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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선인들
1. 매월당 김시습(金時習)과 구은(九隱)
1-1. 김시습, 「金化路傍樓上小憩」, 『梅月堂詩集』
山重水疊路縈廻。似入桃源洞裏來。小雨新晴搖麥浪。野花初拆引蜂媒。仲宣樓上那無賦。潘閬驢中正可咍。從此遊觀好風景。看花登盡幾崔嵬。
1-2. 김시습, 「寶蓋山」, 『梅月堂詩集』
寶蓋山容碧。東州秋色多。年光急似箭。人事薄於羅。古壑煙嵐靜。長途歲月賖。飄飄緣底事。到處卽爲家。
1-3. 김시습, 「有僧自寶蓋山來。有作」, 『梅月堂詩集』
東州千古地。曾是泰封關。寶蓋雲如繖。菩提月似盤。危藤縈棧道。飛瀑漱巖間。因憶曾遊處。秋風葉正殷。
1-4. 최익현, 「탁영재유고(濯纓齋遺稿) 발」, 『면암선생문집』
이름을 신적(臣籍)에 올리고 예물을 임금께 바쳐 신하가 된 사람은 불행히 국가가 위험한 시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는가? 우리 부자(夫子 공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기 위해 인(仁)을 해치지 아니하고 몸을 희생하여 인을 완성한다.”
하였고, 또 거백옥(蘧伯玉)의 어짊을 칭찬하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 나와 간직한다.”
하였다. 이는 죽을 경우를 당하면 죽고, 물러가야 할 경우를 당하면 물러가야 하는 것으로써 다 성인이 허여한 바이므로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해 박씨(寧海朴氏)에 탁영재(濯纓齋) 휘 규손(奎孫)이란 분은 전임 예빈 경(禮賓卿)이었다. 세조조에 온 천하 백성들은 요순의 정치를 경축하였지만, 그는 마침내 김동봉(金東峯 김시습(金時習))ㆍ조정재(曺靜齋 조상치(曺尙治)) 두 선생 및 돈수공(遯叟公) 이하 5, 6인의 동족과 표연히 멀리 가서 화강(花江)의 초막동(草幕洞)에 자리 잡고는 자규사(子規詞)를 화답하고 채미절(採薇節)을 본받아 숨어 산 것이 30여 년이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동향하여 첨배(瞻拜)하였는데 눈물이 옷깃을 적셨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그후 공의 형제와 사촌들은 혹은 동으로 혹은 서로 모두 궁벽한 곳을 찾아서 은둔하였으나 공만을 떠나지 않고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부모의 고향이다. 산소가 가까이 있는데 차마 버리고 멀리 가겠는가. 막곡(幕谷)의 외로운 달과 행정(杏亭)의 봄바람에 저 맑은 샘물을 떠서 나의 갓끈이나 씻을 뿐이다.”
하였다. 아, 공의 충효 대절은 여기에서 갖추어졌다 하겠다.
사람이 자그마한 몸으로 천지와 아울러 삼재(三才)가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仁義)가 있어서이다. 인은 부자(父子)보다 큰 것이 없으며 의는 군신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공의 수립한 바는 군신 부자의 대륜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른바 ‘우주를 부지하는 동량(棟樑)이요, 생민을 편안히 살게 하는 주석(柱石)이다.’란 말이 공과 가깝다 하겠으며,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는 말이 더욱 징험이 된다. 저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제공의 목숨을 바친 일과 비교하여도 역시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또 한 가문 안에서 숙질 형제가 같은 마음을 가져서 그 명망과 절개가 함께 빛났으니, 그 가문의 친족 관계가 좋았음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유고를 보는 사람은 그 소문이 고요했다 해서 소홀하게 여기지 말고, 그 시대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여 그가 잡은 마음과 처한 의리를 본받게 되면, 위태한 세상을 사는 데 꼭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1-5. 최익현, 「金化九隱祠遺墟。設壇告由文。(純祖戊寅。建祠享金東峯時習。配曺靜齋尙治,朴遯叟渡,朴坰隱濟,朴濯纓齋奎孫,朴雲窩孝孫,朴司直千孫,朴正郞璘孫,朴逋臣秀孫。今上戊辰毁撤)」, 『勉菴先生文集』
猗歟先生。海東伯夷。存髥淸標。考槃于玆。時惟靜翁。朴門七贒。惠好同歸。所立卓然。聖山峨峨。如拱越中。汶水湯湯。冷浦與通。莊陵純臣。生死齊名。子䂓賡章。唱酬同聲。高風峻節。百世不忘。疇昔崇報。共享一堂。中間見撤。氣數攸關。蔓草荒原。過者涕潸。於焉卅載。復院無望。况値叔季。禮義都喪。多士彷徨。倍切瞻仰。爰謀私享。畿湖是倣。經始設壇。役旣告成。一壑增彩。九位肅淸。籩豆菲薦。爲歲定式。儀雖草卛。寸誠靡忒。伏惟英靈。儼臨千秋。敬奠一杯。敢告厥由。以靜齋曺先生,遯叟朴先生,坰隱朴先生,濯纓齋朴先生,雲窩朴先生,司直朴先生,正郞朴先生,逋臣朴先生配。
1-6. 『연려실기술』
조상치(曺尙治): 조상치는, 자는 자경(子景)이며, 호는 단고(丹皐)이다. 또는 정재(靜齋)라고도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문과로 병사(兵使)가 된 신충(信忠)의 아들이다. 기해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이 세종ㆍ문종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입어 오래도록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공양에 편리하도록 자청하여 합천(陜川)ㆍ함양(咸陽)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때에 집현전이 창설되었는데, 공이 부제학으로 뽑혔다.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드디어 문을 닫고 병을 일컬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이가 은퇴할 때가 못되었는데,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칭탁하기를,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세조가 그의 속뜻을 알고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다릿병을 칭탁하고 들어가 사은하지 않았다. 세조가 백관을 시켜 동대문에서 전송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벗어나 돌아갔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의 절조가 아니면 한 광무(漢光武)에게 용납될 수 없고, 한 광무의 성스러운 덕이 아니면 엄자릉의 높은 절조를 이루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유사(遺事)》
