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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현장 지나다 연행
증 언 자 : 장막동(남)
생년월일 : 1953. 5. 8(당시 나이 27세)
직 업 : 제조업(현재 재단사)
조사일시 : 1988.10
개 요
5·18 당시 양복점 점원이던 그는 19일 시내 모 양복점에 거래차 들리기 위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미극장 사거리에서 공수대에게 붙잡혀 많은 구타를 당한 뒤 31사단으로 끌려갔다. 며칠 뒤 풀려나기는 했지만 골병이 들어 현재까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재봉사가 되다
우리 집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결혼해서 목포에 살고 있는 둘째누나 집에 가 있으면서 나는 양복 재봉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곳에 1년 동안 있다가 영암으로 내려와 양복 재봉 기술을 더 배웠다. 그러다가 좀더 큰 곳에 가서 기술을 배워볼까 하고 무작정 광주로 올라오게 되었다. 곧바로 고향 친구의 고모님이 운영하고 있는 태창라사라는 양복점에 들어가 바지 만드는 법을 배웠다. 나는 목포와 영암에서 이미 배웠던 기술로 인해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도 부쩍 늘었다.
그러나 워낙 영세업이었고 개인업체라서 그런지 모든게 주인 맘대로였다. 우리는 보통 하루에 바지 세 개씩을 완성시켰는데, 아침 8시 30분에 시작하여 밤 9시에 일이 끝났으니,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4천원씩 받았다. 그것도 나처럼 일을 조금 잘한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그 정도지 기술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3천5백원씩 주었다.
숙식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고종사촌 동생과 함께 해결했는데 그야말로 눈물나는 생활이었다. 태창라사에서 1년 이상 근무하다가 'GQ라사'로 옮긴 뒤 생활이 나아지자 시골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모셔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78년도에 결혼한 뒤부터 직접 일감을 가져다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여유가 생겨 독채를 얻어 이사했다.
아카데미 극장을 지나다 잡혀
18일, 시내 양복점에 들르기 위해 나갔다가 내 친구의 여동생이 양복점 근처에서 돌멩이를 맞아 머리가 터진 것을 보게 되었다. 시위대의 옆에 있다가 경찰이 되받아 던진 돌이 맞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근처에 있는 수정외과에 데려다주었다. 나도 모르게 울분이 터졌다. 마음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끓어올랐지만 처자식이 있다는 책임감으로 인해 차마 시위대열에 끼지 못했다. 그날 그 외에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공수부대들의 잔인한 행동 속에서 마치 굶주린 이리떼가 양떼를 잡아 먹으려는 듯한 살벌함을 느낄 수 있었다.
18일 집으로 들어간 뒤 19일 또다시 양복점에 들르기 위해 나갔다. 양복점으로 바로 갔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호기심 때문에 일을 당하고야 말았다. 그때가 12시나 되었을까? 양복점에 가는 길이었는데 중앙극장 사거리에서 양옆 인도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양복점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에 끼여들었다.
금남로에는 공수대가 이끄는 장갑차 한 대가 느릿느릿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장갑차를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갑차가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장갑차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밀어 버려!"
그들은 사람 수가 점점 불어남에 따라 작전을 개시할 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도청 쪽에서 공수부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나도 엉겁결에 사람의 물결에 휩싸인 채 중앙극장 옆에 있는 조그만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보니 좁은 골목은 터질 듯했다. 여기저기서 서로의 발에 채어 넘어진 사람들도 많았다. 빨리 달릴 수도 없었다. 땀과 비명과 헉헉거리는 숨소리로 골목은 그야말 로 아수라장이었다. 뒤쫓아온 공수부대에 의해 넘어진 사람 등 상당수가 잡혔다. 대부분 사람들은 충장로 부영상회 한복점 골목으로 나갔으나 나와 몇 사람은 골목을 잘못 접어 들었다. 정신없이 달려갔는데 아! 막다른 골목. 남의 집 대문이 보이지 않는가. 일단 뛰어들었다. '틀림없이 잡혔구나!' 사정없이 뛰는 가슴을 누르고 숨어 있는데 다행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방이 잠잠해지자 휴! 한숨을 내쉬며 그곳에서 나왔다.
다시 양복점으로 가기 위해 아카데미극장 골목으로 막 접어들려는 순간이었다. 광주천변에서 한일은행 쪽으로 향해 가던 공수부대 한 무리가 아카데미 극장 입구 사거리에서 나를 보고야 말았다. 순간 그들 모두는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로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잘못한 것이 없고 떳떳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1명쯤 되었을까? 그들은 무작정 달려들어 욕설을 퍼부으며 발로 짓밟고, 곤봉으로 머리를 치고, 총개머리판으로 등을 갈기 는 등 순식간에 나를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맞으면서 간신히 외쳤다.
