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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정과 미운정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좋을 때에 드는 정이 고운정이고 관계가 좋지 않을 때 드는 정이 미운정입니다. 고운정이 들 때는 행복한 때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때이기에 세상이 온통 장밋빛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이 때에 깨가 쏟아진다고 합니다. 미운정이 들 때는 개인적으로 힘들고 관계도 힘든 불행한 때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기에 세상이 온통 흙빛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이때 내가 왜 이 사람하고 결혼했는가 하고 가슴을 치면서 후회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관계에서 고운정만 들기를 기대하지만 인생은 항상 고운정만 들지 않고 꼭 미운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미운정이 들 때를 견디지를 못합니다. 미운정이 들 때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다질 때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미워질 때가 꼭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아닌 인간이기에 어떤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가 성경적인 깨달음으로 아무리 넓은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나의 감정(정서)은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가족이라면, 부부라면, 직장 동료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계를 피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지요. 이런 때에 우리들의 관계 가운데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을 봅니다. 우리의 관계 가운데 삼각형을 그리고 그 꼭지점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긍휼의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모든 관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서 미운정이 드는 기간이 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사람들은 미운정이 드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격한 말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싸늘한 냉담을 보이면서 정이 완전히 떨어지게 합니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미운정이 들 때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미운정의 시간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인생의 깊은 맛을 경험합니다. 미운정이 드는 시간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확인시켜줍니다.
김 영 근 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
2012년 4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이번 4월 11일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선거에 임하는 정당은 각종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당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삼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서울 강북지역에서 정당공천을 받아서 국회의원후보가 되어서 사무실을 방문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선거는 가장 큰 축제가 되어야 하는데 선택받는 과정 속에서 엄청난 편가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신앙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당을 선택해야 하고 후보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동지로 생각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을 적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택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의견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고 자신의 의견만이 진리는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같은 지역출신과 타지역출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와 중도파, 젊은이와 늙은이, 가방끈이 긴 사람과 짧은 사람 등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우리 모두는 필요한 사람들이고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택과정에서 경쟁하지만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들의 기도를 보아봅시다. 우리 남한 땅의 시·군·구는 248지역입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가정과 교회와 학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더욱 간절히 중보기도의 손을 모읍시다.
1. 기도시간: 가족중보기도는 개인이나 교회별로 정해진 시간에 하루 1회 이상씩 합시다.
2. 중보기도참여자: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기도의 대상: 내가 살고 있는 <시ㆍ군ㆍ구>에 있는 가정들이 기도의 대상입니다.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식구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내가 먼저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게 하소서!
셋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하소서!
넷째, 가족식구들의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특별기도제목>
첫째, 학교공동체가 서로를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풍토가 되게 하소서
둘째, 모든 가정이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셋째, 김정은 체제의 북한 사회에 국제사회를 향한 개방과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소서
넷째, 선거기간동안 편가름이 사라지고 화해와 통합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심지가 견고한 마음
김영근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육신을 좇는 마음과 성령을 좇는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육신을 좇는 사람들의 마음을 옛사람의 마음, 성령을 좇는 마음을 새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옛사람의 마음속에는 불신앙과 교만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여기에 반하여 새사람의 마음에는 신앙과 겸손이 밑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성령만을 좇지 못하고 육신도 좇아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어떤 때는 성령을 따라 살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육신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마음을 가진다는 말은 오직 성령님에게만 집중해서 예수님을 주인 삼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상담자가 가져야 할 심지가 견고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육신과 성령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예수님의 말씀과 마음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상담자는 흔들리는 <두 마음>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마음이 심지가 견고한 마음입니다. 상담자도 인간이기에 인간이 가지는 모든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도 이성에 대한 유혹도 명예에 대한 유혹도 능력인정에 대한 유혹도 받습니다. 유혹을 받고 유혹의 욕심에 따라 살면 쉽게 한 마음에서 두 마음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상담자는 흔들리는 두 마음을 포기하고 심지가 견고한 한 마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한 마음은 예수님만을 따르는 정한 마음이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7,8).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상담자를 찾아오는 내담자들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연약하기에 두 마음을 품을 때가 있고 이것은 또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다윗같은 훌륭한 분도 광야에서 쫓기는 생활을 할 때는 한 마음을 품었지만 궁궐에서 편안할 때는 흔들리는 두 마음을 품고 유부녀인 밧세바를 품었습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결과로 결국 간음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두 마음을 품고 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항상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거듭된 죄악의 생활은 한 인생을 만신창이가 되게 합니다.
내담자를 상담할 때에 상담자가 두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들은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상담자로서 두 마음을 품고 죄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절대권력자인 다윗왕 앞에 섰습니다. 이 때 나단은 왕의 비위를 맞추는 두 마음을 가진 상담자가 아니라 견고한 마음을 가지고 왕을 책망합니다. “당신이 간음죄를 짓고 살인죄를 지은 악한 임금입니다.” 나단의 책망은 다윗으로 하여금 통회자복하게 해서 두 마음에서 한 마음으로 돌아오도록 했고 그를 치유했습니다. 권력자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한 마음을 가졌던 나단은 좋은 상담자였습니다(삼하12장). 다윗 왕이 흔들릴 때에 나단도 함께 흔들렸다면 다윗의 회복은 불가능했습니다.
모든 상담자들은 심지가 견고한 상담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심지가 견고한 상담자를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상담자 요셉은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지혜롭고 따르고 싶은 상담자입니다.
