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월의 이별 노래 -이문구 선생님을 여의옵고 김윤자 보령 고향 마을 어구 [관촌마을]이라는 한내문학비는 거룩한 다리로 꼿꼿이 서서 성큼 달려오실 님을 기다리는데 유년의 꿈 고이 깔아 놓으신 집 뒤 소나무 숲에는 문인들 하나로 동그라니 모여 환한 웃음으로 오실 님을 기다리는데 해는 동녘에서 길을 잃고 구름 사이 방황하고 하늘은 사람보다 더 먼저 슬픔을 한가득 머금고 우울한 2월의 이별 노래를 목놓아 부르다가 싸늘한 바람으로 산을 휘돌아나가는 대천 바다의 큰 휘파람 소리 2월의 이별 노래-[보령문단] 2003년 창간호 |
새나라 서점 김윤자 거기에 아버지의 꿈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지금도 그 길을 따라 걷고 또 걷고 낡아진 책을 베고 누우시고 아버지만의 지도 따라 아버지만의 고유한 칩을 따라 그 골목 서점 앞을 서성이시고 아버지의 새나라 서점은 이미 동란의 폭격 분진 속에 증발 되었는데 아버지는 허공에 매달린 꿈조각들을 두 눈 속 빨아 들이시고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전철을 이리 몰고 저리 몰고 청꿈을 찾아 헤매신다. 잃어버린 세월을 잃어버린 새나라 서점을. 새나라 서점-[보령문단] 2003년 창간호 |
벌레 앞에서 김윤자 벌레가 내 앞에 오면 나는 우주가 보인다. 내가 벌레를 잡으려 하면 우주 저 너머 큰 손이 보인다. 벌레는 내 안의 가장 인간적인 양심을 끌어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외딴 산길에서 만난 벌레가 내게 우주의 섭리를 가르치고 삶의 질서를 가르친다. 벌레 앞에서-[보령문단] 2003 년 창간호 |
민들레, 그리고 시인 김윤자 백지의 외길을 끈질기게 파고 또 파는 시인은 민들레입니다. 땅을 부둥켜안고 쥐어짜낸 쓰디쓴 진액, 그래도 꽃은 핍니다. 갓 깨어난 병아리 숨결로 살짝살짝 일어서서 세상을 노오랗게 물들이다가 때가 되면 몸을 접을 줄 알고 세상 필요한 곳에 날아갈 줄도 알고 척박한 땅, 기름진 땅 가리지 않고 뿌리내릴 줄도 압니다. 푸른 혼 하나 스러지지 않고 지키려 하늘을 날고 땅을 파는 강인한 힘 그것이 시인입니다. 민들레, 그리고 시인-[보령문단] 2003년 창간호 |
중국 문학기행 (수필) / 김윤자
<졸정원 벤취에서. 중국 4대 명원 중의 하나 - 가족 사진>
큰 아들이 중등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기쁨과 함께 또한, 그 동안 공부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자 가족여행 겸, 문학기행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 오후 2시 비행기에 탑승하여, 중국 푸동 국제공항에는 오후 5시에 도착(현지 시간)했다. 중국의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늦고, 비행 시간은 약 2시간 정도였다. 푸동공항에서 상해로 진입하는 도로변에는 대나무 군락이 자주 보였다. 중국에 대나무가 많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곳곳에 붉은 색 도로표지판과 가게의 상호가 보인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좀 어색할지 몰라도 중국의 시각에서 붉은 색은 잡귀를 몰아낸다고 믿는 훌륭한 색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유사한 문화권이고 여러 곳에 우리 조상들의 활동상이 많이 남아 있다. 상해, 항주, 소주 순서로 곳곳의 명소에 대한 소개와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본다.
2003년 2월 3일 월요일 상해 편
상해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간 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한국 관광객에게는 첫 번째 코스로 가는 곳이라고 한다. [윤봉길 투탄 유적지]와 함께 이국에서 애국심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상해의 거리는 서울과 비슷하게 번잡했다. 다른 점은 아직 전차가 다님으로 공중에 전깃줄이 복잡하게 늘어져 있고, 아파트 건물 구조가 거의 타워식이다. 그래서인지 건물에서는 안정감과 단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교통체계는 어수선하다. 상해 시내 중심지임에도 신호등이 없는 곳이 많고 차와 인파가 위험스럽게 교행한다. 차도에 오토바이와 자전거의 행렬이 함께 달리는 것도 색다른 풍경이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 청사
<상해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상해 마당로 골목 -가족 사진>
일제 때 3.1운동이 일어난 후 광복을 위해 임시로 중국 상해에 선포한 정부가 활동하던 장소다. 이봉창과 윤봉길 사건으로 일본의 탄압이 심해져 1932년 저장성의 항저우로 활동지를 옮기기 전까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다고 한다.
상해 마당로라는 골목, 허름한 건물에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님들의 조국광복을 위해 애쓰셨던 모습이 여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세계 각국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호소하는 친필 서한이 눈물겨웠고 집무실, 침실, 부엌 등의 용품도 그대로 있다.
