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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대통렬
戊 庚 辛 丁
寅 申 亥 巳
甲乙丙丁戊己庚 대
辰巳午未申酉戌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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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11월 14일 - 박성빈과 백남의의 5남 2녀 중 일곱째(아들로는 5남)로 출생
어머니 백남의는 45세의 나이로 박정희를 임신하였기 때문에 박정희는 백남의에게 있어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누나인 박귀희에 의하면 당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있었던데다가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기,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넘어져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 등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낙태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맏딸 박귀희에게 임신사실을 비밀리에 말하였고 귀희는 어머니의 낙태를 돕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으나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노산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죽을 먹고 자랐으며, 큰누나 귀희의 젖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변비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 10살 술대운 병인년 1926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 16살기대운 임신년 1932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 담임 선생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 반 학생들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 한다고 평하였다.
• 20살 유대운 병자년 1936년 - 3년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 21살 윧대운 정축년1937년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 1937년 - 장녀 재옥 출생
• 22살유대운무인년 1938년 - 부친 박성빈 사망
• 24살무대운 경진년1940년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31일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혈서로 쓴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미 만주국의 군관으로 합격한 상태였다. 이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본의 작은 지방지였던 만주신문의 허위보도일 가능성이 크다.
• 26살무대운 임오년 1942년 - 신경군관학교를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로 편입학
• 28살신대운갑신년 1944년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관동군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한다. 그리고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이 시기 박정희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 29살신대운을유년 1945년 -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 30살신대눈 병술년1946년 -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 12월 광복 직후(1946 ~ 1950)
1946년 5월 8일,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10월 대구폭동 중 셋째 형 박상희 사망
32살신대년1948년 -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한국군 내의 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이었던 그는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프락치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정희는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실형은 면하고 다음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63]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중에 북한군이 38도선에 총집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바로 국방부에 보고서를 올렸으나 이승만 대통령 이하 당시 초대정부 구성원들은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사반란을 시도하지만 북한군과 전투상황이였기에 그의 상급자들이 박정희를 무마시켜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 앙금을 계속 갖고 있던 박정희는 그로부터 10년 후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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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살정화대운 기축년1949년 -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164]
• 모친 백남의 사망
• 34살정화대운 경인년 1950년 -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소령으로 복 11월 김호남과 이혼, 12월 육영수와 결혼
•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과 동거를 했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사망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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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살미대운정미년 1957년 - 육군대학교 졸업, 제7사단 사단장
•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 때의 일로 박정희는 곽영주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품게 되었고,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 43살병화대운기해년 1959년 -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을 지냄
• 44살병화대운 경자년 1960년 - 1월에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2월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둘째 형 박무희 사망
• 45살병화대운신축년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킴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 5월 18일 -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
• 7월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시켰다.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50만환, 의친왕비(妃) 김씨에게는 30만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씨와 삼축당 귀인 김씨에게는 각각 10만환 등 모두 100만환을 지급하였다.[77]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 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 46살병화대운 암인년 1962년 - 3월 22일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 7월 겸임 내각 수
1962년 12월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
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84]
• 47살병화대운계묜 1963년 -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
10월 자유민주당의 김준연은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간첩 황태성은 박정희씨의 친형인 박상희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씨는 대구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 때 박정희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원용덕의 반론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에서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의 원용덕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로 박정희의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밑 문주리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 수립
• -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임금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를 빌림
• 49살오화대운 을사년 1965년 -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112][11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신용하 교수는 "박 정권이 6,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독도영유권 포기, 문화재포기, 징용·정신대등의 강제저축금반환포기 등의 국익을 팔아먹었다"고 주장했다.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 [115]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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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통령 존슨과의 합의에 의해 배틀 머모리얼 대학과 자매기관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 5.1살오화대운 정미년 1967년 -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 6대 대통령으로 재선, 산림청 개청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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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살오화대운 무신년 1968년 - 1.21사태 한국군복장을 한 북한공비 31명 국내 잠입.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시도.
• - 여운형 추모회 고문.
• 53살을대운기유년 1969년 -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후 1971년 김대중을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 54살을대운 경술년 1970년 -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 수출 10억 달러 달성,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새마을 운동 제창
• 55살을대운 신해년1971년 - 국고로 아르헨티나의 국토 중 일부 구매 후 농민을 엄선하여 파견함
• -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원
• 56살을대운임자년 1972년 - 7월 4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통일관련 공동성명 발표 (7.4 남북 공동 성명)
• 10월 17일 - 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10월 유신),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 57살을대운계축년 1973년 8월 8일 - 김대중 납치사건
• 58살사대운 갑인년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사망(육영수 저격사건)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137]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138]
• 4월 9일 - 인혁당 재건 사건
• 60살사대운 병진년1976년 8월 - 칠백의총 주변 기념관, 주차장, 관리사무소 등 기타시설 건립 지시
• 61살 사대운 정사년 1977년 -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수출 100억달러 달성, 부가가치세 시행
• 12월 - 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민학교 학생에게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
• 62살 사대운 무오년 1978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관(68년 박종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추진)
• 12월 27일 - 9대 대통령에 선출, 세계에서 7번째로 국산장거리 지대지유도탄 및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 성공
• 63살 사대운 기미년 1979년 10월 -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관련자 검거, 크리스찬아카데미
10월26일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저격으로 사망,
1979년 10월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방문,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영삼 제명사건은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지미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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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8시 ~ 10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1세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10.26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박정희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148]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의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 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 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148]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
사맹격(四孟格) 의 사주로서, 호걸,위인격의 그릇으로 모종교의 교주의 사주도 이와 같다.
호걸영웅의 일생은 동서양고금을 막론하고, 파란이 많은것이 영웅호걸의 삶이다. 사주상에서 寅申 巳亥의 육충은 인사에서는 논하는것이니, 이에 대한 육친과 대비하여 충(沖)이란 전투 충돌 파괴 이별, 살상등의 흉살의 대표적인 살이다.
충형살이 있는 사주는 예외가 있지만은, 8-9활이 탁기(濁氣)의 사주로서, 흉함이 잠재한다.
巳대운 己未년 甲戌월에 사망
사주를 배우는 입문과정에서 사화(巳火)에서, 미혹하거나 의문을 표시한다,
용신이 火면 당연히 巳火운에서 안둔내지발달해야하는데, 왜 이운에서 흉함을 당한다는 것에 의혹을 가지는것이 당연하다. 사화(巳火)는 지장간에 경금(庚金)이 내장되어있고, 그비율이 4활정도 된다는것을 항상숙지해야하고,
巳화는 사유축(巳酉丑)의 금국의 첮자에 속하고, 경금이 십이운성에 생(生)에 해당된다. 그리고 특히 사주에 인신(寅申)이,있을때는 사운이 오면, 인사신의 삼형살이 된다. 삼형살_살상 수술 시비 쟁투 관재등의 인사
어떻든 우리나라의 보리고개를 없애고, 축재를 하지않는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남을것이다.
*년월이 사해충, 일월이 인신충살로 , 땅이 서로 충돌하는 상이다,조상,형제,부부,자녀들이 모두 충돌하는상이라는것도,
염두에 두어야할것같다,
미공 천현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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