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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창읍 승격 30주년 - 내고장 함창 알리기
제16편 -「나한리 석장생」
함창의 진산, 작약산이 은점산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니 하나는 북으로 어룡산이요, 그 하나는
동으로 크게 수정봉을 빗고 내리 달리니 뒷목골을 들어 올린 후 급격히 그 키를 낮추니 그 자락
아래 정이 배어 나오는 마을이 형성되어 이름 마져 낯설지 않은 나한리 마을이다.
이 마을 어귀 산72번선 과수원 중간에 문인상(文人像)의 귀한 석조물이 서 있다.
장승은 대개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며 보통 남, 여로 하여 세워 놓은 것으로 里程標(이정표)
또는 마을 혹은 절 입구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한리 주민들에 의하면 원래 이 석조물은 북쪽의 산기슭에 있었는데 큰 홍수로 인해 떠내려
왔다고 전하는데요, 글쎄 이곳은 큰물이 내릴 만큼 계곡이 깊지도 길지도 않은 곳이라 확인키는
어려우나 마을을 관통하는 개울 옆에 있었던 것을 개울 위로 걸쳐 놓아 다리로 사용 하다가 8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개울을 복개하여 진입로를 확장 할 때에 이 석조물을 마을 앞 어귀에 세워 보호를
해 왔으나 그 자리도 영원한 자리가 못되었던지 중부내륙고속국도 건설로 다시 옮기게 되어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여 보호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석조물의 모습은 단면방형의 석재를 다듬어 관모와 얼굴, 두 손을 모아 홀을 든 상체를 간략하게
표현했지만 하체표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은 왼쪽만 좀더 조각을 했고 입은 웃는 모습을 하고 있지요,
의습과 손 부분은 석조물을 세우기 전에 일부러 정으로 쪼아 없앤 듯 하답니다. 관모 일부와 코가
깨어졌지만 그 외는 대체로 양호한 편인데, 노출부위의 규모는 높이124*폭50*두께44cm입니다.
하부는 별다른 시설이 없이 직경170*깊이64c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옛날에 五百羅漢을 모신 큰 절이 있었다고 하여 나한대이(불당골)이라 불렀다 한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장자골 일대에 나한리 사지가 위치하는데 규모는 동서 40,남북이 35m정도이다.
외견상으로 구조물이나 건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나 경작지 외곽에 주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1.0m 내외의 자연석이 방치되어 있지요.
원래 이 돌은 밭 가운데 있었으나 경작을 위해 외곽으로 옮긴 것이고 지하수 개발시 다듬은 원형
초석도 출토 되었다고 합니다.
최북단 계단식 밭에서는 기와조각이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사지는 이 최북단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와조각 중에는 景泰(경태),二月 日 眞聖(이월 일 진성),瓦造作(와조작)등의 명문 기와편도 있다.
이 마을의 동명이 나한이라는 불교용어와 관련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옛날 일정규모 이상의 寺址
(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답니다.
景泰(경태) 년간은 서기 1450~1456년에 해당하며 적어도 15세기 까지는 사찰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지요.
이러한 옛 사지와 연관하여 1929년 “나한사”라는 아담한 사찰을 중건 하여 중생들의 기도처로서
그 몫을 다 하여 오다가 1999.11.23.현재의 대웅전을 불사하여 사찰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최근 중부내륙고속국도가 마을 앞으로 지나게 되어 마을 정면을 가로 막고 있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마을은 더 한층 아늑해 보이기만 하고 고속국도 상에서 건너 다 보면 아주 아름다운 전원
마을 풍경이다.
옛날 고개나 마을 어귀에 나무장승은 더러 흔히 볼 수가 있었으나 돌(석재)은 그리 흔치않은 작품
이지요.
주민들에 의하면 석장승 이라기 보다는 무덤 앞에 설치된 장군석이라고 하는게 타당성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마을 뒤 차돌배기 말랑에 이와 비슷한 석조물 한기가 땅속에 묻혀 있어 아마도 현재 보호
중인 것과 한 쌍이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할 따름이다.
석장승이 되었던 장군석이 되었던 그 자태는 범상함이 틀림이 없으니 자랑스러운 유산 이지요.
상주시 남장동 남장사 입구 남장못 옆에 석장승이 있는데요,
이장승은 지방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고 남원의 실상사 앞의 석장승도 전라북
도 민속자료로 보호를 받고 있지요.
나한리 서조물(석장승)도 마을 입구 경작지 중간에 서 있어 항상 도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마모가 심해져 앞으로 보호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제15편 -「호 연 정」
진산, 작약산 아래 함창 북쪽을 아담하게 빚어 놓은 산이 있으니 이곳 사람들은 금대산 이라 부른다.
이 산 동쪽에 모양이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머리미산” 이라 부르고 한자로는 頭山(두산)이다.
이 산자락에 형성된 마을에 당교의 무사기백과 선비정신을 신조로 하기 위하여 이름을 지었으니
그 리 명이 윤직(允直)리 이다.
두산 마을에 「浩然亭(호연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선비정신은 바로 이곳 에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할 수 있지요.
「함창군읍지」에는 많은 樓(루).亭(정).臺(대).軒(헌)이 실려 있는데요.
누각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을 말하고, 정자는 벽 없이 기둥
과 지붕만 있는 것을 말 합니다.
咸昌郡邑誌에 소개된 내용을 빌리면
浩然亭:在郡東五里進士申裕所構有自詠詩後孫進士鎭元重建權遂菴尙夏書楣今後孫榥又重建有記
(재군동오리진사신유소구유자영시후손진사진원중건권수암상하서미금후손황우중건유기)
1,500년대 초에 건립한 이 정자는 함창읍 윤직리 336에 소재를 하고 있으며 호연정 평산(平山) 신유
(申裕:1496 ~ 1541)는 한천처사 숙빈의 장손으로 자는 중서이며 병진생 이시고 師任堂(사임당) 申씨
와는 재종간으로 17세 중종1525년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로서 간신을 논핵(論劾)한 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귀향, 이곳 머리미산(東頭山)에다 1534년에 정자를 짓고 은거함에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9번이나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곧은 선비 입니다.
호연정은 성운(成運).조식(曺植)등과도 교류한 선비로 정자 이름은 조식이 짓고 현판은 권상하
(權尙夏)가 썼으며 원운(原韻)외에 권섭(權燮)의 「八景詩」가 있다.
이에 호연정의 원운을 소개한다.
