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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25주년 학술 세미나 레포트
(위기를 맞은 한중수교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소설로 읽는 현대중국
2017.11.08
중국언어와 문화학과 140223
이유정
1. [제1발제] 한중관계 25년은 ‘성공스토리’인가? : 역사적 관점에서 본 성과와 과제
‣ 발표 -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한중수교를 한반도 차원에서 본다면, 평화체제 구축의 틀이 마련되지 못한 문제가 드러나고, 한중수교의 현 단계는 중국과 (미래의) 통일 한반도의 양자관계로 이행하는 ‘과도기’로 접어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견국가인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미국과 중국이란 두 강대국이 갈등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양자택일의 딜레마를 넘어서는 비전이 절박한 시점이다.
양국관계 발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장을 보인 것은 경제영역이다. ‘동반자’ 관계라고 규정되는 한중 경제관계는 세 단계 도약을 했다. 그런데 경제영역의 성과와 과제를 다루는 경제학자들의 논의는 단기적 관점에서 현상에 기능적으로 접근하는 데 그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장기적인 관점의 대응책이 필요하다. 특히 사드배치 국면을 계기로 정치안보 리스크가 경제리스크로 전환되는 양상이 이미 실감되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려면 분단된 한반도 남북의 점진적인 재통합과 분열의 극복을 추진할 대전략과 결합해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국이 새로운 아시아 협력의 주역의 하나로서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한중수교 이후 25년간 정치안보 영역의 성과는 다른 영역에 비해 협력의 수준이나 제도화의 측면에서 가장 미진하다. 한중간 정치안보 관계의 구조적 특성을 한국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간접성과 매개성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 두 특징은 모두 북중동맹과 한미동맹에서 연유한 것이다. 냉전과 탈냉전이 교차하는 유동적인 단계에 처한 한국의 대부분의 중국연구자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딜레마에서 한쪽 줄서기는 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 한다. 그들은 두 강대국이 어느 정도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한국을 필요로 하게 하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중국전문가가 강조하는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면, 한중의 정치안보 관계를 한반도 대전략의 일부로 파악하는 한국의 리더의 역할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미중관계와 북한마저 중견국가 이상으로 변전된 상황이 만든 구조적 제약 속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과제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임은 명확하다.
상호 교류의 양적 발전과 동시에 역사와 전통 문화의 이해 그리고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존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중간 서로에 균형 잡힌 인식, 달리 말하면 현재의 변화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파악할 수 있는 '비판적 중국연구'라는 인식틀이 필요하다. 그것은 당대의 중국현실과 주류적 사유체계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그러한 중국 연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적 차원, 지역적 차원, 그리고 일굴적 차원의) 사회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주체 간에 '서로를 비추는 거울' 관계가 성립한다.
한중수교 25주년을 맞아 우리도 한중관계를 좀 더 근원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1992년 수교 이래 25년의 양국관계가 한중수교 당시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던 "한반도 정세의 완화와 안정,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특히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또한 중일관계에서도 그랬듯이, 한중관계에서 시민 부재의 후유증이 심각할 수 있음을 명확히 깨닫고, 연구자(및 정책수립자)와 시민의 제휴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한다. 한중관계를 두 나라의 관계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고, 한미일관계를 포함한 동아시아적 관점, 더 나아가 세계사적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 문화와 함께 역사문제나 안전보장의 문제를 기능적으로 분리하지 말고 상호 결합시켜 논하는 구조, 곧 한반도발전을 위한 대전략의 틀에서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2. [제 2발제] 한중관계 : 평가와 전망
‣ 발표 -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지난 25년의 한중관계를 뒤돌아 볼 때, 네 가지 국제변화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중관계의 영역과 주체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2000년 무렵부터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단체가 양국관계의 발전을 이끌었다. 교류 영역도 초기에는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가 중심이었지만, 현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분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양국 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둘째, 한중관계에 대한 정부의 공식 규정과 실제 양국관계가 괴리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공식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계속 격상되었지만, 실제 관계를 보면 양국 정부 간에 전략적 불신이 확대되었고, 양국 사회 간에는 비호감도가 높아졌다.
