던 것이나 혹 이것으로 인한 것인가.
대저 사람이 누가 양육을 받지 아니하고 몸이 있겠는가마는 나와 같은 자가 6세에 하늘이 돕지 않고 선비(先妣)의 두터운 은혜를 특히 심히 받았으나 가난하고 병들어 곤궁하고 위축되어 직위에 빠뜨림이 많았고 벼슬살이를 꾀함도 잘 하지 못하였으며 봉양함도 다하지 못하였다. 또한 학력이 부족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것과 얼굴색을 살피는 것에도 어그러짐이 많았다. 이제 변고에 이르러 나이 들고 병의 핍박으로 상례는 어그러지고 말을 할수록 식언이 되지만 죽지 않으니 평생토록 망극할 것이다.
아! 슬프다. 선비(先妣)의 덕성의 아름다움을 나의 한 마디 말로 다할 바가 아니나 지금 장차 부서하려 하니 그 진실한 것을 빠뜨릴까 두렵다.
삼가 생각건대 드리워 마름질하소서.
만력 4년(1576년) 7월 모일 진(禛)이 삼가 행장(行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