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이다. 전체 1,893권 888책으로 필사본이다. 『고종실록』과 『순조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강제로 편찬되어 왜곡이 많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정족산본(鼎足山本)과 태백산본(太白山本) 등은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이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왕 재위시의 사관(史官)들이 각각 써 놓았던 사초(史草)와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를 연월일 순으로 정리해 작성한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 『승정원일기』·『의정부등록』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 개인 문집 등의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관의 사초인데, 예문관의 봉교(奉敎, 정7품) 2인, 대교(待敎, 정8품) 2인, 검열(檢閱, 정9품) 4인이 이를 작성하였다. 이 사관은 청요직(淸要職)으로 그 선발에 신중을 기하였고, 사관들은 매일의 사건을 직필주의(直筆主義)에 입각하여 작성하였는데, 만약에 사초의 개서(改書), 삭제 등을 행하였을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실록은 원래 1왕이 1실록으로 편찬되어야 했으나. 조선후기 당쟁이 심화되면서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다시 편찬하였으니, 『선조수정실록』·『현종개수실록』·『경종개수실록』이 바로 그 예이다.
실록이 완성되면 완성본인 정초(正草)를 제외하고 비밀 유지 및 종이 재생을 위해 초초(初草)와 중초(中草)는 물로 씻어내는 세초(洗草)를 시행한다. 정초본은 춘추관·충주·전주·성주 등의 사고(史庫)에 각기 1부씩 봉안하여 보관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만이 병화(兵火)를 벗어나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이 실록은 1950년대 중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48책으로 축소 영인해 전문가들이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68년 이후 국역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95년에 서울시스템에서 CD-ROM으로 만들어 대중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비록 지배층 위주의 관찬(官撰) 기록이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3. 종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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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종(祖宗)의 묘, 즉 왕가(王家)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는 곳이다. 종묘는 흔히 사직(社稷) 즉 토지(土地)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과 함께 종묘ㆍ사직으로 불리우며 이것은 곧 국가의 조립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종묘는 조종(祖宗)의 묘, 즉 왕가(王家)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는 곳이다. 종묘는 흔히 사직(社稷) 즉 토지(土地)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과 함께 종묘ㆍ사직으로 불리우며 이것은 곧 국가의 조립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종묘를 창건하는 역사(役事)는 태조 3년 12월 4일에 이루어졌는데 이 날 왕은 중추원부사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궁궐을 지을 터에도 신하를 보내어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를 지내고서 그 터를 개척하였다. 그로부터 종묘를 짓는 공사는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 여러 차례 왕이 직접 공사장에 나와서 짓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공사가 시작된지 10개월이 지난 태조 4년 9월 29일에 드디어 종묘는 궁궐과 함께 완성을 보았다. |
4. 이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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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처음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이이(李珥)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지리 율산(律算) 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요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5.서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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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세도가의 양반 자세로, 약관 14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일찍부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을 체득한 그는 1881년에 무예를 배우고자 다른 젊은이 15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공부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수구파의 반대로 일본에서 배운 바를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서재필이 22세가 되는 1884년, 그는 갑신정변을 도모하면서 전위행동대의 총지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피신한 서재필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망명한다. 서재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을 하고 지내다가 후원자를 만나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한다. 도미한 지 11년이 지난 뒤, 서재필은 미국에 들른 박영효로부터 갑신정변 때의 대역부도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과, 정권을 다시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귀국을 기다리고 있음을 전해 듣고 1895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김홍집내각은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내정하고 입각을 제안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정부의 외곽에서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계몽하는 신문 발행사업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입각을 거절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을 민중의 지지가 결여된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번 갑오개혁의 성패 여부도 민중의 지지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였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도 일본 측의 방해로 신문은 갖지 못했다. 