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5일 내 나이는 당시 21세의 청춘이 피어날려고 하는 20대 초반이었다.
그날 허리가 뻐근하고 묵직하여 허리를 옆으로 비트는 스트레칭을 하였다 그런데, 왼쪽 골반뼈 관절부위에서 갑자기 뚝하고 나무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만, 통증이 밀려 오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10여초 정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서 어렵사리 몸을 간신히 움직여 왼쪽 골반뼈 관절을 맞추었다.
왼쪽 골반뼈 관절이 갑자기 허리비틀기 스트레칭을 하다가 관절이 비틀리면서 어긋나 버렸던 것이었다. 1995년 8월 5일 허리비틀기 스트레칭이 내인생을 추락시키는 일생일대의 사태가 발생한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서 단순히 조금 관절이 놀랬을 뿐이라고 안도하면서.통증이 있었지만, 괜찮아 질거라 믿으며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있었다. 점심때 왼쪽 골반뼈관절을
다치고 나서 저녘때가 되자 몸을 거동할 수 조차 없이 극심한 통증이 밀려 왔다.
화장실을 갈려고 일어날려고 하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방에서 화장실까지는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벽을 잡고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움직여 나가는데, 왼쪽 골반뼈 관절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오는 것이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 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때 씨름을 하다가 왼쪽 발목이 몸에 깔리면서 발목뼈가 으스러져 접골원에서 발목뼈를 맞추는데, 정말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체험했던 터라 이번 왼쪽 골반뼈 관절을 다친 것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10미터 밖에 되지 않는 화장실에 도착하는데, 약 1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볼일을 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10미터가 정말 공포의 10미터였다. 다시 1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왼쪽 골반뼈 관절 통증으로 고통받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 가까운 신경외과에 들렀다.
물론 형의 도움을 받아서 병원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허리를 단순하게 삐끗한 것 같다고 물리치료를 받고 몇일 약 처방을 하여 복용하면 좋아질거라고 하였다.
정말 그때는 의사의 말이 다 맞는 줄 알았다. 물론 내가 의학적 지식이 전무하다보니 의사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직감은 간혹 적중할 때가 있다. 전날 밤에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앞으로 순탄치 않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초조함 이런 감정이 복잡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몇일 동안 병원을 오가며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하여도 여전히 왼쪽 골반뼈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정말 문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바위덩이에 몸이 짖눌리는 것처럼 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제 개강을 해야 하는데, 병원을 다녀도 차도가 없으니 정말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 들어 왔다.
한달정도 병원을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물리치료를 하고 약물치료를 하여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왼쪽 골반뼈 관절에 통증이 심해져 갔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싶어 대학병원 신경외과에 갔다.
신경외과교수는 이리저리 검사를 하며 방사선 촬영을 실시하였다.
검사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뛰고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왼쪽 골반뼈 관절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픈데, 아무 이상이 없다니 머리가 멍하니 검사결과만을 신경외과교수에게 듣고 있었다.
보름치 약처방을 받고 동네 병원에서 지속적으로 물리치료를 실시하였다.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뛰고 돌아버린다는 표현이 이럴때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실감이 되고 있었다. 아니 체험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부모님의 걱정은 날로 더해 갔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아들은 죽을 듯이 아프다고 하니 부모님 입장에서도
근심이 더할 수 밖에 다른 병원으로 옮겨 2달 정도 다시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하였다. 여전히 왼쪽 골반뼈 관절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제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치료를 하다가는 정말로 병신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특별한 이상이란 무엇일까.
환자가 죽을 듯이 아픈데, 아무 이상이 없고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의사들이 정말 답답하고 나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병원 치료를 하는 동안 군입대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 들었다.
정말 미칠 노릇 이었다. 이렇게 아픈데, 무슨 군입대...
군입대 연기를 신청하려고 다시 대학병원 정형외과교수에게 찾아 갔다.
