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펴보건대,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소년시절에 중국을 유람하면서 이세민의 사람됨을 엿보며 영웅들을 결탁하였고 장애와 고난을 두루 겪으며 외국의 문물과 풍토를 관찰한 것은 피터대제와 같다. 각 귀족들이 태자가 어린 것을 보고 부왕父王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늘, 돌연히 번개 같은 솜씨로 여러 귀족들의 권한을 깎아 버리며 그 병권兵權을 독차지하고 하늘을 울리고 땅을 녹이는 군사의 위세로 동서를 정벌하매 그가 가는 곳에 당할 적이 없는 것은 나폴레옹과 같다. 왕의 적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으로 한때를 구차히 지내고자 하는 자였다. 비록 연개소문이 간諫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나 끝내 신의가 없이 몇몇 간신들과 같이 모의하고 비천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써 적국과 내통한 후에 그를 오히려 해치고자 하니, 이에 국가가 중요하고 임금은 가벼운 것이라 곧 한때 위풍 있고 당당히 분한 기세를 일으켜 흰 장검을 뽑아 왕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온 나라에 호령함은 크롬웰과 같다. 아아, 연개소문은 곧 우리 광개토왕을 본받은 손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萬歲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고 욕하는 말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나는 이것으로써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고 어두움을 꾸짖는 바이다. 당시 이세민李世民이 우리 영토를 침범할 때 연개소문이 그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가 선전宣戰의 글을 쓰는데 연개소문을 어지러이 욕하는 것은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지럽게 욕하기 위해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에 고려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사료가 이지러져 없어짐을 인하여 거의 당사唐史에서 그 자료를 뽑았던 까닭에 연개소문전은 일체 이세민의 선전서宣戰書 중의 말을 추려 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흉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예 하고,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역적이라 하면 손바닥을 비비며 그렇다고 했다. 곧 저 이세민의 원수가 되는 연개소문의 역사를 쓸 때 오직 저 이세민의 뱉어 내놓은 것을 모아놓았으니 연개소문이 흉악한 사람이 되고 역적이 됨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아아, 저 눈먼 역사가들이 그 홍몽鴻蒙한 필법으로 우리의 절세 영웅을 묻어 없애버려 우리 수천년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저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번개와 같은 솜씨에 한번 크게 혼이 난 이후로 수천여년 동안 울렁거림을 진정하지 못하여 말이나 글로써 연개소문에 관한 역사를 서로 전하여 왔는데, 그 모습은 천인天人과 같이 우러러보며 그 군사 전략은 귀신과 같이 놀랍다고 했다. 이 까닭에 석자나 되는 수염을 가진 풍채風彩는 당나라 사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 그려 냈으며, 비상한 영웅으로서의 공덕은 왕안석王安石의 경연강론經筵講論에서 찬미하였으며, 깃발과 보루가 40리 뻗어진 기세는 유공권柳公權의 『잡저雜著』에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이 장안을 순식간에 쳐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갔네. 금년에 만약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명년 8월에는 병사를 일으킬 것이네" 라고 한 호쾌한 시가 여련거사如蓮居士의 『패담稗談』에 실려 있으니 이러한 말들이 우리 연개소문의 실제 자취인지에 관해서는 단정을 내리지 못하겠으나, 이미 그 당시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아주 두려워했다는 한 증거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저 이세민의 눈앞에서 아첨하는 당나라 역사가들이 비록 한 손으로 만 사람의 눈을 가리어 나라의 부끄러움을 숨기려 하였으니 마침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 살펴보건대, 요사이 역사를 읽는 사람들 중에 가끔 당 태종이 양만춘楊萬春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갔다고 하고 연개소문과 교전한 사실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단지 『당사唐史』의 거짓된 평가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10만 대군을 몰아서 야심에 넘쳐 우리 나라를 넘보다가 어찌 안시성安市城 하나가 잘 지키는 것을 보고 돌연히 물러가겠는가. 이때 반드시 하나의 큰 패배가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이 과연 크게 패배했다면 양만춘이 비록 잘 지키기는 하였으나 탄환이 비오듯 쏟아지는 외로운 성에서 수백 명의 쇠약한 군사로서 그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반드시 연개소문과의 한바탕 큰 싸움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조선 정조正祖 때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북경에 가다가 안시성을 지나갔다. 거기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계관산鷄冠山 위에 계명사鷄鳴寺가 있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서로 전하기를, 이 곳은 당 태종이 고구려병에게 크게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이 산 위의 풀과 바위 사이에 몰래 숨어 묵었던 유허遺墟라 하니, 이것 또한 연개소문의 잃어버린 전사전사를 메워주는 것이다.
이 뒤에 당나라 사람들이 그 묵은 수치를 감당하지 못하여 다시 쳐들어오려 하나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는 중에, 우리 남방의 신라가 고구려와 대대의 원수임을 정탐해 알아내고 즉시 사신을 자주 보내어 두텁게 서로 맺었으니, 슬프다, 저 신라가 만년의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도적을 도와 형제를 쳤으니 이것 또한 우리 민족 역사상 하나의 큰 부끄러움을 남겼도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피폐하고 저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활발하고 강한 기운을 갑자기 발현하니 이것이 제4기다.(독사신론은 우리 민족과 지나(중국)민족의 접촉을 5기로 나누어 증거했다. 이 부분은 4~5기임.)
얼마 후 연개소문의 못난 아들 남생男生 형제가 불화不和하여 내정이 결렬하고, 또한 신라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그 기회를 틈타 침략하여 오매 남쪽 근심이 바야흐로 커졌는데, 이 때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병력이 고구려에 이르러 동명왕조가 마침내 기울어 엎어지게 되고 북방 일대가 거의 중국민족에 빼앗긴 바 되었더니, 다행히 하늘이 내려 준 위인 대중상大仲象 부자父子가 일어나 변변치 못한 종족으로 백두산 동쪽을 점거하고 말갈의 남은 무리를 채찍질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모두 수복하며, 다시 북진하여 흑룡강 부근을 병합하여, 지나의 남은 도적들을 격퇴하고 저 등주자사登州刺史 이해고李偕固를 쳐서 목을 베니, 아아, 단군. 부루의 남긴 혼령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을지무덕과 연개소문의 옛 업적이 다시 이어짐은 어찌 대씨大氏 부자父子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제5기다.
이 5 기를 경과한 후에는 저 지나족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하나의 화살도 쏜 것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민족과 지나 민족의 관계가 이 대에 이르러 일단락一段落을 고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