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7080 음악 여행] 다시 살아난 중년의 열정 - 글/김시우(시애틀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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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죽더라도 자신의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 餓死 沈厥種子)는 말이 있다. 얼핏 어리석고 인색한 사람이 죽으면 재물도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 한다는, 집념과 책임의 가치를 강조한 속담(俗談)이다.
자유영혼의 천재 뮤지션 송창식은 “세상의 나쁜 것은 다 좋은 것”이라고 했다. 모진 세상의 풍파를 온 몸으로 이겨 낸 자조(自照)의 말이다. 그는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숨지고 어머니는 가출을 하여 조손(祖孫)가정에서 어렵게 자랐다. 음악뿐 아니라 공부에도 천재성을 타고 났지만 그의 가난은 그 창조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결국 가난으로 인한 고교중퇴, 떠돌이 생활, 공사판 경비를 하면서도 그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살면서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절망, 절박, 절실함을 빗대어 목숨 줄을 놓아 버릴 만큼 분노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음악은 그런 순간에 태어나기도 한다. 나와 함께 음악 모임을 꾸려가는 사람들 겉으로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회원 중 백만장자부터 한 달 한 달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면 사람은 모두 '거기서 거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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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때도 무게는 늘 나에게 있었으니까요. 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 배우는 게 2년치 공부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서울 음대에서 4년 배운 거, 내가 공부한 것보다 반도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추운 날 밖에서 자려면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숨을 작고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추우니까요. 그런데 그걸 한참 하다 보니 상상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우리가 컴퓨터에 8이라고 치면 숫자 8이 그대로 입력되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로 기억되는데 컴퓨터 운영체계가 8이라 보여주잖아요. 우리 영육(靈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고 말하면 두뇌에 찍 금 하나 그어지는 건데, 몸의 운영체계에 의해 ‘아버지’라 나오는 거죠. 영육이 같은 체계가 아니면 언어가 안 통합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 그 소통법이 생겨요. 어느 순간 지식이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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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송창식의 작업실 한구석에도 오래된 LP판들과 줄이 끊어진 통기타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송창식은 퇴촌의 집에서 구리 작업실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퇴근을 한다. 송창식이 작업실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8~9시다. 아침에 출근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한창 활동할 때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 밤늦게 노래하고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낮과 밤을 거꾸로 살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 작업실에 도착해 3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다시 퇴촌의 집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하다가 아침 6시나 돼서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그의 기상시간은 오후 2시. 일어나서 화장실에 앉아 책을 보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저녁 6시경에 집에서 나와 다시 구리의 작업실로 향한다고 한다. 난 이런 그의 일반적이지 못한 일상으로 결혼생활이 가능한지 과연 결혼은 했는지, 했다면 그 결혼생활이 지속이 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아도 독신주의자를 자처했던 그였기에 현재의 그의 결혼 생활이 궁금해졌다.
1977년 무렵 30살이었던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연인을 공개하고 결혼 선언까지 했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 때의 그 여인은 나이가 한 살 아래인 서울 예고 동기 동창 한성숙이었다. 학교 졸업 후는 서로 인연이 없었다. 송창식은 음악과를 다녔고 한성숙은 미술과를 거쳐 우석대 메이퀸 출신인데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우연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약속했다고 하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때 송창식은 어떤 기자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작년(1976년) 12월 25일 저녁 <그대 있음에>의 쫑파티(송별연) 때 어떤 역술인 할머니가 나에게 그랬어요. 당신 장가 안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금년 안에 결혼 상대를 만나겠는데 바로 결혼하겠구먼 하고 큰소리를 쳤어요."
새해까지 남은 날짜가 6일인데 믿을 수 없어서 허허 웃고 말았다는 송창식. 그런데 그게 바로 족집게 예언이었다. 그로부터 6일 후인 12월 31일 밤 동창모임에서 그는 우연히 한성숙을 만나 그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15일 뒤 부산에 사는 색시 어른들을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결혼 승낙을 받는 과정에서 송창식의 행동도 기발했다. 술 한 병 차고 들어가 넙죽 큰 절을 올리고는 ‘따님과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하자 어리둥절한 예비신부 아버지는 ‘언제부터 사귄 건지 모르지만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답했다. 이때 나온 사윗감의 응답이 걸작이었다. ‘좋은 남편 노릇은 못할지 모르지만 좋은 사위 노릇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데 어쨌든 사업가로 통이 넓었던 신부 아버지는 기꺼이 송창식을 받아들였고 한다.