요셉은 원래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색옷을 입고서 거들먹거리고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연단을 받으면서 그의 삶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그는 심지가 견고한 상담자로 든든히 세움을 받습니다. 주인인 보디발의 부인의 끈질긴 유혹에도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종살이에도 옥살이에도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대하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원수같은 형님들을 만나서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 속에서 그들을 수용하며 아름다운 용서의 실천으로 진한 형제애를 회복합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궁궐에서도 멋진 상담자의 역할을 합니다(창39-50장).
상담자의 모델이신 예수님은 거절당했을 때 반항하면서 흔들리는 두 마음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흔들리지 않은 견고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고 사는 우리들의 진실한 상담자가 되셨습니다. 나의 주변사람이 흔들릴 때에 내가 흔들지 않아야 견고한 상담자가 됩니다.
치유목회칼럼 8 나의 치유목회 한영수목사
정말 은혜를 경험하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별히 은혜로 구원받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한 것이 심각하다. 얼마 전 기독공보에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칼럼을 읽었다. 글쓴이는 사람을 세 부류로 분류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그러면서 이 사람들과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서술했다.
첫째, 좋은 사람에 대해서 말했는데 좋은 사람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받기에 합당할 만큼 그렇게 좋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나쁜 사람에 대해서 말했는데, 나쁜 사람은 구원받기가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나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상한 사람에 대해서 말했는데,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쁜 행동을 계속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영화 <도가니>에 나오는 청각장애 학교장 같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겉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교회에서는 장로였다. 하지만 실상은 장애소녀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읽으면서 크게 동감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이상한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왜 이런 이상한 사람이 많은 것일까?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나도 모르게 죄를 심상히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닫고 경험하면 죄악들 예컨대 거짓 음란 술주정, 점보고 무당 찾아가는 것-이런 것은 너무나 역겹고 매스껍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자연히 떠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옛날 애굽 생활을 동경했는데, 이것은 아주 비정상적이고 타락한 백성의 모습이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떠나 살던 과거의 삶은 나중에 온통 후회가 될 것들이다.
바울은 디도서 3장 4-5절에서 구원받은 삶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바울은 이 대목에서 구원받은 삶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고 말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죄를 씻음 받아 다시 태어나고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경험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본문은 죄를 씻음 받아 다시 태어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경험이 있을 때 구원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은혜로 죄씻음 받았음을 확신하는 차원이 아니고, 다시 태어난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하고, 성령님이 내 속에서 나를 새롭게 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의 소유자라면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고, 아무도 보지 않고 있다고 몹쓸 짓을 할 수는 없게 된다.
더 나아가 선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말은, 우리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일은 오히려 구원의 열매고 구원하신 목적이다. 이런 신앙인식이 나에게는 분명히 있는지 돌아볼 때이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구원에 대한 거품 현상이 의외로 크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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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시작될 때 - <송길원의 요즘생각에서 펴옴>
구부정한 허리에 무거운 짐을 들고 터벅터벅 회사로 출근하는 남편이 안 돼 보일 때, 야단맞고 제 방으로 힘없이 들어서는 아들이 측은해 보일 때, 헤어지자는 소리에 말없이 돌아서 걸어가는 뒷모습에 한없는 연민의 정이 느껴질 때, 그래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일 때가 사랑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김영근의 가정행복교실 4
가족관계를 회복시키는 공감(共感)의 놀라운 위력
가족끼리도 서로가 싫은 소리를 하면 귀를 닫고 마음을 닫습니다. 시집간 딸이 짜증스럽게 “O서방이 철부지같은 행동을 해서 결혼생활이 너무 힘이 듭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친정 어머니가 말합니다. “자신있다고 부모가 반대하던 결혼을 하더니 남편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너를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신뢰했던 딸이 결혼생활을 잘 하지 못하니까 친청 엄마가 화가 나서 던진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친정 엄마의 마음도 무척 상합니다. 시집간 딸은 딸 입장에서 힘든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을 이해할 줄 알았던 친정 엄마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화가 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때 딸의 짜증스러운 이야기를 듣고서 친정 엄마가 “O O 아, 너의 신혼생활이 매우 힘든 모양이구나. 너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까 내 마음도 많이 아프다.” 하고 공감해주었다면 엄마의 말을 듣고 딸은 어린 아이처럼 엄마 품에 안겨서 한바탕 웁니다. 이제 딸은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어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걱정 끼쳐드려서 미안해요. 최선을 다해서 살아볼게요.” 엄마는 딸을 향해 넉넉한 미소를 짓습니다. 엄마와 딸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무한한 신뢰를 느낍니다.
공감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공감은 위력이 있습니다. 공감은 상담상황에서 상담자가 내담자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감은 모든 인간관계에 필요하며 가장 가까운 사이에도 꼭 필요합니다. 공감은 막혀진 벽도 허물어뜨립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이에도 공감하지 않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부수기 힘든 벽이 생깁니다.