우리 가족은 큰 아들이 준비해 간 태극기를 펴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오늘의 조국이 있음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나라가 독립된 국가로 있음은 앞서 이토록 피 흘리며 투쟁하신 선혈들의 위대하신 업적임을 깊이 깨닫고 더욱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다졌다.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의사 투탄 현장
<윤봉길 투탄 유적지. 홍구공원(또는 루쉰. 노신공원)-큰 아들>
노신공원(루쉰공원)이라고도 한다.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루쉰을 기념한 곳으로
원내에는 루쉰의 묘와 루쉰기념관이 있고 공원 옆에는 루쉰이 말년을 보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노인들이 거처하는 공원(우리나라 종묘공원처럼)이다.
노신은 절강성 사람으로 <미치광이>를 지은 작가다. 원래는 의술을 공부하여 중국인의 병을 고쳐주려고 일본 유학하여 의술을 공부했으나, 글로 중국인들의 뇌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고는 가장 하층 사람들의 이야기, 사건들을 하층의 글로 쓴 유명한 비평가, 평론가, 제 1의 작가다.
특히 우리에게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으로 의미 깊게 기억되는 곳으로써 국제적 애국지사라서 그곳에 모신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윤봉길 의사의 투탄현장지]라는 돌비가 있었다.
1932년 일본인이 아니면 들어 갈 수 없는 일본천황 생일기념축하 행사장에 도시락 폭탄을 안고 들어갔는데 마침 아기를 안고 장사하러 들어가는 일본여인을 만나 일본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윤봉길 의사가 "따님이 참 곱습니다"라는 말로 그 여인에게 접근하여 일본인인양 그 아기를 안고 일본 여인에게는 도시락 폭탄을 들게 하고 유유히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모녀는 잘 피신시킨 후, 폭탄을 던지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 잡혔는데 사실 곧바로 몸을 피할 수도 있었음에도 조국을 위해 이미 몸바치기로 결심했기에 순순히 잡혀갔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인구가 8억, 8억 인구도 못하는 애국을 보고 중국인들이 놀랐고 그 때부터 윤봉길 의사를 <국제적 의사>로 인정하여 일본인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이기에
홍구공원에 투탄현장지를 기념하는 돌비 건립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당로에 임시정부청사 거처도 허락했다고 한다.
또한 윤의사님의 호 매헌을 본떠 [매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그 곳에 여러 유품과 사진을 진열해 놓았다. 역시 우리 가족은 태극기를 활짝 펴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애국자 가족이라는 칭송도 들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정'앞에서. 홍구공원-가족 사진>
*상해 외탄 거리
100 여년 전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열강 국가들의 침입으로 세워진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황포강의 유람선과 함께 절경이다. 특히 야경이 홍콩보다 멋지고 강 건너엔 동방명주 타워와 세계 여러나라 경제각료 회의가 열리는 초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있어 장관이다. 저녁에 그곳에 갔는데 야경이 정말 멋있었다. 대개는 금융건물인데 조명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비추이는지 황홀하였고 황포강의 유람선과 구정인 춘절명절을 즐기기 위해 중국 각처에서 모인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강 건너엔 우리나라 남산 타워와 비슷한 동방명주타워(세계 3번째 높이)가 우뚝 솟아 있고
우리나라의 63빌딩과 비슷한 88타워가 희고 노란 불빛에 싸여 뚜렷이 보였다.
낮에는 으슬으슬하다는 건물들이 밤에는 국가에서 전기세를 내며 밤 10시 30분까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거리로 만들어 준다는 외탄거리가 참으로 환상적인 명물이다.
*동방명주 타워
우람한 기둥이 세 갈래로 세워졌고 관람료가 10불, 상상을 초월하는 긴 행렬의 터널을 지나 타워에 엘리베이터로 올랐다. 세계에서 3위로 높다고 하니 우리의 남산타워보다는 더 높다. 중국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고 황포강과 맞은 편의 외탄거리가 또한 장관이다.
내려올 때는 일행의 줄을 놓쳐 중국인에게 영어로 내려가는 줄이냐고 물었더니 잘못 알아듣기에 손짓으로 물었더니 "샤샤"라고 하며 친절하게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켰다. 서로가 묻는 의미는 정확히 몰라도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을 알고는 신기하였다.
*남경로
우리나라의 명동거리와 같은 차가 다니지 않는 2.5Km의 젊음이 넘치는 활기찬 거리다.
저녁에 걸어 보았는데 젊은이들은 신이 나서 끝없이 걷고 있었다.
긴 모형 기차가 다니기도 하고, 상가와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물건(과일, 의류, 마후라...)을 파는 상인이 많다. 중국에서 제일 번화가로, 중국 특유의 빨간색 조명등이 휘황찬란하게 비취고 있다.
*예원
중국의 옛거리 상가다. 관광객들이 마지막으로 거쳐가는 곳인데 모든 물품이 한 자리에 모인 큰 상가다.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그 규모가 아주 으리으리 했다. 붉은 기와 지붕으로 고풍스런 집들이 죽 늘어서 있어 그곳이 그곳 같고, 도저히 구별하기조차 힘들만큼 골목이 아주 많다. 사람들이 북적거려 기념물건을 사는데 좀 혼란스러웠지만 그 상가들의 거리가 명물임에는 틀림없다.
특이한 것은 화장실마다 3각(중국돈-우리돈으로 50원 정도)씩 돈을 받는 것이다. 중국은 달러와 우리 돈도 받는다기에 중국돈은 환전하지 않았더니 3각이 없어, 기념품은 달러로 계산하여 잘 샀는데 화장실은 어렵게 무료 화장실을 영어와 되지도 않는 중국어로 물어 물어 찾는데 혼이 났다. 그것도 중국 여행에서 격은 인상적인 장면으로 떠오른다.