이런 저런 검사를 하더니만 허리MRI까지 촬영했다. 검사결과 아무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젠장할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10일 후면 군입대를 해야 하는데, 아무이상이 없어 군입대 연기 신청도 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하지, 왼쪽 다리를 절뚝절뚝 거리며 온갖 생각을 쥐어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정형외과교수의 말에 그대로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더 가중되었다. 아들은 죽을 듯이 아픈데, 군입대를 해야 한다니 애간장이 녹는다. 물론 당사자인 나는 정말 죽을 만큼 극심한 괴로움으로 10일을 보내야만 했다.
왼쪽 다리를 절뚝절뚝 거리며 그렇게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사단 신병교육대 정문을 통과하자 마자 얼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교들은 연신 신병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얼차례를 시키고
정신없이 1시간이상을 훈련을 시키더니, 내무실로 집합시켜
사복을 탈의하고 훈련복으로 착용하게 하고 연병장으로 집합하게 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7월 초순이었다.
왼쪽 다리를 절뚝절뚝 거리며 통증을 참아가며 비 내리는 연병장 흙바닥을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3시간 정도를 정말 개가 되어
(너무 속된 표현이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여겨 씁니다.)
신병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때 느낀 것이 사회와 군대는 정말 다르구나.
다른 나라 감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된 훈련을 받고 나서 샤워장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정말 충격을 받았다.
샤워를 2분안에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2분만에 어떻게 샤워를 마친다는 말이야..
그런데, 군대에서는 정말 2분안에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완전 이곳은 포로수용소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욕 바가지로 두번 물을 몸에 부으면 샤워는 끝이다.
2분도 아니다. 30초만에 두번의 목욕 바가지로 몸에 물을 끼언고서 샤워는 끝이었다. 정말 이런게 군대 샤워구나.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는데, 30초를 주었다.
미적거리는 신병들은 바닥에 머리를 박는 얼차례를 받았다.
조교들이 정말 마귀같이 보였다.
샤워 할때 비누칠은 상상도 하지 못할 노릇이었다.
비누가 샤워장에 있었지만, 단 한명의 신병도 비누에 손을 대지
못했다.
우리가 손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목욕 바가지로 두번 몸에 물을 끼언는 동작 뿐이었다.
저녘 밥을 먹고 여기에서 또하나의 충격을 받았다. 생선찜이 나왔는데, 삼치였다. 뼈가 굵고 억세서 도저히 씹어 삼킬 수 없음에도 식판에 잔반이 남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며 굵고 억센 삼치뼈까지도 씹어 먹어야 했다. 정말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군대가 이런 곳이구나.
굵고 억센 삼치뼈를 씹지 못하고 뼈가시를 남긴 신병들에게는
머리를 식당바닥에 박는 얼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군대는 군대구나. 안되는 것이 없이 해야 되는 구나.
신병교육대의 첫날밤을 우리는 편히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잠깐잠깐 비몽사몽간에 잠을 이루었다 그러나 6시에 기상나팔 소리가 귀를 찢어지게 울리고 조교들의 고함소리가 신병들을 괴롭혔다. 5시에 잠이 들었는데, 6시에 기상이라고. 신병들의 고된 하루가 시작되는 거구나.