힘든 이야기를 모처럼 했는데 친정 엄마가 공감하지 못하고 비난하면 딸은 더 이상 엄마와 머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면서 정들었던 친정집도 귀찮아 보입니다. 나의 마음을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하면서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가족 안에서 공감은 참 소중합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추측해서 말로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공감을 통해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주고 힘들어하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긍휼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공감의 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베데스다못가를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만성질환으로 보낸 환자에게 말합니다. “너의 병이 오래 되었구나. 이 고통스러운 질병에서 고침받기를 원하는구나”(요한5:6). 환자는 이 말을 듣고 “예, 그래요, 저는 정말 낫고 싶어요. 그런데 실상은 나보다 조금 더 건강한 사람이 먼저 물이 동할 때에 연못으로 들어가기에 나는 한 번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요3:7). 예수님의 공감은 오랜 시간에 절망의 벽속에 갇혀 있던 이 환자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마침내는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가정 안에서 주로 어머니는 공감을 많이 해주었고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공감대신에 훈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친밀감은 공감을 통해서 유통되기에 자녀들은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더 편안합니다. 물론 아버지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공감을 적게 하기에 자녀들 마음속에는 어머니의 공감이 사랑으로 각인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자취하면서 보냈는데 고3 2학기에는 입시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어머니가 한 달 정도만이라도 밥을 좀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간곡한 편지를 보냈는데도 어머니는 오시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상했지요. 11월 말 정도가 되어서 어머니는 김장김치와 쌀을 갖고 오셨습니다. 차멀미를 심하게 하시던 어머니는 힘이 드셔서 벽에 기댄 채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영근아, 네가 자취를 하면서 공부하느라고 힘이 들어서 엄마한테 한 달만이라도 밥을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엄마가 오지 않아서 네가 무척 서운했겠구나. 엄마는 몸이 너무 아프단다. 그런데 걱정하지 마라. 곧 나을 거야.” 벌써 38년 전의 일이지만 자신은 생사를 넘나드는 심한 질병에 시달리는 고통 중에 있었지만 입시준비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마음을 공감해주었던 어머니는 참 사랑 자체였습니다.
물론 공감은 언어로 표현되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언어 이외에 비언어적인 방법으로 전달되기도 합니다. 눈빛으로 공감할 때도 있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공감할 때도 있습니다. 행동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방신 선지자 850명과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승리 후에 탈진한 엘리야에게 왕후 이세벨은 엘리야의 생명을 거두어 가겠다고 협박을 하자 그는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에 숨어서 죽기를 간청합니다. 이때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격려하면서 공감해줍니다. 엘리야를 향해서 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연약해졌느냐고 추궁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힘들어 하는 엘리야를 공감하면서 그를 쉬게 하고 필요한 음식물을 공급해줍니다. 하나님의 천사의 적절한 공감은 엘리야로 하여금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힘을 줍니다(왕상19장).
문형욱
이성교제는 “꼬시기”?
1,000여명의 크리스천 청년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내게 가장 먼저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이성교제를 잘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매를 잘 꼬시려면 뭘 해야 하나요?”이다. 많은 청년들은 이성교제 라고 생각하면 흔한 말로 “꼬시기”, “만나기”, “엔조이” 등으로 생각을 많이 한다. 이성교제는 예나 지금이나 음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를 만나는 그런 관계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교제 프로그램이라 하면 일단 얼굴이 붉어지며 약간의 가벼운 웃음이 먼저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는 이성교제 만큼은 부모나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을 꺼려하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성교제를 음지화 해서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 이외에는 잘 오픈 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음지화 하면 이성교제 시 가장 문제시 되는 스킨십 등에 커다란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부터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혼전 성경험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이다.(데이터는 조만간 정리해서 올릴 예정) 이렇게 이성교제 시 점점 타락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성교제를 어떻게 생각 하는가?”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이 든다. 이성교제를 좀 더 밝고 유쾌하게 그리고 오픈 되게 하면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혼사길 망친다고 한다. 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누군가와 교제를 시작하면 모든 것을 누구나 에게 오픈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성교제에 대해 올바른 지침을 해 줄 수 있는 사역자들에게 오픈 하며 상담을 해보라는 것이다. 이성교제는 정말 중요한 결혼 전 단계이다. 많은 청년들은 이성교제를 많이 하지 않고 바로 한 사람 만나서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교제하고 이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 한 후에 결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카사노바 처럼 여러 사람을 상대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제 시에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결혼은 무엇인지를 한 가지 한 가지 알아가자는 이야기다. 이성교제는 단순한 “꼬시기”가 아니라 “이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행복한 결혼 생활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성교제를 건전하고 유쾌하게 경험한 사람들이 결혼 후에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더 높은 확률을 가지고 있다.
김영근의 마음치유여행 5 - 사랑과 용서의 하늘 아버지 만나기 -
하늘 아버지 알아가기
평생을 목회했던 목사님 한 분이 교회를 은퇴할 무렵에 은급문제로 교회 리더십과 갈등을 겪으면서 신앙의 본질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인 故한경직목사님도 마지막에 치매가 심해지면서 영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잘 부르는 복음송가 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어렵고 힘든 일이 계속되면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과 환경이 어려워지면 <좋으신 하나님>은 명목상이고 하나님을 벌주고 책망하는 분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벌주는 분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엔가 사랑이 많으신 참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의 <하나님 관(觀)>은 변한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뒤틀리게 할 때가 많습니다(송봉모, 『대자대비하신 하나님』, 서울: 바오로딸, 1999, 9).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소중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모두 아는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생 동안 알아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서만 아는 것은 아니라 나의 전인(全人)으로 나의 온 인격(人格)으로 알아갑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잘못 알아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경우입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신이 드렸던 재물은 열납하지 않고 목축했던 동생이 드렸던 재물은 열납했던 하나님의 편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편애자 하나님을 심판하려고 동생 아벨을 죽이고 불행한 살인자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인생이 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이 부정하다고 소문난 여인은 동네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으려고 낮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지요. 이때에 자신의 망가진 인생을 막장 인생으로 생각했던 그녀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배자와 증거자로 새로운 인생을 행복하게 시작합니다.