중국돈으로 "원" 밑에 "각 "인데 중국돈 1원이 우리돈으로 150원 정도다.
*상해 마술단의 서커스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 1일 1회만 대형 극장에서 상영하는 초호화 서커스다.
대충 10 여가지 묘기로 진행되는데 어린 소녀들의 예술성이 가미된 무용식의 마술과 젊은 청년들의 아슬아슬한 장비를 가지고 부리는 마술, 맨 마지막에는 보는 것조차 현기증이 나는 오토바이 마술 등등, 상상할 수 만큼 잘 준비된 힘든 마술들이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연발 터져나오고 어찌 보면, 보는 우리는 즐거울지 모르나 저 묘기를 위해 서너 살 적부터 얼마나 힘든 수련을 견디어 왔을까 생각하니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저들의 평균 수명이 45세이고 말년에는 뼈 이상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또 상해에서 공연이 끝나면 북경으로 이동하여 돈벌이를 한다고 하니 고달픈 삶이다.
생명 보험을 들고 행하는 위험한 묘기 장면들 특히 맨 마자막 순서로 하는 지구 모양의 철망틀 안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1명, 2명, 3명, 4명까지 순차적으로 들어가 아래 부분에서부터 맨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묘기는 사람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마술이다.
형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줄을 이어 도는데 어떻게 부딪히지 않고 정해진 틀 안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여 도는지, 감탄스런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하여 속도나 코스를 이탈하면 즉시 부딪히어 그 안에 든 4명의 모든 목숨이 위태로울 듯 한데 말이다. 실제로 9명의 단원 중 2명은 그 묘기로 부상을 입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서 현재는 7명만이 단원으로 활동한다고 한다.
그 외 의자를 천장까지 쌓아 놓고 올라서서 사지를 벌리고 선 모습, 대형 도자기화분을 뱅뱅 돌려 머리에 각진 모서리가 닿도록 받는 모습, 높은 원형 탁자 위에 두 소녀가 롤라스케이트를 타고 올라와 돌며 서로 번갈아 상대를 안고 바람처럼 도는 모습, 사다리를 수도 없이 얼기설기 연결하여 머리에 이고 선 모습 등등, 접시 돌리기, 댄스 쇼, 칼로 사람이 든 상자를 찌르고 다시 사람 5명이 줄줄이 나오는 마술, 사람을 쌓는 덤불링, 장애물 통과하는 곡예, 모두 모두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어쩜 저런 마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행하여지기 힘들거라는 생각을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토로하였고, 저것이 생계수단일지라도 너무 비참하다는 심정은 우리 일행이 돌아오는 날까지 버리지 못했다.
값은 1인당 달러로 20불, 한화로 2만 5천원 정도. 그들의 노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다. 중국 여행 중 한번쯤은 꼭 보라고 권할만한 서커스다.
*푸동 국제공항
상해 시내 중앙을 흐르는 황포강의 동쪽에 있다하여 한문으로는
"浦東"공항, 영어나 우리 말로는 "푸동"공항리라 불린다.
얼마 전에 기존의 공항이 번잡하여 이곳으로 국제선만 분리되어 왔다는데, 너른 벌판에 길게 일자로 비스듬히 지어진 공항청사의 규모가 웅장하다. 그 외형은 인천국제 공항과 좀 다르나 내부 구조는 인천 공항과 비슷하다.
인천 공항의 외형은, 맞은 편 용유도 산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보면 비상하는 청학의 형상인데 푸동공항의 외형은 나르는 백갈매기 형상으로 보였다.
도착하는 날과 출발하는 날 모두 쾌청한 날씨로 이착륙에 무리없이 순조롭게 비행기가 운항할 수 있어 즐거운 항공 여행이었다.
2003년 2월 4일 화요일 항주 편
중국 푸동 국제공항에 오후에 내려 상해를 둘러보고 밤차로 항주로 이동했다. 야경으로 본 고속도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한산하고 원할했으며, 지방자치로 인하여 곳곳에서 도로교통비를 받곤 하였다. 항주 근처 가흥 지역 [양광호텔]에서 유숙하였는데 외국 손님은 별 3개 이상의 고급호텔에 모신다는 것이다. 최고급호텔은 별이 6개, 그러나 그런 호텔은 거의 없고 보통 4개, 5개 짜리인데 양광호텔은 별 4개 짜리로 숙박시설이 괜찮았다.
TV 채널에 우리나라의 드라마 '명성황후'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방송하는 곳이 있어서 흐뭇했다. 다음 날 일찍 항주 시내로 들어가 명소를 두루 관광했다.
*영산 동굴
<영산동굴 앞에서. 동굴에 들어 가기 전 -가족 사진>
카르스트 지형의 용암동굴로 제주도의 만장굴과는 대조적이다. 길이보다는 폭과 그 높이의 규모가 상당히 큰 동굴이다.
어느 농부가 양을 두마리 길렀는데 어느 날 산으로 도망가서 뒤따라 찾아 헤매던 중 작은 굴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양이 들어간 것 같아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 곳에 돌이 가득 차면 양이 나오겠지 하고 계속 돌을 던져도 나오지 않자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엄청나게 큰 천연동굴이어서 국가에서 잘 개발하여 현재의 영산 동굴이 되었다고 한다. 1984년에 관광명소로 지정하여 국제적인 관광지다.
