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시인의 사회’ 이달의 시인 허형만
따뜻한 눈과 내면적 성찰의 세계
김종회 (평론가)
허형만 시의 생성과 성장
시인 허형만은 바다와 정원(庭園)의 도시 순천에서 출생했고, 남도의 서편(西便) 목포에서 오랫동안 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는 이 지역의 시단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시인이다. 그의 문학적 성취와 문명(文名)과 비중을 대신할 만한 인물이 달리 없다는 의미다. 1973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니, 그 세월이 벌써 반세기에 가깝다. 1979년 아직 창창한 시절에 강인한 · 고정희 등과 함께 〈목요시〉 동인을 결성하는 등 주로 광주에서 활동하다가, 1982년 대학에 적을 두게 되면서 목포로 이적했다. 그는 목포 시단에 활력을 공여하고 차세대를 이끌 후진들을 양성함으로써, 이 지역 ‘문학 맹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1978년 첫 시집 『청명』(평민사)을 시작으로 2019년 열여덟 번째 시집 『바람칼』(현대시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시의 지평을 넓히고 내면을 심화해온 그는 이제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중진 시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초기 시는 시인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하듯 단정하고 올곧은 언어 운용과 긍정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면으로 출발했다. 그가 가졌던 시적 대상에 대한 ‘사랑’의 눈은 그러한 세계 인식의 외형이었다. 시인으로서 튼실하게 개화(開花)하는 시기를 지나면서 그 시의 바탕에는 민중적 상상력이 응집해 있었고,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잠복해 있었다. 이와 더불어 남녘의 향토 서정을 노래하는 소명(召命)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시를 창작하는 지속적 시간과 함께 웅숭깊은 자기 영역을 구축해 온 시인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허형만은 작품 활동의 후기로 오면서 내면의 심층을 성찰하고 고요한 각성을 소환하는 시 세계로 진입한다. 면전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 존재의 모두가 아니라는 본질적 관점, 사계(四季)의 순환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유심론(唯心論)의 관점, 그리고 우주 운행의 절대자를 응대하는 종교적 관점 등이 그의 세계를 부양하는 소중한 인자(因子)들이다. 최근의 시집 『바람칼』은 그의 시가 함축된 시어를 통한 사색, 자아 밖의 대상을 바라보는 통찰력, 그리고 순정한 문학적 감수성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통어하는 시적 숙련의 지경(地境)에 이르렀음을 증언한다.
신 · 근작 시들의 ‘멋’ 또는 ‘맛’
그는 이제 시와 삶의 내밀한 상관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의 시가 공여하는 깨달음이 계속해서 우리의 기쁨이 되는 내일을 약속하고 있다. 이번 2020년 5월에 시 전문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가 마련한 〈이달의 시인ㅡ허형만〉 코너에 시인은 근작시 2편과 신작시 3편을 보냈다. 근작시는 「바람칼」과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이고 신작시는 「보체리 연꽃」, 「이제야 알았어요」, 그리고 「붉은 핀 하나」다. 여기서 이 5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앞서 검토한 개략적인 시 세계 및 현재적 시의 위상과 더불어 그의 시가 가진 ‘멋’과 ‘맛’을 다시금 음미해 보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떤 행로를 열어갈 것인가를 예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새가 지상을 박차 오르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개는
칼이 된다.
예리한 칼날이 된다.
잠시라도 한눈팔면
허공에 갇히거나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시의 날개가 바로
바람칼이다.
ㅡ 「바람칼」 전문
이 근작시에 표제어로 쓰인 ‘바람칼’은 새의 날개를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이 어휘를 시의 표면에 올려놓고, 시인은 그 어의(語義)를 친절하게 진술한다. 새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칼날이 되는 것은 허공에 갇히거나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처럼 명료하고 효율적인 시적 의미망을 전달하는 것이 이 시의 목표가 아니다. 시인의 언어가 이미 본질과 현상을 능숙하게 왕래하는 발화의 문법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시의 호흡을 가로지르며 시인은 새와 시를 동렬의 상징어로 함축한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 치는 시의 날개’가 곧 공중으로 비상하는 새의 날개와 같은 바람칼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언표는 숱한 장면에서 언어의 한계에 절망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 온 시인의 절실한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숲길 누리장나무 아래
검정 상복을 입은 개미들이
참매미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이미 여름은 끝났는데
한순간의 작렬했던 외침은
지금쯤 어느 골짜기를 흘러가고 있을까.