○ 단종조에 벼슬이 부제학이었는데,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마단(麻丹)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 이름이다. 에 퇴거하여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일찍이 큰 돌 한개를 얻어서 쪼지 않고, 꾸미지 않고, 그 표면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曹某)의 묘’라 하고, 자서(自序)하기를,‘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 앞에 세워라.” 하였다. 공이 죽으매, 여러 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었다.공이 일찍이 자규(子規 두견새)를 읊은 사(詞)에,
접동 접동 접동새 소리 / 子規啼子規啼
그 무엇을 호소하노 /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 돌아가리 / 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 땅을 날아서 건너고저 / 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는 깃을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 看他衆鳥摠安巢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 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로웁고 그 모습 초췌하다 / 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뉘라서 널 돌보리 /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랴 / 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 강개불평(慷慨不平)은 /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못 셀 것을 / 屈指難盡數
하였는데, 대개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자규 노래를 듣고, 느낌이 있어 화답한 것이다.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박팽년이 보내 편지에 말하기를, “행차 뒤에 일어나는 티끌을 멀리서 바라보니 높아서 미치기 어렵도다.” 하였고, 성삼문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箕山)ㆍ영수(潁水)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장(曺丈)의 죄인이라.” 하였다. 《영남가찬(嶺南家撰])》
2. 김응하(金應河)
2-1. 최익현, 「요동백묘(遼東伯廟)」, 『면암집』
큰 의리는 중국에 진동하였고 / 大義擎天動夏夷
영웅의 모습 산악 정기에서 났더라 / 稟精山嶽獨英姿
춘추필법 본받은 화양의 붓이 / 誰知褒袞華陽筆
긴 밤에 태양 같음을 누가 알리 / 劈破重陰閉九時
2-2. 김창협, 「김장군사당」, 『농암집』
한낮에도 옛 사당 솔숲 속에 닫혔는데 / 白日松杉閉古祠
신령스러운 바람 불어 깃발이 나부끼네 / 靈風颯爽閃旌旗
지금까지 세간에 심하 전투 전하는데 / 至今人說深河戰
송로께서 쓰신 비문 이곳에서 접해보네 / 是處吾看宋老碑
두 번째
중화와 오랑캐의 대군 서로 대치할 제 / 漢虜相望列百營
동한 장사 충성 바쳐 장렬히 죽었다네 / 東韓壯士死分明
사막에 묻힌 백골 천추에 묻지 마오 / 千秋莫問黃沙骨
충신 이름 만국이 태양처럼 떠받드네 / 萬國同懸白日名
세 번째
버드나무 슬픈 바람 전투 뒤에 거세지니 / 柳樹悲風戰後多
복 부르는 화살 따라 국경 건너 혼이 왔나 / 魂隨復矢度關河
기련 본떠 표요 무덤 부질없이 쌓았거니 / 祈連虛起嫖姚冢
장사 용맹 기리는 농상가(隴上歌) 구슬프리 / 壠上長悲壯士歌
네 번째
헌칠한 키 긴 팔로 활을 힘껏 잡아당겨 / 長身通臂引雕弧
필마 타고 음산에서 오랑캐를 쏘았다네 / 匹馬陰山獨射胡
어이하면 격전 모습 그림으로 그려내되 / 安得丹靑寫酣戰
적에게 투항한 두 놈까지 드러낼꼬 / 傍邊更著二降奴
다섯 번째
노한 머리 곧추서고 부득부득 이 갈면서 / 怒髮衝兜齒嚼齦
용천검을 잡은 채로 죽어서도 성난 모습 / 龍泉在握死猶嗔
수양성에 떠도는 원귀의 맘 어떠할까 / 睢陽厲鬼知何似
통탄일레 중국 천지 아직까지 오랑캐 땅 / 痛恨神州尙虜塵
여섯 번째
내 들으니 최영도 철원에서 났다는데 / 崔瑩曾聞起鐵城
장군은 뒤에 나서 한층 더 뛰어났네 / 將軍後出更崢嶸
먼 후대 역사에서 공과 죄를 살필지니 / 千秋靑史看功罪
영웅을 한가지로 평가하지 말지어다 / 莫把英雄一例評
최영과 장군은 모두 철원 사람이다. 두 사람이 활동했던 시기는 마침 명(明)나라의 국운이 시작되는 시기와 끝나는 시기로, 한쪽은 순리를 거스르고 한쪽은 의리를 실천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C-001]김 장군(金將軍) 사당 :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의 위패를 모신 철원(鐵原)의 포충사(褒忠祠)이다. 1683년(숙종9)에 묘정비(廟庭碑)와 함께 세워졌는데, 한국 전쟁 당시 불타서 없어졌다. 비문(碑文)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썼으며, 비신 위쪽의 전서체 글씨는 작자의 아버지 김수항이 썼다. 김응하는 자는 경희(景羲),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618년(광해군10)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건주위(建州衛)의 후금(後金)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김응하는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갔는데,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 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명 신종(明神宗)은 그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조선에서도 1620년(광해군12)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龍洲集 卷19 贈領議政金將軍神道碑銘》