내무실 침상정리를 2분만에 완료하고 훈련복으로 급히 갈아입고
연병장으로 집합. 선작순으로 집합하는데, 동작이 굼뜬 신병들을 기다리는 것은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박는 얼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X같은 군대는 바닥에 머리만 박다가 군생활 마감할 것 같았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왼쪽 골반뼈 관절에는 여전히 통증이 심하게 밀려오는데, 내 고통을 알아줄만한 사람이 없다니, 정말 죽는 것이 편할 때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입대할 때 약국에서 바르는 진통연고를 하나 사서 매일마다
왼쪽 골반뼈 관절 부위에 쥐똥만큼 짜서 바르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병원의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왼쪽 골반뼈 관절에 극심한 통증이 오는데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의사들이 아무리 이상이 없다고 해도 나는 환자가 맞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쥐똥만큼 쬐금씩 짜바르는 진통연고가 나에게는 둘도 없는 의사이자 의지할 버팀목이 되었다. 나에게는 목숨같이 소중한 3000원도 되지 않던 진통연고를 다른 신병들이 훔쳐갈까봐 잘 보관해야 하는 임무도 나에게는 주어져 있었다. 나의 의사이자 나의 유일한 위안이며 버팀목인 진통연고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고된 훈련을 받아 가며 신병교육훈련에 적응을 해야만 했다. 한여름에 무더운 날씨속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각자에게 배급된 소금통에서 소금을 조금씩 수통에 있는 물에 넣어 소금물을 먹어 가며 고된 훈련을 하루하루 견뎌야만 했다.
5일동안 큰 것을 보지 못했다. 무더운 날씨속에서 고된 훈련을
하느라 몸에 수분이 부족하여 화장실에서 5일동안 도무지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5일만에 화장실에서 큰 것을 볼때 정말 하늘이 노랗고 찢어지는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나뿐이 아니었다.
다른 신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큰 것을 볼때 변기에는 붉은 피X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정말 무더운 날씨에 고된 훈련을 하면 큰 것을 볼때도 장에 수분이 부족하여 매우 큰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군에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 신병교육대의 훈련은 1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매일 마다 쥐똥만큼 쬐금씩 짜 바르는 진통연고를 나의 의사로 의지하며..
신병교육대에서 TV에서만 보았던 목공체조도 하였다. 굵은 통나무를 여러 신병들이 서로 어깨에 매고 다른쪽 어깨로 이리저리 넘기는 5공시절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하였던 목공체조를 1996년에 실시한다는 것이 놀랄 노자였다.
6주간의 신병교육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받았다.
자대로 배치를 받고 나서 같은 달에 입대를 한 동기들을 만났다.
물론 다른 지역 신병교육대나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로 배치 받은 동기들이었다.
대한민국 표준 훈련소인 논산훈련소 동기들에게 내가 겪었던 사단신병교육대의 생활과 훈련얘기를 들려 주었는데, 도무지 믿지를않는 것이었다.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 받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너무 편하게 훈련을 받고 자대로 배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5공시절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한 목공체조얘기도 믿지를 못하겠다고 하였다.
2년 2개월동안 아픈 몸을 이끌고 군복무를 하였지만, 그때는 정말 군인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생각된다. 지금 다시 군에 간다면 도저히 아픈 몸을 이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군전역을 하고 나서 왼쪽 골반뼈 관절의 통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또 병원들을 헤메기 시작했다. 이병원 저병원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병원의 의사들은 왼쪽 골반뼈 관절이 아프다고 표현을 해도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였다. 허리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물리치료하고 약물치료하면 좋을 질거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였다.
정말..괴로움이 이런 상황을 괴롭다고 하는 것이구나....
자격증 공부하랴 또 병원들을 헤메며 치료를 받으라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갔다. 의사들은 왼쪽 골반뼈 관절이 아픈 것을 허리의 문제로 보고 이런 저런 검사를 하였지만, 아픈 원인을 찾지는 못하였다.
2003년 5월 서울 연세대학교 신촌세브란스병원 류마티스내과에
진료를 받아 보기로 했다. 8년동안 외과쪽(정형외과, 신경외과,재활의학과, 통증의학과)병원들을 헤메였기 때문에 호기심에 류마티스내과란 곳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 진단이 나오지 않으면 이 세상과 정말로 안녕하리란
비장한 각오로 서울로 향하였다.
류마티스내과에서 이런 저런 검사를 실시하고 검사결과를 보기로 하고 예약을 하였다. 다음 예약날짜 까지는 보름정도 소요되었다.