특히 내부대신 유길준은 1883년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의 창간 준비작업을 한 경험이 있었으며, 서양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견문을 통하여 신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896년 1월 하순, 서재필과 유길준은 신문사를 설립해서 국문판과 영문판을 동시에 창간, 3월 1일부터 발행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김홍집내각도 신문 창간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신문사 창설자금과 서재필의 생계비를 정부예산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1896년 2월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내각이 붕괴되고 유길준도 일본으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은 창간 준비단계에서 지원하던 큰 지원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관파천에 의하여 몰락한 것은 친일적 개화파뿐이었으므로 신문 창간사업을 지원할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었다. 특히 박정양, 한규설, 김가진 등을 비롯한 건양협회의 잔여세력과,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등을 비롯한 정동구락부 세력이 서재필을 지원 보호하여 신문의 창간계획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아관파천 뒤 구성되었던 박정양내각도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서재필의 요청에 따라 유길준이 작성한 승인서를 재확인해주었으며, 정부예산에서 신문사 설립자금과 서재필의 개인생계비 및 가옥 임대료까지 지출하였다. 서재필은 이 정부 자금으로 일본에서 인쇄기와 국문활자. 한문활자. 영문활자 등을 구입하여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고 1896년 4월 7일 마침내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왕성한 황동을 펼치는 동안, 황실, 특히 친러세력 및 보수세력과 갈등을 빚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독립협회가 해산을 당하고 만다.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던 서재필 역시 정부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
6. 한중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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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 복합감성/한중록 개요 작품포인트 혜경궁 홍씨는 부친 영조에 의해 뒤주 안에서 죽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를 남편으로 두어 평생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는 아들 왕세손을 부둥켜안고 운명적 한으로서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아픔과 불효의 망극함, 함께 죽지 못하는 비통함을 절규하는 것이다. 침묵하여 내면에서 삭히고 잠재우기엔 너무 깊은 한이요 원통함이었다. 왜곡된 진실을 밝혀야만 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그 실상들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멸문지화를 당한 친정의 누명과 억울함, 그토록 비극적 한의 세계로 몰고 갔던 흉심과 야욕의 주역들, 이러한 모든 실체와 상황적 아픔들을 폭로하고 설원해야 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이 많은 여인이었다. 28세에 남편을 잃은 후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기쁨과 영광의 날보다는 고통과 번민의 날들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팔순을 넘기도록 산 그 삶 자체가 한일 것이다. 작자는 3편의 글을 쓸 때까지도 남편 사도세자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피한 것 같다. 실제로 3편의 글에서 다른 사건이나 인물에 관련된 것 외에 남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마지막 편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밝힌다면서 섬세하게 그 날의 일을 전개하고 있다.
한중록은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의 오해를 지켜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부자 사이에 얽힌 오해가 불러온 역사적 비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혜경궁 홍씨의 복합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주요인물 1.혜경궁홍씨 : 어린 나이에 입궐하여 한 평생을 눈물로 보낸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 생긴 오해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인물이다.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게다가 한 나라의 세자빈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기에 그녀에게 가해진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운 것이었다.
2.영조 : 좋고 싫음이 너무도 분명한 인물이다. 그는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차에 아들을 얻어 기뻐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항상 마음에 차지 않았으므로 항상 꾸중과 성냄의 감성으로 아들을 대한 인물이다. 해가 거듭 될수록 아들과의 골이 더욱 깊어져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한번 정해진 마음의 결을 고집 세게 고수하는 인물로, 결국에는 마음을 잘 풀어내고 다스리지 못해 비극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3.사도세자 : 탄생 시에 누구보다도 많은 축복을 받은 인물이다. 유달리 총명하고 건강하여 성군의 자질을 지녔었는데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그 뜻을 펴지 못했다.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의 인물이다. 생각이 많고 감성이 풍부한 인물로, 아버지의 끝없는 미움 앞에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풀어야할 지점을 몇 차례 놓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배경 시간 : 조선시대 영·정조 대 장소 : 한양 대궐 전체줄거리 혜경궁 홍씨는 나이 9살에 동갑인 동궁 빈으로 간택된다. 이듬해인 10살에 가례를 치르고 궁중에 입궐한 후 8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궁중에서 생활하였다. 입궐 초기에는 영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앞으로 군주가 될 동궁의빈으로서 쇠락하던 친정 집안을 다시 일으켰고, 후에 정조가 된 국본을 생산하는 일들로 기쁨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입궐 초에 징후가 나타나던 세자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 백약이 무효이고, 주변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도 빛을 보지 못한 채 28세의 나이에 생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 사건은 작자에게 지울 수 없는 여러 가지 한의 고리가 되었다.
이 때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시부인 영조의 변함없는 자애와, 이제 겨우 11살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는 아픔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대신에 왕위에 오르게 하여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실로 이 염원을 이루기 위해 혜경궁 홍씨는 아들에 대한 사사로운 정을 덮어둔 채, 할아버지인 영조의 처소로 그를 보내고 그리움을 나날을 보낸다.