길이가 그리 긴 것은 아닌데 입구에서부터 동굴 벽이 상당히 우람하고, 그 높이도 무척 높고 곳곳에 조명시설을 설치하여 경관이 장관이다. 또 두 군데의 제법 큰 연못이 있고 가파른 절벽에 철계단을 박아 놓아 높은 곳까지도 오르도록 가꾸어 놓았는데, 현지 가이드 말로는 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여 일반인들은 가지 못한다고 한다.
용암이 분출할 당시의 그 모습대로 긴 돌기둥이 솟아오른 모습은 살짝만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데 어찌 그리도 단단하게 버티어 오가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할 수 있는지 그 위용이 대단했다.
중국 젊은 여인들이 몇 군데서 장사를 하는 모습과 1회용 즉석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운무를 분출시키는 모습, 물론 돈벌이의 하나이지만 그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진종일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회의적이었다.
*육화탑
항주의 남서 쪽에 있는 탑으로 높이가 59.9Km다. 970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무와 벽돌로 되어 있고 8각형 13층(내부는 7층) 구조를 가졌는데 현재 육화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 보수와 유지에 신경을 쓰는 문화재다.
하늘과 땅을 모두 합하여 강을 지키라고 지은 탑인데 그 탑이 세워진 산 아래 들판에 전당강이 있는데 용이 노하여 물기둥이 솟아 고기잡이하던 부모가 죽자 강에 자꾸 돌을 던졌다. 그 뿐만 아니라 동자를 산채로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양자강물과 중국 서해 바닷물이 달의 인력에 의하여 만나 물기둥이 솟아 오른 것일 뿐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고 그래서 불교에서 육합탑을 세운 것이다.
매년 8월 18일부터 반달 가량 합하여지면서 물기둥이 8m까지 솟아 오른다고 한다. 낮 1시에서 밤 1시까지 그 모습이 장관이어서 중국 각처에서 보려고 몰려들어, 한 해에 무려 40 여명의 목숨을 잃는다는데 구경하다 죽어도 좋다고 여전히 행렬은 이어진다는 것이다.
경찰이 막아도 안되고 잘못 그 근처를 지나면 버스도 뒤집어져 아예 관광 코스로 넣지도 않았다. 사실 한국 관광버스가 그 곳을 지나다가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영은사
서호의 북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고 AD 326년(1700년경) 북고봉 남쪽 기슭에 세워진 고찰이다. 동진 때인 326년에 인도의 승려 혜리가 창시했다는 중국의 10대 고찰 중 하나로 오나라 때는 9루, 18각, 72전에 3000 여의 승려를 가진 대규모 사원이었다고 한다.
날아오른다는 비래봉 산봉우리가 해발 208m로 그리 높지는 않은데 꽤 긴 산이고 절 입구에서부터 산 곳곳에 조각한 석상이 500 개 중 현재는 335 개만 남았다는데 어떻게 우람한 바위 절벽을 깎아서 생생한 모습의 부처를 새겼는지, 참으로 불심이 대단함을 느꼈다. 불심이 날아갈까봐 직접 돌벽에 석상을 깎았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큰 향로에 불을 지피고 향을 한다발씩 사서 중국인들이 아이 어른 구분없이 그 향로에 던져 향불을 사르고 있었다. 향로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대웅전 앞에 죽 늘어 놓은 상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아름답고 절 내에는 은은히 향 내음이 흐르고, 거룩한 모습이다.
사천왕이 다리를 들고 있는데 그 이유인 즉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이 곳 절의 마당지기로 있을 때 개구장이라서 사천왕에게 다리를 들고 있으라 하고 군대에 갔는데 그 후 황제가 되어 다시는 이 절에 돌아오지 않아 지금도 사천왕이 다리를 들고 있다고 한다. 물론 속설이겠지만 특이한 모습이다.
대웅전 부처는 금물을 입힌 것이고 90 여m의 높이로 눈을 아래로 지긋이 내리 뜬 모습, 그 것은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고자함이라고 한다.
*용정차 밭
<용정차 밭 입구에서 - 가족 사진>
용의 머리를 닮은 산에 차나무를 재배하여 그 산아래 우물물에 끓여 먹는 차라 하여 용정차. 특등급은 나라의 간부급에게 바치고 산지 현지에서는 1, 2 등급을, 시장에서는 4, 5 등급을 판매한다.
온 산이 차밭이고 중국 현지 사람들도 이 곳으로 차를 마시러 온다고 한다. 한잔에 우리 돈 2만원 정도. 반드시 유리잔에 뚜껑을 덮지 말고 끓일 것이며(덮으면 차잎이 누렇게 변하고 약효가 제거됨) 김은 눈에 쏘이면 시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5번까지 물을 부어 마시고 마지막 차잎은 씹어 먹던지 생선요리, 부침개, 비빔밥에 사용하며 그 순에 비타민 K가 들어있어 심장병 예방에 좋다는 것이다.
장기 복용하면 지방간의 지방을 분해하며 건데기의 물을 우려 목욕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오래 두면 산화 작용으로 독소가 나오므로 2년 내에 먹으라고 권했다.