幽居無事但吟哦(유거무사단음아)/興味悠然雨後多(흥미유연우후다)/苔滿前溪人不到
(태만전계인불도)/隔林終日聽鶯歌(격림종일청앵가)
『한가히 살매 일없어 시나 읊조리니/ 유연한 흥미가 비 뒤에 더하네/ 앞 개울에 이끼 그득해도
사람 이르지 않으니/ 막힌 숲에서 종일토록 꾀꼬리 소리만 듣네』
이 정자는 중간에 폐정되어 호연정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만 있었는데 1752년 후손
신진원(申鎭元)이 중건하고
1891년 후손 황(榥)이 또 중건하고 근년에 들어 1984년 후손 광현(光鉉)이 중수를 했다고 합니다.
정자는 산 끝자락 바위비탈의 언덕배기에 서 있는데 좌측으로 보면 넓은 들판이 가슴속을 후련하게
하고 오른쪽으로는 나이를 알 수 없는 배롱나무가 그 꽃을 만발하여 정자를 향하여 들어가는 둑방
길에서 보면 아주 장관입니다.
정자 앞 비탈면에는 대나무가 새순을 뽑아 올리고 있으며 대나무 사이에 아주 큰 살구나무가 버티고
있어 그 연륜을 짐작 하고도 남습니다.
입구 맞은편에 후손들의 정성어린 중수기념비가 모처럼 찾아온 길손을 맞이하고 관리에 많은 관심
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건물의 평면 구성은 중앙대청 한 칸에 좌우로 온돌방 한 칸씩을 배치시킨 전형적인 3칸 중당협실 형
이고 앞면에는 툇마루, 앞쪽으로 난간을 세워 누마루처럼 꾸몄고 툇마루 왼쪽으로 출입 할 수
있도록 했다. 가구는 건실한 5량가 이고 지붕가구는 중도리를 측면 중앙기둥 바로 위에 놓은
3분변작법이라 합니다.
지난 5월 윤직마을에서는 家傳忠孝(가전충효) 世守仁敬(세수인경)의 전통을 자랑하고 옛 과거길인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고 지나는 과객들이 마셨다는 우물도 존재를 하는 등 역사성 있는 이 마을을
누구나 찾아오기 쉽도록 4차선 도로변 입구에 마을 표지석을 크게 설치하고 그 옆에 호연정에
대하여도 수필가 百忍 申光鉉씨가 撰(찬)한 글을 실은 표지석을 설치 하였습니다.
더 쉬운 길은 함창에서 문경방향으로 진행중 신광주유소 지나 오른쪽으로 새로이 확·포장하는
진입로로 들어서면 바로 갈수가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쯤 찾아보시도록...
- 자료제공 함창읍 부읍장 김광희 -
내고장 함창 알리기
제13편 -「唐橋(당교) 」
역사 스페셜 (1999.10.23)에
「1,300 여년전 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시체는 다리 밑에 매장 되었다. 사건의 피살자 그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 이었다」
라고 방영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우리함창 지역의 3번 국도상 윤직사거리와 점촌 시외버스 터미널 사이, 시계표지판 아래에는 작은 교량이 하나 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당나라 소정방 군사를 물리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옛 부터 여기에는 농사용의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함창지방 사투리로 “뙤놈(唐人)”을 쓸어 없앤 곳이라 하여 “뙤다리 또는 띄다리(唐橋)”라 부르고, 김유신(金庾信)장군이 당군을 쓸어 묻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三國遺事1卷-1紀異-太宗春秋公-13 에 의하면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 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 라고...
신라에 온 당나라는 663년엔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도둑으로 격하(格下)시키고, 신라의 국호도 계림도독부로 고치는 큰 잘못을 범한다. 이에 격분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은 왕년엔 우군(友軍)이었으나, 적군으로 돌변한 당나라 소정방군과 상주 관내의 당교(唐橋)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어 당나라군을 격퇴시킨다. 당교의 개울은 적군의 피로 물들었고, 야트막한 산은 적군의 시체로 덮였다고 전한다.
당교란 순수한 우리말로는 뙤다리다.
되다리가 경음화 현상의 덕분으로 뙤다리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이이제이(以夷制夷)는 전형적인 중국의 외교수법인데,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를 없애고, 신라마저 집어삼키려 했으니 되놈은 역시 되놈일 뿐이다. 국가 간엔 절대적인 원수도, 항구적인 우방도 없음은, 현대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깊이 깨달아야 할 큰 교훈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왜군은 중요한 거점인 이곳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켜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도 전세를 만회하고자 이곳 탈환에 심혈을 경주하였으며 그 가운데 큰 사례는 창의군 선봉장인 李軸(이축:1,565~1,647년,1592년 황령에서 의병을 일으킴)의 공격과 향병들의 항쟁으로 당교는 우리측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묻어 있는 당교가 도로확·포장 사업으로 사라졌으므로 그 유래를 밝히고자 여기에 작은 비가 하나 세워져 있으니(2008년) 상주인의 긍지를 고취하고 산 교육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당교에 관하여 꾀 큰 규모의 비는 현재 문경시청사 전정에 서 있다는 것이다. 뒷면의 글을 모두 읽어 보면
「우리고장에 있는 찬란한 호국의 명소이건만 지금은 잊혀진 다리가 당교이다. 통일의 비원을 싣고 달리는 3번 국도 옆에 당교사적비를 세움은 통일의 의지를 오늘에 다시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라고 표기를 하고 점촌시민은 그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고,
그러나 당교의 위치는 현재도 엄연히 상주 인것을.....
물론 문경시청사가 소재하는 지역도 1914년 이전까지는 함창군 지역이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말 하리오.
위에서 본바와 같이 함창은 삼국시대, 고려시대(홍건적을 물리침), 임진왜란, 6.25 전쟁(육군 2군단 창설지)등 국난을 피하여 본적이 거의 없는 군사적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리라.
- 자료제공 함창읍 부읍장 김광희-
제11편 -「오직 믿음 하나로 烈婦閣」
상주에서 문경방향으로 국도3호선을 달리다가 이안초입을 지나 함창에 들어서면 이내 신흥 나들목을 만난다.
이곳에서 내려 면도101호선을 이용하여 신흥2리를 지나 신흥3리와 신흥1리 경계쯤에 옛날에는 분명히 오봉산에서 낮은 산줄기로 이어져 있었으나 촌노들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큰 장수가 태어날 명당이라고 하여 산줄기를 끊었다고 전 하는데 이 지점이 속칭 아리랑고개 이다.