셋째, 한중관계는 영역별로 매우 불균등하게 발전했다. 단적으로 경제와 사회 교류는 급속히 발전했지만, 군사와 안보 협력은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넷째, 한중 양국의 국력 차이가 커지면서 비대칭성이 확대되었다. 양국 간의 국력 격차는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 외교, 과학기술 등 여러 면에서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특징에 주목한다면 한중관계가 매우 취약한 토대에 기초해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한중관계의 '외양(공식관계)'만 강조했지 '내협력 동반자관계'로 격상될 만큼 기초가 튼튼한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격상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사드를 둘러싼 갈등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한중간의 사드를 둘러싼 갈등은 결코 우연히 발생한 사건도, 갑자기 발생한 사건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앞으로 직면할 어려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동시에 중국 정부가 지금과 같은 외교 정책을 추진하고 한국에 대응한다면, 한중관계는 계속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우선 향후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과 중국 간에 전략적 경쟁이 계속될 것이고, 이것이 한중관계를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미중간의 격렬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있다. 직접적으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간접적으로는 부상하는 중국이 초래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불확정성에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에게는 한미동맹이 꼭 필요하다. 만약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중국 견제에 참여할 경우 한중간에는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초래될 것이다.
한중간의 국력 격차가 확대되면 중국에 대한 한국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것 또한 문제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및 수입 국가이다. 그러나 중국에게 한국은 이제 그렇게 중요한 국가가 아니다. 게다가 한국이 북한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여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시 말해 중국의 협조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이제부터라도 한중관계의 '취약한 토대'를 '굳건한 토대'로 바꾸고, 양국관계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실'을 기하는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한중관계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평가와, 그에 기초한 장기적이고 초당파적인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중국에 대한 정책의 재검토만이 아니라, 한국의 외교 정책 전반과 북한 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특히 THAAD를 포함한 한중간의 군사 안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동시에 THAAD만 해결되면 한중관계가 이전처럼 다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한중관계는 이제 THAAD'이전'과 THAAD'이후'의 시기로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3. [제 3발제] 국가 사회주의에서 포스트사회주의로 : 한중수교 25주년에 바라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 발표 - 임춘성 (목포대 중국언어와문화학과)
현재 중국을 사회주의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도 과연 사회주의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인민공화국의 역사를 '국가 사회주의'에서 '포스트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하나의 시간대로 설정해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를 위해 아편전쟁 전후 어느 시점에서 시작해 지금까지의 시간대를 아우르기 위해 고안해 낸 ‘중국의 장기 근현대’라는 개념을 제출하였다. 이는 서유럽 중심의 지구적 자 본주의에 편입되는 시간대인 동시에 혁명과 이행의 시기였다. 이 기간을 ‘단기 40년’, ‘중기 70년’, ‘장기 180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국의 장기 근현대’는 ‘단기 40년 -포스트사회주의 시기’, ‘중기 70년 - 중화인민공화국’, ‘장기 180년 - 자본주의 편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단기 40년’의 핵심어인 포스트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는 논자에 따라 다양하다.
아리프 딜릭은 일찍이 사회주의적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배제된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한 상황’을 포스트사회주의로 설정하는 동시에 이를 ‘지구적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개혁개방시기에 ‘혁명적 사회주의’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으니, 이는 ‘사회주의의 합리성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관방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한 것에 빗대어,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라는 해석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사회주의를 개혁개방 이후 중국을 관찰하는 시야로 설정한다. 포스트사회주의는 문혁으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30년’을 부정하고 그것과 단절하는 측면과,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에도 문혁의 기제가 여전히 관철되는 측면을 동시에 지적한다는 장점이 있다. 즉 사회주의의 지속과 발전을 절합시키고 있는 중국 ‘개혁개방’ 시기의 특색을 요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한다.