내가 만난 하늘 아버지
세계적인 선교단체인 국제YWAM(Youth With A Mission)의 총재인 로렌 커닝햄목사님은 자신이 설립한 이 선교단체의 목적을 To Know Him & Make Him Known<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그 하나님을 알리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풍성하게 알아가는 일이며 둘째는 그 하나님을 전도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세례를 베풀면서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인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유대인인 내가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왔습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왔습니다. 이제부터 이방인도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엄청난 사건으로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박스에서 벗어나 누구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찾아간 교회는 두 칸짜리 방을 붙여놓은 가정교회였습니다. 그 때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는데 붓글씨로 강대상 오른쪽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왼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표어처럼 붙어있었습니다. 그 때에 동네의 친척 누님뻘 되는 분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이 분은 결핵병을 앓는 분으로 병 고치기 위해 교회를 다녔습니다. 방 두 칸에 아이들로 가득 찼습니다. 젊은 집사님 한 분이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면 귀를 쫑긋하고 들었습니다.
순진한 유년 시절이라 교회학교 선생님이 하시던 이야기를 그대로 스폰지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회개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해서 집에 돌아와 방구석에 개어놓은 이불위에서 뜨겁게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에 뜨거움을 경험하기도 했는데 성령님의 작은 불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종종 쪽복음서를 나눠주었습니다. 그 겉표지에는 예수님이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그 양을 안고 바라보면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예수님의 품안에 안긴 양이 바로 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실망하고, 병들고, 낙심해 있을 때 나에게 오셔서 나를 껴안아주시면서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시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쪽복음서의 그림은 나의 심비에 새겨졌고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쪽복음서에서 만났던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새로 만난 하늘 아버지
내가 어린 시절에 감격적으로 만난 사랑의 하나님은 어느 순간엔가 조금씩 율법의 하나님으로 변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여전히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면서도 사랑하기보다는 나를 더 책망하고 기대치를 채우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은 정말 나를 안아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성장한 가정은 전형적인 유교가정이었고 가부장적인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외형적으로는 책임감이 많으셨지만 나에게는 늘 무섭고 두려움의 대상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지는 않는 베풀기 좋아하는 신실한 농부였고 사람들에게는 호탕한 사람이었지만 속마음을 나누는 친밀함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강조한 것은 남에게 인사를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성적이었던 나는 인사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움이 심해서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한 번은 옹기장사를 다녀오신 아버지가 동업자들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서 술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그 때가 중1 여름방학 기간이었는데 나는 동네 어른들이 모두 가면 인사를 드리려고 방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배회했었습니다. 내가 밖에 있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는 내가 들어와서 동네 어른들에게 절을 하기를 원했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방에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가고 나서 분노한 아버지에게 뺨을 몇 차례 얻어맞았고 나는 억울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두려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상급학교에도 진학하게 되었지만 나의 감성과 사회성은 잘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권위자들 앞에 서면 표정이 굳어지고 몸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안절부절 못했던 나는 영향력있는 사람들 앞에 서면 과도하게 긴장했습니다. 기독교학교인 신일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지만 내가 만난 하나님은 친밀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많은 짐을 지우고 기대치를 채우도록 강요하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형이 생각했던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예수 안에서 자유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인정받으려고 경쟁했습니다. 나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서 인정받음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는 더욱 심각한 죄책감에 눌려서 나의 영혼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나의 페르조나(외형)는 평안하게 웃었지만 나의 그림자(내면)는 두려움 속에서 울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율법과 죄책감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유학생활과 목회생활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생활도 은혜의 생활도 아닌 인정에 목마른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기독신앙인의 정체성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인정에서 교회의 인정으로 위치 변경이었습니다. 나의 경험은 인정받음이라는 벽을 쌓고 내가 그 벽 뒤에 숨어있으면 이 벽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내가 행복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가정과 교회의 사역현장에서 보이기를 원했고 그렇게 보인 적도 많았지만 나의 심령에 참된 만족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의 심정으로 물었습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왜 만족이 없고 힘만 들지요?”
하나님은 이러한 나에게 1994년 한 해 동안 안식을 주셨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삼년 반 만에 한국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동안 하와이 코냐에 있는 국제YWAM 선교단체에서 약 1년 정도를 지내면서 나의 내면을 돌아보았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긍휼함을 새롭게 맛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동안 성공하기 위한 일중독자로 살아온 내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기대치를 세워놓고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고 내가 경험한 하늘 아버지의 첫사랑이었고 하늘 아버지는 여전히 그 사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놓쳐버리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욕심 많은 신의 모습으로 하늘 아버지를 바꿔놓았습니다.
