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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매일 아침,
기꺼이 인생의 초보자가 되십시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프롤로그 하루 10분,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삶은 자신만의 임무를 발견하고 실천해나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에는 늘 예상치 않은 ‘괴물’이 등장한다.
이 괴물을 극복할 수 있는 생각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열정’이다. 열정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다. 결코 타인을 향한 부러움이나 흉내 내기가 아니다. 열정은 자신의 약점과 열등감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 열정을 통해 스스로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임무를 발견하게 된다.
열정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얽매고 있는 수많은 구태의연함과 과거로부터 과감하게 결별하는 용기다. 이 열정은 내면 가장 깊숙한 곳, ‘심연’으로 가는 지표다.
권태에 익숙해져 있던 나 자신과 결별하기 위해 나만의 열정을 찾기 위해 저자는 달리기와 묵상이라는 두 가지 수련도구를 택했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면서 육체의 한계를 확장하고, 묵상을 통해 정신의 한계를 고양시켰다.
‘나를 넘어선 나’는 ‘위대한 개인’이다. 위대한 개인이란 자신을 깊이 관찰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나’다. 위대한 개인은 항상 자신의 행복을 지향하며 그 과정에서 행복하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열정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거룩한 여행을 떠나자.
1부 고독, 혼자만의 시간 갖기
순간;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는 찰나의 시간
흔적도 없이 만물을 삼켜버리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과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은 그 흐름의 시작과 끝을 볼수도 없고, 알수도 없다. 쏜살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간,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둘의 공통분모인 사이, 즉 ‘간(間)’을 포착해야 한다. 이것을 ‘순간(瞬間)’이라고 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이 터지는 그 찰나(刹那)의 시간이다. 봄이 약동하면 잎과 꽃망울은 모든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거칠게 제 모습을 바꾼다.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순간을 ‘모멘트(moment)’라고한다. 모멘트는 정지의 시간이 아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이다. 모멘트의 어원인‘모멘텀(momentum)’은‘움직임/움직이는 힘/변화’ 또는 ‘순간’이라는 의미다. ‘눈 깜짝할 사이’는 시간적인 경험이자 찰나의 시간을 이르는 표현이다.
자기변화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 결정적인 순간이 삶을 좀 더 진실에 가깝게 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한다. 반대로 영원한 질적인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한다. 카이로스는 신이 개입하는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생각; 인생이라는 집을 짓도록 도와주는 설계도
유일무이한 나만의 유전체가 있듯이, 나만의 생각 DNA가 존재한다. 그 생각으로 나만의 영적인 DNA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마음속에 심어놓고 정성껏 가꾸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천재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지속적으로 찾아내,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일생 동안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다. 믿음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찾아 소중하게 지키는 삶의 모습이다.
천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자신의 욕망을 탐색하고 발견하며, 그것을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여기며 삶을 통해 그것을 실현한다.
생각은 매일매일 변화를 거듭하며 나 자신을 더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는 높은 차원의 시선이다. 그 시선은 어제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를 아낌없이 버리고, 그 한계를 선명하게 보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여정 가운데 잠시 멈춰 서서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교하게 헤아리는 훈련이다.
한 발 한 발, 지금 내딛는 이 삶의 여정은 오직 나만의 거룩한 것이다. 내심연속에숨어있는 유일한 신념이야말로 나만의 보물이자 천재성이다.
가장심오한 나의생각이야말로 보편적이고우주적이며 영적인생각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숨어있는 천재적인 섬광을 감지하고 응시해야 한다.
천재들은 자신의 심연 속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를 용기있게 말한다. 내면에서 발견한 희미한 빛조차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생각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빛은 모두 숭고하다.
내가 축하해야할 대상은 나와 무관한 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의 생각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유일한 임무를 찾아내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현관; 진화를 위해 거쳐야 하는 장소
현관(玄關)은 불교 사찰의 첫 번째 문을 가리킨다. 현묘(玄妙)한 도(道)로 들어가는 문, 즉 속세를 떠나 영원한 극락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현(玄)’자는 누에가 실을 뽑는 행위와 나비가 되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는 행위를 ‘작고 여리다’는 뜻의 ‘요(幺)’라고 한다.
이렇게 고치를 짓고 ‘가물가물’나비가 되는 과정을 ‘현(玄)’이라고 한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고치 안에서는 천지개벽하는 변신이 일어난다.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상태지만 급격한 창조가 일어나는 현장이다.
라틴어에도 문지방이나 현관을 뜻하는 ‘리멘(limen)’이 있다. ‘limit’도 여기서 파생됐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
프랑스 인류학자 방 주네프(Arnold van Gennep)는 『통과의례』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입문자는 다음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썼다.
첫번째는 ‘분리’단계로, 과거로 상징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버리는 단계다. 익숙한 세계와 단절하는‘혁신(革新’에서‘혁(革)’은 소의 가죽을 벗겨낸 모양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가차없이 버리는 것을 상징한다.