2-3. 정조, 「포충사」, 『홍재전서』
황조(皇朝)로부터 요동백(遼東伯)에 추증되었고 시호가 충무공(忠武公)인 김응하(金應河)가 일찍이 심하(深河)의 전쟁에 나간 지 삼회갑(三回甲)이 되는 무오년 모춘(暮春) 19일, 즉 의종 장렬제(毅宗莊烈帝)의 휘신일(諱辰日)에 충신(忠臣) 제가(諸家)의 후손들과 함께 삼가 대보단(大報壇)의 봉실(奉室)을 배알하고, 먼저 선전관(宣傳官) 등을 명하여 충무공의 사손(祀孫) 김택기(金宅基)를 단망(單望)으로 천거하게 해서 당일로 그에게 선전관을 제수하였다. 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충숙공(忠肅公) 조정익(趙廷翼)의 후손으로 무장(武將)이 된 사람들을 명하여 북영(北營)으로 가서 유엽전(柳葉箭)을 시험해서 초시(初試)를 내리게 하고, 인하여 북원(北苑)에 임어해서 친히 시험하여 급제를 내려서 특별히 무오 식년방(戊午式年榜)에 붙이었다. 이 일이 마치 때를 기다림이 있는 것 같으니, 어찌 옛일에 대한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만일 영령(英靈)들에게 앎이 있다면 반드시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철원의 포충사에 걸게 하노라.
남아의 명성이 사이에 널리 전파하여라 / 男子聲名聞四夷
화려한 고명 요동백이 해동의 인물일세 / 遼東華誥海東姿
심하의 늙은 버들은 사람처럼 서 있으니 / 深河老柳如人立
알건대 장군이 칼 기대어 섰던 때이리라 / 知是將軍倚劒時
2-4. 김조순, 「詠金烈士事」, 『臺山集』
節制之孫國寬。以武勇聞。深河之役。從金將軍應河。同日立慬。走回人申忠業。目擊而道其事。見載邑誌。
深河高柳老難僵。猿鶴悲吟古戰塲。長遣胡兒澆馬湩。三韓烈士死堂堂。蒙古入汴。陳和尙力戰不屈而死。蒙古將義之。以馬湩酹而祝曰。好男子。他日再生。令我得之。
華陽鉅筆日星懸。夷夏高名仰鐵圓。未遇韓公賡後敍。誰從楚國傳先賢。尤菴先生撰金將軍碑。烈士事未及槪見。故落句云。鐵圓。鐵原古號。將軍鐵原人也。
2-5. 강재항(姜再恒), 「김응하전(金應河傳)」, 『입재선생유고(立齋先生遺稿)』
金將軍應河者。鐵原人也。字景羲。高麗名將上洛公方慶後也。應河早孤。獨與弟應海處。及長。膂力過人。善騎射。觀察使朴承宗行縣。至鐵原閱武。應河射矢輒中。承宗奇之。已而選武擧。數歲不得調。會承宗爲兵曹判書。薦授宣傳官。當路有忌之者黜之。未幾承宗復爲湖南觀察使。召應河供幕職。時有國哀。承宗飭所部莫近酒色。他幕僚莫不犯。而應河獨不犯。承宗亦以此奇之。鰲城府院君李恒福聞其賢。擢拜慶源判官。又落職家居。承宗復爲兵曹判書。復召應河。四遷至北虞侯。應河長八尺餘。慷慨有大節。判慶源時。客飾小艾以獻曰。此貴家女。公豈有意乎。應河歎曰。應河故貧賤。貴家女難畜。並妻則亂。以妾則㤪。且人福兮如布帛。尺寸有限。豈可因一女子致之乎。且今法不得將家。念昔日糟糠。更何忍用此乎。及至。觀察使韓浚謙黜之。及浚謙廢。應河先人往問。人曰。韓公於公何如也。公乃如是。應河曰。韓是我舊帥。豈有芥滯於懷也。甞病疫將死。其友持藥椀大聲號曰。子常自許死國。今何因一病寂寞死。誰知之者。應河聞言。卽張目飮其藥立盡。朴承宗葬其父。有中使來。或謂應河曰。中使見公狀。必稱於上。公宜加禮。應河歎曰。大丈夫寧可附閹寺得榮利乎。且因此得尺寸。獨不內愧於心。聞者皆服。明神宗皇帝萬曆四十六年。建酋奴兒哈赤叛天子。大發兵。四路討之。且徵兵於我。屬都督劉綎深入擊之。時我光海君十年也。光海君以姜弘立爲都元帥。金景瑞爲副元帥。發兵二萬以應詔。時應河以助防將宣川郡守。隷景瑞麾下。應河自度偏裨無所用。請於朝願無屬大帥。獨於咸鏡路江上當一面。不許遂行。應河分必死。與家人訣別。封職帖印章授郡吏。且致書承宗托其孤。謂部將吳憲曰。吾夜夢擊賊。賊斫吾首而去。吾將多殺賊。不浪死。爾其識之。其弟應海欲俱往以相救。應河曰。吾分當死。汝從吾死無益也。止之。遂佩二弓百箭而行。諸將怪之。四十七年春三月。行至深河堡。劉綎與遊擊喬一琦將燕薊兵三萬爲前行。弘立,景瑞將我兵殿後。劉綎等至富車嶺。遇虜伏戰大敗。綎死之。一琦敗走。虜乘勝直薄我軍。時應河爲左營將。以三千人居前行。使人告弘立曰。今我以孤軍遇大敵大軍。若不齊心協力於死中求生。事必敗。願急令右營兵來助戰。弘立卽令右營將李一元往助應河。應河謂一元曰。我兵多步。虜兵多騎。步兵利據險。騎兵利平地。今我兵在平地。若虜以鐵騎蹙之。必立盡矣。不如移兵屯。一元不從。已而賊縱精騎數千。橫截兩陳間。一元不戰遁去。一元軍亂。賊大敗一元軍。遂萃於應河軍。應河申令堅陳以待之。賊陳在一里外。可五六萬。縱精銳薄應河軍。應河傳發火炮。賊兵却已而復進。如是者三。賊終不得縱。時喬一琦在中軍望見彈指曰。平地。以步卒支吾鐵騎如此。眞可謂善戰者也。歎不已。會天風大起。飛沙礫摶面。銃藥皆飄散。賊乘之。軍遂亂。應河知事不濟。被重鎧倚柳木。射殺賊數十百人。賊不敢進。環而射應河。矢集如蝟。應河不動。矢且盡。應河拔所佩釖擊賊。復殺數十百人。先是弘立使通事河世圖 一作國 于虜軍。至是虜呼世圖。應河愈怒戰益力。釖折。復易釖擊之。前後所殺傷無數。弘立已與虜通。見應河急。斂兵不救。應河大呼曰。姜元帥胡不戰。始吾王敕吾等云何。玉音猶在耳。生固不惜。如王命何。况劉都督已死。吾義不可獨生。復引釖擊賊。釖凡三折。應河持半釖向賊。賊猶不敢近。以槊從應河後刺應河。應河遂死。賊旣殺應河。招弘立,景瑞。弘立,景瑞以八千人降虜。虜旣殺應河。降弘立等。相謂曰。柳下將軍勇無雙。朝鮮若有此輩數人。豈易敵哉。後數月。虜人斂天兵及我兵死者。應河顔色如生。右手釖柄猶在。虜共射其目。事聞。累贈領議政。立祠江上。其後弘立以虜兵入冦。上如江都以避之。崇禎九年。虜又大至。陷江都圍南漢。請盟而去。崇禎十七年。虜竟下燕有天下。應河弟應海官至節度使。亦壯健使氣義。有兄風云。
贊曰。世言帝聞應河死。封遼東伯以褒之。又有僞撰詔命者。及懷川作應河廟碑。亦題曰遼東伯。南伯居克寬生曰此皆非也。爲之考論頗詳密。故不錄。然亦烈矣。我之誠心服事於明。亦足暴矣。
2-6. 이재, 「金將軍應河傳」, 『密菴先生文集』
昔我先人。嘗次其文章議論有及皇朝者。名之曰尊周錄。因歎曰國家不全負神皇罔極之恩。賴有金將軍一死爾。世 所謂金將軍傳。猥釀不堪讀。爲可慨。己嘗因其後孫求得忠烈錄一本。蓋欲早晩立傳。參以議論。以傳信來世。亦欲自抒其悲憤。推遷多故。未及屬筆而棄諸孤。不肖孤追慟靡及。乃於竆愁中。就忠烈錄本。芟其煩蕪。旣又掇拾見聞。參以龍洲趙公所撰碑。以爲金將軍傳。顧文字短淺。終不足以揚勵偉蹟發明先志。是可懼也。
