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 큰골 → 장계성당 판공성사길 도보 순례
○ 순례 일자 : 2014. 04. 12. 토요일
○ 순례 인원 : 28 명 (이영춘 요한 지도신부, 이동수 안드레아 안내)
○ 순례 일정 : 총 14km, 소요시간 4시간 20분 (이동 3시간 30분, 휴식 50분)
1. 10:15 : 땡양지 출발 - 장수군 계북면 월현리 산촌마을 - 도로로 직진
09시 40분에 도착하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최학부 다두(장계성당 감사) 형제의 설명을 들었음. 현재 이 마을은 땡양지 산촌 생태마을을 만들어 숙박시설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옛 월현공소는 마을 입구 삼거리 옆에 있는 정자 부근에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공소 건물은 없음.
(땡양지 마을은 마을 입지조건을 보면, 뒤와 좌우는 산으로 둘려 싸여 있고, 앞쪽인 남쪽은 멀리 산이 있어 뙤약볕이 잘 드는 곳으로 뙤약양지라 하다가 변하여 뙤양양지로 부르다가 땡양지로 변하여 부르게 된 것으로 생각됨.)
2. 10:20: 마을
3. 10:30 : 길 우측 군내버스 승강장 옆에 있는 큰골교 다리를 건너 큰골로 간다
4. 10:45 : 큰골 마을 도착
이 곳에서 뒷산으로 올라가면 상여덤에 블랑(Blanc. 白圭三) 당시 부주교와 두세(Doucet. 丁 加彌) 신부의 피난굴이 있다. 일정 관계로 올라가지는 않고 되돌아 내려왔다. 이 큰골 마을에는 블랑 신부님이 심은 배나무가 있었는데 몇 년 전 볼라벤 태풍에 쓰러져 베었다고 한다. (입구 큰골교까지 간다)
(도보 순례 안내문 내용)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 전라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선교사는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였다. 그가 1877년 11월 경 고산 어름골에 도착하여 거처를 정함으로써 전라도는 교회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전교담당 신부를 맞은 것이다.
1879년 5월 15일 드게트(Deguette. 崔鎭勝)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백신부와 정신부는 먼저 정자골(장현)로 왔다가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큰골 뒷산 상여덤에 있는 굴속으로 숨었다. 그 후 교우들은 이 굴을 “백주교 피난굴” 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때 신부들을 보호해준 교우는 큰골 회장 이성휘(李成輝)였고, 먹을 것을 공급해준 교우는 산촌마을 부엉덤이 김회장(월현공소 회장 김학수 안셀모의 조부)이었다.
이곳에서 백신부는 정신부와 얼마를 지내다가 용담 양명리 처소를 오고, 정신부는 이곳에 남았다. 정신부는 이곳에서 백신부의 명을 받고 신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학생은 5~6명이었는데, 라틴어는 정신부가 맡고 한문과 한글은 구(具)씨와 방(房)씨라는 교우가 가르쳤다. 정신부는 이곳에서 두해 여름을 보내고 1881년 이곳을 떠났다.
상여덤은 해발 600m쯤 되고 경사가 50도가 넘는데 이곳에는 큰 굴과 작은 굴이 있다. 큰 굴은 석회암으로 되어잇고 굴의 길이는 10여m 이고 높이는 3m쯤 되었다. 그 굴의 왼쪽으로 좁은 복도로 가면 4평쯤 되는 방이 있다. 거기에는 샘물이 있어 취사를 할 수 있고 백주교가 앉았던 장방향의 돌이 있었다.
굴 입구에는 밖에서 보이지 않게 돌로 담을 쌓았다. 굴 입구의 오른쪽으로는 사람 한명이 겨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밖으로 나가면 돌무덤 사이에 작은 굴이 있어 거기에도 20여명은 은신할 수 있었다.
만약 그곳도 위험하면 산모퉁이를 돌아 오봉리 옥자동골 우거진 숲속으로 피신했는데 지금도 숲이 우거져 앞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백주교의 피난굴은 6․25사변 때 지방 유지들이 피난와 숨으면서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굴의 길이가 4m, 높이는 1.5m 정도.
정자골에서 3km 쯤 떨어진 큰골에는 백주교 피난 당시 신자가 두 집, 부엉덤이에 두 집이 살았다.
큰골에는 심 씨와 이 씨 가족이 있었다. 이 씨들은 1956년경 이곳을 떠날 때까지 대대로 큰골회장을 지냈다.
진사(進士) 이경운(李卿雲 1784~1876)과 아들 이성휘(李成輝 1819~1830)는 처음 정지터골에서 피신하다가 큰골로 와서 ○○(1859~1935)을 낳았다. 이 씨 가족은 공소집 바로 곁에 살면서 백주교와 정신부를 극진히 보호했다. 또 현재 월현공소 회장 김학수(안셀모 43세)의 증조부는 부엉덤이에 살면서 신부들의 주부식 공급과 정보를 연락해 주었다.
백주교가 살던 집은 40년전 헐려 다시 짓고 외인이 살고 있는데 뒤 안에는 백주교가 심은 배나무가 배나무가 고목이 되어 있는데 “백주교 배나무”라고 불린다.
이제 이경운의 5대손 이상범(李相範 필로리아노 56세 전주성심당 한약방)씨가 유일한 증언자다.
5. 11:15 : 큰골교 도착
6. 11:25 : 월현(달앗골)
7. 11:35 : 월현3교 지나 월현로로 직진
8. 11:50 : 장현(정자골)
9. 12:00 : 매계마을 매향정(梅香亭) 중식
10. 12:45 : 중식 후 출발
11. 13:00 : 삵다리 마을 (옆 정지터골)
12. 13:20 : 집재 정상 (510m) 10분 휴식 후 출발 고속도로 위로 통과
13. 13:50 : 호덕마을
14. 14:20 : 서변마을 입구
15. 14:30 : 무진장 농기계 4거리
16. 14:35 : 장계 성당
1954년 5월 19일 남원(현 쌍교동)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로 김필곤 바르나바 신부가 부임하였다. 무주·남원·임실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수분리에 강당과 사제관을 지어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92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2대 주임 이철연 신부는 성당 건축에 사용할 시멘트 벽돌을 만들고, 다음해 3월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58년 10월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봉헌식과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첫댓글 주신 순례자료로 대리 만족할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