심각한 죄책감과 회한(悔恨)으로 시달리는 나에게 예수님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으로 나의 가장 친밀한 주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LA에서 머물면서 그렌데일 뒷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환상가운데 맞은 편 산골짜기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채로 피를 흘리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묵묵히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보혈로 죄에 대한 용서를 확신시켜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죄에 관한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두려움에 매인 나에게 하와이의 한 해변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습니다. 그 때에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며 물속에 빠져가는 둘째 아들 은섭이를 천사들(두 명의 미국 청년)을 통해서 구조하면서 나에게 인과응보를 넘어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목회상담학자인 에드가 드레이퍼(Edgar Draper, 1965)는 내담자의 진단을 위한 세 가지 질문을 제안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인물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이야기는?> 등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면서 성경말씀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성경구절은 행24:16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롬5:20b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나이다.”와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행위의 온전함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주님의 긍휼함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무엘 선지자를 참 좋아했습니다. 사무엘을 허물이 없는 온전한 인격의 사람으로 보면서 그를 성경상의 멘토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속임수를 써는 못된 인간이면서 여러 여자를 거느렸던 야곱을 참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나는 사무엘선지자 보다 야곱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짓말쟁이와 꼼수로 인생을 출발했지만 인생의 후반기에는 가장 아꼈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포기하면서 움켜쥐었던 손을 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동안에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도 참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제 자신이 사마리아 여인이 되었고 간음한 여인이 되었고 탕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긍휼함을 맛보았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아무리 노력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옛사람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바울사도의 쓰라린 실패와 고통이 <로마서 8:1-2>의 선언으로 해결되는 감격이 나에게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옮겼느니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율법이 주는 죄와 사망의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성령이 나의 인생을 온전히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이제 나도 새롭게 선언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육신의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다!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에 대해서 육신의 아버지는 늘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불만은 많지만 직접 잘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권면하는 아들이 못마땅해서 가끔 화를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해서 아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기도 중에 나는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정사역을 하면서 나는 식구들끼리 친밀함을 권면하는 입장인데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방문하고 떠나올 때에 나는 아버님을 꼭 안아드리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는데 실천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혹시 내가 아버지를 안으려고 하면 <이 애가 미친 것이 아니냐>고 말씀을 하실 것 같아서 실천이 두려웠습니다.
한 번은 큰 아들 민섭이가 나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 우리가 떠나올 때에 할아버지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았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향해서 아버지는 더 진한 사랑을 하신다는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이후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버지를 꼭 껴안았습니다. 아버지는 <이 애가 미쳤느냐>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내 품에 안겨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2010년 10월 21일에 소천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해 3월부터 교회를 출석하셨으니 오후 5시에 부름받은 포도원의 일꾼이셨습니다. 그 때 저는 결혼 25주년기념 제주도 여행 중에 아버님 소천의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목회하는 아들집에 오면 교회를 의무적으로 출석하는 아버지였는데 인생의 마지막에 예수님께로 귀의하셨습니다. 참 좋으신 하늘 아버지는 저와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신의 아버지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에 일찍 응답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의 육신의 아버지는 내가 갖지 못했던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는 종종 이 땅의 많은 육신의 아버지들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너무나 다양한 육신의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말이 없지만 표현이 때로는 어눌하고 거칠지만 여전히 자녀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변함없이 갖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쓴뿌리로 인하여 아픔을 갖는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에 육신의 아버지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안에 하늘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아버지들의 원형속에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광일의 영성이야기 7
광야의 영성
<영성>이란 말이 이런저런 형태로 정의되고 있으나 어떤 세련된 개념적 풀이보다 적어도 이 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관점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사람은 영적 존재로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산다. 궁극적인 무언가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경험되어지고 깨달아지는 것들이 생긴다. 이런 것들을 담는 그릇으로 영성이란 말을 이해하려한다. 만일 그 경험과 깨달음이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이끄는 지향점으로 자리매김 될 때, 그런 삶을 영성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영성>은 사람의 경험과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지향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삶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경험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적 체험을 뜻하는 것이고, 깨달음이란 체험에서 얻어지는 결과로서의 자기고양(高揚)이고 영적 삶이란 그 이후에 지속되는 생활의 연속성이다. 이 세 가지가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통합되고 일치될 때 비로소 영성은 영글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의 <영글어 감>을 영성화라고 이름 붙여본다. 영성이란 말을 풀이해 본다면, 먼저 영성은 <영/靈>이란 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영은 성경적으로는 본래 <숨>을 뜻하는 말이었다.