金應河字景羲。高麗名臣忠烈公方慶之後也。數世居關東之鐵原府。太僕判官珍生國子直講麟祥。麟 祥生騎省郞中韌。韌生贈參判地四。是實生應河。萬曆二十年倭發亂。明年國大饑。殭屍滿野。人相食且盡。時應河年十四。偕喪父母。將無以葬。適遇異僧指佳兆以葬。祭必以禮。不以遇兵難爲解。有弟名應海憐愛甚。鄕里一辭稱孝友。少長力田以自給。時射獵以爲生。嘗病癘危死。其友持藥呼曰君非自許以馬革裹尸者邪。今寧死於一疾乎。應河瞋目飮盡三椀乃穌。三十年。觀察使朴承宗行部至州。試才勇得應河。大奇之。勸令攻支左屈右。越三年中武科。例戍北邊。瓜還置散。後二年承宗判騎省。薦授宣傳官。明 年夏有嗛應河者。陰中以法。應河卽日歸家。無幾微見言面。已從承宗佐戎湖南。時當穆陵新陟。屛酒色無得近前。學士大夫自以爲不如也。晝則習騎射。夜歸讀鈐略。其奮厲自樹立又如此。尋再授宣傳官。會有以應河名聞于體相李公恒福者。超薦至慶源判官。將行有爲應河言。有貴家女少而艷。君若欲置便房。無出是女右者。且有進取利。應河辭曰吾素貧賤。彼嬌貴兒。豈易畜哉。因女子媒進。吾又羞之。在慶源秩滿將還。韓西平浚謙時按北臬。誤注下考。因辟幕府。及韓公扞文罔黜郊外。應河先往候之。或謂此 非前日誤考君者邪。應河笑曰是吾舊將。吾豈以細故芥懘爲。人益以此多之。俄擢拜都總經歷。出知三水郡事。尋陞北虞侯。節度使符。應河監築城。量功命日。親董月餘。工告訖。口未嘗言功。應河勤敏有操槩。在本道首尾四年。吏畏民懷。蕃胡爭來附之。及還。凝原君卒且葬。文武大夫士來送之。會朝廷遣中貴人監護。或勸應河延款曰。是朝夕給事上左右者。何不以君好身手。爲一交歡。令延譽于上。其勢必得所欲。應河蹙然曰毋夤緣覬僥倖。豈丈夫所爲乎。一座咸嗟異之。初建虜數侵擾北邊。爲中國患。四十六年 秋。攻陷撫順衛。總兵張承胤以下全軍敗沒。神宗皇帝遣楊鎬經略東北。詔發川蜀,幽燕諸路兵討之。於是杜衳,劉綎,馬樕,喬一奇等。各將步騎合三萬餘人。分四路馳出關。綎老將。習兵事。屢鎭北邊有功。嘗以事殺奴酋父哈失。惜奴沈勇有異姿。撫置之幕下。一日亡去。入深山冶鑄致富。聚黨至數千人。綎患之。使人謂曰女忘吾活爾恩耶。奴答曰大爺固活我。其敢忘殺吾父耶。天子以其兵猘甚。詔徵兵于我爲後援。於是以姜弘立爲元帥。金景瑞爲副元帥。分兵爲左右營。以順川郡守李一元爲右營將。以應河爲 左營將。帥步兵三千屬景瑞。時應河方知宣川郡事。知不得有爲。請於朝願得自當一面。不許。遂行。應海欲隨往。應河止之曰兄弟俱死無益。與家人訣。不一語及私事。解印綬封識訖。授郡吏。戒勿汚賊。十月自昌城移陣朔州。士寒凍有死者。終無逃散意。明年二月渡遼至鬱郞山。與綎等會。綎,一奇將大衆當前茅。應河以左營次之。弘立,景瑞爲中勁次之。李一元在後爲殿。癸亥至富車嶺。與賊相遇。綎墮重圍。衆遂潰。綎自焚死。虜乘勝長驅。其鋒不可當。應河告急。元帥曰孤軍深入。彼衆我寡。其勢不相敵。請與右營合兵 擊之。弘立令一元進兵。一元從平地陳。應河謂曰步卒陳平地。兵家所忌。今陳庳殆不可乎。一元執不肯。俄而虜數千騎。衝左右營。一元被創先遁。右軍亦潰。於是虜之精銳約五六萬騎。咸萃左營。相去一里所。應河令軍中砲築藥。弓者持滿。聞鼓聲而縱。不者有軍法。及浴銕之騎如牆而進。應河援枹鼓之。矢丸一時俱發。虜前騎大崩。若將還軍者。已虜又選壯補缺。出死力進鬭。幾三四合。合必我軍捷。時喬遊擊以數十騎奔中營。欲與之共事。望見應河督戰狀。歎曰平原易地。以僅千步卒。能支數萬鐵騎。可謂好利兵。尋 亦自縊死。會大風衝塞起。沙礫擊人面。日色晦冥。銃藥飄散。丸不得發。我軍無所施其技。虜乃乘之。將士駭散無人色。應河被重鎧。獨峙柳樹下。引大黃射之。虜應弦而倒。中必疊雙。所殪多裨少貴人。應河身被數十創。射矢且盡。持長劍奮擊。所殺傷尤多。劍折不得復擊。有一虜持戈從後刺。仆地已殊。劍柄尙在手。虜猶恐其生。不敢近前。弘立,景瑞從壁上觀。見賊勢大盛。懼甚不敢抎一矢向虜。及見應河軍敗且死。皆解甲迎降。先數日。弘立等陰遣舌人河世國于虜中。至是虜呼世國。趣二帥降。應河名弘立,景瑞曰。爾曹 平日荷國寵榮何如。今乃忍爲此。二帥慙無以應。已虜相指言柳下一將。最雄勇善射。朝鮮若更有此輩數人。不可敵也。至收尸瘞之曰。死久顔色如生。右握刀不釋。好男子好男子。異日再生。願我得之云。事聞累贈領議政。弔祭有加。家復不事。官其弟應海。立祠龍灣江上。刻石以紀其績。楊經略聞之大慟。爲文以祭之。中朝大臣白其事。天子嘉之。詔出天府白金萬有餘奇。大賚我國。俾優恤其家。應河身長八尺餘。魁梧有奇氣。有神力善射。弓不假人。自造殊制。寡言笑。動止有常。能食酒數斗不亂。一時曹偶皆許以 眞將軍。死時年四十。應海至昌江上。以矢復而歸。爲衣冠葬。承宗次其序傳哀誄賜祭文若干篇。爲忠烈錄。行于世。子益鍊水軍節度使。有父風早卒。今其曾孫重器官至賊曹大將。應海曾孫重元,重三。亦爲節度使。
嗚呼。余後丙子城下之盟已數十年。每讀昭敬王萬折必東之語。未嘗不扼掔流涕曰。嗟乎痛哉。彼二三臣者。亡論天經地義人事之紀。卽再造罔極之恩。何遽視如弁髦。爲卒之賣國偸生。靦然自以爲得計。何以見先王於地下。又何以有辭於天下後世也。 及讀金將軍忠烈錄。又慨然想見其爲人。噫。微應河一死。擧一世幾不免爲禽獸矣。先王必東之志。惟應河爲少酬矣。精忠偉烈。至今凜凜有生氣。豈所謂與日月爭光者非耶。劉將軍號爲中朝善用兵者。擁大衆。未及出一奇。爲其所蹂躙。獨應河提步卒不滿數千。當乘勝之虜。身所擊殺如此。信善戰且烈哉。然若應河者。豈但雄勇伉健。善騎射力戰鬭之爲難哉。表著天心。扶持人紀。爲東方萬世人臣忠義之勸。是爲難耳。語曰非死之難。處死爲難。豈應河之謂乎。且應河旣用武進。寧有學問講習之素。特以其忠義之 性。鬱於中而作於外。能殺身成仁。無求生以害仁。其視攻文辭以取貴。擁金貂自尊大者。一朝俛首帖耳。甘心犬豕之行之爲。其賢不肖何如也。或者以爲是役也。虜蓋悉其精銳。如使爲中勁者出一隊以相援。嘬其銳而踣之。虜必十年不振。我以其隙。修城鍊卒。以壯邊威。庸詎有丙丁之辱。信斯言也。弘立,景瑞之罪。直上通於天。嗚呼可勝言哉。承宗旣識應河困汚之中而力推挽之。何不畁大將權。得專制於外。必令從小竪子受其節制。豈不重可痛哉。余旣備著其蹟。於聖天子恩賚。尤切有感焉。因表而出之。以俟夫 秉史筆者攷焉。
偶見一士人家小說。其中有記應河事。而載中營中部將李繼宗戰死事。又曰一元旣敗走。應河與左部將李有吉走山上結陣。片箭盡。以長箭射殺賊無筭。有吉亦射倒十餘級。尋中矢死。又曰應河被堅甲。賊槍不能入。以手從後捲甲刺之。遂仆地。又曰喬一奇本遼東人。憤朝廷不用平戎策。祝髮爲僧。及虜陷撫順。朝廷思其言。召爲鎭江遊擊。及戰敗死。遼東人莫不流涕云。此皆本傳及神道碑所不載。故剟而附之。一奇之奇。一作琦。
2-7. 조경, 「贈領議政金將軍神道碑銘 幷序」, 『龍洲先生遺稿』
皇明萬曆四十七年己未春。建州夷逆命。天子赫然出師征之。且徵兵我東。蓋視同內服也。時天朝經略卽楊鎬。我國元帥卽姜弘立。副卽金景瑞。分軍爲左右營。將軍以宣川郡守。兼助防將將左營軍。軍行。劉都督,喬游擊當前茅,我左營翼其左。李一元佐將軍。弘立,景瑞中勁。至深洲布陣。將軍謂一元曰。軍志有之。先據北山者勝。今我陣庳。殆不可乎。獨無高處。一元執不肯。趑趄間虜騎數千衷我左右陣。一元先遁。於是虜之精銳咸萃左營。將軍令軍中曰。砲者築藥。弓者持滿。聞吾鼓聲乃縱。否軍法在。俄而浴鐵之騎堵墻而進。間不十步。將軍授枹鼓之。虜中丸而死者不記其數。空鞍虜馬塞逕。虜大崩。居頃之。虜又選壯補缺。出死力進鬪者幾三四合。合必我軍捷。虜將走矣。大風忽衝塞。起沙礫擊人面。日色晦暝。火器與藥飄颺半空。我軍無所施其技。虜乃乘之。我軍亂。將軍獨倚柳樹。彎大黃射虜。中必疊雙。應絃而倒。虜之死者過當。矢盡則持長劍搏戰。其所斬刈。又有倍焉。將軍亦被數十創。性命已殊。猶握劍柄。植立不動。怒目勃勃云。當此時。爲中勁者出卒一隊。作蟻子之援。虜雖衆。未必不半折於將軍之一拳矣。弘立,景瑞徒從壁上觀而反覆生奸。甘心將軍血虎牙。不抎一矢向虜。非虜之寇。乃弘立,景瑞也。李少卿言陵與律之罪上通于天。是猶自知罪也。不知弘立,景瑞其能自知罪也哉。噫。將軍信善戰。且壯哉。杜崇,劉綎以中國名將。將十萬兵。暫爲虜蹂躪。血流波道。無一卒還。將軍獨當乘勝之虜。抑萬萬拐子馬。使堇千弱卒。視死如歸。身所擊殺如此。雖關雲長,岳武穆。曷以過焉。喬游擊之至死。津津稱東國兵利將勇不容口。虜人旋師。猶避柳下戰場。必曰柳下將力戰可畏。至收屍瘞之曰。好男子好男子。異日再生。願我得之。將軍之名動華夷。豈虛也哉。人有恒言。慷慨殺身易。從容就死難。若將軍者。死綏之志素定於受脤之初。彰彰明矣。弟應海欲從。將軍以爲俱死無益止之。與家人訣。不及私事。封識印章。屬郡吏戒勿汚賊。此非從容就死而奚。惜也朴相不薦將軍則已。旣才將軍而薦之。胡不畀之大將若酇侯之薦淮陰者。抑有國運天時之有與於其間耶。或曰。深河之役。虜勢方盛。我如挫其強而熸之。虜必十年不振無疑。我以其暇鍊士厲卒。以壯邊威。惡有丙丁之亂。信斯言也。弘立,景瑞之罪。歷世難貰。庚申春。神宗皇帝用嘉將軍力戰死之之狀。出天府白金萬有餘奇大賚我國。俾恤將軍家。於是天下之人訟共頌將軍名。