중국 특유의 반봉건․반식민 사회로부터 ‘중국적 사회주의’로 이행했다가 다시 ‘중국적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중국을, 개혁개방 이후에 초점을 맞추어 ‘포스트사회주의’ 시야로 바라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 이행의 의미 : 국가 사회주의에서 포스트사회주의로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을 단일한 잣대로 규정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주의의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 자본주의를 적극 수용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시행하고 있는 중국을 ‘이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의 장기 근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아편전쟁 이후 반식민․반봉건 사회를 거쳐 1949년 인민공화국, 즉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사회주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단절적인 성격의 이행’과 ‘연속적인 성격의 전환’은 포스트의 두 측면이므로, 양자를 구분하기보다는 절합시키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글에서는 ‘transition'과 'transformation'에 대한 사전적 변별을 잠시 유보하고, '단절적 이행'과 '연속적 전환'의 의미를 아우르는 차원에서 '이행'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포스트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사회주의의 지속과 발전의 절합으로 이해하고 그것으로 중국 '개혁개방' 시기의 특색을 요약할 수 있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김부헌과 이승철은 스미스와 피클스에 기대어 '포스트사회주의 체제전환의 지리'가 구사회주의 체제의 유산, 기존 사회적 관계와의 접합을 통해 특수하고 다양한 경제적 관행으로 점철된 공간을 형성하는 동시에, '거대 프로젝트'로서의 신자유주의 담론이 일상의 관행을 통해서 항상 매개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항상 최선을 다해 '감당할만한 것'으로 구성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 단절인가, 연속인가
1) 중국 혁명의 2단계
서유럽 맥락에서는 '반모더니티적 모더니티'가 '모더니티 자신의 모순적 구조의 표현'(서양 모더니티의 이중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국적 맥락에서는 '반모더니티적 근현대성'-서양 모더니티의 어떤 측면에 반대하는 중국의 근현대성-이라야만 '중국 사상가의 특수한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유럽의 모더니티는 전통과의 관계 방식이 주를 이루었지만, 동아시아의 근현대성은 서유럽의 모더니티에 의해 촉발되어 그것을 국족화 또는 자국화해야 하면서도 그것을 참조하여 전통을 근현대화해야 하는, 서유럽 모더니티와 다른 층위의 이중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이너스는 "경제후진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마오주의의 시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결국에는 마오의 근대화 목표와 사회주의적 열망 사이에 내재하는 모순에 압도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의 장기 근현대'가 직면한 매커니즘의 또 하나의 형태에 마주치게 된다. '반봉건 계몽과 반제 구망의 이중 과제'를 설정하고도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반제 구망을 주요 과제로 선택함으로써 '구망이 계몽을 압도'한 상황을 연출했듯이 이번에도 마오쩌둥은 근현대화의 목표와 사회주의적 열망이라는 이중 과제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회주의 목표가 공업화에 종속되는 길을 선택한 셈이다. 그러므로 마이너스는 마오쩌둥의 업적에 대해 "마오주의 정권의 진보적인 사회경제적 업적과 퇴행적인 정치적 성격 사이의 깊은 부조화가 각인된 유산"을 후계자에게 남겼다. "마오주의 정권은 혁명의 부르주아 단계를 실현하는 데 있어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자신이 선포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실현할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마이너스의 맥락에서 보면, 두 개의 세계는 봉건 사회와 사회주의 세계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이미 죽은' 봉건 사회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단계를 뛰어 넘어 사회주의 단계로 진입하려 했지만, 그것은 중국 대륙에서는 '아직 태어날 힘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2) 개혁개방의 진정한 의미
개혁개방은 마오쩌둥 사후 2년 만에 덩샤오핑의 주도로 본격 시작되었다. 덩샤오핑의 '실전파'는 이른바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 이후 '사회주의 셴다이화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사회주의 근현대화는 모순 어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비슷해 보이는 기표를 구호로 내세웠지만 기의는 달랐다. 그것은 이제부터 근대적 경제발전에 그 밖의 모든 이해관계를 종속시키는 것을 뜻했다.