오후 여섯 시, 햇살이 서서히 자리를 뜨는 시간
부전나비 한 마리
누구 상인가 하고 잠시 기웃거리다 떠나가고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지리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숲을 끌고 가는 개미들의 행렬
숲은 가랑잎처럼 가볍다.
ㅡ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전문
두 번째 근작시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의 숲길 풍경을 세미한 그림처럼 보여준다. 이 시에 주요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검정 양복’의 개미들, 장례에 이른 참매미, 또 부전나비 한 마리는 숲속의 생물들이며 삶의 여러 국면을 대변하는 객관적 상관물이자 삶의 다기한 굽이를 상징하는 생명체의 현현이다.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질 터인데, 은밀하게 숲의 질서를 이끌고 가는 개미들의 행렬로 인하여, ‘숲은 가랑잎처럼 가볍다.’ 이렇게 보면 앞의 시 「바람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인의 시가 늘 단선적인 언어의 조합과 의미의 전달에 머물지 않고 중층적이며 암시적인 의미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때로는 역설적이며 이율배반적인 비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의 표정은 산뜻하고 상쾌하다.
정진규 선생님이 계신 보체리에 갈 때마다 이태리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를 떠올리곤 했지 나 는 이 가수의 노래를 듣고 시 「영혼의 눈」을 썼고 문학사상사에서 『영혼의 눈』 시집도 냈지 지금도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노라면 정진규 선생님이 손수 파고 키우셨던 안성시 석가헌 앞 보체리 연 못의 그 밝은 연꽃들을 떠올리지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피어오르는 연꽃에서 문화연필 깎을 때의 향을 들이마셨던 기억을 떠올리지 지금 주인은 멀리 떠나고 안 계시지만 보체리의 연못은 주인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지.
ㅡ 「보체리 연꽃」 전문
신작시 가운데 처음인 「보체리 연꽃」은 짧은 산문시로 되어 있다. 이 시가 서두에 떠올리고 있는 고(故) 정진규 시인이 즐겨 산문시를 썼다는 사실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선생님’이 살던 안성시 석가헌 앞 ‘보체리 연못’의 밝은 연꽃들과 이태리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를 떠올리는 것은 시인에게 단순한 추억의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소통을 이제껏 지속하고 있는 자신의 자리,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점검의 절차다. 시인은 ‘선생님’과 연못가에 나란히 서서 ‘피어오르는 연꽃에서 문화연필 깎을 때의 향을 들이마셨던 기억’을 되살린다. 아, 그러고 보니 정 시인의 산문시 중에 이름 있는 것으로 「연필로 쓰기」가 있었다. 연못의 주인은 떠나고 없는데 연못이 그 주인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정황을 판독하는 눈은, 인생사의 깊이를 순후하게 체득한 시인의 것이다.
우린 상상도 못했지요.
바이러스가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앗아가리라는 것을.
서로 손도 잡을 수 없게
서로 껴안을 수도 없게
서로 키스도 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어요.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이 얼마나 절실한지.
이제야 비로소 알았어요.
당신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를
비누가 얼마나 제 몸을 희생하는가를
지상에 깔린 햇살이 얼마나 황홀한가를.
그동안 잘 있는지 별 탈 없는지
안부도 제대로 못 전하다가
이제야 안부를 물어보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해
두 손 모아 올리는 간절한 기도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지
비로소 알았어요.