相傳道籍籍。介冑之士。則恨不得與將軍俱角虜接踵而死。秉筆之徒。則恐不能盡寫將軍鏖戰狀。以光皇明敦史之萬萬也。將軍之死。今近四十餘年。而談其事者。怳若挹將軍喑啞叱咤於阿睹中。凜凜有生氣。孰謂人與骨皆已朽哉。將軍名應河。字景義。姓金氏。本安東人。著籍鐵原堇數世云。曰珍。太僕判官。曰麟祥。成均直講。曰軔。兵曹正郞。曰地四。贈參判。於將軍高曾祖若考也。將軍生十四歲。遭父母喪。遇異僧指示好丘。葬祭以禮。不以童子爲解。與少弱弟友愛備至。鄕里稱之。及長。彎弓石八。弓不假之人。自造殊制。身長八尺。志氣磊落。一時曹偶皆許以眞將軍。皆出其下。二十五。擢武科。朴相承宗判兵曹。擧爲宣傳官。明年。坐忮者見汰。卽日歸家。無幾微懟色。戊申。褊裨湖南幕。卽朴公按使時也。時宣祖大王國恤初。將軍居戲下不近酒色。持戒終始不怠。聞者以爲儒者不如。庚戌。再授宣傳官。李時彥盛稱于白沙李相。李相擢授慶源判官。將行。有人紹介貴家女美而艶者屬將軍畜。將軍辭之。在慶瓜滿。觀察使韓西平誤置下考。仍隷幕下。及西平扞文罔廢。將軍往唁先諸人。人疑其非情。將軍曰。韓吾舊將。吾何以記憶細故而形迹爲。蓋其胸次坦蕩類此。自此名實籍甚。歷都摠經歷,三水郡守。至北虞候。雖皆朴相尉薦。實因衆望也。縻職處北關者四載。靡職不擧。至於爲植致力。有過陶長沙運甓者。其不伐又有公孫大樹風。嘗遘厲虐苦幾死。其友操난001藥大呼曰。君平生自許馬革裹尸。今寧死於一病乎。將軍瞋目而飮盡三椀乃甦。至深河之役。果忘身徇國立大節俱如其志。庸不烈烈男子哉。本朝亦特贈將軍階大匡。爵領議政。國家顯忠崇節之道。良足千古矣。弟應海等矢復于灣上。而葬衣冠于先壟下。將軍室。僉樞尹時益之女。生二男二女。男長益鍊。登虎榜。官全羅右水使。蔚有父風。不幸未究其用而卒。次時鍊。早世。女柳信傑。宣傳官。次金基。幼學。側室男承鍊。孫世龜。宣傳官。益鍊出也。世聲。時鍊出也。柳信傑生二男。長坦然。江界府使。季斐然。肅川府使。金基生四男。翊勳,翊華,翊文,翊武。女趙一善。幼學。銘曰。
鈹弨何歸乎。殫於斫虜兮。衣冠何歸乎。藏於若斧兮。魂無不之兮。矧此狐丘。死面如生兮。先軫其儔。齒碎無餘兮。眞源莫先。帝命胙女兮。貤贈我宣。痛彼降帥兮。遺臭世世。繩彼庾信兮。功止羅際。夫孰如公兮。效命天王。名噪薄海之不足兮。汗竹煌煌而廟食其鄕兮。柏板松楹虔揭靈妥兮。燁如旌節下大荒兮。
2-8. 정조,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의 포충사(褒忠祠)에 치제한 글」, 『홍재전서』
옛날 만력 연간의 / 曰昔萬曆
기미년 2월에 / 己未二月
황제가 이에 혁연히 노하여 / 帝赫斯怒
오랑캐 소굴을 치려고 원정했네 / 濯征虜窟
우리 동국을 돌아보시어 / 眷我東服
병사를 징발하여 따르게 하니 / 索賦從戎
이때에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가 / 惟弘曁瑞
공실(公室)에 출정을 고하는 의식을 행했네 / 受脤于公
경이 이때에 소매를 떨치고 / 卿時奮袂
좌영장(左營將)이 되어서 / 左防營將
압록강을 건너 병사를 주둔시키니 / 兵頓深河
원수가 급거(急遽)하였네 / 元帥劻勷
어리석게도 경의 말을 듣지 않고 / 瞢莫我聽
이릉(李陵)과 위율(衛律)처럼 돌아섰건만 / 爲陵爲律
경은 칼을 잡고 활을 당겨 고군분투하여 / 握刃開弧
구차하게 살려 하지 않았네 / 卿不苟活
뜻은 목을 버림에 격렬하고 / 志激喪元
기운은 주먹을 떨침에 장했으니 / 氣壯張拳
전사의 소식이 황조(皇朝)에 알려지자 / 死聞于朝
천자가 슬퍼하였네 / 天子愍然
한 목숨을 버린 경의 결단이 없었다면 / 微卿一辦
문명국으로서 오랑캐가 되었으리라 / 以華而夷
저 아름다운 돌로 다듬은 비석을 보라 / 視彼貞珉
대로의 찬사가 있도다 / 大老有辭
성조에서 경의 충절을 표창하여 / 聖朝褒忠
사당에 편액을 내려 빛나게 했는데 / 于廟賁額
내가 황단(皇壇)에 참배하니 / 予拜皇壝
마침 구갑을 만났도다 / 適丁舊甲
비풍의 감회가 / 匪風之感
드디어 이 사람에게 미치니 / 遂及伊人
나의 술 매우 아름다운지라 / 我酒孔嘉
혼령이 흠향하길 바라노라 / 尙格維神
3. 원호(元豪)
3-1. 오원, 「金化路次。拜元將軍廟。感成一律。因贈爲將軍孫者元華伯」, 『月谷集』
絶峽寒陰水欲波。古祠門掩暮山阿。松杉谷裏氷霜冷。香火堂中歲月多。復矢餘魂存彷彿。征驂落日此經過。村人不識靑編事。遠客聊爲擊劒歌。
3-2. 이병연, 「葛洞戰塲」, 『槎川詩抄』
此地元豪死。曾聞覆數州。風吹祭壇草。溪入戰塲流。磧裏居人少。沙中落日愁。當時關國運。莫問將臣謀
3-3. 이병연, 「元防禦戰塲」, 『槎川詩抄』
芳草茫茫路。行逢一老人。山深當勁虜。兵敗出忠臣。燒斷平原夕。耕侵遠野春。國殤新雨露。賜祭峽江濱
3-4. 『연려실기술』
원호(元豪): 원호는, 자는 중영(仲英)이며,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계사년에 태어났다. 정묘년에 무과에 올라서 만포 첨사(滿浦僉使)ㆍ여주 목사(驪州牧使)ㆍ전라 수사를 지냈다. 임진년에 강원도방어사로 있다가 전사하니 나이 60세였다. 병조 판서를 증직했다. 원두표(元斗杓)의 조부이다.
○ 원호는 전 수사로서 집에 있다가 강원도 조방장으로 기용되었다. 원호는 강원도에서 다시 여주로 와서 고을 군사를 불러 모아 구미포(龜尾浦)에서 적군을 습격하여 50여 명을 죽이니 남은 놈은 도망쳤다. 그로부터는 적군이 다시 여주의 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장계를 올리고 벤 적군의 귀를 바치니, 임금이 칭찬하고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시키고 여주 목사 겸 경기ㆍ강원 양도 방어사로 삼았다. 이때 적군은 충주와 원주에 있으면서 진영을 연결하여 경성에까지 뻗쳐 있었다. 원호는 또 이천 부사(利川府使) 변응성(邊應星)과 군사를 합세하여 활쏘는 군사를 배에 싣고 안개가 낀 틈을 타서 적군을 마탄(馬灘)에서 맞아 공격하여 상당히 많이 죽였다. 이로부터 원주 적군의 길이 마침내 끊어졌다. 《조야첨재》 《명신록》
○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춘천에 있으면서 원호를 불러 북로(北路 함경도)의 적군을 공격하라 하였다. 원호는 군사를 이끌고 김화(金化)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적의 대군을 만나서 곧 군사를 거두어 산으로 올라갔다. 종일토록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화살은 다 떨어지고 적군은 바짝 다가왔으므로 드디어 천길 절벽에 몸을 던져 죽었다.적군은 그의 머리를 고을 문에 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이미 귀순하였는데, 원호만이 나라를 위하여 우리를 항거하였다.”고 방(榜)을 붙였다. 뒤에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고, 그곳에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계갑록(癸甲錄)》에는, “춘천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하였으니, 잘못이다. 그 부인에게 월급을 주었다.
