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 만에 귀향한 일본인을 만나다.
소설가 공선옥씨가 신작소설 ‘영란’을 쓰기위해 취재차 목포에 내려왔다. 유달산 중턱 옛 일본영사관 앞에서 우리는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들과 마주쳤다.
아무리 호기심이 생겨도 숫기 없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나다. 그러나 공작가는 팔십 노구를 이끌고 한국까지…그것도 명승지를 놔두고 남도 끝자락 목포까지 찾아 온 노인들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했나 보다. 그중 곱게 자란 듯 꼿꼿한 자태가 남아있는 한 할머니가 유독 눈에 띄었다. 우수에 젖은 눈가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촉촉이 젖어 있었고 일행들에게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뭐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까지 동해 사연을 물었다.
“내 고향 목포…목포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름도 ‘바다의 아이’라 뜻의 요코로 지어 주셨어요. 죽기 전에 꼭 와보고 싶었는데 66년 만에 돌아왔어요. 내가 다니던 심상소학교(현 유달초등학교)와 학교 앞 가게도 그대로고 동양척식회사, 목포부청도 있어요. 지금도 사쿠라마찌가 있나요?”
지금은 신도심에 밀려 쇠락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목포 상권의 중심이었던 오거리 일대에는 식민시절 사쿠라마찌(벚꽃마을)라고 하는 유흥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갈래머리 여중생에게 금지된 그곳이 더 기억에 생생할 수 있겠다. 할머니는 지금은 이전한 옛 시청의 내력, 우체국, 경찰서의 위치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청년기를 목포에서 보낸 내가 외국인에게 도시의 역사를 듣는 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했다.
살아있는 도시박물관. 목포 구도심
목포는 100여 년 전 개항기의 건물과 도로, 상수도, 조형물, 유적들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다. 살아있는 도시박물관이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미군정 시대 신안공사로, 권위주의 시대엔 헌병대,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이 되었다.
1897년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구일본영사관 건물은 한․일 간의 세력관계에 따라 명칭이 변해 왔다. 목포이사청, 목포부청,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박화성기념관 등으로 활용되었다. 유달산과 고하도엔 수많은 동굴이 파여 있는데 구 일본영산관 뒤편의 방공호가 72m로 가장 깊다. 고하도의 동굴은 숨겨진 포대다.
대표적 적산기업인 조선내화는 공장이전으로 가동을 멈추었지만 철거되지 않고 보존돼 있다. 이 공장은 회장이 살던 집에 이훈동정원이다.
일제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로 친일에 앞장섰던 영암출신 현준호와 김신석이 세운 호남은행은 조흥은행을 거쳐 목포문화원이 되었고, 조선식산은행은 한 여류서양화가의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현준호의 손녀고, 삼성그룹 이건희 명예회장의 부인 황라희씨와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은 김신석의 외순주들이다.
신사참배의 거점이었던 동본원사는 중앙교회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목포항 주변과 유달산 일대의 구도심에는 지금도 일본인들이 세운 관공서와 민가, 상가들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다. 마치 일본 오사카나 교토의 뒷골목 어디쯤에 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제 때 금융가가 밀집되어 있어 중심상권 역할을 하던 선창방향 오거리는 최근 목포시가 구도심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의욕적으로 예술의 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10여 곳 넘게 입주 작가들이 갤러리를 열었고 축제와 전시회도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갤러리의 상당수는 문이 닫혀 있었고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한때 목포상권의 중심지였던 차없는거리 일대에는 전 지역을 거쳐 야간조명을 설치했으나 신도심으로의 상권이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광주광역시의 양동시장이나 대인시장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예술적 활동’과 ‘공공목적의 창작’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행위와 참여’없는 ‘전시’만으로 도시공동화를 막은 사례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유달산을 오르다 보면 호남 최대의 개인정원인 이훈동정원을 만나게 된다. 드라마 야인시대 하야시의 집으로 촬영되어 더 유명해졌다. 1930년대에 일본인 우찌다니 만페이(內谷萬平)이 지은 일본식정원으로 입구정원·안뜰정원·임천정원·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본식 석등과 석탑이 배치되어 있다. 113종에 이르는 나무가 식재되어 있는데 한국 야생종 37종, 일본 원산종 39종, 중국 원산종 25종, 기타 12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원 뒷길로 산을 오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탁월한 위장술 ‘강강술래’를 탄생시킨 노적봉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일본인들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였던 모양이다. 일본은 태백준령에서 이어져 내린 차령의 끝자락 유달산 맥을 끊을 요량으로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고 그것도 모자라 산 정상 바위 밑에는 헤이안시대에 일본 진언종을 일으킨 홍법대사와 수호신 부동명왕을 새겨 넣었다. 그 외에도 유달산 곳곳에 88개 불상을 세웠다고 하나 해방 후 모두 파괴되고 지금은 일부 좌대와 터만 남아 있다.