인근 폐교된 용곡초등학교 뒤산은 그 이름이 거북산으로 불린다.
면도 왼편 언덕배기 아래 작지만 아담한 맞배지붕의 木造瓦家(목조와가)가 한 채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楊州趙氏烈婦閣(양주조씨열부각)이다.
열부는 고난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키어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여자라고 하는데, 예부터 사람노릇(사람의 도리) 이라는 대의명분을 살려 타의 귀감이 되어 나라로부터 旌閭(정려)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양주조씨열부각」은 비록 나라로 부터 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계승 발전 시키고 유교사상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으로 시대에 맞는 실용적인 덕목을 홍보하여 건강한 정신문화와 사회구현을 도모 하고자 함창유도회에서 열부각을 건립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양주조씨열부각」홍보문의 내용을 빌리면
소재지: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666-1로
“이 각은 열부 양주조씨의 烈行(열행)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1982년 咸昌儒道會(함창유도회)에서 조씨열부 선양위원회를 조직하여 1984년2월에 열부각을 건립 하였다.
열부 양주 조씨는 18세의 나이에 백정흠에게 시집와서 여인의 禮
(예)를 다하다 남편이 6.25 사변에 자원입대하자 통일이 되기를 기원 하였으나 남편이 갑자기 멸공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사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슬피 울며 곧 자결하기로 결심 하였다.
그러나 식구들의 만류와 초상을 치루지 않고 죽는 것은 영혼을 달래지 못하는 것이며 婦道(부도)를 어기는 일이라 생각 하고 초상을 치른 뒤 집으로 돌아와 약을 먹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흥마을에 위치한 이 비각은 원기둥의 형태이며 익공의 柱頭(주두)에 창을 설치한 맞배지붕의 木造瓦家(목조와가)이다.“로 설명을 하고 있다.
비각안의 비문에는 「烈婦楊州趙氏之碑」라 음각되어 있다.
특히 금년은 6.25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로서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다 바친 선열들에 의하여 현재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을 하면 그저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요즈음 세태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이가 더러 많지만 한번약속은 영원한 약속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마도 진정한 결혼이 아닐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자는 쉽게 이루어지는 이혼이 진정한 婚姻이 아니고 結婚만 하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 뜻을 깊게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함창군읍지에 의하면 烈女(열녀)에
鄭氏(정씨)-敎理權達手之妻(교리권달수지처).
蔡氏(채씨)-士人權應井妻(사인권응정처)외에 13명이나 기록 되어 있다.
지나는 길에 한번쯤 그 의미를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제12편 -「우리나라의민간협동조합 嚆矢-함창」
우리나라의 민간 협동조합 효시는 1927년 1월 당시 상주군 함창면에 세워진 「함창협동조합」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농업생산력 증진과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농협은
말 그대로 거대한 조직이다.
대략 지역본부16, 시·군지부160, 지역농협·축협, 품목농협·축협, 인삼협등 1,177 개소이다.
이와같이 우뚝할 수 있었던 이면에 우리나라 농협역사에는 뼈아픈 과거가 남아있는 일제강점기부터 그 근원을 알아보아야 한다.
당시 일제는 강력한 행정력을 동원, 빼앗은 토지를 일본토지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여 우리농민을
일본의 소작인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농민에게 비싼 소작료를 착취하고 식민지화에 항거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고유의 전통미풍양속이고 단단하게 이루어진 두레나 대동계등의
조직을 교묘한 방법으로 전면 해체시켜 이른바 금융조합, 식산계, 농회등을 설치하여 우리농촌을
포괄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수탈해 나아갔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를 지나 1945. 8.15.해방을 맞이하자 협동조합운동을 표방한 농촌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 금융조합은 농업은행으로 탈바꿈하고 농협은 금융조합과 재무부당국에
의해 철저히 거세 당한 채 빈털터리로 태동을 하게 된다.
5.16 혁명후 농업관계 협동조합은 농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1. 8.15 농협과 농업은행이 통합하여 「종합농협」으로 되어 농민을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해오다가 1981. 1.농협의 시·군조합이 중앙회
시·군지부로 흡수되고 축협은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2000. 7.농협중앙회는 조직기반 확충으로
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 한국인삼협동조합을 흡수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농협의 역사와 함께하는 함창에 자랑스러운 그 징표가 있으니 농협중앙회 함창지점 앞에
칠순이 넘는 나이를 자랑하는 키 150cm의『咸昌金融組合理事趙範錫不忘碑』가 오늘의 농협 함창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1927년 1월 당시 우리나라 민간협동조합 효시라 꼽히는 함창협동조합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지식인들이 귀국해서 함창에 둥지를 틀고 농민계몽을 목표로 협동조합을 처음 만든 것이 그 시발점 이다.
유학생들이 함창에 제일먼저 설립한 이유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려진바 없으나 전문가들은 아마도
가난한 농민들이 많아서가 아닌가 하고 추측 할 따름 이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농촌이 다 그러하듯 양식이 없어 나물죽으로 연명할 만큼 낙후되어 유학생들은 함창을 거점으로 하여 협동조합 관련 순회강연을 하는등 전파 노력을 거듭 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협동조합 운동은 김천, 군위, 안동 나아가 충남도, 경남도에 까지 퍼져 1930년에는 조합수가 100개를 웃돌았다고 한다.
아마도 농협운동이 함창지역이 가난하기도 했겠지만 농촌치고는 교통여건이 좋아서 거점지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불망비의 주인공 趙範錫理事任(1891~1978년)은 대구농림학교를 제3회로 졸업 하시고 내내 금융조합 이사로 재직 하시면서 당시 농촌에는 노름하고, 술 마시고, 싸움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농촌을
부흥 시키고자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새 생활 운동을 벌리셨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생활이 차츰
나아지자 그 높은 뜻을 기리고자 지역민들이 1937년도에 불망비를 세웠는데 비석전면에 음각된
비문을 소개하면
昭和五年(소화 5년 - 서기1930년)
世値財荒(세치재황 - 온 세상 재계에 불경기 만났네)
滔滔漏船(도도누선 - 물은 강둑에 가득한데 배 바닥에 물이 새어들고)
安得梢工(안득초공 - 이 배 저어갈 뱃사공 어디서 구할꼬)
韙哉賢公(위재현공 - 훌륭하시다. 趙 이사여)
莅我咸昌(이아함창 - 우리 함창에 오셨네)
其蘇更生(기소갱생 - 이 조합 다시 살려주시니)
去後敢忘(거후감망 - 가신 뒤라도 어찌 잊으리까)
측면에 昭和12년 3월 冠岩振興組合 立 라 적고 있지요
우리 삶 주변에 숱한 공적·선정·기념·불망비 등이 많이 있지만 금융과 관계된 碑(비)는 흔치 않으리라....