하루하루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드디어 검사결과를 보러가는 날이 되었다. 오늘 진단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 자신과의 약속을 했던 이 세상과 영원히 안녕을 고해야만 한다.
비극적인 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마음이 무겁고 착찹하였다.
류마티스내과교수에게 검사결과를 받았다. 강직성척추염이란 생전 처음 듣는 생소한 병명...강직성척추염...천장관절MRI상에 천장관절염 소견이 보이고 골파괴가 보인다는 소견이었다. 그리고 강직성척추염 대표적인 유전인자인 HLA-B27항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무슨 병명인지도 모른채 이세상과 안녕을 고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정말로 마음이 가볍고 날아갈 것 같았다. 왼쪽 골반뼈 관절이 의학용어로 천장관절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8년동안 많은 병원의 의사들이 몰랐던 천장관절...sacroiliac Joint ( si joint) 새크로우 아이라? 조인트 ,에스 아이 조인트 이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강직성척추염을 검색하였다. 모니터의 내용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척추뼈가 새우등처럼 굽어지고 목, 등, 허리등이 대나무처럼 통으로 굳어지고 굽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리도 고통스럽고 괴로움의 연속일까.
정말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모님에게 진단이 나왔다고 전화통화로 말씀을 드렸다. 이제 아픈 병명을 정확하게 찾았다....8년동안 많은 병원의 의사들이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였는데, 류마티스내과란 곳에서 강직성척추염이란 확진을 받은 것이다.
천장관절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부모님께 병명을 찾았다고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 비참하고 비통한 슬픈 마음으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아픈지 8년만에 어렵게 병명을 찾았는데, 불치병인 강직성척추염이란다.
척추가 새우등처럼 굽어지고 대나무처럼 척추뼈들이 통으로 붙어버린단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를 악물고 견뎌가며 군생활을 하며 고된 훈련을 받아가며 죽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티고 지금까지 왔는데, 차라리 그때 이 세상과 안녕을 했더라면 이런 비참하고 비통한 마음을 다시는 맛보지 않았을 텐데, 억울하고 억울했다.
강직성척추염에 대해서 정보들을 수집하고 의학서적들을 뒤져가며 미친듯이 공부를 하였다. 강직성척추염환자들도 만나 보고 모임에도 참석해 보고 강직성척추염 군면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 사무실을 드나들게 되었다.
중증의 강직성척추염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한달에 120만원짜리 주사제를 보험적용시키기 위해 이리 저리 동분서주하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뜨거운 불길속을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나도 이 세상에서 뭔가를 하다가 안녕을 고하고 싶었다.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것이어서 이제는 더이상 나에게 무서움이란 없었다. 눈에서 살기가 번뜩거렸다. 광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강직성척추염 군면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 사무실에서 보좌관을 면담하면서 이세상 마지막 순간이다란 비장한 각오로 강직성척추염에 대해서 상황들을 얘기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군대에서 강직성척추염이 악화되고 고통받고 있다는 상황들을 알렸다.
1년 6개월정도를 지방에서 서울 국회 사무실을 오가며 강직성척추염에 대해서 온 마음과 시간들을 다 바쳤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은 성공율이 높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강직성척추염이 병역법이 개정되어 군면제 질환에 포함되고 한달에 120만원하는 주사제를 보험적용하여 25만원만 부담하면 되는 보험적용문제를
해결했다. 유전학을 공부하며 강직성척추염의 대표적인 유전인자인 HLA-B27항원을 다음세대인 아기에게 유전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국내 처음으로 알아냈다.
그리고 유전학클리닉 산부인과전문의로부터 검증을 받고 유전예방 기술을 접목시킬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현행 생명윤리법상 64종이외의 유전성 질환은 유전예방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끔 금지되어 있다. 강직성척추염도 유전예방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국회 사무실의 도움을 받아 이 잘못된 생명윤리법을 개정하려고 하였지만, 황우석박사와 연관된 법이라서 스케일이 너무 컸던 것이다. 몇몇 국회의원이 나서서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생명윤리학자들과 종교계의 반대로 인해서 도저히 생명윤리법에 손을 대지 못하게끔 되어 버렸던 것이다. 개정을 하려다가 좌절되자 한동안 매우 힘들었다.