사실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 개념에는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없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공산당 관료들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동시에 위협하는 이중적인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첸리췬이 마오쩌둥 시대를 '1957년 체제'로 보고 덩샤오핑 시대를 '6․4체제'라 명명한 후, 두 체제가 부국강병과 개인독재라는 측면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연속체로 본다. 그러므로 덩샤오핑 체제를 지칭하는 '6․4체제'는 "1989년의 '6․4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전환점" 이후 형성되었는데, "'6․4' 이후에 진일보하게 강화되고 발전한 일당전제체제가 마오 시대의 '1957년 체제'의 연속임과 동시에 새로운 덩 시대의 특징을 가지며, 이러한 '6․4체제'는 '6․4' 이후의 중국 사회구조의 거대한 변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개혁을 승인한 중국 공산당의 과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로 집중되었다. '사회주의 근현대화'라는 용어는 '사회주의를 근현대화 시킨다'는 맥락과 '사회주의 방식으로 근현대화를 진행 한다'는 맥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한 동남부 연안도시의 자본주의화에 이어 농촌의 자본주의화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농촌의 자본주의화는 곧 농촌 부르주아지를 양산했는데, 이들은 '가족영농에 종사하는 농민', '임금노동자계급', '이주노동자'와 함께 농촌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마이너스에 따르면, 부르주아지는 농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대륙에서 사라진 부르주아지가, 그들을 축출하거나 개조했던 장본인인 공산당 관료와 그들의 친척에서 새롭게 탄생했다는 사실은 개혁개방 중국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신흥 부르주아지는, 서양의 역사에서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정치질서와 갈등을 일으키고 기득권과 투쟁하며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부르주아지와는 달랐다. 중국의 신흥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에 의존하는 계급"이고, "노동계급과 자유노조로부터 정치적으로 보호받기 위해 국가에 의지하는 계급이다."
자오쯔양 총서기 시절의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스탈린주의 정치 독재가 결합된 '신권위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지젝은 자본주의로 가는 중국의 방식을 러시아의 방식과 대비시킨다. 경제적 파산선고를 받은 러시아와 반대로, "중국은 칠레와 한국의 경로를 따라서 견제 받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통제했고, 그에 따라 혼돈을 피했다. 지젝의 논리에 따르면, 농업과 공업을 자본주의적으로 '개혁'하고 특히 대외무역과 외국인 투자에 중국을 '개방'하는 덩샤오핑의 정책은 '불행한 축복'이었던 셈이다. 이 불행한 축복에 상당수의 지식인도 동참했다. "덩샤오핑 정권의 지지자나 이론가로 남아있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민주'의 목표를 버리고 자본주의의 독재를 옹호하는 신권위주의를 선택했다. 이런 지적인 변화는 사회 경제적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결국 중국 사회주의의 운명을 탐구한 마이너스의 결론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산물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은 결코 실패라고 할 수 없다"는 평가를 덧붙였다. 마이너스의 평가에 따르면, 사회주의 신중국은 마오쩌둥 시기에는 사회주의적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고, 덩샤오핑 시기에는 사회주의적 개혁의 의도가 애초에 없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외피를 걸치고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셈이다.
3) 3단계 8위기
원톄쥔은 또 다른 맥락에서 인민공화국의 역사를 공업화/산업화라는 문제의식으로 고찰한다. 그는 인민공화국 60년의 역 사를 여덟 차례의 위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데, 3단계 공업화 과정의 여덟 번의 위기는 다음과 같다. 우선 공업화 초기 ‘원시적 축적 단계’라 할 수 있는 1958년-1976년 사이, 외자와 외채로 인해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 위기는 1958-1960년, 소련의 투자 중단으로 일어났고, 두 번째 위기는 1968-1970년, ‘삼선 건설’ 중의 국가전략 조정과 경제 위기였으며, 세 번째 위기는 1974-1976년의 마지막 상산하향 때 발생했다. 산업 확장의 두 번째 단계인 개혁개방 이후 1978-1997년까지 세 번의 내발적 경제 위기 가 있었다. 네 번째 위기는 1979-1980년, 다섯 번째 위기는 1988-1990년, 여섯 번째 위기는 1993-1994년에 일어났다. 이후 중국의 위기는 외향형 경제로 전환되었다. 마지막 구조조정 단계의 외래형 위기는 1997년과 2008년에 발생했다. 일곱 번째 위기는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대 응조치와 그 영향으로 일어났고, 여덟 번째 위기는 2008년 금융 위기의 대응조치와 그 영향으로 발생했다.