하나의 기념물로 잘 보존이 되기를 갈망 합니다.
제10편 -「옛 민립교육기관인 임호서원」
임호서원(臨湖書院)은 이름 그대로 삼한시대 3대 저수지의 하나인 공갈못을 바라보며 큰 꿈을 키우던
선비들의 강학공간으로 당초 공검면 역곡리 성악서당의 자리에 1693년(숙종20년) 임호서원을 세우고
지역 향촌사회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이후 지역 사림들의
노력으로 1988년 함창읍 신흥리 산21-1번지(화평마을)로 옮겨져 복원 하였다고 한다.
사학과 향교가 관학이었다면 서원은 민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선현존경과 후진장학의 정신으로 설립
되어 선현을 봉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기관 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춘추로 제향하고
청소년에 강학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라 한다.
咸昌郡邑誌에 소개된 내용을 빌리면
在郡南十里古城嶽享文匡公洪貴達參判表沿沫襄靖公蔡壽敎理權達手獻納蔡無逸今毁撤
(재군남십리고성악향문광공홍귀달참판표연말양정공채수교리권달수헌납채무일금훼철)
명유공신의 유덕을 기리고 청년자제를 모아 학문과 덕성을 연마하는 수도장으로 국가에서도 높이
평가하여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하였으나 그 수가 늘어나면서 많은 폐단이 생겨 조세의 면탈,양민의
원노화로 인한 군역기피,붕당과 파벌조장,양민착취등 역기능이 심해지자 1871년 679개의 院祠(원사)
중 중요한곳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훼철시켰다.
이 때 함창의 모든 院祠도 훼철되었다고 한다.
임호서원은 左講右廟(좌강우묘)형으로
景賢祠(경현사)는 서원의 주 건물로 전면3칸,측면1칸반의 맛배지붕으로 지어졌고 이 건물에는
藍溪 表沿沫(남계표연말), 虛百亭 洪貴達(허백정홍귀달), 瀨齋 蔡壽(난재채수), 桐溪 權達手
(동계권달수),休巖 蔡無逸(휴암채무일)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後學 眞城 李源榮 謹記를 소개하면
함령땅에 서원이 창설된 것은 숙종대왕 신미년(1691)이고, 나라의 명령에 의하여 무진년(1868년)에
훼철되어 단소를 만들어 제사를 지낸 것이 일백여년, 골짜기가 깊고 토질은 척박하여 살던 사람들이
떠나니 마을은 자연히 비게 되어, 서원을 지킬 수가 없고 또한 맡길 사람이 없어 후손과 사림들이
서원을 현의 남쪽 화평마을에 복원하기로 논의하여 무진년(1988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중순에
마쳤다.
서원의 유생인 이영욱, 채춘식, 권태영 보가 차례로 나에게 방문하여 기문을 써줄 것을 부탁하여
사양하고 또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생각하니, 오봉산은 넓은 들판의 가운데 힘차게 솟아서 푸른빛을 하늘에 가로 쌓아 놓은 것
같은 것이, 마치 용이 또아리를 튼 것 같고 , 봉황이 춤을 추면서 남쪽으로 나르는 것 같아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한 물줄기(이안천)는 북으로 네 개의 산허리를 두르며 남쪽을 감싸 안으니,학문을 강마하기에 마땅한
자리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계 표선생은 점필재의 연원으로 명현들과 벗을 하며, 효행으로 가정을 다스리셨고 이단을 멀리 하셨네.
허백정 홍선생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혀 깊은 학문을 궁구하여 일찍이 이를 이루었으며 大諫(대간)으로 임금을 충성스럽게 보필하였으니, 곧은 말로 간하여 어지러운 조정을 멀리 하셨네,
난재 채선생께서는 과거에 장원을 하시어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시고, 성난 문장으로 사악함을
배격하니 종래는 조야가 맑게 되었다.
동계 권선생의 곧은 기개는 하늘을 바치었으니 그 충정은 태양을 뚫고 폐비윤씨사당을 세우는
모의를 배격하여 나라에 대의가 있음을 보이셨다.
휴암 채선생은 뛰어난 문장을 감추고 붓을 놓아버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그 뜻과 바름이
한가지로 그 절의를 일세에 남기셨네.
대저 다섯 분 현인의 그 끼치신 유풍은 물방울처럼 흩어지지 않고 또한 선생들의 누대의 고향으로
정성을 다해 받들고 지켜왔으며 또한 나라에서 훼철한 이후 예를 가르치던 사원이 황무지로 변하여
버렸으며 세태는 인륜을 버리고 의를 싫어하고 버리려 하지만 새로이 바른 기운이 돌아와 예절과
옛 풍속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막게 하였으니 이것이 서원의 제 유생들이 모든 힘을 다하여 자리를
정하고 묘우와 강당을 차례로 중건함이다.
옛 편액을 높이 걸고 절목을 정하여 삼월 초 정일에 제사를 올린다고 각 문중에 알리니 엎어질 듯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모두가 즐거워하네.
건물과 담장들을 올려다보니 모두가 엄숙하고 장중하여 변두에 제물을 차례로 올려놓고 읍양하고
주선하니 예절과 사양하는 풍습이 다시 살아나 여유롭고 활기차게 시 읊고 글 읽는 풍습을 진작
시키니 무릇 하늘이 우리의 도를 다시 돌려놓았으니 어찌 내일이 밝지 않으리오,
경하 드립니다.
원중 여러 군자께서 서원의 현판을 걸고 준공한 것을.
기사년(1989)정월16일에
제9편 -「향민의 얼이 깃든 함창향교」
함창은 산자수명한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예부터 문물이 흥성하여 많은 현인을 낳았으며 민족사와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고장으로서 그 이면에 자랑스러운 함창향교(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124호)가 존재하고 있다.
