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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테레사 수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1. 다중 소명(multiple callings) |
'마더 테레사', '콜카타4)의 성 테레사', '벵골의 테레사', '매리 테레사 보야지우'(Mary Teresa Bojaxhiu) 등으로 불리는 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였다. 그는 동유럽 발칸반도의 도시 스코페(Skopje)에서 1910년 8월 26일에 태어났다. 스코페는 현재는 북마케도니아공화국(Република Северна Македонија)5)의 수도이지만, 아녜저가 태어날 때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 코소보주의 일부였고, 이름도 스코페가 아니라 위스큅(Üsküp)이었다. 1913년에는 오스만튀르크에서 독립한 세르비아의 영토에 속했다가, 1944년 유고슬라비아연방에 편입되었다. 현재 스코페는 1991년에 독립한 마케도니아(2019년부터는 북마케도니아)의 수도다.
국가 및 민족, 종교 분열의 복잡한 역사를 담은 발칸반도의 도시 스코페에서 태어난 아녜저의 가족은 무슬림 터키인도, 주로 정교회 신자인 마케도니아인이나 세르비아인도 아니었다. 이 가족은 오늘날 마케도니아와 스코페 인구의 약 20~25%6)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오늘날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알바니아 사람 다수가 무슬림인 것과는 달리, 또한 동유럽 발칸반도 국가들이 대체로 정교회와 깊은 역사적 유대를 맺어 온 것과는 달리, 아녜저의 가족은 몇 대째 내려온 가톨릭 가문에 속해 있었다. 역사적으로 로마 및 베네치아공화국의 영향을 받은 알바니아 북서부 지역에 가톨릭이 상대적으로 강세여서, 통계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알바니아인의 약 10~17%가 가톨릭 신자다.7) 아녜저가 속한 보야지우 가문도 알바니아에서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주한 알바니아인 가톨릭 배경을 가졌던 것 같다.
아녜저는 아버지 니콜라 보야지우와 어머니 드라나필의 3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전통에 따라, 태어난 다음 날에 영세를 받고, 아녜저 곤제(Anjezë Gonxhe)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녜저는 젊은 나이에 처녀로 죽은 순교 성인 로마의 아녜스(아그네스, Agnes of Rome, c.291~c.304)의 알바니아식 이름이며, 곤제는 같은 언어로 '꽃봉오리'를 뜻한다. 위로는 6살 장녀 아가타, 3살 장남 라자르가 있었다. 아버지는 대대로 무역업을 해 온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당시 국제 무역업과 건축업에 종사하며 지역 정치에도 참여한 인물로, 활동 범위가 넓은 지역 유지였다.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발이 넓어서 집안에는 늘 손님이 가득했다. 이들 가족에게 집은 언제나 평화롭고 즐거운 곳이었다. 특히 아녜저는 영국 언론인 맬컴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와의 1968년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에 자신이 수녀 소명을 받게 되었을 때 마음에 남았던 유일한 장애물이 사랑이 넘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가족을 사랑했다.8)
아버지의 사업가 재능, 유쾌하고 호탕한 성품에 더하여, 어머니의 신실하고 사랑 많은 기질이 이 알바니아인 가톨릭 가정을 '지상천국'으로 만든 요인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자녀들을 데리고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기도했다. 주변의 가난한 이들의 집을 찾아가서 먹을 것을 주고 병자를 돌아보았으며, 근처에 사는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의 집을 찾을 때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경우가 없었다. 외부 구제 활동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어린 아녜저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저녁이 되면, 어머니와 자녀들은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장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함께 기도하고 식사하고 대화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어머니는 매일 있는 가족 상봉을 일종의 축제처럼 인식하는 모범을 자녀들에게 가르쳤다.9)
그러나 매일이 축제와도 같았던 이 가족의 행복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말았다. 아녜저가 9살 되던 해에, 1차 대전 후 알바니아 독립 운동에 투신해 있던 아버지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거의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오스만튀르크의 거의 600년에 이르는 식민 통치, 제1차 발칸전쟁(1912), 제2차 발칸전쟁(1913),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이어진 혼란기였다. 발칸반도에서 터키,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알바니아, 코소보 사람들이 벌인 분쟁으로 모든 민족과 종족은 극한의 증오와 갈등 상태에 있었다. 아녜저의 아버지도 이런 현실의 희생양이었다. 아버지가 손도 쓸 수 없을 만큼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는 어머니가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출신 집안이 부유했던 데다 사업 수완도 있었던 덕에, 어머니는 자수 제품을 파는 상점과 카펫 사업을 시작했다.10)
