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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도시 엘파소(El Paso) 근처에서 맞은 해넘이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서 비행기 자살 테러가 발생한 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 때부터 대폭 강화된 미국의 국경 경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멕시코 접경지역은 밀입국 시도가 잦은 지역이라 더욱 경비가 삼엄하다.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 없이 미국을 여행하는 외국인, 특히 동양인은 국경수비대의 요주의 대상이다. 혹시 밀입국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예외없이 검문을 한다. 미국과 멕시코의 최 접경도시 엘파소에서 샌디에이고까지 국경 650여 마일을 달리면서 검문검색을 4번이나 당했다. 그러나, 낭패를 당하지 않았던 것은 여권과 DS-2019를 챙긴 덕분이었다. DS-2019는 미국 국무성의 위임을 받아 연수기관(대학교)에서 발급해주는 서류로 미국 입국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연수기관과 체류기간, 미국에서의 주소 등이 적혀 있다. 두 서류가 없더라도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 미국 운전면허증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이리 저리 불려 다니며 검문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여행 때마다 여권과 DS를 집에 두고 다녔는데 유독 이번에는 챙겨야겠다 싶어 챙긴 것이 보험이 됐다. 여권과 DS를 빠트렸더라면 어찌됐을까? 여행을 다녀와 이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첫 번째 검문검색을 받은 곳은 엘파소 북쪽 경계지점에 있는 검문소, 검문중인 군인들이 "Are you a citizen?"이라고 묻길래 “No, I am not"이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차를 길 옆으로 빼라고 요구했다. 밀입국자로 의심하는 것 같아서 미주리주에서 왔고 차 번호판도 미주리주 것이라고 얘기하며 선수를 치고 나갔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여권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렁크를 열어 여권을 꺼내는데 트렁크 가득 든 짐을 이것 저것 들춰보면서 의심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DS에 대해 물을 때 미주리 주립대에서 미국 언론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의 기자라고 하자 관련해서 몇가지 더 묻고는 길을 열어줬다. 과달루페에서 오후 늦게 출발한 탓에 엘파소에 들었을 때는 벌써 깜깜한 밤이었고 아리조나 투산까지(Tucson)갈 길도 먼데 검문에 20분 가량 지체한 것도 기분 나빴지만 다른 차들은 놔두고 유독 우리 차만 잡아 트렁크 속까지 뒤지는 것은 더욱 기분 나빴다. 10~20분 검문받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시민이 아니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표적 검문받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국과의 접경이 없는 한국인에겐 국경지대를 지나친다는 것이 생소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38선은 한반도 내에 그어진 선이라 딱히 국경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무시로 왕래할 수도 없으니 간도땅이라도 찾아간다면 모를까 국내에서 국경을 경험하긴 어렵다. 그래서 늦은 밤 지나치는 국경지대에선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엘파소의 야경(출처=www.jac-ccc.org)
사막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옅어지고 어둠이 대지 위로 깔리는 국경의 밤! 국경도시 엘파소, 수 십 만개 불빛들이 무심히 빛나는 국경의 밤! 이역 만리 이국 땅에서 맞는 국경의 밤! 점 처럼 퍼진 불빛 하나 둘 셋, 야경꾼 처럼 도시를 훑어간다. 나트륨등 노란 불빛이 뿜어낸 온기 좋은 사람 그리운 마음 가만히 문 열고 불쑥 뛰어들고 싶지만 머나먼~ 타국. 리오그란데강은 지척에 있고 그 너머 멕시코 후아레즈, 아리조나 가는 길은 더욱 먼데 국경의 밤은 깊어만 간다.
엘파소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 1500여 마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국경도시로 멕시코 국경과의 거리는 10여 킬로미터 멕시코 국경도시 큐다드 후아레즈(Ciudad Juarez), 그리고 뉴멕시코주의 라스 크루세스(Las Cruces)와는 하나의 메트로폴리스를 이루고 있다. 엘파소를 기점으로 동쪽의 국경 끝 도시 브라운스빌까지는 리오 그란데강이 두 나라의 국경이고 서쪽 은 사막 사이로 국경이 그어져 있다. 엘파소는 규모에서 미국의 22번째 도시로 인구는 61만 3천명 주변부 인구까지 합치더라도 74만명이지만 도시의 면적은 미국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엄청나게 넓다. 전체 도시면적이 648.9평방킬로미터로 서울보다(605.41)더 넓다. 우리는 저녁 무렵 시내를 동에서 서북쪽으로 가로질러 프랭클린 산맥을 넘으면서 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멋진 야경을 구경했다. 이 산은 시내를 남북 두 개의 지역으로 갈라놓고 있다.
