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부 산문 / 최우수상
두려워마라
민중구(미카엘라) / 월평동 성당
내가 하던 사업이 망했다. 연금매장 여섯 군데를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다. 아파트를 처분해서 급한 빚부터 정리 하고나니 세 식구 살 길이 막막했다. 친구에게 어렵게 도움을 청했다. 작은 방과 부엌이 딸린 가게를 얻게 되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끝나고 방으로 들어가면 방안은 탁하고 더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선풍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누워 보지만 지하 단란주점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방바닥이 울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부엌으로 나가 찬물을 끼얹는다.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보면 새벽이 온다. 머리는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무겁고 눈은 떠지지 않았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시골 교회를 다녔다. 자라면서 학교와 교회만을 오가며 지냈고, 예배당은 공부방 겸 놀이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교회에 일이 생겼다. 목사님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이곳으로 왔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확인이 되기도 전에 목사는 어머니를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을 쳤다. 그 소식이 온 동네에 퍼졌다. 신앙생활이 내 삶의 전부였는데, 사람에 대한 실망은 하느님에 대한 갈등과 불신으로 이어졌다. 결국 교회를 떠났다.
나는 믿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스탠드 빠나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았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한 죄의식은 없었다. 그렇게 세상적인 생활 속에 젖어 살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평탄치가 않았다. 남편과의 다툼이 잦았다. 남편은 술 중독자가 되어갔고 많은 돈을 유흥비로 탕진했다. 막무가내로 돈을 내놓으라 하고 주지 않으면 거칠고 포악했다. 밖에서도 걸핏하면 싸움질이었다. 외박을 밥 먹듯 했다. 한마디 잔소리하면 한번 외박을 하고, 두 마디 하면 두 번 외박을 하는 식이었다. 미안해하기는커녕 당당하기만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직원들과 야유회를 갔는데, 밤중에 회사 운전기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양평에서 패거리들과 싸움이 붙었고 경찰서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랫배에 통증이 왔다. 피를 쏟기 시작했다. 나는 임신 삼 개월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바로 수술을 했다. 허망하게 아이를 쏟아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시부모님과 형제들까지 남편을 책망하며 외면했다. 남편은 아버님 회사에서 쫓겨났다. 나는 깊은 절망의 수렁 속으로 빠졌다. 남편이란 존재가 싫었다. 이혼만이 내가 살길이었다.
그런 내게 새 생명이 또 들어섰다. 남편의 소행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없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문득 하느님이 생각났다. 하느님을 찾아 새마을시장 옆에 있는 잠실 성당으로 갔다. 그 곳은 시장을 오가며 자주 보았던 곳이다. 문은 열려 있었고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다.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에게 다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제게 힘을 주세요.”
나는 기도를 하다가 울고, 울다가 기도했다. 그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축복하지 않겠느냐.’
그 음성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어떤 용기가 나를 휘감았다. 아기를 지켜야 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벼락같이 내리쳤다.
나는 날마다 성당으로 갔다. 제단 앞에 앉으면 마음이 편했다.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돈을 달라고 하면 무조건 주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달려갔다. 그런데도 남편의 행동이 변하거나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심해졌다. 한 달씩 안 들어오기도 하고 술집에서 외상값 갚으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있는 힘을 다해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에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것 같았다. 다시금 고개를 드는 분노와 절망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죽으려고 한강으로 달려갔다. 시커먼 물이 너무나 무서워 돌아섰다. 세상이 몹시도 두려웠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자존심 죽여 가며 남편에게 순종했다.
어느 날, 남편은 내게 말했다.
“너처럼 잘난 척은 혼자 다하는 여자가 왜 이러는 거야. 당신한테 난 질린 사람이야. 차라리 옛날처럼 대들어보셔. 그래야 훨씬 당신다우니까. 어거지로 고분 고분하는 당신 오히려 소름끼친다. 소름끼쳐.”
나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벼락같이 내리치던 사명감과 용기가 나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여보, 나 임신했어.”
이 말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끝도 없이 흘러 내렸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요.”
남편보다 내 고집이 더 세었고, 내 맘대로 남편을 휘둘러가며 살고자 했었다. 나는 남편만 향해 비판하고 삿대질 했었다. 한 번도 나 자신을 향해 비판하지는 않았다. 비로소,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남편은 변해갔다. 싸움질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외박을 하지 않았고, 돈도 요구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쫓겨 난 후 무위도식하던 것도 접고 내 일을 도와주었다.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남편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기적이었다. 어떻게 남편이 저렇듯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영세를 받았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팔십 팔년 도에 남편에게서 축하 꽃다발을 받았다. 다음해 팔십 구년에는 남편 스테파노도 영세를 받았다. 태어난 생명은 아들이었고 본명은 요셉이다. 유아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랐다. 우리는 성가정을 이루며 행복했다.
레지오에 입단했고, 구역반장일도 했다. 그리고 구․반장성령세미나에 열심히 다녔다. 성령은 내안에서 강하고 뜨거웠다.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새벽미사에 다녔다. 매주 금요일이면 개포동성당 철야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생명으로 살아 움직였다. 신앙을 위한 행진이라면 나는 지치지 않았다.
남편은 아버님의 사업을 물려받았고, 지금은 집안의 꼴찌에서 첫째가 되었다. 이제는 단란주점의 노랫소리에 잠 못 들어 하지 않아도 된다. 밤새 찬물을 끼얹으며 새벽을 맞지 않아도 된다. 하느님은 건방지고 콧대만 센 나를 연단하시느라고 그 무서운 고통의 늪을 건너게 하셨나보다. 내게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씨앗에서 열매로, 그 열매가 삶의 순교로, 내가 거듭나고 또 거듭날 때까지 짊어지고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