ㅡ 「이제야 알았어요」 전문
두 번째 신작시 「이제야 알았어요」는, 어쩌면 김소월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처럼 쉽고 부드럽고 반복적이며 감동적인 운율에 몸을 실었다. 그 시의 표면을 흘러가는 서사는, 지금 온 인류사회가 함께 당면하고 있는 ‘코로나19’의 횡액을 쓸어 담고 있다. 그런데 시적 언어의 행보는 전혀 어둡거나 우울하지 않고, 그 와중에서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감각하게 한다. 이 시에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사랑’의 호명, ‘당신’의 고마움과 비누의 희생과 햇살의 황홀에 대한 체득, 그리고 간절한 기도의 눈물겨움이 줄지어 포진해 있다. 이는 이 시인의 시 세계에서 살펴보았던 그 긍정적 세계관이, 난관 앞에서 더 빛나는 보화임을 반사한다. 시가 우리 삶에 힘 있는 조력자로 기능하는 현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붉은 핀 하나
길바닥에 오도마니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어느 소녀의 머릿결에서 빠져나왔을까
날마다 산책하던 길
어제는 못 보았는데 오늘 새로운 손님을 만나다니
더 추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 하므로
붉은 핀 하나
낯설지만 오래전 만났던 것처럼
손바닥에 꼬옥 쥐고 감싸주어 보는 것인데
어린애처럼 야생 나비의 날갯짓 소리에 귀 기울였을
머리핀을 잃어버린 소녀를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인데
그 소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가던 길 멈추고 찾고 있을까
붉은 핀 하나
ㅡ 「붉은 핀 하나」 전문
마지막 신작시 「붉은 핀 하나」는 작고 소박한 것에 대한 시인의 온정적인 눈길을 담고 있다.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힘은 크고 위대한 것에 있지 않다. 그래서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들에 핀 꽃에서 우주를 본다’고 언명했던 터이다. 길바닥에 오도마니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붉은 핀 하나가 있다. 그 핀이 빠져나왔을 것으로 유추해 보는 어느 소녀의 머릿결을 시인은 알지 못한다. 발길이 바빠 ‘손바닥에 꼬옥 쥐고 감싸주어 보기’도 하고 ‘머리핀을 잃어버린 소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당연히 시적 담화에 대한 현실적인 결말은 없다. 그러나 이 하나의 영상 컷과도 같은 형용은, 우리가 바라보던 이 시인이 여전히 낮은 자리에 생각을 둘 수 있는 박애주의자요 인본주의자임을 상기하게 한다.
다시 내일의 시인을 위해
이 작은 난에서 오랜 세월 시의 집을 지어온 허형만 시인의 면모를 다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의 정론적 기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일구월심 시의 길을 바라보며 요동 없는 발걸음으로 일관해온 그의 문학세계에 주목과 존중의 답례를 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때로는 풍광이 수려한 오솔길을, 때로는 물소리 찰랑거리는 시냇가를, 또 때로는 백화난만한 화원을 거쳐 온 그의 시는 어언 47년의 시력(詩歷)에 이르렀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 어려운 이들의 삶을 돌아보는 민중적 세계관, 남녘의 향리를 기리는 여린 서정, 그리고 내면의 성찰과 각성을 견인하는 글쓰기 등 그의 강역(疆域)은 넓고 또 깊다. 바라기로는 이후에 더욱 노익장(老益壯)과 역부강(力富强)으로 더 찬연한 시 세계의 전개를 보여주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김종회 ■ 평론가 1988년 《문학사상》 평론 등단. 저서 『문학과 예술혼』 『문학의 거울과 저울』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등, 산문집 『글에서 삶을 배우다』 『삶과 문학의 경계를 걷다』 등이 있음. 〈김환태평론문학상〉〈김달진문학상〉〈편운문학상〉〈유심작품상〉〈시와시학상〉 등 수상. 경희대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비평문학회, 국제한인문학회, 박경리토지학회 회장 역임. |
[출처] [이달의 시인] 허형만 - 보체리 연꽃 외 / 시인론 김종회[202005vol.56]|작성자 공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