향교는 고려·조선 때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으로서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하였다고 하는데 국도(國都)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 부터라고 한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按廉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 고과(考課)의 기준을 삼는 등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郡縣)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는 공자(孔子)와 선현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해 마련된 대성전(大成殿)·동무·서무 등 문묘,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숙하는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가 기본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향교의 두 기능인 제례와 교육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생의 정원은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郡)에 30명, 현(縣)에 15명으로 배당되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증원되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교수관으로는 교수(敎授;종6품)와 훈도(訓導;종9품)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고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향교는 점차 무력화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사학인 서원(書院)이 거의 대치하게 되었고, 향교는 지방 양민들이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게 되고 단지 문묘를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함창군읍지에 소개된 내용을 빌리면
“在郡西五里莫求利山下壬辰兵燹後移建于邑南池上小崗其後復遷于舊基慕齋金安國詩板擖于明倫堂”
(재군서오리막구리산하임진병선후이건우읍남지상소강기후복천우구기모재김안국시판갈우명륜당) 이라 전하고 있다.
현재의 위치는 함창읍 교촌리 304-1 번지로 마을 안 언덕위에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데 조선조 태조 7년인 1398년에 건립, 임진란에 소실되어 구향리 남지위 소강으로 이건 하였다가 인조14년(서기1636년)교촌리에 다시 옮겨 前學後廟型(전학후묘형)으로 몇 차례 중수를 거쳐 大成殿(대성전)이 內三門(내삼문)을 경계로 위에 높게 배치되고 아래에 東西齋(동서재)가 있고 小設位(소설위) 이므로 東西(동서) 廡(무)는 없고 명륜당이 전면 중앙에 樓閣(누각)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으로서 제향공간인 文廟(문묘)와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로 나누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配享(배향)된 聖賢(성현)은 小設位(소설위)로 五聖(오성)과 宋朝(송조)四賢(사현)과 東國(동국)十八賢(십팔현)으로 新羅朝(신라조)二賢(이현),高麗朝(고려조)二賢(이현),朝鮮朝(조선조)十四賢(십사현)이다.
외삼문 밖 언덕위에 여섯기의 비(碑)가 서있는데
1.觀察使李相國鎬俊興學碑(관찰사이상국호준흥학비)
1.縣監李侯奎學興學碑(현감이후규학흥학비)
1.郡守金侯大鎭興學碑(군수김후대진흥학비)
1.縣監洪侯應漢(?)興學碑(현감홍후응한흥학비)
1.贊儒碑1982年8月 咸昌儒道會
1.保存會創立鄕校大重修紀念碑(보존회창립향교대중수기념비)로
모두가 함창향교와 관련된 碑(비)들이다.
우리함창은 예부터 학문이 興(흥)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朝鮮 선비의 半이 영남에 있고 영남선비의 半이 尙善에서 배출되었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 상주의 儒學(유학)이 크게 盛하여 많은 선비가 출현 되었는데
이시기에 함창에도 藍溪 表沿末, 虛白亭 洪貴達, 懶齋 蔡 壽 선생의 활약이 대단히 크셨다고 한다.
이분들은 모두가 節義波(절의파) 선비들로서 유학사에 기여한바가 컸으며 그 이후에도 名儒가 蔚然(울연)히 이어 왔으니 실로 함창은 鄒魯之鄕(추로지향)이라 하여도 誇張(과장)은 아니다 할 것이다.
유교의 본산인 향교가 문묘향사와 지역사회 교화의 역할을 수행하여 왔으나 변천하는 시대의 조류에 의하여 세태가 급변하여 지키고 가꾸어야할 소중한 우리의 미풍양속은 점차 사라지고 인륜마저도 경시하는 황금만능주의의 시대 앞에 과연 기성세대는 어떻게 후학을 바르게 가르치고 이어 나갈 것 인지를 모두가 함께 심도 있게 생각을 해보아야할 것이다.
그래도 아직 지키고자 하는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2010. 3.「함창향교지」를 발간하게 되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서 우리는 옛 선현들의 유훈을 받들고 인과 예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문화를 다시 진작시켜 함창의 큰 명성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농촌인구가 많았던 시대에는 청장년들이 이곳에서 모임의 장소로, 배구연습장으로, 한때는 태권도를 수련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어 주민과 애환을 함께 한 적도 많았지만 거주인구는 감소되고 노령화가 되어감에 따라 2010. 4.에 향교 들어가는 진입로 공한지에 운동기구를 설치하여 낮에는 들판에서 생업에 열중하고 새벽이나 저녁에 지역주민들이 심신단련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므로 주민과 향교는 상생의 길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자료제공 함창읍 부읍장 김광희 -
제8편 -「함창현 역사의 징표 - 증촌리의 비석군(碑石群)」
상주에서 문경으로 통하는 국도3호선에서 이안면 중촌의 나들목을 나와 시도41호선을 이용하여 함창에 들어서면 옛길과 우회도로의 군집게양대가 있는 삼거리에 다다른다.
우회도로로 약 0.3km 진입하면 왼편 증촌리의 낮은 산자락 끝부분 절개지위에 일련의 비석들이 도열해 있는데
예부터 비석은 비(碑)·빗돌·석비(石碑) 등 여러 말이 있으며, 거기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 하고 이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史料)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때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昌寧)의 척경비(拓境碑),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등은 역사상 자랑할 만한 비석이며 귀중한 보물입니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성행하여 그 유품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그 역사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의 종류는 수없이 많지만 대개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기적비(紀蹟碑)·기념비·순수비·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성곽(城廓)·대단(臺壇)·서원(書院)·묘정(廟庭)·빙고(氷庫)·교량·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기적비가 있습니다.
비석은 대개 비신(碑身)과 이수(螭首)·귀부(龜趺)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 서민층의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또 자연석의 한 면을 갈아서 글을 새기고 위를 둥글게 한 것을 우리 선조들은 갈(碣)이라고 칭 하였지요.
함창읍은 조선 태종때(1413년)현으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현(縣)에 걸맞게 비석군에는 현감 비석이 압도적 입니다.
원래 이 비들은 함창군(1895~1914년) 당시 구향삼거리(현재 LG 건물주변)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도로가 넓혀지고 지역이 발달함에 따라 여기서 더 북쪽으로 우회도로 삼거리(일명 황새고개)에 옮겨졌으나 이곳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래 있지 못하고 현재의 우회도로 증촌 산자락 시도 변에 자리를 잡아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몇 차례 옮기는 과정에서도 훼손됨이 없이 온전하다는데 있습니다.
아마도 관계자들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엿 볼 수가 있지요.