어렵게 강직성척추염 유전인자를 다음세대에 유전되지 않게끔하는 기술을 알아냈는데, 이 기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억울하였던 것이다. 내 대에서 강직성척추염이란 병을 끝내고 싶었는데, 다음세대에 유전인자를 유전되게 하여 부모와 같은 질환으로 자녀들이 발병하여 고생할 생각을 하니 정말 마음이 비통하였다.
유전성 질환을 앓아 보지 않았던 일반인이나 생명윤리학자들은 이런 비통한 심정을 손톱만큼도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똑같이 당해 보아야 이해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더 거론 하면 내 자신만 비통해져서 이만 줄이고자 한다.
광기는 좋은 일에 쓰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다들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개인이 병역법을 개정하고 엄청난 예산을 편성해 고가의 주사제를 보험적용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들이다고 주위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런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일들이 해결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하는 일에 불가능은 없다고 여긴다. 인간이 아닌 자연의 일들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2005년 5월은 추락된 나의 인생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강직성척추염을 공부하고 강직성척추염환자들과 만나 보았지만 나의 병세는 매우 특이하였다. 그래서 천장관절에 대해서 다시 공부를 하였다. 천장관절 치료를 하려고 의사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물론 몇몇의 의사들을 만나 보았지만, 천장관절 치료에 대해서 정확한 치료법을 제시해 주는 의사는 없었다. 2005년 4월 경 우연히 대학병원에서 일반인을 위한 통증학회 세미나가 있었다. 항상 왼쪽 천장관절의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터라
호기심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희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른채 말이다.
조선대학교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임경준교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후 천장관절치료법에 대한 논문을 찾아 프린트하여 임경준 교수님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덤으로 희망이 곱배기로 더해진다. 물론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다.
나의 왼쪽 천장관절의 통증은 천장관절 기능장애라고 진단을 내리셨다.
이분야의 전문가를 추천해주겠다고 하셨다. 추락된 내 인생을 다시 회복시킬 만한 위인을 추천받게 된다. 바로 광주에서 목포로 버스로 달려 갔다. 물론 막연한 기대감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목포 한국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김현성과장이다. 이분은 프롤로테라피(인대증식주사치료=인대강화주사치료)임상강사이다.
그러면서 국내의 대부분의 의사들이 모르는 천장관절이란 분야를 특별히 공부하신분이다. 천장관절 전문가를 왼쪽 천장관절을 다친지 10년만에 만나게 된다.
이글을 쓰고 있지만, 내 인생에서 10년의 세월은 고통의 연속이고 괴로움의 나날이었다. 결코 짧은 시간들이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인내하며 고통을 참아가며 의사들도 모르는 천장관절의 극심한 통증을 참아가며 인내하고 인내해야 했던
나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인고의 세월이었다.
2005년 5월부터 목포한국병원 신경외과전문의 김현성과장님에게
3년동안 천장관절 내에 프롤로테라피시술을 반복시술받았다. 결과는 매우 만족 할만 했다. 10년이상을 일상생활에서 항상 왼쪽 천장관절의 통증으로 시달려야 했던..고통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내가..프롤로테라피임상강사 김현성과장님을 10년만에 만나게 되어 매우 많이 회복되었다..
현재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왼쪽 천장관절의 통증으로 고생하지 않고 있다.
물론 무거운 것을 들거나 무리한 행동은 자제하려고 한다.
또한 2006년 8월에 강직성척추염 치료를 할 만한 실력 있는 한의사를 만나게 된다.
물론 나도 3개월 반정도를 이곳에서 집중치료를 받았다.