한국에서 먹는 녹차와는 달리 애순을 말린 것을 직접 유리 찻잔에 넣고 물을 부어 순수한 모습의 차잎을 보며 먹을 수 있고 특히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음이 안심이 되고 말간 연초록의 찻물이 보기도 좋고 향도 그윽하여 맛이 좋았다.
값은 좀 비싼 편이다. 100g 정도에 우리 돈으로 3만 3천원, 달러로 25불 그래도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우니 모두들 조금씩 사 왔다.
*서호
<서호 유람선에서 - 큰 아들과 함께>
항주 시내 서쪽에 펼쳐진 천연호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둘레가 15Km이며 많은 문인묵객들이 사랑한 것으로 특히 백낙천,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이다.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 왕 부자에게 바친 미녀 서시를 기념하여 서자호라고도 불린다. 아침, 점심, 저녁, 맑은 날, 흐린 날, 비오는 날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 나름대로의 분위기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중국에 있는 36개 호수 중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한다. 세계 10대 비경 중 하나이고, 서호 안의 고산(외로운 산)은 높이가 38m로 절경이다. 원래 5개의 호수로 분리되어 있는데 내호는 진주 양식장, 북호는 연꽃단지로 못 들어가고 외호를 유람선으로 관람하였다. 유람시간은 1시간 정도. 남북으로 지름이 2.8Km 동서로 3.2Km인데 끝이 보이지 않는 큰 호수다.
정말 죽어도 좋을 아름다움, 글로는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 비경이어서 카메라에, 가슴 속에 그 풍경들을 담고, 새기어 왔다.
소동파가 둑을 쌓았다는 [소제] 돌비도 있고 서호 주위엔 식당을 허락하지 않아서인지 아주 깨끗했다. 11월에 '초어'라는 고기를 잡아 어민들에게 주면 시장에 나가 비싸게 팔아 쓰는 것뿐이란다. 아주 절도 있는 행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호 가장자리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어 소제에서부터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더욱 절경이라고 한다. 전당강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33일이면 물 전체가 깨끗한 물로 바뀐다.
멀리 육화탑과 비슷한 래봉탑이 보이는데 그 곳 흙벽돌을 뽑아가면 아들을 낳는다하여 여인네들이 자꾸 벽돌을 빼가는 바람에 기울어져 있다.
수심은 깊은 곳은 2.8m, 낮은 곳은 1m, 평균 1.5m로 규모의 웅장함에 비해 얕은 편이다. 또 특이한 것은 땅과 물의 높이가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호수나 저수지는 둑이 높이 올라와 있는데 중국의 호수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 모두 진당강에서 흘러온 진흙이라서 자꾸 흙을 퍼내어 호수 가운데 섬을 만들곤 한다.
그 예로 호수 한가운데 [삼탄인월] [호심정]-맨처음 1529년, [원공돈] 등의 섬이 있다.
삼탄인월 앞에 석탑 3개를 수심 재려고 세웠는데 한 석탑에 구멍이 5씩 있어 추석날 촛불을 넣고 창호지를 바르면 달모양인데 그 모양이 3*5=15개인데 호수에 비추이니 물 속의 모습 15개를 합하여 석등으로 인한 달이 30개로 보이고, 실제의 하늘에 뜬 달 1개, 물 속에 비추인 달 1개, 술잔에 뜬 달 1개, 앞사람 눈 2개, 사랑 1개 모두 합하여 36개의 달이 뜬다.
다시 정리하면 석등 달 30개+실제의 달 2개+술잔의 달 1개+앞사람의 눈 2개+사랑 1개, 모두 합하여 36개의 달이 추석날 밤에 뜬다니 상상만 해도 시가 절로 나올듯하다.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지상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는 옛말이 있다는데 과연 항주의 서호는 명물 중의 명물로 신이 내리신 천혜의 비경이다.
< 서호 소제비 앞에서. 소동파가 쌓은 제방 기념비-가족 사진>
< 서호 유람선 선착장에서. 승선하기 직전 -가족 사진>
*발 맛사지
발 맛사지 전용 호텔식 건물로 들어가 방 하나에 4, 5명씩 들어가 발과 전신의 맛사지를 받는 곳이다. 구수한 차를 우려낸 물을 나무 함지박에 들고와 발을 담그게 하고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정성껏 두드리고 주무르며 피로를 풀어준다.
우리들의 방에는 소녀 5명이 들어왔는데, 나의 발을 맡은 소녀는 영어를 조금할 수 있어 대화를 나눴다. 20세이고 항주에 살고 있고 엄마, 아빠, 남동생이 있다 하였다.
내 나이를 묻기에 알려 주었더니 그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며 예쁘시다는 죠크까지 했다. 그리고는 '아리랑'을 다같이 합창하며 장단 맞춰 우리들의 다리를 두드려 주었다. 사이 사이에 코리아의 말로 '사랑해'가 무어냐고 묻기도 하고, 또는 중국말로 '사랑해' '시원해' 등등 몇가지의 말을 가르쳐 주기도하였는데 그 소녀도 우리도 익숙하지 않은 남의 나라 말에 금새 잊고는, 다시 또 묻고, 또 묻고 하며 웃었다.