두 번째는 ‘전이(轉移)’ 단계로, 오래된 자아를 소멸시키는 오랜 투쟁의 시간이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고 최선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과거 본질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소멸되어 새로운 자신으로 채워지는 과정이다.
세 번째는 ‘통합’ 단계로, 전이 단계에 충분히 머문 자만이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들어서는 단계다.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창조의 시간이며, 동시에 불안한 가운데 서서히 새로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우리의 스승이다. 이 분리된 시·공간인 고독은 의도적인 분리의 상태이자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자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현관에 서라, 지금 곧.
인내; 열정과 몰입이 안겨주는 선물
다른 이들이 도달할 수 없는 소중한 경지에 들어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어려움과 성가심을 덤덤하게 수용하도록 만드는 사랑이다. 또한 그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인내다. 사랑과 인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뉘지 않는 신비한 합일이다. 사랑하니까 인내하고 인내하다보면 그 사랑이 더욱더 깊어진다.
장거리 선수들 중 일부는 완주한 뒤 평온함을 느꼈으며 행복감에 젖었다고 말한다.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동안 뇌에서 ‘엔돌핀’이라는 특별한 화학 성분이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인내가 안겨주는 종합선물세트다.
성찰을 통해 자신의 임무를 찾아냈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몰입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 인내를 선물한다. 그 인내는 내가 몰입한 임무를 더 깊이 사랑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꽃들은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몰입한다.
기도란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침묵; 자신에게 몰입할 때 들리는 내면의 소리
‘깨어 있음’이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가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미션을 알아가는 행위다.
다른 사람이 못 듣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히브리어로 ‘나비(nabi)’라고 부르는 예언자는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신의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 침묵의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예언자였던 엘리야는 자신의 ‘마음속 보화’를 발견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보화란 타인의 기준이나 욕망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위대한 무언가다. 엘리야는 이를 위해 오직 한 가지, ‘회개(悔改)’를 요구한다.
‘회개’의 심오한 의미는 ‘당신 안에 숨어 있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라!’는 뜻의 고대 히브리어 ‘슈브(shub)’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의 미세한 소리에 반응하는 영적인 운동이다.
신이란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소리, 온 마음을 집중할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침묵의 소리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 함석헌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중략)
그대 맘의 네 문 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면
극진하신 님의 꿀 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실패;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는가
“우리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반듯한 길이 숨겨져 있다.”(단테,『신곡』 ‘지옥’ 편)
이 지옥 여행은 우리의 인생 여정을 은유한다. 자신을 위한 위대하고 유일한 삶은 알려지지 않은 그 길을 찾아나서는 용기에서 시작한다.
단테는 『신곡』을 쓰기 전 오랜 기간 추방된 채 살았다. 이 시간은 그에게 창조적인 수련 기간으로, 그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심연을 응시함으로써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해리 포터』를 쓴 조앤 롤링도 혼자 딸을 돌봐야 하는 이혼녀이자 홈리스였다. ‘지옥’과도 같은 캄캄한 터널 속에서 고통과 암흑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제거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척하기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일을 헤아려 집중했다. 남과 비교하는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인간이길 그치고, 자신을 깊이 응시하며 새롭고도 놀라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다. 바로 그때 ‘어두운터널’은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만 하는 자신만의 임무를 현시하는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이됐다. 에피파니는‘현현(顯顯)’의 고대 그리스어로,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것’을 뜻한다.
어두운 숲속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실패가 두려워 숲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더 큰 실패다. 인간은 저마다 어두운 숲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열정을 발휘하게 하는 나만의 고유 임무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자신에게 진실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당신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 당신만의 임무를 가지고 있는가.
동굴; 환상과 공포가 함께 존재하는 매혹적인 공간
동굴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머물던 뱃속이며, 세상을 떠나 가야하는 무덤이다. 그러므로 동굴은 생명 창조의 공간인 동시에 소멸과 죽음의 공간이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은 두 동굴 사이에 존재하는 정거장일 뿐이다.
프랑스 남부 지하에 있는 쇼베동굴의 벽과 천장에는 말, 곰, 들소, 코뿔소 등과 지금은 멸종된 동물들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들이 그려놓은 것이다.
구석기시대 인류는 우리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유동성’이다. 유동성이란 인간과 동물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은 인간과 동물, 사냥꾼과 사냥감이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닌 하나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투과성’이다. 크로마뇽인들은 자신들을 살아있는 동안 육체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경험하려 시도한 ‘영적 인간(HomoSpritualis)’이다.
쇼베동굴의 벽화는 빛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은 동굴 속 벽화를 감상하는 도구다. 이 거룩한 공간에서 저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는 동시에 ‘황홀’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크로마뇽인들이 드나들던 동굴처럼 침묵으로 가득 찬 이런 공간을 나는 갖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