모두 13기의 비석으로 하나의 군(群)을 이루고 있답니다.
소개를 하면(우에서 좌로)
1.縣監趙侯元植淸德善政碑,戊子3月(현감조후원식청덕선정비)
1.觀察使趙相國康夏永世不忘碑,乙酉2月(관찰사조상국강하영세불망비)
1.縣監申侯台喜愛民淸德碑,庚寅2月(현감신후태희애민청덕비)
1.觀察使 嚴(?)相(?)國 世永頌德碑,丁酉11月(관찰사엄상국세영송덕비)
1.兼幽谷道察訪高侯允模永世不忘碑,戊子6月(겸유곡도찰방고후윤모영세불망비)
1.觀察使金相國明鎭永世不忘碑,己丑11月(관찰사김상국명진영세불망비)
1.縣監金侯熙臣淸德愛民碑,乙酉3月(현감김후희신청덕애민비)-군 읍지에 기록
1.郡守朴侯淵德善政碑,丁酉11月(군수박후연덕선정비)
1.縣監李侯后沆淸德愛民碑(현감이후후항청덕애민비)-군 읍지에 기록
1.縣監尹侯東魯淸德善政碑,壬寅5月(현감윤후동노청덕선정비)-군 읍지에 기록
1.步兵第八師團民事處長陸軍少領趙承珏頌德碑(보병제팔사단민사처장육군소령조승각송덕비)
1.靜坡李漢承功績闡揚碑(정파이한승공적천양비)
1.縣監郭侯致季永世不忘碑(현감곽후치계영세불망비)
이중에 현감(縣監) 비(碑) 3기는 함창군읍지에도 현감의 이름이 일치하고 있지요.
이밖에도 여러 곳에 더러 비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없어지고 훼손되고 하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한 곳으로 모아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며 이곳의 비는 이끼가 끼고 음각한 글씨가 마모가 되어 식별이 곤란한 것도 있지만 이 모두가 함창의 오랜 역사의 징표가 아닐까 하고 소중히 지켜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느 현감은 후손들이 먼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좌대를 새로 만들고 정성을 쏟은 반면에 대부분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소중하고도 큰 유산이 아직도 함창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가장 최근의 비는 대조리 산자락에 위치한 “김학범 초대 읍장의 공덕비”도 존재를 한답니다.
선조들의 발자취를 느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크고 값지기에 우리 모두 관리와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으로 생각을 한다.
- 자료제공 함창읍 부읍장 김광희
구향시(舊鄕市): 함창 5일장
정감이 있고 맛깔스런 대화가 오가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함창의 5일장!
먼 아득한 옛날 인간이 삶을 영위 하면서 태초에 모든 것을 직접 구하고 만들어 쓰던 시대를 지나 삶 자체가 조금씩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나한테는 없는 것이 상대에게는 있기 마련이라 자연스럽게 그 가치를 인정해주면서 서로가 바꾸어 쓰다보니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더 발전하여 없는 것을 구하게 되고 값을 정하고 사고 팔고를 거듭하다보니 근접하기 쉽고 여러 곳에서 만나기 쉬운 일정한 곳에 거래가 이루어 지다보니 자연 발생적으로 장(場)이 형성 되었을 것이다.
함창도 예외가 아닌지라 이곳은 교통이 편리하여 한양의 길목이 되었고 일찍이 농경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곳이라 사방에서 모여 들었을 것이다.
고동람군,고릉,함영,함창등으로 변천하면서 인근의 여러 고을을 관할 하다보니 시장 형성이 다른 지역보다 일찍이 발달이 되었을 것이다.
- 최근의 근대시장은 공식적으로 구향리 122-16번지외 여러필지에 1951.12.16.개설 되고 면적 또한 12,872㎡로 건물면적 694.8㎡이고 100여개의 노점이 운집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농경사회의 기본이며 가장 큰 농가의 자산인 소를 매매 하기 위하여 우시장을 1960년에 개설하여 운영 하여 왔으나 소 사육이 대형화 되고 규모화 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어 2000. 1.11.폐쇄 하였다.
함창군읍지의 내용을 빌리면
- 장시(場市)편에 2곳에 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舊鄕市 - 在官門外一日六日.南面市 - 在郡南十五里今無
- 토산(土産)으로는
은구어(銀口魚).송심(松蕈).今無 시(柿).호도(胡桃).연실(蓮實). 今無.
- 진공(進貢)으로는
인삼(仁蔘).백작약(白芍藥).남성(南星).구기자(枸杞子).백복령(白茯苓).감국(甘菊).시호(柴胡).생목과(生木果).작목(作木).육필(六疋).은구어(銀口魚).조홍(早紅).호도(胡桃) 이라 기록은 전 한다.
- 함창군읍지에 기록 될 그 당시에 구향에서 열리던 장은 1일과 6일로 전하는데 지금도 함창의 5일장은 구향리에 소재하며 1일과 6일에 열린다.
- 작금 산업사회의 발달로 농촌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그 기능이 많이 약해졌으나 지금도 1일,6일은 재래시장 주변엔 항상 인파가 넘친다.사람은 줄었지만 대신에 차량숫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에 들어서면 어릴 때 시골장에서 볼 수 있던 것을 지금도 거의 구경할 수가 있는데 고무줄과 나프타린을 파는 행상부터 시작하여 요즈음 제철인 고추,가지,호박등 갖가지 모종 등등.....
차량을 이용한 여러 형태의 상행위등 정말로 볼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재래시장주변으로 상호명도 다채로워 등불·청사초롱식당이 보이고 나라머리방,거기다가 현대적 간판으로 김해숙 미용실,은성포목,고향농산,엄마순대,예천상회,시장천막,시장·중앙방앗간,뚱보식당,함창명주시장등......
제각기 본인의 양심과 신뢰를 바탕으로 대를 이어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으며 모두들 생업이라 열심히 생활한다.
- 2009년도에 재래시장에 비가림 시설을 설치(120백만원) 하였으며 금년에도 2010갤러리(비풍침방지시설:60백만원)를 추진 중이다.
이러한 재래시장의 좋은 시설들은 큰 규모의 행사에 기상여건이 좋지 않을 때 모임의 장소로 종종 이용되어 지기도 한다.