화목한 집안, 민족 갈등 속에 급사한 아버지, 역경 중에도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운 외유내강 어머니가 어린 아녜저를 성장하게 한 원료였다. 이에 더해, 그가 받은 학교 교육과 출석한 교회, 여기서 만난 선생님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교회 부속 초등학교에 다닌 테레사와 언니는 졸업 후 공립 스코페김나지움에 다녔다. 오빠는 오스트리아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후 나중에 알바니아국왕경호대에서 근무했다. 테레사의 가족은 주로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성심聖心교구에 속한 성당에 다니며, 스코페에서 멀지 않은 레트니스의 세르나고레 성모 마리아 성지도 정기적으로 찾았다. 가족 모두가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덕에, 성당 합창단과 알바니아가톨릭합창단에서 노래하고 만돌린 등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이 지극히 행복한 경험이었기에, 1922년에 12살이던 아녜저에게는 이미 수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싹트고 있었다. 이런 그의 '희미한 소명'(1차 소명)을 현실로 바꾼 계기는 1925년에 교구 주임사제로 부임한 예수회 소속 얌브렌코비치(Jambrenkovic) 신부와의 만남이었다.
테레사 수녀가 태어난 스코페에 있는 테레사수녀기념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얌브렌코비치 신부는 청년을 위한 '성모신심회'를 만들어 성인들의 생애와 해외 선교사들의 활동을 공부하게 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인도 벵골 지방에 파송된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가 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때 가슴에 불이 붙은 아녜저도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선교사로 벵골에 파송되어 활동하다가 성인이 되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18살 생일을 앞둔 아녜저는 1928년 8월 15일 성모몽소승천일에 기도하던 중에 6년 전 12살 때 느꼈던 소명이 다시 찾아왔다고 확신했다. 이어서 익숙한 지역, 바로 인도의 벵골이 자신이 부름 받은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아일랜드관구에서 관리하는 로레토(Loreto)수도회 소속의 수녀들이 벵골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아녜저는 자신이 가입해야 할 곳이 바로 이 수녀회라고 확신했다. 그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수녀가 되고, 특히 해외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가족과의 기약 없는 무기한 이별일 수 있었기에, 딸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꼬박 하루 동안 골방에서 기도한 후 결국 딸이 받았다는 소명을 인정했다.11)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9월 26일에 어머니, 언니 아가타와 함께 아녜저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로 가서 며칠을 함께 보냈다. 자그레브역에서 파리행 기차를 탄 아녜저와 어머니의 이별은 지상에서 이 둘이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다. 파리를 거쳐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수도회 본부에 도착한 아녜저는 이후 단 한 번도 수녀로서 받은 소명을 의심하지 않았다.12)
로레토수도원은 1609년에 잉글랜드 요크셔 출신 메리 워드(Mary Ward) 수녀가 활동한 성모마리아수도회(Institute of the Blessed Virgin Mary)의 아일랜드지부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가 되면서 가톨릭을 박해하자, 워드는 플랑드르(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를 포괄하는 지역)로 이동했다. 그러나 봉쇄수도원 자격으로는 이웃을 섬기는 봉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봉쇄를 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청은 이를 거부하고 수도원을 해산해 버렸다. 그러자 워드 수녀는 로레토라는 이름의 독립된 봉사 수도회를 아일랜드에 창설했다. 이 수도회는 이후 1841년 인도 콜카타에도 지부를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더블린 로레토수녀원에 도착한 아녜스는 짧게 약 6주간 머물며 영어, 수도회 회헌 및 규칙을 배웠다. 이어서 12월 1일에 인도로 파견되어 이듬해 1월 6일 콜카타에 도착한 후, 북쪽 히말라야 기슭에 자리 잡은 다르질링(Darjeeling)으로 이동해 첫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다르질링에서의 수련 생활은 약 2년간 지속되었다. 영어, 벵골어, 힌두어, 교리를 배우고, 지역의 소년 소녀를 가르치는 등 수련 과정을 거친 후 1931년 5월 25일에 청빈·정결·순명을 서약하는 서원誓願을 하며, 로레타수도회의 정식 수녀가 되었다.13)