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나 같은 뜻을 지닌 그리스어 푸뉴마(Peneuma)는 모두 숨이나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숨>이나 <바람>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몸을 만들고 코에 이<숨>을 불어넣었다. 자연물이라는 진흙덩이에 특별한 하나님의 입김이 불어넣어져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한다. 숨이 끊어지면 죽고 숨을 다시 쉬게 되면 살아난다. 숨에 모든 게 달려 있다. 숨이 생명이고 숨이 삶이고 숨이 생명체고 숨이 사람이다. 숨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불어 넣어준 이 숨을 한자어로 <영>이라 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곧 거룩한 영은 새로운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숨이란 말이다. 사람아 이 거룩한 숨을 쉬면서 살아라! 인생들아 제발 이 거룩한 영을 날마다 순간마다 들이키고 내 쉬면서 살아가라! 내가 이미 했으니 내가 다시 하겠다. 그래서 나온 말씀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요엘 2:28-29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사도 2:1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숨을 쉬는 존재인 사람을 가리켜 영적 존재 또는 영성적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영>이란 말과 <영성적>이란 말의 차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요한4:24)”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성적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무 아무개는 영성적 삶을 산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영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본체는 영이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또는 본체적으로 영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그 무엇을 추구한다. 영 그 자체는 아니지만 영적인 그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해 이를 영적존재 또는 영성적 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이란 말과 <영성적>이란 말은 어떻게 다른가? <영적>이란 말이 보다 넓은 포괄적 의미를 드러낸다고 한다면, <영성적>이란 거기에 어떤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영성>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영성은 <성령론>과는 구별된다는 것, 성령론은 삼위일체 가운데 제 3위(位)에 해당되는 성령 하나님에 관한 것 즉 신론(神論)임에 반해, 영성은 <인간론>또는 <인성론>에 가깝다. 둘째로, 영성은 양극 또는 대극(對極)의 통합을 이루고자 한다. 음과 양, 여성성과 남성성, 하늘과 땅, 수직과 수평, 좌와 우, 어둠과 빛, 강함과 부드러움, 드러남과 감춤, 공(公)과 사(私), 존재(being)와 행위(doing)등에서. 셋째로, 영성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5:48)는 그 온전(穩全/wholeness)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의 상태에서 참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하나로 귀일 될 것이다. 이를 위한 부단한 자기점검과 연단의 과정이 따라야 한다. 즉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는”(고전 15:31) 그리고 날마다 사는 곧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체험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영성의 과정을 <영성화/spiritualization)>라 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영성화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광야를 떠올리게 된다. 곧 광야의 영성이다. 광야는 사막을 포함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빈들 곧 황무지를 말한다. 이곳은 일찍이 모세가 사십 년을 훈련 받은 현장이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십 년을 견뎌낸 곳이며, 우리 주님이 사십 일을 싸웠던 곳이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이 광야의 과정이 필요했었다. 그렇다면 광야와 영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면 사막을 지나가고, 사막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사람이 자기를 무(無)로 하며, 자기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몰아내고, 하나님께만 모든 자리를 내드리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이라는 집을 완전히 비게 할 수 있는 곳은 그곳입니다.”(샤를 드 푸꼬, 미셀 카르주 지음, 성바오로출판사. 209쪽)
사하라 사막의 성자로 추앙받는 푸코의 말이다. 사막은 있는 것 보다는 없는 것이 더 많은 곳이다. 있음보다는 없음의 장소이다. 영성이 무엇 무엇을 함(doing) 보다, 있음 그 자체(being)에 비중을 두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정한 있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없음(nothing)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 없음의 장소가 바로 사막이다. 존재는 행위에 앞선다. 그리고 무(無)는 존재에 앞선다. 참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를 체험한다. 그렇다. 무의 체험이다. 이 무는 창세 이전의 공허이며 부활 이전의 십자가이며 예수를 따르기 이전의 자기 부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유(有)는 무에서 나왔다. 무 없이 유가 있을 수 없다. 영성이 이 무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영성은 <없음>의 영성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누가 6:20)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마태 5:3)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의 것이다.(마태 18:3)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마태 19:24) 권력이 큰 헤롯은 예수를 죽이려 하였고 재물이 많은 청년은 예수를 떠났으며 명예 있는 니고데모는 체면 때문에 밤이 되어서야 길을 나설 수 있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마태 23:13,15,16,23,25,27,29)” 그들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에 화(禍)를 자초하였던 것이다.
<없음>을 영성화하기에 빈들만큼 좋은 곳이 또 없다. 거기엔 헤롯의 궁도 나봇의 포도원도 없다. 그 뿐이랴. 거기엔 헤르몬의 설경(雪景)도 가이사랴 빌립보의 시원한 물줄기도 없다. 요단강은 물론 갈릴리 호수도 아주 멀리 있을 뿐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누가 있어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으랴! 산이 있어 산촌이고 강이 있어 강촌이고 바다가 있어 어촌인데 도무지 그런 곳이 없으니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 그런데 거기에 사람이 있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는 사람이 되기 위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벗고 자신이 되고자 하며 겉 사람을 벗고 속사람이 되고자 한다. 참 나로 거듭나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한다. 광야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서 사람은 벌거숭이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실 그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다. 그래서 광야는 없는 곳에서 있는 곳이 되었다. 무에서 유가 된 것이다.
광야에 그리고 사막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왜 그분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가도록 하였겠는가? 모세로 하여금 미디안 광야로 가게 한 이도, 또 이스라엘 백성을 같은 곳으로 인도한 이도 하나님이셨다. 예수께서도 성령 하나님께 이끌려 유대 광야로 갔다. 광야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싸워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신 곳이다. 부활이 완전한 승리이며 재림이 최후의 승리라고 한다면 유대 광야에서의 승리는 우리 주님의 첫 승리가 된다. 싸움 중의 싸움이 영적 싸움이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때 이 전쟁터가 바로 빈들인 것이다. 사막에서의 전투만큼 치열한 싸움은 또 없을 것이다. 모래바람이 그렇고 은폐와 엄폐의 경우가 그렇다. 적에게 완전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으랴? 적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빤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영적 싸움의 특징이다. 이 전투에서는 나뭇가지나 물감으로 위장한다든가 은폐물에 나를 숨긴다든지 하는 일은 도무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이건 육박전이니까! 그렇다 이 싸움은 사탄과 단 둘이 맞장 뜨는 육박전이다.