팔과 다리, 등까지 맛사지를 받으며 너무 과분한 마음, 그리고 이것 역시 그들에겐 생업이라는 현실이 안쓰러웠다. 여행사에서 일괄적인 요금을 지불한다고 팁을 따로 주지 말라하였는데 우린 이구동성으로 그들에게 한화 2천원씩 주자고 약속하고는 돌아서 번개같이 나가는 소녀들을 불러 천원권 2장을 고사리 손에 쥐어주며, 얼굴을 맛대고 부비며 뽀뽀해주고, 등을 어루만지며 포옹해 줄 때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는데, 나는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날 밤은 피곤 가셔서인지 항주의 별 5성급 시설이 좋은 호텔 [항주성시호텔]에서 편안히 잠을 잘 잤다.
2003년 2월 5일 수요일 소주 편
상해나 항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춘절명절로 인한 인파가 너무 많아 좀 힘이 들었다. 중국인들은 구정명절을 아주 귀히 여기고 있다. 심지어 속설에 의하면 1년을 벌어서 구정명절 동안에 다 쓸 정도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인파보다 중국 각처에서 나들이 나온 인파로 가는 곳곳마다 행렬이 장사진이다. 곳곳의 명소에는 어김없이 주차난이 심각하여 많이 걸어다녔다. '하늘에 천국이 있다면 지상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정원과 호수가 많은 아름다운 도시다. 소주는 좀 북쪽에 위치한 도시라서 날씨가 쌀쌀하였지만 일기는 맑아서 관광하기에 좋았다.
*소주의 집들
소주는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도시로, 중국의 베니스라고 한다. 집들이 지붕은 모두 흑색이고 담은 흰색인데, 이것은 선비정신이 강하여 후손들이 등용하길 비는 차원으로 흑지붕은 먹을 상징하고, 흰벽은 종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소주라는 도시에 진입하니, 온 마을 집들이 하나 같이 똑같은 모양으로 거기에 색깔까지 똑같이 죽 나열하여 들어선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소주는 강소성에 속하며 양자강 남쪽, 상해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춘추 전국시대 오나라와 원나라와 많이 싸웠다고 한다. 태호라는 호수는 소주의 10배 크기라는데 가 보진 못했다.
온도는 상해와 비슷하고 여름엔 42도 까지 올라가 덥고, 비도 많이 오며 복잡하고 좀 무질서한 도시로 자전거와 오토바이 이용자가 많다. 인구는 165만명, 시내에만 100만명 정도이고 고기(어)와 쌀(미)의 고향이기도 하고 실크산업으로 부유하게 산다.
*실크 공장
항주와 마찬가지로 소주 벌판엔 뽕나무가 많다. 거의가 누에용이고, 실크 공장에 가 보았는데 정말 말로만 듣던 번데기와 누에고치에서 실을 풀어내는 과정을 생생히 보았다. 뜨거운 물에 고치를 담가 실을 풀어내고 번데기를 축출한다. 번데기 중에서 쌍태는 골라 이불용 실로 쓴다. 누에가 동시에 한집에 두 마리가 집을 지어 엉켜서 실이 풀리지 않아 그 실덩이를 죽죽 잡아당겨 명주 이불솜으로 만들고 있었다.
주로 50대 이상의 부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고, 캐나다와 합작하여 수입이 많다고 한다.
이불을 사 오는 사람도 있고, 나는 신기하여 누에고치 쌍태와 일반고치 몇 개를 얻어왔다.
*한산사
서기 502년에 건립된 고찰로 역대 중국의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5차례나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가 청대말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장계의 시 '풍교야박' 로 유명하기도 하고 당나라 때에는 일본에서 많이 유학을 오기도 하였으며 당대의 승려인 한산이 이 절에서 산 후부터 한산사라 개명하였다. 영은사보다는 작지만 저녁 10시부터 12시까지 울리는 108번의 종소리를 듣기 위하여 일본인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1년간의 고민 108가지를 다 풀으라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해발 4미터의 낮은 지대이지만 물난리가 난 적 없고 북경에서 항주까지는 운하로 연결되어 있어 물길로도 왕래한다.
이 곳 절에서도 큰 향로를 절 입구에 놓고 오가는 이들이 향불을 마음대로 피울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한 다발씩 향불을 피워 절 내에는 향내와 향불의 연기, 불꽃 등등,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그윽한 풍경이다. 절이 아주 우람하고 지붕 끝부분이 살짝 올라간 모습, 지붕 위 가운데 부분에 두 가닥으로 솟아 오른 형상이 우리나라 절의 모양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소주의 물길
소주에는 물길이 아주 많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중국의 땅 전체에서 물길이 많다고 느꼈지만 특히 소주에는 집과 집 사이, 아파트 단지 사이, 심지어 마을 안으로도 물길이 지나고 있다. 예전에 운송로로 이용하던 것인데 현재는 좀 문제거리가 된다고 한다. 10년 후쯤엔 큰 문제가 될것이라고 한다. 지저분하고 바다에까지도 오염될 정도로 그 물을 사용하지 못하며 지금은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수로를 잘 이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전엔 그 물로 쌀도 씻었다는데 지금은 식수를 사 먹는다고 하니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어쩜 이런 물에 대한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고 세계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집들이 습기로 인하여 거의 다 2층 집인데 1층은 창고로 쓰고 2층에서 산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상해에서도 항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해안지방이라서인지 습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곳 수로 옆에 조상의 유골을 묻어두고 수시로 절하며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묘지로 인하여 손실되는 국토의 손실을 막기 위해 무덤을 쓰지 않기를 권하기 때문에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해를 물가에 묻거나 아니면 지붕 아래에 창고 같은 방을 마련하여 보관한다고 한다. 실제로 물가에 유골을 보관한 작은 집을 볼 수 있었다.
