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 한살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평생토록 그와 행복하게 사는게 소원인 평범한 - 아니, 이런 순진함은 요즘 사람답지 않다. 어쩌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삶인지도 모르겠다 -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날 집으로 찾아온 남편 효경의 여자. 효경은 한 순간의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이미 믿음이 깨어져 버린 그녀는 지독한 두통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수면제로 삶을 이어간다.
가정을 끝내 포기하지 못한 남편은 서로 불편한 사이의 이웃 같은 관계를 유지 하면서도 그녀의 요양을 위해 바닷가 마을로 이사하고, 그 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상처의 내면의 표정을 한눈에 알아보고 "괜찮아요?"라고 물어준 우체국장 '규'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지독하게 생에 대해 초연한 사람이었고, 그런 초연함이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켜가기 위한 것임을 한 눈에 꿰뚫어 본 그녀와 게임이라는 명목을 빌어 서로의 욕망을 해방시킨다.
사랑한다, 라는 말을 꺼낸 순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게임, 이기는 사람은 없이 지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게임에서 두 사람 다 지고 만다. 질척이는 삶의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아 애써 서로를 부정하다가 결국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모텔에서 나오는 장면을 효경에게 들켜 버리고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 구타 당한 나는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사이에 늘 만나던 휴게소로 나와 규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전화를 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과는 달리 다시 그를 만나게 되고 밤새 상처를 보듬어 주던 그와 함께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 사고를 당한다.
작은 마을에 추문이 퍼지고 남편은 나를 용서하지 못해 집을 팔려고 내놓는다. 나는 집을 판 계약금을 받아 낯선 곳으로 떠나오고 몇 달 후 남편은 찾아왔지만 이미 두 사람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남편이 너무 변해 버렸다는 것을 느끼면서, 미안한 마음은 그지 없지만 이제서야 삶의 의지를 찾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2.넋두리
마음에 부담이 되는 일들이 좀 있었다. 내내 덥수록 하더니 결국 체한 것처럼 다 게워내고 약을 먹느니 손을 따느니 부산을 떨었지만 통증은 가라앉을 줄을 모르고 결국 밤새 날 잠 못 들게 했다. 기나긴 밤을 멀뚱 거릴 수 없어 심심풀이로 집어든 책이 전경린의 소설이었다. 결국 여성소설가들이 쓸 법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지만 - 나는 그런 류의 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틀에 박혀 있는 것들에 대한 짜증 때문이다. 그렇기에 친구가 집에 가져다 놓고 간지 1년이 넘도록 손대지 않고 있었던 책이었다 - 내가 느끼는 육체적인 통증 때문이었을까, 숨 한번 돌리지 않고 책을 읽어내렸다.
사랑, 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거다.
작가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된다고 표현했지만 어쨌던 간에 일상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삶에서 사랑이란 말이 너무 사치스런 것이라면 작가는 나름대로 진실한 사랑의 그림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내가 숨 막혔던 것은, 결국 상처에 태연할 수 없는 연약한 두 사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가. 하는 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삶은 너무나 태연하다. 우리는 비극적이고 추잡한 결말을 알면서 왜 끝내 사랑이라는 감상적인 감각을 버리지 못하는 가. 좀 더 견고한 벽으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인가.
작가의 말대로 삶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파괴적인 삶에 흡수되길 갈망하는 것인지도. 무미건조한 행복보다는 온몸을 갉아먹는 열정을 원하는 것인지도. 비록 한 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말이다.
'규'는 '나'에게 진정으로 강한 것은 나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선택한다 해도 완전한 결말은 아니지 않을까. 결국 상처에 이르는 두 가지 갈래 길의 선택. 과 같은 것.
책을 읽는 내내, 초연... 하라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이 얼마나 바스러지기 쉬운 것인지 이야기 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을 느낀다.
평범하지 않은 여자가 겪은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첫댓글 오빠.... ㅡㅡ;; 손민흽니다. 미워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