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울산의 산천에 서려 있는 아주 깊고 슬픈, 그러면서도 가슴 뜨거운 옛 이야기 한 토막을 나누고자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전화앵(囀花鶯)’이라는 여인의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꽃 사이에서 꾀꼬리가 지저귀듯 아름답다’는 이름을 가진 여인. 신라의 노을이 지고 고려의 새 아침이 밝아오던 격동의 천년 전, 당대 최고의 예인이자 명기였던 그녀의 삶과 절개가 바로 우리 울산 땅에 깊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산 57번지로 올라갑니다.
활천리의 야트막하고 양지바른 산기슭을 거닐다 보면, 푸른 잡풀 사이에 고요히 자리한 나지막한 무덤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천년 전 고려 땅을 흔들었던 동도(東都) 최고의 명기(名技), 전화앵 (囀花鶯)의 묘소입니다.
고려 사람들은 신라의 옛 도읍이었던 경주를 '동쪽의 도읍'이라 하여 '동도(東都)'라 불렀고, 평양을 '서도(西都)'라 불렀답니다. 그리고 그 경주부 남쪽으로 30리를 내려오면 험준하면서도 아늑한 고개가 하나 나타나는데, 그 고개의 이름이 바로 '열박령(悅朴嶺)'이었지요. 옛날에는 경주부에 속했으나,
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의 소중한 땅입니다.
조선 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 고적조에는 이 열박령과 전화앵에 대해 단 한 줄의 명확하고도 강렬한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悅朴嶺在府南三十里 東都名技囀花鶯所埋之地"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동도 명기 전화앵이 묻힌 곳이다.)
문헌 속 한 줄의 기록이지만, 그 속에 담긴 서사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고려 시대의 뛰어난 문인 김극기(金克己) 선생 역시 먼 길을 지나다 열박령에서 전화앵의 무덤을 발견하고는 가슴을 치며 시 한 구절을 남겼지요.
아름다운 용모의 혼을 재촉해 저 세상으로 가다니,
헛되이 하늘가의 바위벽만 바라볼 뿐이로다.
신녀가 비를 모아 무협에 뿌리는데,
아름다운 이여, 그 바람은 낙천에서 끊겼도다.
운학무를 추던 소매는 땅에 끌리었고,
월투가를 부르며 흔들었던 부채는 하늘에 닿았으니,
지나는 길손이 그 아름다운 마음을 상하여,
손수건 가득 붉은 눈물에 젖는구나.
춤을 출 때는 긴 소매가 땅을 쓸며 구름처럼 감기고, 노래를 부를 때는 손에 든 부채가 하늘의 달을 가릴 듯 우아했던 여인. 그 미모와 예술 기량에 수많은 선비와 유아랑(젊은 귀족들)이 매료되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당시 서라벌은 천년 전성기의 화려한 꿈이 조금씩 사그라들던 서글픈 시절이었습니다.
궁궐의 금빛 기와는 빛을 잃어가고, 화려했던 문물은 저 멀리 북쪽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전화앵은 그 어수선한 도읍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경주 남쪽의 열박령 고개에 올라가길 좋아했습니다.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꽃봉오리가 터질 때면, 그녀는 열박령 바위 위에 앉아 아득한 서라벌을 바라보며 가야금을 뜯었습니다.
그녀를 사모하여 열박령까지 찾아온 젊은 선비 하나가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전화앵아, 너의 고운 모습은 마치 봄날 나뭇가지 위에서 우짖는 화려한 꾀꼬리 같구나. 하지만 이 화려함도 세월이 가면 다 사라지지 않겠느냐?"
그러자 전화앵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가야금 줄을 튕겼습니다.
"선비님, 이미 꽃 같은 꾀꼬리의 전성기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나라는 기울고 내 젊음도 언젠가 시들겠지요."
"아니다, 전화앵아! 너의 노랫소리는 천년이 지나도 꾀꼬리 같을 것이다!"
선비들이 이렇게 지난날을 회상하며 안타까워할 때마다, 전화앵은 환상에 젖어 고향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서글픈 곡조를 불러 사람들의 거문고 선율 속에 눈물을 띄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신라의 국운을 뒤흔드는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서남쪽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로 난입하여 궁궐을 짓밟았고, 서라벌의 화려했던 전설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한편 북쪽 고려의 왕건이 서라벌 임해전(안압지)까지 내려와 연회를 베풀었을 때, 어전으로 불러 내려간 전화앵은 북방 무사들 앞에서 긴 소매를 휘날리며 춤을 추어야만 했습니다.
