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사람들은 온통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립니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음식을 먹여 살리는 것, 전쟁을 중단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 이것들이 나는 본질적인 일이라고 믿습니다.
12년째 국제적인 구호활동을 벌여온 배우 김혜자씨가 세계 각국의 분쟁•기아지역의 체험기를 엮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너무 많은 것을 봤고, 그 광경이 목까지 차올라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제 눈과 심장을 빌려주는 심정으로, 지난해부터 꼬박 1년2개월 동안 이 책 쓰기에만 매달렸습니다. 제목은 꽃같이 예쁘고, 맞아도 아프지 않은, 그런 것으로도 이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틈틈이 쓴 일기와 비행기에서 적은 메모, 또 현지 방송국이 동행해서 찍었던 테이프를 책을 쓰기 위해 자꾸 읽고 보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내게 일어나 앉는 것처럼 느껴졌다"며 책을 쓰는 행위 자체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을 내비쳤다. 그는 "만약 화살이 날아왔다면, 그 사람의 고통을 위해 화살을 얼른 빼줘야죠. 이 화살이 어디서 왔는지 화살촉은 금속인지만을 따지고 있는 격"이라며 "세상은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급한데도, 비본질적인 것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비판했다.
지난 12년 동안 김혜자씨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해 소말리아, 르완다, 방글라데시, 라오스 등 14개 빈곤국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출발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해 최고로 히트했던 '사랑이 뭐길래'를 막 끝낸 후 기분전환을 위해 대학생 딸과 유럽 배낭여행을 떠날 참이었다. "비영리 기독교 자선단체인 월드비전 한국지부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공짜로 보내준대죠, 아프리카는 언제 또 가보겠어요. 그래서 딸아이 혼자 유럽 가라고 하고 목적지를 바꾼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제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영양죽을 얻어먹기 위해 갓난아기 동생을 업고 자동차로 40분 거리의 모래땅을 걸어오던 소말리아 소녀.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반군 대장의 아이와 정부군 대장의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던 열여덟 살의 레베카, 사람이 무서워 집 뒤로 숨어버리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 우연히 따라갔던 아프리카 여행 후 그의 가슴은 먹을 것이 없어 독초를 씹고 다니는 바람에 입술이 퍼렇게 물들어 있던 아이들, 눈 날리는 계절에도 신을 양말이 없어 양지바른 곳에 선 채 두 발을 열심히 비비던 아이들의 모습들로 채워져 갔다.
"처음에 좀 별난 여행지로 생각하고 갔던 아프리카가 저를 죄인으로 만들었어요. 땅에 발자국이 남을까 싶을 만큼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아무리 안고 있어도 팔이 아프지 않은 앙상한 아이들 앞에서 눈물샘의 실밥이 터져나간 듯 울고 다녔습니다."
1992년 국제 구호 단체인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와 여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녔던 그의 11년 세월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고자 했다. 보고 느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방송 활동을 중단한 채 집에 틀어박혀 1년 3개월을 꼬박 글쓰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눈물 대신 제가 할 일을 찾으면서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깨쳤죠."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빈곤한 나라들을 찾아 식료품과 교육비 지원, 직업훈련, 전쟁후유증에 시달리는 소년병들의 정신치료 등 절실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해마다 수십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고 6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사막을 곡예 하듯 넘었다. 단돈 100원이 없어 2~3일씩 굶는 게 예사인 케냐 소녀 에꾸아무,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는 시에라리온의 소년병 모하메드 같은 세상의 고통 받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 황열병도 멀미나 설사도 그를 막지 못했다. "뷰티 산업 규모가 수조 원이라고 하고 애완동물에게 수백 만원씩 쓴다는 오늘날에 왜 다른 아이들은 800원짜리 항생제 하나가 없어서 장님이 되야 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있는 아빠의 배 위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어야 하나요?" "르완다였을 거예요. 세 살배기 아기가 몸을 움츠린 채 천막 속에 앉아있기에 가여워 안아주었더니 내가 엄마인 줄 알고 가슴께에 손을 얹어요. 땅에 내려놓아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을 것처럼 가벼운 아이였죠. 경비행기를 타고 다시 케냐로 돌아가야 하는데 품에 안겨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아이를 내려놓을 수 없어 그냥 끌어안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 그런 아이들 이야기를 그는 대학노트에 연필로 써내려갔다. 아이들의 눈망울, 여인들의 고단한 모습이 떠올라 여러 번 눈물도 훔쳤다.
"계획이 따로 없이 그때그때 내 손길을 필요로 하면 달려갔다"는 김씨는 현재 빈곤국 50명 아이들의 학비를 대주고 있다. 2003년 10월부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시에라리온에서 내전으로 피해를 입은 가정을 골라 식량과 기술 훈련을 제공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주는 '마담 킴스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그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건 드라마가 아니니까요. 실제로 꽃 같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
"재벌, 정치가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많은 악수를 나눴지만 제 손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감촉은 난민촌 아이들의 앙상한 손입니다. 날마다 3만5000명씩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들, 결코 통계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들의 눈동자가 잊어지지 않아요."
"이젠 지갑을 열 때마다 '이 밥값이면 아이들 몇 명이 한달은 먹을 텐데'하고 계산하는 게 버릇이 됐어요. 이 책도 한 권 팔리면 어떤 아이가 사흘은 먹겠구나 싶어서 기를 쓰고 썼습니다." 지난 11년간의 일기를 들추고 비디오 테이프를 수십 번 돌려보며, 대학노트에 연필로 쓰다 포기하고, 또 다시 쓰기를 여러 번. 부어오른 손에 침을 맞아가며 그의 눈과 심장에 아로새긴 기억을 한 자 한 자 책으로 엮었다. 본문을 비롯해 사진설명까지 공들인 것은 물론 국가별 정치상황과 분쟁원인을 분석까지 하며 정성을 쏟은 이 책의 인세는 모두 전세계의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쓰이게 된다. "산다는 게 참 이상해요. 사람들은 저를 뛰어난 연기자, 한국의 여인상ㆍ어머니상, 언제나 관심과 화려한 조명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그렇게 생각하지만 늘 끝 모를 허무감이 들었어요." 연기자로 쉼 없는 사랑을 받아온 그지만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라는 근본적인 질문만큼은 비켜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월드비전 한국지부장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줬던 것이다. 나눔과 베품이야 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혜자씨는 이렇게'사랑만이 희망'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조금씩 증명해 나가고 있다. "그 애들을 도와 주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게 슬프고 부끄러울 수 밖에 없으니까요."
(제목; 꽃으로도 때리지마라 저자; 김혜자 서평; 김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