그에 따르면 인민공화국의 역사는 공업화/산업화의 과정이고 ‘원시적 축적 단 계’, ‘산업 확장 단계’, ‘구조조정 단계’를 거친 국가자본주의의 과정이었다.
4) 포스트사회주의와 중국
딜릭은 1989년 「포스트사회주의?―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12)이라는 글에서, 포스트사회주의를 ‘사회주의 국가의 현상, 즉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미래’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그에게 포스트사회주의란 사회주의가 다음의 세 가지 역사 환경에 놓인 상황을 가리킨다. 첫째, 사회주의 이상이 역사 발전과정에서 쇠락했기 때문에 그 것은 이미 정치 원(元)이론으로서의 통일성을 상실했다. 둘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 사회주의’라는 이 구조의 제약 을 받게 된다. 셋째 결합의 진행과정이 자본주의의 복권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포스트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포스트자본주의이기도 하므로 그것 은 자본주의의 경험을 이용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결함을 극복하 려 시도하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로 표현된다.
딜릭은 1989년 「포스트사회주의?―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포스트사회주의를 ‘사회주의 국가의 현상, 즉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미래’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포스트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포스트자본주의이기도 하므로 그것 은 자본주의의 경험을 이용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결함을 극복하 려 시도하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로 표현된다.
딜릭은 현 세 계를 “당대 자본주의(지구적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사이에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진행하는 전 방위적 투쟁”으로 설정하고, 포스트사회주 의를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의해 제약된 발전 목표를 실현”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포스트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위기에 서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성찰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담론인 것이다.
제이슨 맥그레이쓰(Mcgrath, Jason)는 중국이 국가 사회주의로부터 포스 트사회주의 시장 사회로 이행하는 동력을 시장화, 다원화, 개인화, 분화라 고 지적(Mcgrath 2008, 7)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가 포스트사회 주의를 시장 사회와 연결시킨 부분이다. 그가 볼 때 포스트사회주의, 최소 한 1990년대 이후 중국 문화와 사회를 규정하는 기본 과정은 통합적인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시장 사회로의 전환이었다.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 에서는 포스트공산주의(post-communism)라는 용어를 선호하지만, 포스트 사회주의는 단순하게 사회주의의 다음이 아니라, 자본주의로의 이행 (transition to capitalism)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5) 이행의 아포리아
1949년 충분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사회주의에 진입한 중국은 발전한 생산양식과 낙후한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30년을 보냈다.
이 글은 국가 사회주의로부터 포스트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인민공화국의 역사를 고찰했다. 이 관점은 아리프 딜릭의 논의에 힘입은 바 크다. 딜릭은 사회주의적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배제된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한 상황'을 포스트사회주의로 설정하는 동시에 이를 '지구적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이 지점에서 곤혹스러움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생산양식을 담론으로만 접해온 필자로서는 판단의 근거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은 가능한가? 아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접합시킨 제3의 길은 가능할까? 논의의 핵심은 딜릭의 주장처럼 포스트사회주의를 지구적 자본주의의 대립물로 볼지, 아니면 그것의 특수한 형태로 볼지의 문제일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딜릭의 결기는 존중해야겠지만, 호네트의 ‘시원적 사회주의 이념’과 같은 사회주의의 근본이념을 새롭게 재구성하기 전에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논자들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이분법으로 보는 반면, 자나디는 중국을 ‘이행/전환중인 복잡한당-국가체계(complex and transforming party-state system)’(Csanadi 2016, 3)로 본다. 그녀가 보기 에 여러 가지 현상들은 복잡한 구조에 대해 서로 다른 각도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혼종된 자본주의(hybrid capitalism)’는 경제 각도에 서, ‘발전 국가(developmental state)’는 중앙 행정 구조의 각도에서, ‘다단 계 국가(polymorphous state)’와 ‘얼룩덜룩한 자본주의’는 권력 네트워크 집합의 다양한 층위의 각도에서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state-socialism)’는 정치적 하위분야의 각도에서 접근한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현재의 중국은 자본주의 체계의 국외자도 아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도 아니고 공산 체제라는 특징이 없는 발전 국가도 아니다. 중국은 개혁개방 시기 ‘상호작용하는 당-국가 모델(Interactive Party-State model)’이 잘 작동하는 사회인 것이다.