아직까지 고향냄새가 물씬 풍기고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는 함창재래시장에 구경 한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제6편 -「봉황대(鳳凰臺)」
함창읍 금곡리 산69-1번지에 이름값만도 대단한 높은 봉황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개 대(臺)는 산의 높이에 관계없이 그 산의 높은 봉우리를 봉(峰 봉우리 봉)
과 대(臺 돈대 돈)로 주로 쓰여 져 왔습니다.
봉은 주로 산의 정상에 붙여지는 것이며 대(臺)는 봉(峰) 보다는 대부분 높이
에서 조금 낮습니다.
대(臺)를 붙혀 부르는 유명한 곳으로 입석대,서석대,비선대,문장대등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함창의 봉황대는 높은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봉우리라 할만큼 높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얼마나 멋지고 장엄한 절경인지 누구나 지나다보면 쳐다보고
올라가고픈 충동을 느끼지요.
바위 절벽에 鳳凰臺 세자와 다른 암각서가 있고 대(臺)위에는 봉황정이
있답니다.
함창군읍지에 소개된 내용을 빌리면
鳳凰臺 - 在郡東十里金谷路傍高數百尺可佐百餘人層巖削立蒼翠薈蔚串川猪川二水合于下戞雲飛鳳德鳳三山列于前故昔人取李白三山二水之句以名云其上有井其北有倉庫遺址新羅時近邑田稅田此漕運云
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곳은 곶내와 저천의 두 물이 앞에서 합치고 알운,비봉,덕봉의 세산이 앞에 있어
이태백의 삼산이수시(三山二水詩)구를 따라 대(臺)의 이름으로 했다고
전하는데요,
이곳 산수가 좋아 일찍이 습독(習讀)류희임(柳希任)이 대(臺) 위에 소요(逍遙)
하고 그 위에 수장(壽藏)할 곳을 얻으니 그 연유로 후손들이 추원사모(追遠思慕)하는 뜻으로 1,500년
대에 이곳에 봉황정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윤석(全胤錫)의 기문(記文)과 채휴징(蔡休徵,1684~1747)의 등봉황대유감(登鳳凰臺有感)
이라는 詩가 전 하기도 합니다.
정상에는 우물이 있고 북쪽에는 옛 창고 터가 있는데 옛날 근처의 전세(田稅)를
이곳에 모아 뱃길로 운반 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옛날에는 애환이 서린 봉황대 나루가 있었으나 금곡교가 놓여지므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자에서 건너 북동쪽으로 보면 옛날 곶천(영강)물이 간간이 범람하여 왔으나
이곳 봉황대 밑단애를 받아치고 흘러감으로 늘 금곡마을은 안전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어지며
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은 이안천(저천)과 영강(곶천)의 제방이 잘
정비되어 넓은 들판엔 하천변의 질 좋은 충적토(沖積土)의 영향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금곡감자」가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함창읍에서는 아름다운 상주가꾸기의 일환으로 금곡교 입구 공터에 각종
화훼류로 단장한 쉼터를 조성하여 여름철 피서객의 유용한 공간으로 활용
하고자 추진 중입니다.
제5편-만력(萬曆) 36년(1608)에 왕자의 태를....
함창읍 태봉리 대평들 한 중앙에 낮으면서도 기품이 있는 산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으니 세인들은 태봉산 또는 고산이라 부른다.
「산자분수령」에 의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대간 형제봉에서 갈라진
갈령지맥이 작약산을 크게 들어 올리고
하나는 북으로 새봉을 지나 진남교 옆 어룡산에서 그 맥을 가라앉히고
그 하나는 동으로 함창읍 소재지를 가로 질러 덕봉을 빚고
그 마지막이 도곡천과 관천의 합류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급히 빚어 놓으니
바로 태봉이다.
함창군읍지에 소개된 내용을 빌리면
(孤山 在東九里大野中望之如島嶼上有王子胎封萬曆三十六年立標石)이라
적고 있다.
이 태실은 선조의 12남 인흥군(仁興君,1604~1651)으로서 모(母)는 정빈민씨(靜嬪閔氏)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물은 태항아리와 태지석 이다.
태지석의 명문은
「皇明萬曆三十二年二月初七日生王子阿只氏胎」「萬曆三十六年十一月初七日」
로서 출생일은 만력32년(1604) 2월7일생 이고
장태일은 만력36년(1608) 11월7일로서 출생 후 4년9월만에 태실을
조성 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태실자리는 대개 세 부류로 나누는데 제일은 왕손과 세손을, 제이는 대군과 공주를,
제삼은 군과 옹주의 태를 묻었다고 전한다.
상주에는 태실이 세 곳에 존재 하는바 함창읍 태봉리, 화서면 상현리, 모동면 상판리에 태실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8 ~1930 사이에 경기도 고양시 소재 서삼릉으로 민폐를
끼친다는 이유로 이봉을 하였다고 하는데
함창읍의 태봉은 리 의 이름도 태봉리로 쓴다.
그 옛날 마을도 이 부근에 있었으나 갑술년(1934) 대홍수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유실되고
현재의 태봉마을로 집단이주를 하였다고 한다.
태봉의 선정은 관상감(觀象監)에서 담당을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태실 증고사
(證考使)를 지방에 보내어 전국을 돌며 길지의 태실지를 선정 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 한양에서 사백삼십칠리나 떨어진 함창에까지 명당길지를 찾아서
태를 묻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함창은 풍수 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곳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함창에서 오동리와 태봉리를 지나 금곡,하갈 방면으로 진행하다보면 들 한가운데에
아주 잘 생긴 나지막 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산이 바로 태봉산 이랍니다.
제4편 -「천년전의 아름다운 향내음」
천년 전의 아름다운 향 내음
함창읍 증촌리 용화사(龍華寺)에 보물 두 점이 있어 함창의 역사성을 뚜렷하게 증명 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는 본래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상안사(詳安寺⇒함창군읍지에는「祥安寺在宰嶽山或曰蛇安以邑基是形故名云今廢」라 적고 있다)의 유지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상고 하기는 어려우나 조각품이 신라시대 석조유물이 수점 남아 있어 규모가 큰 옛 절의 유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절의 법당 안에 보물 제118호인 石佛立像과 보물 제120호인 石佛座像 각 일구(一軀)가 봉안되어
있고 경내에도 석탑 및 석탑재·광배편(光背片)·장대석(長大石)등 많은 석조의 부재가
마을 인근에 산재하고 있었던 것을 절 안에 모아 두고 있다.