긴 소매로 땅을 휩쓸며 곱게 넘어가는 그녀의 선율과 자태는 북쪽 사나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렸습니다. 고려의 거친 장수들과 무사들은 승리자의 오만을 부리며 그녀에게 졸라댔습니다.
"전화앵아! 너도 우리를 따라 저 번창하는 고려의 수도 송도로 가자! 망해가는 옛 도읍지에 남아 무엇하겠느냐? 송도 조정으로 가면 온갖 부귀영화가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전화앵은 장수들의 화려한 제안에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거절했습니다.
"싫습니다. 천한 기녀의 몸이 어디를 간들 마음이 후련하겠습니까. 비록 망해가는 땅일지언정, 나는 내 고향 신라를 지키며 이곳에 남겠습니다."
신라의 멸망을 나타내는 비극의 조짐들이 고을마다 널려 있을 때, 나라의 녹을 먹던 신라의 힘 있는 대부(大夫)와 벼슬아치들은 제 몸 하나 살겠다고 고려 조정에 잘 보이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그 비열한 꼴을 가만히 바라보던 전화앵은 눈물을 흘리며 그 배신자들을 향해 서슬 퍼런 대호통을 쳤습니다.
"망국의 대부들아! 어서 남의 나라로 가거라! 신라의 은혜를 입고 벼슬을 하던 너희들이야말로, 몸을 파는 여염집 여인이나 창녀보다도 더욱 절조와 절개가 없는 자들이구나!"
당대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도 미천한 신분의 예인 전화앵이 내지르는 이 사자후 앞에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과 부귀영화에 영혼을 판 선비들보다, 한 명의 기녀가 품은 고결한 지조가 훨씬 더 크고 찬란했던 것입니다.
신라가 완전히 무너지고 경주는 이제 한갓 주현으로 전락하여 '동도'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도시에는 보리만 바람에 흔들리고, 황룡사 옛 터에는 전날의 탑만이 우뚝 솟아 있었지요. 오릉의 가을 풀은 저녁노을에 쓸쓸히 빛나고, 밤마다 구슬프게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민중들은 옛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전화앵은 망국의 한을 가슴 깊이 머금은 채, 다시는 기생의 화류자리에 나가지 않고 열박령 깊은 골짜기로 들어와 은거했습니다.
하지만 송도에서 새로 부임해 오는 고려의 관리들은 승리자라는 오만에 빠져, 한결같이 명성 높은 전화앵을 탐내며 그녀를 부르려 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고려 관리가 호통을 쳤습니다.
"전날의 동도 명기 전화앵을 즉시 내 앞에 대령하여라!"
그러자 그녀를 보호하던 활천리 마을 사람들과 수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또, 전화앵은 이미 떠났나이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당장 잡아 오지 못할까!"
"그분은 열박령의 산신(山神)이 되어 떠나셨습니다. 기녀가 아니라 이 고개를 지키는 신령이 되었나이다."
"어허, 무슨 미친 소리냐! 몸을 대령하지 못하겠느냐?"
"사또, 그분은 몸뿐만 아니라 넋마저 하늘로 떠나셨나이다."
승리자의 시달림과 수모를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던 전화앵은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경주와 울산의 민중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절개를 지킨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주민들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경주부 남쪽 30리, 공기 맑고 양지바른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열박령 산기슭에 그녀를 정성껏 묻어주었습니다.
완전히 피어보지도 못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죽어간 기녀. 하지만 주민들은 그 화혼(花魂)이 묻힌 활천리 묘소를 지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무언의 국상(國喪)을 치르며 그 고결한 넋을 기렸습니다.
전화앵의 삶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신분은 천한 기녀였을지 몰라도, 국가의 위기 앞에서 부귀영화를 좇아 나라를 버린 정치가들보다 훨씬 더 숭고한 선비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마지막 휴식처가 바로 우리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라는 사실은, 울산이 결과적으로 천년 전부터 ‘고결한 절개와 아름다운 예술 혼이 살아 숨 쉬는 역사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해 주는 소중한 증거 인 것이죠.
첫댓글 첨부된 사진은 2002년 2월 20일, 전화앵 진혼제 때 참석하여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