더러 부자 집에서는 산에 커다랗게 집을 지어 조상을 마루 밑에 모시기도 하는데 산 곳곳에 그런 집들이 보인다. 이런 풍경은 10년 전에 가 본 대만의 모습과 동일하다.
중국인들은 죽어서도 좋은 아파트에 살려고 돈을 많이 모아 평소에 죽으면 살아갈 아파트를 산 속에 짓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명절 때면 그 산 속 집에 모여 밥도 해 먹고 며칠씩 지내며 마루 밑의 조상님께 예를 갖춘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집 옆에 운하를 두고 살았는데 현재는 거의 떠났고 돈이 없는 사람은 운하 위 배에서 살았다고 한다. 오늘은 항주, 내일은 소주, 또 다음날은 상해로 정처없이 떠돌며 살아 아침에 학교에 간 아이가 저녁 때, 옮겨간 집을 찾지 못하여 헤매곤 하기도 하고 아침엔 동쪽, 저녁엔 서쪽으로 정처없이 살아 그들은 인구 통계에서까지 제외되었다고 한다.
이런 운하 위의 집이 지금도 있다하니 중국의 삶의 수준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그 예로 부자가 결혼하면 자가용이 40 여대로 늘어서 자기 집에서 처갓집 마당까지 줄을 짓는다는 것이다. 첫차가 장모댁에 도착하였는데도 아직 자기 집에선 출발도 못할 만큼 자가용이 대기 중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 호화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농촌에선 아직도 가마 속에서 신부의 손을 만져보고 결혼하기도 하고 오히려 농촌에선 자가용으로, 도시에선 꽃가마를 8명이 메고 혼사를 치룬다고 한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풍습인듯 싶다.
*호구탑
해발 42미터의 얕으막한 호구산에 세워진 무덤의 일종인데 15도 각도로 삐뚤어진 탑으로 96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희한하게도 사찰 안에 호구산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호구란 '호랑이가 있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즉,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 호랑이 항문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오의 왕 '함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그 아들이 무덤에 무기를 묻었다는데 아직도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산사에서 호구산까지 운하로 이동이 가능하고 호구산 안에는 가마꾼이 있어 우리 돈 1만원만 주면 사람이 직접 가마를 메고 출구까지 실어다 주었다.
일행 중 연로하신 두 분이 그 가마를 탔는데 가마가 삐그덕거리며 기우뚱거리고 특히 그 가마를 멘 세 사람의 중국인들이 안쓰러웠다. 돈벌이라고 하기엔 좀 잔인한 모습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왼지 좀 우울한 풍경으로 비춰졌다.
호구산 정상에 세워진 호구탑은 명물이다. 중국의 피사탑이라더니 정말로 기울어진 형태가 눈으로 파악될 정도로 심한 상태다. 언젠가 넘어질까봐 기울어진 쪽엔 줄을 쳐 놓고 관람객의 통행을 차단하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여름인양 파란 나무들이 호구탑 주위에서 잘 가꾸어져 있어 사진을 찍었는데 탑과 나무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장엄한 호구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고 둘레는 각이 진 둥글고 우람한 형태다.
공원 경내도 꽤나 넓고 조랑말로 호구산을 돌며 관람하는 이도 있었다.
*졸정원
< 졸정원 연못가에서 - 두 아들과 함께 >
중국 4대 명원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정원이다. 정원이 조성된 것은 명대의 왕헌신이 관직에서 추방되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온 때인 1522년이고 진대의 시 한구절 '졸자위정(拙者爲政: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에서 본따 이 정원을 졸정원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부지의 60%가 연못으로, 물 주변으로 누각이나 정자 등이 있어 그 풍경이 장관이다. 중국 4대 명원 중 2개나 소주에 있을 정도로 소주는 정원이 많은 도시이며, 그 대표적인 정원이 졸정원과 유원인데 우리는 더 유명하고 잘 가꾸어진 졸정원에만 가 보았다.
아버지가 30여년 동안 모은 돈으로 세운 이 정원을 그 아들이 하룻밤에 마작으로 돈을 다 날려 이 졸정원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고 지금은 정부에서 관리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자손에게 돈을 안 물려준다고 한다.
부지도 넓고 누각 사이 사이로 흐르는 호수물길, 그 물길 따라 배를 타고 다니며 정원을 돌보려 노젓고 다니는 사람도 보인다. 용의 형상으로 지은 누각은 서호에서 본 유람선의 모습이고 저 건너 멀리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이 그의 친모와 양모를 위해 세웠다는 보은의 탑이 보이기도 하였다.