석탑은 법당을 중건 할 때에 동편 옆집으로부터 옮긴 것이며 법당안의 석불 양구(兩軀)도 석탑 북쪽 대지위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석불입상(石佛立像)은
출토불로 전해지며
한 장의 판석으로 여러 입상을 양각 하였으며 판석은 곧 광배를 이루고 있는데
그 표면은 마멸이 심하여 화염문(火焰紋)을 조각 한 것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불상의 높이는 148cm정도로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섬세한 조각의 부분은 알 수 없으나 조형이 정제되고
조성 수법도 우수 하다.
원만하고도 미련한 상호라던가 당당한 양쪽 어께와 가슴, 그리고 부드러운 양팔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에서 느껴지는 인상으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불좌상(石佛座像)은
용화사 법당의 주존 불로 봉안 하고 있는데 광배는 없으나 대좌(臺座)를 갖추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의 석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덟모로 조각한 하대석에는
복판연화문(伏瓣煙花紋)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으며
상대석은 원형으로 조성 되었고 측면에 앙연(仰蓮)을 홀 잎으로 각 여덟각에 꽃잎을 한개씩
조각하고 각 면에도 꽃잎을 한개씩 배치하여 합해서 열여섯 개의 꽃잎인데
각각 꽃잎 안에는 다시 이중의 화판장식이 있다.
불상은 운모가 많이 섞인 화강석으로 조성된 여래상으로
불상의 높이는 168cm 정도이고 전면적으로 마손이 심하여 풍부한 인상을 감하고 있으나
상호가 원만하고 양쪽 어께가 당당하여 통일 신라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양쪽 손과 발의 조각이
둔중(鈍重)하고 의문(衣文)이 선명하지 못한 점으로 보아 신라 하대인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측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함창읍 용화사에 보물 제118호와 120호가 소재하고 보물119호는 상주시 복룡동 석불좌상이다.
상주에 돌로 된 작품 중에 보물이 몇 점 소재하는바 사벌면 화달리 삼층석탑이 보물 제117호이며
신봉동에 소재하는 석각천인상은 보물 제661호이고 화북면 상오리 칠층석탑은 보물 제683호로
지정 되어 있다.
모두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복룡동 석불좌상과 상오리 칠층석탑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한다.
새봄과 함께 천년 전의 아름다운 문화적인 향 내음에 한번 심취해 보시지 않으시려는지요.
제3편 -「傳 古寧伽倻王陵」
상주는 경상도의 웅도로서 광활한 경지면적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다.
경상북도에 경주시는 수기의 왕릉이 소재하고 있고 그 전통의 맥이 명확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에 옛 삼국시대를 논할때에 역사적인 면에서는 언제나 대표적
인 고도 이다. 우리시에도 일찍이 왕릉으로 칭하는 두 곳에 큰 덤이 있으니
하나는 사벌면의 둔진산 자락에 「傳 沙伐王陵」이요, 또 하나는 함창에
「傳 古寧伽倻王陵」이다.
함창의 陵은
까마득히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서기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중 함창,문경,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나라를 세운 고령가야 태조의
능이라 전하여 오기에 그 연륜 만은 대단하다 할 것이다.
우리 지역의 가야관계 문헌 전승은 여지승람 하권 함창고적조에 기록되고,
조선 순조대에 만들어진 「함창현읍지」 능묘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陵墓伽倻王墓 在縣南二里左右麓有二墓世傳爲王陵本邑胥吏多咸寧之金稱爲後裔改封築竪碑歲祀之』
(능묘 가야왕묘 현의 남쪽2리 좌우 산록에 두 묘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릉
이라 한다. 본 읍의 서리중에 함녕김씨가 많아 후예로 칭하여 봉분을 쌓고 비를
세우고 해마다 제사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다).
조선조 선조25년(1592년)에 경상도 관찰사 김쉬와 함창현감 이국필등이 무덤 앞에
묻혀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가야왕릉임을 확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숙종38년(1712년) 왕명으로 묘비와 석양등의 석물을 마련하고 후손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묘역이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답니다.
태조왕의 왕릉을 서릉(西陵), 비릉을 동릉(東陵)이라 부르는데
왕릉은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원형 토분으로 약간 구릉지대의 넓은 공간 중심부에
자리하고 약200m정도로 서로가 떨어져 있답니다. 이 능의 규모는 왕릉의 경우
봉토의 직경이 동-서 14m,남-북이 13m정도이고, 왕비릉은 형태는 원형에
가까우며 동-서11m,남-북12m정도로 지금은 리 의 경계에 따라 왕릉은
함창읍 증촌리에, 왕비릉은 오사리에 속하여 있지요.
왕릉 앞에
萬歲閣(1930년대 건립)은 함창김씨 재사(齋舍)로 정면5칸,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있으며 三門은 맞배지붕으로 현판에 承武門이라 적혀있고 숭령전,
홍살문,사적비등이 잘 정비 되어 있답니다.
대부분의 傳 왕릉이 한기의 큰 덤으로 전해 오는 게 다수이지만 함창의 왕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뚜렷하게 전해지는바 상주와 함창의 후예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가슴 아픈 일이나 앞으로 많은 연구와 학술적인 고증을 거쳐 언젠가는 “傳”자를
사용하지 않는 가야왕릉임이 밟혀질 날을 기대하며, 현재
1977.12.29.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6호 「전 고령가야왕릉」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소유는 咸昌金氏 門中으로 매년 음력 3월 3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는 우리지역에
감히 「王 」을 거론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 邑 昇格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삶의 질은 나아졌으나 아름다운 우리의 고유한 美風良俗이 사라지고 지역에 노령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우리의 것이 가장 소중한 것 임에도 전달이 되지 않아 잘 모르거나
지켜야 할 부분이 없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 고장 함창의 모든 부분을 지역민 및 출향인에게 알려 애향심 고취로 지역발전 및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 게시내용 : 함창의 유래 및 연혁 · 문화재 · 명승지 · 산 · 천 · 마을유래 · 농특산물 등
❍ 게시방법
• 일주일에 1회(매주화요일) 정기적으로 게재
❍ 게시장소
• on line
- 상주시청 홈페이지 함창읍편 마을소식란에 게재
- 전자결재 ‘아름다운 상주가꾸기’란
- 함창초등학교 “다음카페”란 등
• off line
- 함창소식지(연1회발간)『고장의 문화유적지』,『우리고장 바로알기』
코너의 연재로 출향인과 읍민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실시
★ 내고장 함창알리기 1편은 함창읍의 옛지명인 [고동람군] 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