이처럼 그는 음악 생활은 물론이고 평상시 생활에도 그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의 시선에 송창식은 이렇게 항의(?) 했다. "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과 하찮은 일이 제게는 그저 똑같은 일이거든요. 만약 방송 출연 섭외가 왔는데 친구와 선약이 있잖아요. 그럼 섭외 PD에게 ‘친구랑 약속이 있다’고 거절하거든요. 그럼 주위 사람들이 난리가 나요. 친구는 나중에 만나고 방송을 먼저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저한테는 세상 사는 일 중에 특별히 중요한 일이란 건 없어요. 그저 누가 먼저 약속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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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개념 역시 그를 ‘기인’으로 불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그에게 ‘돈’이란 그저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문제일 뿐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에게 가난하다고 하지만, 정작 그는 “한 번도 돈이 모자라거나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사는 데 꼭 필요한 부분에서 돈이 없다면 불편하겠지만 집 있고 차 있고 입을 옷과 먹을 게 있는데 더 필요한 게 뭐냐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좋은 기타도 돈이 있으면 구입하지만, 만약 돈이 없다면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
그는 한평생 ‘소유욕’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다고 한다. 내가 웬만한 승용차 값에 버금가는 꿈에도 갖고 싶었던 Martin D-40 기타를 사기 위해 "기타가 몇 개인데 또 사냐? 차라리 그 돈을 차를 바꾸라"고 했던 아내의 성화를 잠재우고 결국 손에 넣었던 일을 생각하면 프로 가수임에도 나와, 아니 일반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를 제대로 알고 그의 공연 실황을 보니 늘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해탈의 모습이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는 한평생 집 한 칸도 없이 살다가 이사 다니기 귀찮아서, 생애 처음으로 경기도 퇴촌에 집을 지어 정착했다. 방송에 출연했을 때는 물 위에 집을 지었다고 알려져 ‘수상가옥’이라는 소문이 났지만, 개울 옆에 집을 지었을 뿐이다. 아내가 물을 좋아해서 개울가에 집을 짓게 된 것이라는데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도 엿볼 수 있다.
사랑에는 기인 송창식에게도 비범하지 않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인 송창식. S 방송 프로그램에서 L사회자가 그에게 “화는 낼 줄 아세요? 누군가와 싸움을 해본 적은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송창식은 “전 화를 낼 때 굉장히 열심히(?) 화를 냅니다. 열심히 화내지 않으면, 상대방이 제가 화가 났다는 걸 모르니까요. 다만, 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아요." 라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또 그는 ‘포커 페이스’에도 능하다고 했다. 웃으면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슬픈 걸 웃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고. 웃는 얼굴이기 때문일까. 고단하고 힘들었던 생활고에도, 그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6·25전쟁 때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선 후, 가난에 찌든 고달픈 삶이 계속됐고,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 3년 동안 노숙을 하기도 했다는 송창식의 고뇌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돈이 없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공사판을 전전하고 무전 여행을 했던 송창식은 그때 그 시절이 그냥 좋은 추억 같다고 한다.
빈털터리 노숙 생활을 회상하며 “죽도록 힘들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할 법도 한데, 송창식은 그저 인생의 한 시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편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그의 무던한 성격은 웃으면서 살아온 내공 덕분일 것이다. 40년의 긴 세월 동안 돈과 명예에 대한 소유욕을 모두 ‘음악’에 대한 열정과 맞바꾼 듯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여전히 행복해지는 이유는 웬만해선 닮을 수 없는 그의 삶에서 나오는 듯하다.
송창식의 음악 인생과 철학을 짚어보면서 음악은 가식 없는 진실과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그 꿈을 열어준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음악은 그 숭고함과 고마움을 아는 자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출처: 호주 통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컨보이
첫댓글 저 이거 신문에서 봤는데 멋지게 편집하셨네요. 신문에서는 듣지 못한 음악꺼정 넘 좋아요 두번째 동영상 목동의 노래는 첨 듣는데 눈을 지그시 감게 만드네요. 고물장수님 감사합니다.
소리샘님 덕분에 창식팬인 저도 도움이 되었던 글이지요... 시애틀7080은 좋겠읍니다.. 좋은 음악샘님이 계셔서 ....♥♥♥
첫댓글 저 이거 신문에서 봤는데 멋지게 편집하셨네요. 신문에서는 듣지 못한 음악꺼정 넘 좋아요
두번째 동영상 목동의 노래는 첨 듣는데 눈을 지그시 감게 만드네요. 고물장수님 감사합니다.
소리샘님 덕분에 창식팬인 저도 도움이 되었던 글이지요... 시애틀7080은 좋겠읍니다.. 좋은 음악샘님이 계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