그것은 남편 사도세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병의 단초를 부자간의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갈파하였기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외가인 풍산홍씨 집안을 치기 시작하여 혜경궁 홍씨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아버지를 가둔 뒤주를 외조인 홍봉한이 들이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혜경궁 홍씨는 이러한 처분들이 시누인 화평옹주와 시모인 정순왕후 측의 이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정조는 전날의 처분들을 후회하면서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혜경궁 홍씨는 환갑 되는 해에 처음 붓을 든 1편에서 지난날의 아픔을 담담하게 뒤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담아낸다.
이렇게 현명한 노모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정조의 극진하나 효도로, 만년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인하여 혜경궁 홍씨에게 다시 비운이 감돌게 된다. 그것은 손자인 순조가 보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후 혜경궁 홍씨와 시모의 두 집안 간에는 끝이 없는 투쟁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67세와 68세에 작품 2-3편을 집필하게 된다.
그 후 혜경궁 홍씨는 이러한 모든 비극의 실마리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남편 사도세자의 병의 원인과 그 증세를 자세히 밝힌다. 또한 사도세자 처단 때 사용된 뒤주는 영조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 일로 인해 수차에 걸쳐 수난을 겪은 친정 집안의 억울함을 손자가 풀어 주기를 소망하면서 71세의 노년에 10년에 걸친 회고록을 마감한다.
7. 몽유도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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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가 : 안견 제 작 연 대 : 1447년 소 장 처 : 일본 텐리대학교 재료ㆍ크기 : 비단에 옅은 채색, 38.7×106.5㎝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특징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세계는 부감법(俯瞰法)을 구사하였다.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1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그림과 그들의 시문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그들의 시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은 안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8. 도산서원 |
본문 |
도산서원(道山書院)은 건립된 시기에 따라 두 개의 군락으로 구분된다. 앞부분에 있는 도산서당, 농운정사, 하고직사, 역락 서재는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1560년에 건립한 것이고 그 뒤에 있는 건물군은 이황이 타개한 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1574년 제자들이 건립한 것이다. 이들 둘은 매우 다른 장소적 특성을 보인다. 나중에 건립된 부분은 한국의 서원이 가지는 보편적인 배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건물의 형식도 마찬가지로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황에 의해 건립된 앞 부분은 다르다. 배열방식은 물론 건물 자체의 형식에서 매우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형식 중 내부의 공간은 다른 전통 건축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특성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도산서당은 크게 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반절은 방, 다른 반절은 마루, 이런 식이다. 이들 방과 마루는 또 둘로 나누어진다. 방 안에 조그마한 방이 또 하나 구획이 되고, 마루 끝에 조그마한 마루 하나가 추가가 되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생들이 기거했던 농운정사 역시 크게는 마루와 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방과 마루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마치 일반 서원이 동재 서재로 나뉘어져 있듯이 이들도 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 덕에 도산서당 및 농운정사에는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여러 장소가 존재하게 된다. | |
9. 신숙주 |
본문 |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보한재(保間齋). 본관은 고령(高靈).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 중이던 명(明)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동국정운(東國正韻)》《국조보감》《영모록(永慕錄)》등을 찬수했으며, 《보한재집》《북정록(北征錄)》《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의 저서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
10.
동국여지도 |
본문 |
제작방식은 조선방역도식을 따랐다. 조선방역도식이란 정척, 양성지의 '동국지도'를 잇는 지도로서 산천 형세를 자세히 그리고 그 안에 전국의 주현 수를 원으로 둘러싸서 그린 형태이다. 이 지도는 정상기의 '동국대지도'가 나올 때까지 표준지도 역할을 했다
[출처]: 다음 한국문화원형사전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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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감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승완군 너무 성의가 없어서, 이런 숙제는 안한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이 당부한 출처도 모두 빠졌고, 긁어온 흔적이 역력합니다. 소감도 없고, 편집도 안된 상태입니다. 무성의한 과제에 대해 실망이 큽니다. 내일 수업 시간까지 수정하기 바랍니다. 더불어 과제를 안한 학생은 모두 집에 보내지 않고 과제를 완성한 후에 보낼 예정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