○ 젊었을 때 윤두수ㆍ근수(根壽)ㆍ이해수(李海壽)와 잘 지내어 한 스승 밑에서 함께 수업하였다. 여러 공들이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두루 청환직을 내고 있었더니, 공은 분연히, “나와 함께 공부하던 사람은 오직 이 세 벗 뿐인데, 어찌 다시 소년배와 같이 붓과 벼루를 만지겠느냐? 하물며 나의 선조들 중에는 술로 이름이 드러난 분이 많으니 출세길이 어찌 문(文)에만 있으랴.” 하였다. 윤공 형제가 말리며, “자네의 재주로 어찌 끝내 불리하겠느냐? 그런데 왜 무술 쪽으로 나가려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며,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각각 알맞는 재주로 할 것인데, 어찌 문과 무를 따지겠는가.” 하였다.
○ 일찍이 단천(端川) 군수로 있을 때에 그 부인이 은가락지를 샀더니, 공이 놀라며, “이 지방이 은 생산지인데 내가 이곳 원으로 있으면서 어찌 내 집에 이런 물건을 두게 하겠느냐.” 하고 드디어 그 물건을 사들인 종을 매질하고 가락지를 빼앗아버렸다.
3-4. 김육, 「원호(元豪)를 포상하여 녹공(錄功)하기를 청하는 차자」, 『잠곡유고』
삼가 절의(節義)를 표창하여 사방 사람들을 권장하는 것은 제왕의 성전(盛典)입니다. 이 때문에 비간(比干)의 묘(廟)를 무왕(武王)이 세웠고, 왕촉(王蠋)의 묘(墓)를 악의(樂毅)가 봉(封)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본조(本朝)의 사람에 대해서이겠습니까.
고(故)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는 임진년의 난리 때 관동(關東)의 병사들을 거느렸는데,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기세가 치성한 왜적에게 대항하였습니다. 국가의 형세가 이미 무너져 군대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자, 오직 한번 죽어서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구포(龜浦)의 싸움에서 비로소 작은 승리를 거두었고, 금화(金化)의 싸움에서 갑자기 대적(大敵)을 만났는데, 하루 종일 힘껏 싸우다 화살이 떨어지고 군사가 다 죽자, 천 길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서 죽음 보기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였겠습니까.
이에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의열(義烈)에 감동해서 대궐에 상소를 올려 향사(享祀)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기가 뒤늦었고 말이 늦어서 다른 사람을 향사하는 데 편승해서 일을 성사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 오고야 말았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 가운데 원호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으로는 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호는 애당초 문인(文人)으로, 신의 증조부인 증 판서 신 김덕수(金德秀)에게 수학하였는데, 같이 문하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은 그 뒤에 대부분 이름난 공경(公卿)이 되었습니다. 원호는 스승을 존경하고 학문을 지향하는 마음을 붓을 던져 버린 뒤에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원주(原州)에 살면서 서울에서 벼슬하였는데, 왕래하는 즈음에 반드시 스승의 묘 아래에서 전배(展拜)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10여 세의 나이로 평구(平丘)의 여막(廬幕)에서 아비를 따라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으면서 매번 원호가 길가에서 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는 군사의 일로 바쁘고 소란스러운 즈음에도 역시 말에서 내려 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이 비록 어린 소년이었지만 마음속으로 그의 사람 됨됨이를 공경하였는바,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원호가 북쪽으로 올라가 지키면서는 추운 달에 고생을 하면서 싸우느라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갔는데, 신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국가의 일을 위해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더욱더 전일의 실제 행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해조(該曹)에서 회계한 것을 보고는 신은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병화(兵禍)의 참혹스러움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난리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화(金化)의 싸움에서 앞뒤로 전사한 두 사람은 그 빛나는 절의(節義)가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그 지역이 같고 그 일이 같고 그 절의가 같으니, 한 사(祠)에서 같이 향사(享祀)하는 것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충혼(忠魂)과 의백(毅魄)이 이웃이 있어서 외롭지 않아 깜깜한 지하에서도 반드시 나란히 합해진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한 사우(祠宇)에서 같이 향사한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수양(睢陽)의 쌍묘(雙廟)는 참으로 한때에 같이 죽은 사람들이며, 송(宋)나라 여릉(廬陵)의 충절사(忠節祠)에는 문천상(文天祥)이 양방예(楊邦乂)의 열(列)에 같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정덕(正德) 연간에 형주(衡州)에다 세운 사충사(四忠祠)에는 남제운(南霽雲), 뇌만춘(雷萬春), 주필대(周必大), 진억손(陳億孫)을 아울러 향사하였는바, 세대의 거리가 이와 같이 멀고 사람의 처사가 이와 같이 같지 않은데도 오히려 한 주(州)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아울러 향사하였습니다. 그런즉 해조에서 이른바 ‘각자 다른 사람을 아울러서 향사하게 하는 것은 사세에 있어서 편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신은 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송상현(宋象賢)의 전례에 의거해서 특별히 홍명구(洪命耈)와 원호(元豪)에게 시호(諡號)를 하사하고, 아울러 한 사우에서 향사하게 하여 숭상해서 권장하는 뜻을 보임으로써 풍교(風敎)를 수립하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1-5. 김육,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여주목사(行驪州牧使)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된 원창부원군(原昌府院君) 원호(元豪)의 시장」, 『잠곡유고』
공의 휘는 호(豪)이고, 자는 중영(仲英)이며, 원주(原州) 사람이다. 고려조에 시중(侍中)을 지낸 원홍필(元弘弼)의 9대손이고, 본조에서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원산군(原山君)에 봉해진 원황(元滉)의 5대손이다. 시중공으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벼슬아치가 대를 이어 나와 대대로 망족(望族)이 되었다. 할아버지인 원팽조(元彭祖)가 처음으로 무관(武官)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 진(鎭)에서 부월(斧鉞)을 잡았으며 품계가 2품에 이르렀다. 아버지인 원송수(元松壽)는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성균관 생원 안순(安珣)의 딸로, 공조 참의를 지낸 안요경(安堯卿)의 손녀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에 태어났는데, 10세가 되기도 전에 고아가 되었다. 조금 장성해서는 나의 증조이신 이진자(頤眞子) 김덕수(金德秀)에게 수학하여 드디어 경사(經史)와 제자(諸子)에 통하게 되었으며, 이어 과거 공부를 하였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탓에 스스로의 힘이 아니면 문호(門戶)를 세우고 선대(先代)의 업을 전할 길이 없었으므로, 뜻을 독실히 해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음(梧陰) 윤 상국 두수(尹相國斗壽) 형제, 약포(藥圃) 이해수(李海壽)와 더불어 친하게 지내었는데, 윤두수나 이해수 등 제공들은 모두 일찌감치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급제하지 못하여 실의 속에 보냈다. 이에 홀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기를, “내가 종유한 사람은 오직 이 세 사람의 벗뿐인데, 모두들 나보다 먼저 수립한 바가 있다. 그러니 어찌 다시 나이 어린 사람들을 따라서 붓을 들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의 선조들께서는 대부분 무(武)로써 현달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었다. 그러니 어찌 문(文)에만 종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붓을 내던질 뜻을 굳히었다. 그러자 윤 상국 형제가 찾아와 말류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를 가지고서 어찌 끝내 낙방만 하겠는가. 그런데 이에 이렇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들이 있으니 또한 어찌 앞에서 끌어 주지 않겠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수립을 함에 마땅히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하는 법이다. 자신이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임금을 섬김에 각자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치는 법이니, 어찌 문무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무예를 닦아서 한 세상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였는데, 이는 대개 무선(武選)이었다. 전례에 따라 6품으로 승진하여 경주 통판(慶州通判)이 되었다가 파직되어 돌아왔다. 다시 서용되어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지금 다 기록할 수는 없고, 기록할 만한 것으로는 두 번 군수가 되었으니 운산 군수(雲山郡守)와 단천 군수(端川郡守)를 지냈고, 두 번 부사가 되었으니 경흥 부사(慶興府使)와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지냈으며, 경원 부사를 지낸 이유로 해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었다.