"나,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하, 학생도 아니고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오. 양복점에 일 보러 나가는 기일……."
그러나 그 말이 그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젊은 놈이라는 게 문제였을 것이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니 시커먼 공수가 내 옷을 벗기고 있었다. 팬티만 남기고 다 벗긴 뒤에 벗은 옷은 허리에다가 묶게 하고 위로 손을 쳐들게 한 채 나를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 일도 안 했으니 제발 놓아달라고. 충장로를 지나갈 때 그동안 자주 충장로에 들르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 "그 사람 학생 아니에요" 하며 놓아달라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미제과 사거리로 해서 금남로로 끌려나왔다. 도청 쪽으로 끌려가는데 버스는 금남로에서 곧바로 운행되지 못하고 대한극장 앞으로 돌았다가 다시 유동 삼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잡혀가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끌려갔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공수대는 착검을 한 상태였고 조금만 늦게 걸어도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31사단으로 연행
도청까지 끌려간 나는 군용버스에 마치 짐짝처럼 실려졌다. 나 외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랬다. 그러한 광경을 도청 쪽에 있는 높은 건물에서 내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공수부대는 내다보지 말라고 눈을 부라렸다. 군용버스에는 가운데 통로까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짐짝처럼 늘어진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우리는 고개를 차 바닥에다 처박은 상태로 어디가 어딘지 모른 채 옮겨졌다. 서부경찰서에서 차는 멈췄다.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더니 빵과 우유를 하나씩 줬다. 그것을 먹고 나니까 소위 하나가 차 안으로 올라왔다. 가운데 통로가 사람들로 가득 찬 상태여서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어이 걸어왔다. 사람들을 엎드리게 한 채 마치 개울가에 놓인 징검다리를 밟듯이 들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걸어오면서 그는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진 사람, 귀가 찢어진 사람, 차마 말 못할 지경이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야 해."
쉴 새 없이 지껄이는 그의 욕설 속에서 언뜻 그의 고향이 순천이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덜 맞았다.
한바탕 그렇게 하고 나서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30-40분 정도 뒤에 도착한 31사단에는 이미 큰 야외막사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막사는 철조망으로 되어 있었다. 막사 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었고, 함께 잡혀갔던 우리 160명은 80명씩 둘로 나뉘어서 두 개의 막사에 분산 수용되었다. 크게 지어져 있었지만 80여 명이 들어가니까 꽉 들어차고 말았다. 그곳에 들어간 19일은 새벽 2시 30분까지 원산폭격과 한강철교라는 벌을 받았다.
기합을 받고 나서 가까스로 눈을 좀 붙이고 20일 아침에 일어나자 경찰서에서 보내온 사식을 주었다. 그것으로 그날 아침과 점심을 먹고 그 후로는 짬밥을 먹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층들이었는데,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다가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무등고시학원생들도 있었다. 같은 막사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동안 받았던 충격으로 인해 모두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군데군데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오후가 되니까 헬리콥터에서 자제를 당부하는 방송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들은 방송국이 모두 불타버렸다는 등 매우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사를 한답시고 우리 모두를 A급은 구속이니, B급은 뭣이니, C급은 훈방이니 하면서 등급 별로 분류해 놓고는 기다리라고 했다. 거의 하루내 앉아서 기다려도 조사를 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조사가 늦어지는 겁니까?"
그러자 상무대에서 일차 조사가 끝나야 조사원들이 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사원들은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나타났다. 7시 30분부터 사복을 입은 조사원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조사를 받았다. 가족상황은 어떻고, 무슨 행위를 했는가, 그리고 직업은 뭣인가, 광주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것 등을 물었다. 조사원들의 태도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여차하면 욕하고 군화발로 차고 때리는 등 우리들을 죄인 취급했다.