다운타운(출처=wikipedia)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시내 식당(맥도날드)으로 찾아 들어가자 보이는 사람은 대부분 히스패닉(Hispanic)이었다. 히스패닉이 엘파소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6.6%, 백인은 18.3%, 흑인 3.1%로 비중이 낮다.(출처:wikipedia) 히스패닉은 영어로 Spanish를 의미하지만 오늘날은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와 중미, 남미, 카리브해 국가 출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엘파소란(El Paso)스페인식 이름은 후안 오나테(Juan de Oñate)란 스페인의 탐험가가 지은 것. 그는 1598년 4월 30일 엘파소를 스페인왕 필립 2세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지금의 엘파소 다운타운 서쪽 지역으로 리오 그란데강을 건너면서 “El Paso del Rio del Norte,”란 말을 했다고 한다. 뜻은 ‘리오그란데 북쪽으로의 통로’이다. 미국 남부 국경 기행의 루트는 멀리 플로리다주 잭슬빌(Jacksonville)에서 미국 대륙을 최남단에서 가로질러 로스엔젤레스에 이르는 US-10번과 아리조나 피닉스 부근에서 샌 디에이고로 연결된 US-8번 고속도로. 엘 파소와 라스 쿠루세스, 데밍, 투산, 유마 등의 도시를 거쳐 샌 디에이고까지 갔다.
고속도로를 밤새 달려 도착한 곳은 투산 공항 근처의 모텔 체인 ‘라 퀸타’(La Quinta). 공항은 다운타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시로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만큼 숙박 가격이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이 많다. 미국 여행 초기엔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지만 자동차 여행에서는 일 이십 마일 가깝거나 먼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숙소가 깨끗한 지 어떤 편의를 제공하는 지를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됐다. 투산 교외의 사구아로 국립공원을 찾은 2009년 11월 23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아래 펼쳐진 투산 시내는 아주 아름다웠다. 위도가 샌디에이고보다 낮으니 늦 가을에도 날씨는 약간 더웠고 야자수 가로수가 시원스럽게 하늘로 뻗어 올라간 거리들은 활기가 넘쳤다. 투산은 아리조나의 황량한 소노란 사막 가운데 있지만 야자수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 도시의 경치가 풍성했다. 도시 주변 사방이 사막이기 때문에 도시의 숲은 더 크고 싱그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구아로 국립공원 사이로 난 시닉 드라이브를 따라 사막을 달려보는 것은 독특한 체험이다. 그레이트 센 듄이나 사하라 처럼 모래 언덕으로 이뤄진 죽은 사막이 아니라 황량한 황무지에 사구아로 같은 선인장과 관목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하나의 생태계, 살아 있는 사막이다. 투산엔 동서 두 쪽에 있는 사구아로 국립공원 외에도 전투기와 여객기 등 항공기를 그대로 전시하는 야외 항공박물관이 있고 도시 주위로도 많은 관광지가 널려 있다. 투산에서 매라나(Marana)시를 거쳐 20여 마일 지점에 있는 피카초(Picacho)주립공원과 레드락(Red Rock)은 고속도로 변에 있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칠 염려가 없다. 피카쵸 픽으로 가는 길에는 수백 채의 집과 학교, 공원, 동네야구장 등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계획도시가 조성되고 있었다. 멀리 피카쵸 픽과 산타로사(Santa rosa)산맥을 배경으로 사막위에 서 있는 마을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풍경화 같다.
소노란을 지나 질라(Gila)와 콜로라도 강이 합류하는 곳, 아리조나와 캘리포니아주의 경계지점에 유마란 도시가 있다. 엘 파소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바자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주와 접경지역이다. 여기서 샌디에이고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임페리얼 센 듄’ 거대한 모래 언덕이 나온다. 풍광이 콜로라도의 그레이트 센 듄에 못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고 사구의 길이도 40마일이나 된다. 앨거던즈 듄(The Algodones Dunes, 면화) 또는 Glamis Dunes으로도 불리는데, Glamis와 Gordon's Well, Buttercup, Midway, Patton's Valley 등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임페리얼 듄 필드(출처=photo.igougo.com)
고대의 호수였던 케이휠라(Lake Cahuilla)에서 바람에 실려 날아온 모래가 언덕을 만들었고 사막지대를 달리는 off-highway vehicle(OHV)애호가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샌디에이고 가는 길 시간이 없었지만 자동차를 길 한 켠에 세워두고 짧은 시간이나마 모래 언덕을 체험했다. 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 황혼에 비친 모래언덕이 신비로운 경치를 만들어냈다. 늦은 밤 샌디에이고 시내에 도착했을 때 이틀에 걸친 국경기행은 힘겹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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