공이 단천 군수로 있을 적에 시첩(侍妾)이 사봉(私俸)으로 은가락지를 샀는데, 공이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이 어디서 난 것이냐? 이 고을은 은이 생산되는 고을이다. 내가 이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어찌 집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소유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가락지를 사들인 종을 곤장 치고 은가락지를 빼앗아서 친구를 따라온 인근의 기생에게 주었다.
경원 부사로 있을 적에는 이탕개(泥湯介)의 난이 있었는데, 공은 관할하고 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들을 추격하여 그들의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 당시 몹시 추운 때를 당하여 종일토록 활을 당겼는데, 헛발을 쏘는 법이 없어서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아주 많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이 얼어서 떨어지니 군사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이 당시에 이탕개가 자주 변방의 환난을 일으켰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걱정하여 계미년(1583, 선조 16)의 춘추(春秋) 양방(兩榜) 600명을 북쪽 변방에 나누어 보내어 방수(防戍)하게 하였는데, 공의 아들인 원계공(原溪公) 역시 새로 급제하여 이곳으로 왔다. 공은 그들 가운데에서 출중하여 성취할 만한 자들을 뽑아 막하(幕下)에 두고는 원계공에게 명해서 그들에게 대줄 음식과 의복을 맡게 하였으며, 원계공 보기를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았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말을 타고 활 쏘는 연습을 하게 해 재주를 성취시켰는데, 그들 가운데 신할(申硈)이나 윤열(尹悅) 등 8, 9인이 모두 이 세상에 소문이 났다.
얼마 뒤에 이광(李洸)이 본도에 어사의 명을 받들고 왔는데, 기생을 말에 태우고 순시하면서 오직 기생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였으므로, 열읍(列邑)에서 앞다투어 뇌물을 바쳤다. 공이 맡고 있는 고을에 이르자, 공은 단지 술만을 주면서 끝내 사사로움이 끼여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광이 노하여 끝내 법으로 얽어넣었기 때문에 파직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왜노(倭奴)들이 남방을 자주 침범하자, 조정에서 곤수(閫帥)를 선발하면서 한 때의 무망(武望)으로 세 사람을 의논해서 천거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공이었다. 선묘(宣廟)께서 하문하기를, “이들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가장 나은가? 각자의 장점을 말하라.” 하니, 묘당에서 그들의 장단을 기록하였는데, 공을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을 다시 등용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공은 명을 듣고는 감격하여 적개심을 더욱더 가다듬어서 날마다 방비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마침 왜노가 전라 좌도를 노략질하였는데, 공은 먼 곳에 주둔해 있어 미처 달려가서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에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가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방환되었다. 그 뒤에 만포 첨사(滿浦僉使)와 평안 우후(平安虞侯)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해임되어 집에 있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노가 대거 침입해 왔는데, 제로(諸路)가 모두 와해되어 적의 예봉이 날로 급해졌다. 공이 변란의 소식을 듣고 성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공을 기용하여 강원도 조방장(江原道助防將)으로 삼아 동로(東路)를 방비하게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동쪽으로 가서 군사를 거두어 모아 평해(平海)에 이르니, 군사들의 기세가 조금 진작되었다. 이때 이광(李洸)이 전라도 순찰사로 있으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는 왜적을 겁내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제로에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의병(疑兵)이 이미 고개를 넘었으니, 국사가 글러졌다.” 하면서, 근왕병(勤王兵)을 저지하였다. 이에 제진(諸鎭)이 모두 무너져 흩어졌는데, 공이 거느린 군사들도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공은 이에 몸을 빼어 원주(原州)와 여주(驪州) 사이로 돌아와 향병(鄕兵)들을 불러모아 신륵사(神勒寺)에서 왜적을 쳐서 섬멸하고는, 이어 장계를 올려 왜적들의 수급을 바쳤다. 이때 선조께서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여러 성과 진이 모두 텅 비어서 적을 막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보고가 이르자 상이 몹시 칭찬하면서 특별히 공을 가선 대부로 승진시키고는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양도방어사(驪州牧使兼京畿江原兩道防禦使)에 제수하였다. 또 공의 휘하로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로 간 이춘기(李春起)를 선전관(宣傳官)에 제수하고, 온힘을 다해 싸운 군사 원색(元穡)을 음죽 현감(陰竹縣監)에 제수하였는데, 이춘기는 한량(閑良)이었으며 원색은 출신(出身)이었으니, 모두 특별히 은혜를 내린 것이었다.
공은 명을 받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더욱더 사력을 다하여 반드시 한 귀퉁이나마 보전하여 나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갚으려고 하였다. 이때 왜적의 대진(大陣)이 원주에 있었는데, 원주로부터 진영이 잇달아서 경성(京城)까지 연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구모포(龜毛浦)에 있는 자들이 가장 치성하여, 여기저기 출몰하여 약탈하면서 서로 성원(聲援)이 되었다. 공은 밤을 틈타 이들을 습격하여 크게 패퇴시켰는데, 수백 급을 참획하고 기타 살상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다시 이 사실을 장계를 올려 아뢰려고 하였으나 길이 막혀 주달하지 못하였다.
신륵사에서 승리를 거둔 뒤로부터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자가 아주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군사들의 기세가 더욱 성대해졌다. 공은 이어 상류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으니, 왜적들이 왕래하는 길이 드디어 끊어졌다. 서쪽으로는 이천(利川), 광주(廣州)까지와 북쪽으로 지평(砥平), 양주(楊州)까지의 경내가 적의 칼날을 면하고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공의 힘이었다. 얼마 뒤에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춘천(春川)에 있으면서 격문을 보내어 공으로 하여금 동쪽으로 돌아와서 북로(北路)의 왜적을 치라고 하였다. 공이 이미 떠나간 뒤에는 강상(江上)에 다시는 적을 막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에 동로의 왜적이 경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공은 군사를 이끌고 춘천을 경유하여 가다가 김화(金化)에 이르러서 갑자기 적의 대병과 맞닥뜨렸는데, 형세가 비교가 안 되었으므로 즉시 군사를 거두어 산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왜적들이 급하게 공격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종일토록 싸워 왜적을 쳐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공의 군사 역시 다 죽고 단지 휘하의 이돈(李暾) 등 6, 7명만이 공의 곁에 남아 있었다. 공은 더욱더 기운을 떨쳐 일어나 직접 왜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었다. 그러자 왜적들이 조금 물러났으나 얼마 있다가 다시 대거 진격해 왔다.
공은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돈 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명을 받아 왜적을 토벌하니, 힘을 다하고서 죽는 것이 의리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죽을 필요가 없다. 각자가 흩어져 도망가라.”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죽으니, 바로 6월 19일이었으며, 그 지역은 김화읍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왜적들이 공의 목을 잘라서 현청(縣廳)의 문에 걸어 놓고는 방문(榜文)을 써 붙이기를, “조선의 군민들이 이미 모두 다 귀순하였는데, 원호(元豪)만 홀로 나라를 위하여 우리에게 대들었다.” 하였다. 현의 사람들이 몰래 공이 죽은 곳을 알아내어 공의 시신에 표시를 해 놓고는 밤중에 공의 머리를 가져와서 매장한 다음, 공의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알려 주었다. 이에 드디어 유골을 수습하여 원주의 치소(治所) 서쪽에 있는 우두산(牛頭山)의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바로 선영이 있는 곳이었다.
유영길은 본디 공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또 주장(主將)으로서 공을 세운 바가 없었으므로, 공이 전공을 세우고 의리를 지킨 것을 꺼려서 장계를 올려 아뢰면서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공의 열렬한 절개로 하여금 이 세상에 크게 드날리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애석하게 여겼다.