이 시기에 아녜저의 새 이름도 결정되었다. 수도사들은 주로 자신이 본받고 싶어 하는 인물의 이름을 차용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녜저가 선택한 이름은 테레사14)였다. 교회사에는 두 유명한 테레사, 즉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Ávila, 1515~1582, 대大테레사)와 리지외의 테레사(Thérèse of Lisieux, 1873~1897)가 있었다. 그런데 아녜저가 택한 이름은 후자인 리지외의 테레사였다. 리지외의 테레사는 프랑스 알랑송에서 태어나서, 15살에 리지외의 가르멜수도원 수녀가 된 후, 24살 되던 해에 이 수도원에서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신과 인간에 대한 뜨겁고 헌신적인 사랑과 순결로 많은 가톨릭 신자에게 칭송받은 인물이었다. '예수 아기와 거룩한 얼굴의 성녀'(Saint Thérèse of the Child Jesus and the Holy Face) 혹은 '예수의 작은 꽃'(The Little Flower of Jesus)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수녀는 특별한 사역이나 활동으로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면서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병중에서도 기도하는 데 전력했기 때문에, 그는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녜저가 이 성녀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리지외의 테레사는 자신을 "어린 예수가 손에 쥔 공"으로 비유한 일이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후에 이와 비슷하게 자신을 "하느님이 손에 쥔 몽당연필"로 비유하기도 했다.15) 같은 이름을 사용한 다른 수녀와 구별하기 위해, 아녜저는 프랑스식 표기 Thérèse 대신에 스페인식으로 Teresa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아녜저는 '벵골의 테레사'(Bengali Teresa)로 불렸다.16)
다르질링에서 수련 교육을 마친 수녀 테레사는 콜카타 동쪽의 엔탈리(Entally)에 소재한 로레토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테레사와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수도원은 고전적인 건물과 정원 등이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공간으로, 구내에 로레토엔탈리학교와 성마리아학교가 세워져 있었다. 이 수도원의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수도원 밖 빈민가 풍경은 극히 대조적이었다. 로레토수도회는 1841년 첫 수녀를 콜카타에 선교사로 파견한 이후 교육 사업에 집중했다. 그 결과 테레사가 도착할 무렵에 대학과 6개 중고등학교를 운영할 정도로 활동을 확장했다. 테레사가 맡은 역할은 성마리아학교에서 지리, 역사,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마리아학교 이외에도 중산층 자녀가 다니는 콜카타 다른 지역의 성테레사학교에서도 가르치곤 했다. 그런데 이 두 학교를 오가는 길에 대표적인 빈민가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 길을 오가며 본 가난한 이들의 참상이 지속적으로 테레사의 마음을 후벼 팠다. 1937년 5월 25일에 다르질링에 가서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할 때까지도, 교사 수녀로서의 테레사의 사명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새로운 부르심, 즉, 수녀가 되라는 두 차례의 부르심에 이은 세 번째 소명이 테레사에게 찾아왔다. 이 새로운 소명을 부른 배경에는 콜카타 전역을 더 비참하게 만든 전쟁과 기근이 있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2차 대전이 아시아로 확전되면서 일본군이 영국령 버마(미얀마)를 점령했다. 그러자 영국군은 콜카타와 엔탈리의 여러 선교회 건물도 징발해서 병영과 병원 등으로 활용했다. 전쟁 중 1942~1943년에는 대기근까지 찾아오면서, 주민이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벵골 농민들이 일터를 찾아 대규모로 콜카타로 몰려들었다. 당시 정부 통계에 의하면, 이 시기에 아사한 인구가 200만 명에 달했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대부분 추정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문제가 이어졌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종교 분쟁이 발생해 1946년 8월 16일부터 4일간 사망자만 6000명이 발생했다. 1947년 8월 15일에 독립한 인도는 벵골과 펀자브를 무슬림 파키스탄과 분할했다. 양 국가의 힌두교도와 무슬림은 각각 국경을 건너 자기 종교가 우위에 있는 지역으로 이주했다. 도시 전체가 난민과 홈리스로 가득한 슬럼이 되었다. 바로 이 상황이었다.
"맬컴: 그런데 수녀님께서 바깥세상의 특정 상황을 알게 됐을 때 그런 생활도 끝난 거로군요.
마더 테레사: 소명을 따르고 있던 제가 또 다른 부르심을 받은 거죠. 그건 두 번째 부르심이었어요. 내게 아주 큰 행복이었던 로레토수녀회까지도 포기하고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poorest among the poor)을 섬기러 거리로 나가라는 소명이었어요.