광야는 그저 거칠고 비어 있는 들판만은 아니다. 한낱 물 없는 모래밭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시험과 연단의 장소로 구별한 하나님 계신 하나님의 땅이다. 이런 광야를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일부러 광야를 찾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까닭으로든 광야로 내 몰린 자는 복되다! 그는 이미 영적 존재로 영성의 과정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김은섭
“조금만 더”
대학시절, '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한 달 25만원으로 6~7명의 순원들에게 가끔 밥을 사주면서 지내기는 빠듯했기 때문이다. 사치를 하거나 유흥에 돈을 많이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저 월말에 라면과 빌붙기를 하는 생활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많은 돈이 없어도 나는 행복했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더 벌면…' 내가 소위로 임관하면서 받을 월급을 계산하면서 한 생각이다. 십일조와 후원, 저축과 기본적인 식비, 통신비, 교통비를 제외하고 나니깐, 어라? 별로 남는 게 없다. 기타도 사고 싶고, 컴퓨터도 사고 싶었는데, 이래서는 쉽지 않다. 그러다가 1월 달 첫 월급에 설날 보너스가 더해져서 기대 이상의 돈이 들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 속에는 아쉬움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대학시절에 비교하면 몇 배의 돈이 내게 주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속으로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이 외침을 지금 중단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동안 '조금만 더!'를 외치며 살 것이다. 내가 몇 억의 연봉을 받더라도 상관이 없다. 나는 조금만 더 필요할 뿐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그래서 남들이 나를 무시해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과의 뜨거운 첫 만남 때 드렸던 고백이고, 지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결심이며 다짐이다. 나의 이런 고백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들과 언론에 등장하는 교회의 재정비리에 대해 정죄하는 교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졸업 후 월급쟁이가 된 나는 표현만 다를 뿐 그들과 똑같은 욕심과 불만족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돈이 부족해지면, 헌금부터 아까운 그런 사람이다. 이제는 겸손하게 기도한다. 나는 청빈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기도가 아니라, 부디 돈을 쫓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평생 '조금만 더'를 외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닌, 자족하기를 아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의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김하기칼럼 6
세종의 창의적 리더십
세종의 시대 조선은 유달리 창의력이 왕성했다. 세종대에 조선의 세계적인 발명은 29건이었는데 중국은 5건, 일본은 한 건도 없다.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모두 합해 28개라고 일본 도쿄대학에서 발행한 과학사사전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대에 나온 새로운 발명은 무려 5천 건에 이른다. 가히 세종 르네상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종 르네상스를 이끈 세종의 창의적 리더십은 어디서 나왔을까? 최근에는 그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주목하고 있다. 1397년 조선 건국 5년째에 태어난 그는 피비린내 나는 두 왕자의 난을 온몸으로 겪으며, 정치게임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체득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 이도(세종의 자)는 아버지 태종에게 외갓집의 불충을 고자질해 민씨 일족을 도륙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술자리에서 시부를 지어 타인들과 비교하며 잘난 체 하기를 좋아했고 식성은 고기가 아니면 잘 먹지를 않아 몸이 비만해 평생 47가지 질병을 달고 살았다. 셋째 충녕이 두 형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제치고 대통(大統)을 이었다는 정통성의 시비도 지병처럼 따라 다녔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세종은 어떻게 영명한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먼저 독서를 들 수 있다. 세종은 눈에 안질이 생길 정도로 맹렬히 책을 읽었다. 어쩌면 독서는 아버지 태종의 눈에 들기 위한 몸부림이자, 형제간 비교우위를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버지 태종이 공부 잘하는 셋째아들에 대한 만족감을 피력한 장면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어쨌든 셋째 충녕은 왕이 됐으나 상왕 태종의 권력은 기세등등했다. 태종과 그 곁을 맴도는 노신하들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마음대로 펼치지 못했다. 게다가 즉위 이후 흉년이 계속됐고 재위 7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민심이 폭발할 정도로 흉흉했다. 오죽했으면 강원도의 이각이 ‘지금 임금 때문에 못 살겠다. 차라리 양녕대군이 왕이 되었더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해 역모죄로 잡혀왔을까. 하지만 세종은 호학의 자세, 겸손과 인덕의 풍모로 평균 20세나 많은 태종의 늙은 대신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어릴 때 모순덩어리였던 그가 섬김과 인본주의 리더십의 군주로 바뀐 데에는 독서를 통한 끊임없는 자기수양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임질(淋疾)이라는 극심한 병통이 있었다. 오늘날 세종의 임질은 성병이 아니라 요로결석이라고 추측되지만 이 병을 통해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백성의 아픔도 대리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번은 재상 허조가 종묘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갔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당시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종묘제사를 망쳤는데도 세종의 첫 일성은 ‘허조는 다치지 않았나?’였다. 그 다음 말은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계단을 넓혀라.’였다. 허조의 실수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어느 누가 이런 세종의 배려에 감격하지 않겠는가. 결국 허조는 태종의 노대신 중 최초로 세종의 신하로 돌아섰고, 이후 세종을 위해 죽기 살기로 일을 하다 과로사했다. 비단 허조뿐만 아니라 6진을 개척한 최윤덕 등 세종시대에 순직과 과로사를 한 신하들이 유달리 많았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군은(感君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의 리더십은 황희·허조·맹사성와 같은 명재상, 김종서·최윤덕과 같은 명장, 이천·장영실·이순지과 같은 불세출의 과학자, 성삼문·신숙주와 같은 뛰어난 집현전 학자를 창조의 길로 이끌어 세종 르네상스를 만들고 조선조 500년의 표준을 세웠다. 그 결과 조선의 산업은 풍성했고 국방도 튼튼했다. 조선 건국 당시 국민 1인당 GNP는 불과 80달러였는데 세종 때 GNP는 200달러로 세 배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60년 우리나라 GNP가 80달러인 것을 보면 놀라운 경제수준이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나라의 모습을 한 구절로 요약하고 있다. “왜인과 야인들도 세종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했고, 세종 30년간 백성은 전쟁을 보지 않고 편히 살면서 생업을 즐겼다(倭野人畏威懷德 三十餘年之間 民不見兵 按堵樂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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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마라톤치유집단상담>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 4월 27일(금)저녁 7시-28일(토) 저녁 7시, 장소;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주제 : <적대감에서 환대로의 여행> 인도자: 김영근 원장
회비 : 13만원 등록: 농협121015-52-049140 김영근
참가대상 : 모든 크리스천, 소그룹인도자, 집단상담 실습생 및 상담전공자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상담 ․ 교육프로그램 안내
<치유상담 아카데미>
상담전문가로 임상을 경험하고 유능한 상담자로서 훈련받는 상담교육과정이다.