그 뒤에 우리 나라가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를 당해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묻기를, “동방은 본디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칭해졌다. 그런데 대적이 쳐들어와서 마구 노략질을 하여 임금이 파천하는데도 절개를 지키고 의에 죽은 자가 있었다고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어째서인가?” 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힐난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즉시 사절(死節)한 자 몇 명을 들어 회주(回奏)하였는데, 공이 실로 거기에 들어 있었다. 그러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몹시 가상하게 여기어 백금 20냥을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병조 판서에 추증하고 또 공의 부인에게 월봉(月俸)을 지급하였으며, 공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계공(原溪公)이 서애(西厓) 유 상국 성룡(柳相國成龍)을 만나 보았는데, 유 상국이 공의 왜적을 친 공적과 절의에 죽은 의리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또 말하기를, “조정에서 만약 전공을 녹공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한다면 선영공(先令公)이 의당 다른 사람보다 먼저 녹공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녹공함에 미쳐서는 유영경(柳永慶)이 권한을 잡고 있었는데, 유영경은 바로 유영길의 동생이었다. 이에 그 형의 일로 인해서 마침내 공을 녹훈하자는 의논을 저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분통하게 여겼다. 그러자 원주와 여주의 인사들로서 공의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차례 대궐 아래에서 항소(抗訴)를 올려 공의 공렬을 아뢰고, 이어 사당을 세우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유영경에 의해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금상(今上) 5년(1654, 효종 5)에 김화(金化)의 유생 박시진(朴時璡) 등 19인이 상소를 올려 김화현에 있는 관찰사 홍명구(洪命耈)의 사우(祠宇)에 공을 향사(享祀)하기를 청하였는데, 예관이 홍씨 집안의 사우에 다른 사람을 향사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서 온당치 않다고 하여 기각되었다. 이에 상이 단지 시호를 추증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천부적으로 타고나 모부인을 지성을 다해 섬기었으며, 어려서 외가에서 자라나 외삼촌을 아버지를 섬기듯이 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집을 얻어서 형인 수사공(水使公) 원량(元亮)과 더불어 같은 담장을 끼고 가까이에서 살았는데, 낮이면 한집에 모여 종일토록 즐기었다. 수사공은 재산이 제법 많았는데, 공은 자기의 재산처럼 가져다 썼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수사공에게 올린 다음 감히 먹었다.
조상을 제사지냄에 있어서는 더욱더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찬품(饌品)과 제기(祭器)를 반드시 풍성하고 정결하게 마련하도록 하였으며, 사시(四時)의 제사에 반드시 소를 잡았다. 수사공이 뒷날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절제하여 줄이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있으면서 제사를 지낼 때 소를 잡지 않는다면, 이 뒤에 자손들은 반드시 닭도 잡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서 더욱더 풍성하게 하고 줄이지 않았다.
자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였다. 원계공이 홍주 통판(洪州通判)이 되었을 때 집사람이 홍모전(紅毛氈)을 샀는데, 공이 서울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 자식이 어찌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물품을 사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는, 드디어 편지를 보내어 꾸짖었다.
원계공이 일찍이 호서 절도사(湖西節度使)의 천거를 받게 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마침 난리가 일어나서 공이 조방장(助防將)에 제수되었다. 장차 떠나려고 하는데, 원계공이 청하여 말하기를, “동쪽이나 남쪽이나 모두 국가의 일입니다. 그런데 대인께서 종자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조정에 말하여서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소속이 이미 다르며, 군법은 지극히 엄한 것이니, 부자간의 사사로운 정이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하고는, 이어 울음을 삼키면서 서로 이별하였다.
종질(從姪) 가운데 공의 지시를 받고서도 태만히 하여 즉시 떠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공은 그의 아비를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부형이 명을 하였는데 자식이 듣지 않는 것은 우리 집안의 좋은 가법(家法)이 아니다. 이것은 네가 평소에 아이를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잘못이다. 그러니 네가 대신 가라.” 하자, 그의 아비가 즉시 일어나 일에 달려 나가면서 감히 싫어하여 꺼리는 뜻이 없었으며, 아들은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이 가르치기를 엄하게 한 것이 이와 같았다.
종족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정성스러운 뜻이 애연히 피어 올랐는데, 참으로 친척이면 존비(尊卑)를 따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은혜와 우의를 베풀었다. 이에 여러 친족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은 능히 우리를 화목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분수를 범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조금도 용서해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또한 경외하여 의롭지 못한 짓이 공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였다.
공은 스승을 존경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종신토록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스승의 묘를 지날 적마다 반드시 가서 절하였고, 기일을 만나면 그때마다 제수(祭需)를 마련하였으며, 항상 그 집을 왕래하면서 마음 써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록 난리로 인해 황급한 즈음을 당하여서도 더욱더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는 뜻을 가졌다.
집이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었고 서울과 시골에 집이 없었으며, 관복(官服) 역시 스스로 마련할 수가 없어서 항상 수사공에게 도움을 받았다. 호서 우도에 있다가 파직되어 돌아올 때에는 행장이 쓸쓸하여 자루 속에 몇 권의 서책만이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으니, 향리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찬하고 있다. 당시에 무장(武將)들 가운데에는 변협(邊協)이나 신립(申砬) 같은 사람들이 우뚝하여서 칭할 만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는데, 모두 공의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청렴하고 결백하며 지조가 있기로는 모두 공에게 한 발 양보하였다.
천부적인 자질이 어질어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혹시라도 상심케 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일에 임해서는 격앙하여 영특한 기운을 떨치어서 권세 있고 귀한 자들을 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았다. 평생토록 다른 사람을 따라서 부앙(俯仰)하면서 진취(進取)하기를 엿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있었던 관직마다 모두 실패하고 드디어 형세를 잃어서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을 아는 자들은 역시 이런 점 때문에 공을 인정하였다.
부인 김씨(金氏)는 승훈랑(承訓郞) 김광후(金光厚)의 딸로, 상주(尙州)의 대성(大姓)이었다.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서 자손들이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원계공이 이미 귀하게 되었는데도 혹 뜻에 차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부인은 여러 날 동안 낯빛을 풀지 않았다. 노복들을 대하고 집안일을 경영함에 있어서는 모두 조리가 있어 볼 만하였다. 또한 공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해하여 평생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으며,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반드시 직접 제수를 마련하였다. 손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몹시 부지런하게 하여 매번 사장(師長)에게서 서책을 받아가지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곁에 놓은 다음 콩을 가지고 셈을 하면서 익숙하게 읽은 다음에야 그치게 하였다. 여러 손자들이 학문을 성취한 바가 있는 것은 모두가 부인의 공이다. 공보다 23년 뒤에 죽었는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1녀 1남을 두었는데, 딸은 사인(士人) 봉양신(奉良臣)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자식이 없다. 이에 그 남편의 족인(族人)의 아들 봉벽(奉壁)을 후사로 삼았다. 아들 원유남(元裕男)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策勳)되었고, 관직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원계군의 공훈으로써 공을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원창부원군(原昌府院君)에 추증하였다.
원계공에게는 2남 1녀가 있는데, 장남은 원두표(元斗杓)로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서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지금은 의정부 좌의정으로 있다. 다음은 딸로 현감 윤우(尹堣)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원두추(元斗樞)로 지금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다.
원두표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원만석(元萬石)으로 지금 승정원 좌부승지로 있다. 차남은 원만리(元萬里)로 생원인데, 지금 세자익위사 세마로 있다. 삼남은 원만춘(元萬春)으로, 전임이 평강 현감(平康縣監)이다. 딸은 전 지평 이민서(李敏敍)에게 시집갔다. 윤우는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이 윤세미(尹世美)이다. 원두추는 3녀를 낳았으며, 아들이 없어 형의 둘째 아들 원만리를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진사 박세채(朴世采)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신전(申銓)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유학 홍이우(洪爾祐)에게 시집갔다.
아아, 공이 몸을 바친 것은 한때의 강개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축적한 것이 단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자신을 잊는 데 있었으므로, 명을 받던 날에 이미 한번 죽을 마음을 정하였다. 공의 웅대한 풍모와 장엄한 절개를 상상하면 지금에 이르러서도 늠름하여 생기가 있으니, 아무리 옛날의 열사(烈士)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천년이 흐른 뒤에도 공의 일을 듣는 자들은 오히려 부지불식간에 머리카락이 관을 뚫고 치솟을 것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것이다. 더구나 나는 어려서부터 그 분을 직접 보고 그 분의 행실을 익히 들은 데이겠는가.
이제 공의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대략 세계(世系)와 역임한 관직 및 국가를 위해 죽은 실제의 자취를 서술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조정에 올려 시호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며,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사당(祠堂)을 세우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을 마무리 짓게 하는 바이다.
3-6. 『연려실기술』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금화(金化) 충장사(忠壯祠) 병신년에 세웠다. : 원호(元豪)
충렬사(忠烈祠) 경인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홍명구(洪命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