*태가촌
중국엔 소수 민족이 많은데 그중 하나로서 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민속춤과 함께 즐긴 석식은 참으로 의미있는 자리였다. 그들의 혼인은 처녀가 춤을 추다기 발을 밟으면 결혼한다고 한다. 색시가 싫다하면 총각은 장모 집에 가서 1년간 벌로 일을 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황소 1 마리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결국은 결혼해야 하는데, 태가촌은 아들을 가진 어머니가 한달 간 운다고 한다. 우리와 거꾸로 남자가 여자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상한 결혼 풍습인데 그건 아마 여자가 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쇼 행사를 다 마치고 그들은 무대에서 무언가를 객석에 던졌다. 우리 가족이 앉은 좌석으로도 오기에 받는다는 것이 그만 놓쳐 음식 그릇에 떨어졌는데 그 것을 집으려 하자 그 곁에서 보던 한 남자가 아주 신사적으로 그들의 언어로 집지 말라는 표현을 하며 그가 도로 가져가더니 다시 새 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생각보다, 떨어져 외롭게 사는 소수민족치고는 예의 바르고 반듯한 생활 자세임을 느꼈다.
2003년 2월 6일 목요일 마지막 날
여행 마지막 날로 상해 옛거리를 잠시 들러 푸동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으로 인천국제 공항에 돌아왔다. 3박 4일 간의 여행으로 배우고 깨달은 점이 많다.
*비행기에서 본 지구의 둘레는 너무나 희뿌연 매연으로 덮여 있었다.
하늘 위는 투명하고 쪽빛인데 우리나라와 중국 영토 가까이에는 뿌연 공기층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어쩌면 인간이 지구를 혹사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그로 인해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폐해가 온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아름다운 지구가 더 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문명 발달로 편리함은 얻었어도 우리 인간이 숨쉬며 살고 있는 지구가 저토록 불투명한 매연 공해층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흑탕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물이 오염된 사실을 못 느끼듯이 우리 사람들도 정작 오염된 지구의 매연 속에서 살고 있음을 못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풀어봄이 어떨까. 자동차의 매연 문제를 다른 각도로 풀어보고 발전은 하되 지구도 아름다운 동산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됨을 느꼈다.
*우리는 좀 더 전기를 절약해야겠다.
중국은 밤 10시 30분이면 암흑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전기를 그 때까지만 공급해주고 대부분 공공 장소는 불이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밤낮없이 환한 불빛들, 좀 전기를 아껴야겠다. 사실 중국 호텔에서 새벽에 바깥 풍경을 보니 암흑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중국인들은 워낙 절약이 습관화되어서 전기불을 잘 안 켠다고 한다. 저녁에 고속버스가 다니는 도로에도, 일반 시내나 외곽 도로에도 불빛이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어둡다는 것을 느꼈다. 오는 날 비행기가 밤에 인천에 도착하였는데 우리나라 상공에 들어오니 휘황찬란한 우리나라의 불빛이 보였다. 중국의 거리와는 조금 다르다. 에너지 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국가적인 차원으로 전기 절약에 신경써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과 물길이 많은 중국,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대조적이다.
물론 중국도 고산지대로 가면 깊은 산맥이 있겠지만 요번 여행에서 본 중국 지역은 거의 산을 볼 수가 없었다. 끝없이 몇 시간씩이나 이어지는 넓은 평원이 부럽기도 하고 산이 없어 과연 공기가 맑을까 염려되기도 하였다. 저들은 산이 그리울 때 어디로 갈까. 바다에 기면 수평선이 보이듯 중국엔 저멀리 지평선이 보일 만큼 끝없이, 아주 끝없이 너른 평원만 보였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집들도 간간이 몇 채 보일 뿐, 아주 넉넉하고 여유로운 들녘 풍경, 그래서 중국인들의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있는 표정인가 보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본 우리나라의 풍경은 온통 산악지대다. 어쩌면 아름다운 금수강산 속에서 살고 있음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우리나라의 산, 정말 아름답다.
중국엔 물길이 참으로 많았다. 벌써 비행기 위에서도 거미줄 마냥 시내 곳곳에 이어진 물길, 운하, 수로, 이런 표현의 생소한 풍경들은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것은 공장의 물품을 운송하거나, 이동할 때 사용되는 길이라고 한다. 폭은 좁은데 꼭 배는 몇 척씩 떠 있다. 신기한 모습들이다.
*내실의 충실함으로 부상하는 나라, 우리의 생활 자세도 돌아보아야 한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겉치레로 꾸미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공산주의에서 이미 사회주의로 변했고 실상은 자본주의 체제와 거의 비슷하게 바뀌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으로 똑같이 배급을 받던 시대에서 일한 만큼의 성과에 따라, 한 집 식구들마저도 서로 다른 양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다른 미래를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열심히 일한다. 물론 퇴폐적인 생활상도 있겠지만 대부분 근검 절약하여 내면의 충실함에 우선하는 것 같았다.
혹자는 머지 않은 장래에 중국이 급부상할 것이라고도 한다. 나라의 장래는 국민 하나 하나의 노력으로 결정지어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에서 근로자로 있는 외국인 중에 중국인들의 근무 태도가 으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신임도도 높을뿐더러 그들은 임금으로 받은 돈을 반드시 본국으로 보낸다고 한다. 반면 중국에서 일하는 외국의 근로자들은 본국으로 돈을 보내는 것 보다 중국의 물건을 사서 보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눈여겨 살펴야할 대목이다. 아무튼 거국적인 안목으로 우리의 이상을 높이고, 좀더 자신의 영역에서 충실함으로 우리나라의 차원 높은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국민의 한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아울러 필자는 시인으로서 문학적인 시제도 많이 얻었고, 여러면에서 많은 것을 배운 뜻깊은 나들이였다.
중국 문학 기행-[보령문단] 2003년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