과목 1 |
ㆍ주제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MBTI, 자기발견, 타인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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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일시 : 5월1일-6월26일(매주 화, 8회) 오전10:30-12:30. |
과목 2 |
ㆍ주제 : 전인치유<내적, 인격, 관계, 영적치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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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일시 : 5월1일-6월26일(매주 화, 8회) 오후2시-4시. |
<개인상담>
사전전화예약한 후에 상담을 진행합니다. 지역교회의 위탁상담을 환영합니다. 개인상담예약 02-3675-7368, 010-3290-1007.
<집단상담>
만남과 나눔을 통해 함께 치유와 회복을 찾아가는 소그룹 치유공동체모임
집단6기 주제 : 하나님의다림줄 일시 : 3월7일-4월25일(수, 8회)
집단7기 주제 : 전인치유 일시 : 5월2일-6월27일(수, 8회).
마라톤집단상담2기 주제: 적대감에서 환대로 일시: 4월27-28(1박 2일).
<목민독서교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저녁에 읽은 책을 함께 나누는 식사를 겸한 독서치유모임
4월 모임: 4월 26일 저녁7시-9시 도서: 김덕경 ․『허물이 많아도』
5월 모임: 5월 31일 저녁7시-9시 도서: 조지 워싱턴 카버 ․『땅콩박사』
<교회집회>
쓴뿌리 치유 부흥회, 일시: 4월15일(주일)-16일(월), 장소: 행복한 교회
쓴뿌리치유 세미나, 일시: 4월 22일(주일), 장소: 현대교회
<교회초청 세미나 • 집회인도를 실시합니다.>
구역장(목자)교회학교교사 세미나 : 상담기술훈련, 대화법훈련, 감수성훈련
교회집회 : 쓴뿌리치유, 전인치유, 가정사역부흥회, 부부행복학교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가족치유상담연구원
가족치유상담연구원 가족 여러분, 잘 지내셨지요. 저는 지난 3월 17일에 몇몇 고등학교 동창생들과 와인열차를 타고 충북영동까지 봄나들이 여행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교제가 좋았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옛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이어령교수님의 따님인 이민아목사가 위암3기의 투병 중에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불꽃처럼 살았던 인생이었는데 마지막까지 복음의 열정을 불태우며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제 이 땅에서 순례의 여행을 마감하고 주님께로 가셨네요. 아직도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바쁜듯이 떠나버렸습니다. 이민아 목사님, 천국에서 먼저 보낸 큰아드님과 함께 안식하소서! 당신의 인생은 아름다운 감동이었습니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독서치유모임이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감동과 나눔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고 너를 알아가는 귀한 모임입니다. 3월의 책은 송인규『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이고 4월의 책은 『땅콩박사 조지 카버』입니다.
4월 넷째 주 4월 27일(금) 저녁부터 28일(토)까지 1박 2일로 한국교회백주년 기념관에서 제 2회 마라톤치유상담모임을 갖습니다. 이 모임은 연속 10회기(1회 70분)로 진행되는 모임으로 주제는 <적대감에서 환대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저희 연구원을 위해 후원하는 교회와 개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김영근>
2월 후원 ․ 교회 : 동숭교회, 참빛교회, 한마음교회, 유성장로교회, 안동서부교회, 예향교회, 예성교회, 삼송교회, 충신교회 ․
: 주재철, 김세광, 김은섭, 유해룡, 이은혜, 이지은, 이정산.
I 가족치유상담 연구원의 사역 I
►가정회복중보기도(기도사역) ►엘림상담실(개인상담ㆍ집단상담)
►지역교회위탁상담(협력사역) ►치유상담아카데미(상담교육)
►다문화가정상담(긍휼사역) ►중국교회지도자상담교육(교육선교)
►목민독서교실(독서치료) ►월간쪽지<예수사랑ㆍ가족사랑>발행(문서사역)
►구역장ㆍ교사상담기술훈련(훈련사역) ►교회집회ㆍ세미나(쓴뿌리치유, 전인치유)
주소 : 종로구 연지동 136-46 기독교회관 504호 / 02-3675-7368, (fax)7369
원장 : 김영근목사(010-3290-1007) 상담실장(010-3219-1097)
Cafe.Daum.net/familytherapy0191(daum 다음 카페→가족치유상담연구원)
메일 noksanlove@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351-0355-2650-43 김영근
찾아오는 길: 종로5가역 2번 출구 대학로 방향 200M⟶ 한국기독교회관 5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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