그날 저녁 11시가 넘어서야 조사가 모두 끝났는데 조사가 끝나고 난 뒤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집에다 편지를 썼다. 신변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발송'도장을 받고 풀려나다
21일은 머리를 빗고 옷이 없는 사람은 새로 내주는 등 차림새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도록 했다.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것이었다. 오후 4시 30분쯤에 정웅(당시 31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광주시내는 지금 난리가 났으니까 여기에서 나가면 집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등급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군용버스에 나눠 실었다. 군용버스는 남해고속도로(31사 부근 서울-순천간 광주 톨게이트에서 동광주 톨게이트 사이의 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가더 니 그 중간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우리 손바닥에다 '발송'이라는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우리가 집에 가는 도중에 다시 잡혀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곳에서 각기 집으로 향했다. 험악한 31사단에서 그렇게 빨리 나오게 된 것은 그 당시 광주 사람들의 힘이 컸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기독교 단체 등 여러 단체들이 우리의 석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오로지 어서 집에 가야 한다는 일념 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앞만 보고 걸었다. 구 호남전기 자리에 오니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고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서 지프차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숨었는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시민군이라고 했다. 그들은 총을 들고 차체를 두들기며 노래와 구호를 외치면서 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어떤 차는 불타고 있었고, 갖가지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모두 보통 차량은 아닌 듯 싶었다. 차에 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총을 들었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별 느낌도, 별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집, 집에 간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미 불에 타버린 누문동파출소를 지나가다 서부경찰서 앞에서 아내를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아내는 그동안 시체실로 어디로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고 했다. 아내는 목격한 사실을 얘기했다. 한번은 구 공업단지 부근에서 였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한 여학생이 태극기에 덮여있는 죽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거의 울부짖으며 외쳤다고 한다. '시민 여러분, 이것을 보십시오. 공수부대가 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어찌 피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싸웁시다. 싸워서 저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를 지킵시다.' 또한 시민들이 쌀을 걷어서 시민군들에게 건네주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만 나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은 상무대 헌병대에 중위로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 나의 신원을 파악해 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아내와 집에 도착해 보니 5시 30분이 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동네 사람들이 와서 똥물을 먹으라는 둥 난리였다. 나는 양쪽 팔꿈치 위 어깨에서부터 허리 뒤까지 온몸을 빈틈없이 맞아 온통 멍으로 시퍼랬다. 두렵기도 했지만 돈도 없어서 병원에도 못 가고 죽은 듯이 집에만 갇혀 있는데 그야말로 생지옥 같았다.
27일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난 뒤에도 병원에 가지 못한 채 어머니가 산에서 캐오신 약초뿌리만 달여 먹었다. 그러다가 6월 1일 상황이 조금 안정이 되니까 한약방에서 한약을 지어다 먹었다.
진통제를 먹고 일을 해도
가정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양복점 일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일을 잘 못하니까 월급은 이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또 손님이 주문한 날짜에 맞춰 일을 끝내야 하는데 몸이 아파서 일이 늦어짐에 따라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그런 거래관계에선 책임감과 신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잘 지키지 못했으니 일 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까 점점 전세금을 빼 쓰게 되었다. 1981년도에 2백50만 원 전세에서 1백50만 원짜리로 이사를 갔다. 1986년도에는 다시 55만 원짜리 방으로 이사를 했다. 일을 하는데 날씨만 궂으면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고통을 참기위해 낙센을 먹고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점점 일이 무서워졌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내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올라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 후에 당했다면 모르는데 아무 일도 안 했는데도 무작정 당한 일이라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껏 한이 맺힌 속에서 살아왔다. 아내와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특히 제5공화국에 대한 원한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때 이후 나는 신문 등을 통해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해마다 5·18이 되면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 망월동에도 가보곤 하지만 나는 지금 아무 단체에도 가입해 있지 않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5·18 관계 단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힘을 한데로 모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1985년도에 전화연락이 와서 부상자회에 나갔으나 둘로 분열되어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이 좋지 않았다. 그 후론 나가지 않았다.
5·18 관련 단체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우선 살기가 팍팍하다 보니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사실은 부상자 신고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주위에서 말만 앞세우고 보상도 해주지 않는데 뭣하러 신고를 하느냐고들 했다. 그러나 진상이 하루바삐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고를 했지 꼭 보상만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다.
9월초에 서류가 올라갔는데 10월 5일날 보건소에서 하는 신체검사를 통해 2백 명을 책정하여 10월말쯤 등급이 판정되면 그에 따라 보상이 나올 거라고 한다.
처음으로 올해 8월말경에 월산동장과 서구청 시민과장이 위로차 왔다며 포도를 3, 4천 원어치 사왔다. 그러나 지금도 분해 죽겠다. 보상을 해준다고 그것이 전부란 말인가?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은 일생일대의 큰 재산인데 몸이 이렇게 못쓰게 되어 버렸는데 먼저 5·18에 대한 진상이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현 광주특위는 힘이 약하다). 그래서 관계자들을 밝혀내고 그들에게는 보복적 차원이 아니라 법적인 처리를 하여 국민 앞에서 엄하게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5·18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동안 받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얼마만큼 치유해 준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