<서평>
우선 제1,2발제를 통해 한중수교 25주년 동안의 성과와 과제 그리고 전망을 알 수가 있었다. 특히 'THAAD'로 인해 악화된 한중관계 사태를 심도 깊게 고찰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THAAD' 사태가 발발하고 나서 한중외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고 이는 한국에 큰 위기가 되었다. 중국의 경제적 보복을 피할 수 없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신뢰도 또한 떨어졌다. 'THAAD'는 한국을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미국의 군사적 압박을 피할 수 없으며 중국의 강력한 반대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중국은 이 기회로 한국에 더욱 강경한 외교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은 이미 시진핑의 분노를 실감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중국과 일본 간에 없는 어떤 친밀함과 그로 인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한중외교 상황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저 속편한 생각에 불과하였고, 혹 그 동안의 한중 수교가 성공적인 길을 걸어왔을지라도 국익 앞에서 외교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간과하였다.
한국의 밀당에 화난 시진핑 정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입장도 난처하기 그지없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다. 어떤 외교를 펼쳐야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중국 고사 ‘間於齊楚’에는 강대국인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여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등나라’가 나온다. 한국은 현재 마치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인 등나라와 같다. 나는 당시 등나라가 어떤 외교 방법을 택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맹자가 등나라에 방문하였을 때, 문공이 어떻게 두 나라 사이에서 등나라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때 맹자는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성을 굳건히 쌓고 나라를 먼저 튼튼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국민의 화합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선택한 외교는 균형외교였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외교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균형외교는 미중에게서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현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균형외교’가 아닌 ‘균형 있는 외교’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균형 있는 외교’는 미국과 중국에게 우리의 현재 입장을 더욱 잘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외교를 아시아 국가로 폭 넓히려는 ‘외교의 다변화’ 시도이다. 하지만 오직 외교에만 집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구축해야 하며, 전 국민의 단합된 의지이다. 우리 내부에서부터 굳은 의지가 자리 잡혀야 중국의 강경 정치에 대응할 수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문재인의 정부의 삼불정책으로 시진핑 정부의 분노도 누그러뜨려졌지만, 완전히 완화된 것은 아니기에 아시아적 관점에서 중미관계 그리고 북한이 모두 대립․협력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정책을 위해 연구하여 더 이상 한중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 3발제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것과 사회주의적인 것이 혼재한 중국 현실을, 지식인들과 그 밖의 여러 중국학자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떻게 설계되어왔는지 포스트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 자본주의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 자본주의는 중국의 상황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개념이 필요하다. 포스트사회주의는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는 수렴했지만 여전히 국가는 사회주의로 돌아가는, 즉 탈피와 이행을 함께하는 중국의 모습을 설명한다. 우리는 포스트사회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중국과 한중수교를 맺어왔으므로, 현재 외교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에 대해 더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탈피와 이행이라는 독특한 구조 속에서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우선적으로 알아야 앞으로의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포스트사회주의'는 중국당대문화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접해 지금까지 중국을 공부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으로서 그 시기를 구분 짓는 데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럽고 어렵지만, ‘중국적 자본주의’, ‘중국적 사회주의’와 같은 중국이 실행하고 있는 체제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축이 되었다. 또한 그 개념을 이미 알고 이번 학술 세미나를 들으니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한중수교가 성공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중국역사에 대한 연구가 우선되어야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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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꼼꼼한 요약이 돋보인다. 독후감을 쓸 때는 필자(들)의 논점에 기대어 그에 대한 평가(동의/부동의)에서 시작해야 한다. 서평은 주로 '한중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