기차는 목포역을 지나 삼학도에서 멈추고
이번에는 목포여객선터미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간 470만만 명이 이용해 국내 최다인 41%의 해상여객을 자랑하는 곳답게 여객선터미널도 한국 최대 규모다. 삼학도에서 건네다 보면 영락없이 항해하는 선박모양이다. 그러나 터미널의 규모에 비해 항구의 풍치를 즐길 수 있는 문화적 꺼리들은 아예 없었고 상권은 협소했다.
다시 목포항을 끼고 돌아 삼학도를 향했다. 물때가 조금이 아닌데도 부두에는 어선들로 가득했다. 항구에서 만난 한 선원은 ‘기름 값이 비싸 앞으로 밑지고 뒤로도 밑지니 출어를 포기하는 배들이 많다.’고 전했다.
삼학도는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매립과 개발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는데 지금은 목포시에 의해 상당부분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학도의 세 섬 중 한 곳은 매립을 위해 거의 헐리고 원형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알려진 것과 달리 호남선의 종착지는 목포역이 아니다. 호남선의 종착지는 삼학도다. 삼학부두로 가는 철로엔 아직도 기차가 다닌다. 목포사람들 중 그 기차를 본 사람은 드물다. 나 또한 23년 살았지만 대여섯 번밖에 본적이 없다. 대부분 존재 자체를 모른다.
삼학도에는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을 기념하는 난영공원이 조성되어있는데 ‘목포는 항구다’와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남도의 한을 노래한 가수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남편 김해송과 정부 남인수 모두 친일전력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본인도 속속 친일전력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남인수가요제’는 사라져도 ‘난영가요제’는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낭만의 바다’ 대반동으로 향했다. 대반동 밤바다엔 80~90년대 여름밤이면 밤새도록 통기타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대전 발 0시50분 기차를 타고 목포항을 찾은 젊은이들이 으레 들르던 헤밍웨이카페는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젊은이들은 하당 신도심 평화광장 앞 해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반동 끝자락에는 공생원이 자리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윤치호씨가 1928년에 세운 고아원이다. 그는 일본인 다우치지즈꼬와 결혼했는데 해방 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평생을 고아들과 함께해 1962년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이 사연은 한일합작으로 영화화돼 1995년 ‘사랑의 묵시록’으로 개봉했다.
소설 속이 아닌 진짜 ‘영란’이 살고 있는 ‘영란횟집’을 찾았다. 사진만 찍으려 했는데 목포 인심 상 그분과 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소설 속 영란여관에서 문학소녀 할머니로 묘사된 김은초씨(여, 82세)는 백내장 수술로 시력이 좋아져 깨알 같은 소설을 거뜬히 읽어보였다. 40년 간 영란횟집을 운영해 온 쉰여덟의 처녀 박영란씨는 소설책을 들이 밀자 깜짝 놀란다. 다음엔 공작가를 직접 모시고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둘이 민어회 한 접시를 놓고 두 시간이 넘도록 소설과 옛 목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가교로 거듭 났으면…
소설 출간 후 다시 목포를 찾은 공선옥작가와 함께 다시 ‘영란’의 흔적을 되 집어 보기로 했다. 온금동 다순구미 언덕을 올라 남주인공 정섭이 살았던 모란통닭집인 부광통닭과 ‘금지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의 도피처로 어울린다.’고 농을 했던 ‘장미넝쿨이 아름다운 집’도 다시 가 보았다.
과거 목포에서 소위 ‘출입’한다는 유지들은 오거리다방에 모여 들었다. 다방 마다 색깔과 성향이 있었고 모이는 부류의 사람들도 달랐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등 가릴 것 없이 목포의 여론이 형성되었고 예술가에겐 창작의 기운을 충전하는 곳이었다.
심지어 진보를 대표하는 임기준목사, 서한태박사, 박광웅의장 같은 분과 기업을 대표하는 박준형 행남자기 회장, 전태홍 목포시장, 임광행 보해소주 사장 같은 분들도 만나 도시의 여론을 조정했다. 그래서 갈등은 조정됐고 도시는 평화로웠다.
이제 오거리엔 다방이 한 곳만 남아 있다. 마지막 ‘묵다방’의 마담은 ‘오거리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것이 이제 사명의식 같은 것이 돼 버렸다.’라고 하소연 한다. 비록 계란 띄운 쌍화차는 팔지 않았지만 다방커피를 시켜놓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다. 어르신들이 오랜만에 만난 40대 젊은이들이 반가우신지 빙그레 웃어주신다.
언제부터 저분들과 우리 세대에 사이에 공백이 생겨버렸을까? 덕인주점에서 햇보리 숭숭 썰어 넣은 홍어애국 ‘호호’ 불어가며 탁주를 마시고 싶다. 한때 오거리를 채웠던 어른들의 넉넉한 품이 그립다. <글.사진 김대호여행작가> <이 글은 격월간 대동문화에 게재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