결과는 매우 만족하였다. 생명윤리법상 강직성척추염은 유전예방기술을 사용 할수 없게 되어 있어서 매우 비통해 있었는데, 강직성척추염 치료를 할 만한 실력 있는 한의사를 만나고 나서 나의 고민은 사라지게 되었다. 만약 나의 자녀에게 HLA-B27
항원이 유전되어 강직성척추염이 발병하더라도 내가 알아낸 한의사에게 강직성척추염 치료를 맡기려고 한다.
나에게 지난 13년은 이세상과 안녕을 수백번, 수천번을 고해야만 했고 인내와의 처절한 싸움을 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의사들도 모르는 강직성척추염, 그리고 천장관절, 그리고 인대증식주사치료의 효과를 체험하고 치료를 받아 보고 효과를 검증하고 정말 파란 만장한 인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성 요통환자의 약 30%이상이 천장관절 환자들이다.
그리고 만성요통환자들의 대부분은 인대증식주사치료로 회복될 수 있다.
만성 근골격계환자들의 경우 통증의 주요원인이 근육이 아닌 인대와 건(힘줄)이다.
인대와 건(힘줄)을 인대증식주사치료(프롤로테라피의 반복시술)를 하면 대부분의 만성 근골격계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천장관절 환자들을 발굴하고 인대증식주사치료 (프롤로테라피)=인대강화주사치료를 반복시술하여 천장관절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천장관절 환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또한 많은 요통환자들에게 인대와 건(힘줄)의 치료법으로 프롤로테라피를 반복시술하면 근본적인 요통치료법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의사들도 모르는 천장관절에 대해서 일반인인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허리 아래쪽 부위 통증,엉덩이 통증, 엉치뼈 통증, 골반 통증, 한두 시리다, 한두 선다, 한도 시리다,한도 선다, 산후풍이다, 좌골신경통이다. 골반뼈가 어긋난 것 같다. 엉치뼈가 어긋난 것 같다. 이런 증상들은 천장관절에 이상이 있다는 표현들이다.
이런 증상으로 고생하는 많은 천장관절 환자들께서 내 네이버 블로거 정보들을 보고 본인의 증상이 바로 천장관절의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병원홈페이지의 상담코너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카페의 상담코너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주변에 천장관절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됩니다.
물론 병원 홈페이지의 의사분들은 천장관절에 이상이 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죠.
허리디스크얘기만 앵무새가 중얼거리는 것 같이 반복할 뿐입니다.
저와 같이 10년이상을 많은 병원들을 헤메면서도 천장관절이 문제란 것을 진단받지 못하고 엉뚱한 부위를 치료하거나 엉뚱한 치료를 받는 천장관절 환자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의 정보를 보는 엉치통증, 골반통증, 엉덩이 통증환자들은 본인의
아픈 부위가 천장관절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셔야 합니다.
아직도 의료계의 현실은 암담합니다. 천장관절 환자들은 넘쳐나는데,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하는 의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운 의료계의 현실입니다.
물론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하니 정확한 치료법을 제시받는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장관절 진단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고 치료법을 제시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매우 흔하고 많은 천장관절 환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의사라고 해서 모든 질병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의사들은 천장관절에 대해서 너무 무지합니다. 천장관절은 미개척분야이고 불모지입니다.
10년동안 많은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아보았지만, 천장관절에 대해서 쥐똥만큼이나 언급해 주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 정말 하늘에 별따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의사들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천장관절 환자들에게 희망은 과연 존재할까요.
인간세상에서 조그만 하게 나마 희망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 희망을 찾는데 세월이 소요되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하기에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10년이상을 희망을 찾고 헤메다가 결국 찾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질병의 고통에서 투병해야하는 만성환자들에게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희망은 존재한다는 것을 많은 천장관절 환자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과거의 저처럼 불행한 투병생활을 하는 천장관절 환자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