맬컴: 수녀님, 그 두 번째 부르심은 어떻게 받으신 거죠?
마더 테레사: 1946년에 저는 피정하러 다르질링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바로 그 기차 안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빈민가로 들어가서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부르심을 들었어요."17)
36살의 성마리아학교 교장 테레사는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 '부르심 속의 부르심', 즉 두 번째 소명을 만나게 됐다. 개인이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만으로 수녀원을 떠나 거리로 나가는 것이 가톨릭 수도회 전통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소명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와 수도원의 허가 절차가 필요했다. 콜카타의 반 엑셈 신부, 콜카타의 페리에 대주교, 성테레사교회의 줄리앙 앙리 신부, 아일랜드 로레타수도회 총장, 교황 비오 12세와 만나고, 편지를 쓰고, 상담하고, 결정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마침내 1948년 8월 8일에 테레사 수녀는 교황청으로부터 빈민가에서 일해도 좋다는 허락이 담긴 편지(1948년 4월 12일 자)를 받았다. 처음에 테레사는 수녀가 수녀원 안에 봉쇄된 채 평생 산다는 종신서원을 깨고, 세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환속' 특전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이 내린 허락은 상황 변화에 따라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재속' 특전이었다. 즉, 수도자의 신분을 유지한 채 '수도원 밖 임시 거주 허가'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일평생 테레사는 수녀회로 돌아가지 않고 세속에서 살다가 죽게 된다.18)
테레사 수녀는 1948년 8월 17일 콜카타를 떠나 갠지스강가의 고도古都 파트나로 갔다. 유럽을 떠나 벵골로 온 지 19년째 되던 해로, 당시 테레사는 38세였다. 로레타 수녀들이 입었던 (상대적으로) 화려했던 수녀복 대신에 이제 테레사가 입은 복장은 파란 물 색깔 줄무늬가 있고, 어깨에 십자가가 부착된 흰색 인도 사리였다. 흰색과 물색은 성모 마리아의 상징색이었다. 이 사리 세 벌이 가진 옷 전부였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의료 지식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수용한 테레사는 미국 '의료선교수녀회'가 파트나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3~4개월간 기초 간호법을 배웠다.19)
전통 사리를 입은 수녀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크리스마스 전에 콜카타로 돌아온 테레사는 우선은 '가난한사람들의작은자매회'가 운영하던 '성요셉의집'에서 갈 곳 없는 노인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이어서 콜카타 내 모티즈힐(Motijhil) 지역 슬럼가로 혼자 들어가 학교를 열었다. 모티즈힐 바깥 다른 지역에서도 학교를 시작한 이후, 한때 테레사의 제자였던 수녀들을 중심으로 젊은 여성 자원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자 시작했다가, 이렇게 차츰 공동체로 변모해 가던 1950년 10월에 테레사의 선교회는 바티칸의 공식 허가를 받게 되었다. 이 조직 이름이 바로 '사랑의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였다. 이 선교회는 처음에는 콜카타대교구 부속 수도회였으나, 1965년에는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선교회의 회헌會憲에 따라, 테레사 수녀(Sister Teresa)는 이제 선교회 총장인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가 되었다.20)
275조로 구성된 사랑의선교회 회헌에는 이 선교회가 지향한 선교의 방향이 반영되어 있다. '가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주제고, '가난한 이 중 가장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 기독교 정통 실천(orthodox)임을 회헌은 명료하게 선언한다.
"우리들의 목적은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의 한없는 갈증을, 사람들의 사랑의 갈증을 풀어주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권고를 지키며, 회헌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봉사한다",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예수님에게 봉사하며 이들이 하느님 닮은 모습을 되찾도록 일한다."
이런 방향성은 사랑의선교회가 다른 수도회들이 공통으로 하는 세 가지 서원 위에 하나를 더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청빈과 정결과 순명 이외에, 사랑의선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21)
사랑의선교회가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게 되면서, 테레사 수녀와 이 선교회를 후원하는 세계 협력자들의 모임도 1969년에 조직되었다. 사랑의선교회 부속 단체인 이 '국제마더테레사협력자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the Co-workers of Mother Teresa) 정관도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를 인용하며 조직의 존재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형상을 하신 하느님을 알아보도록 도와줌으로써. B.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과 봉사를 베풀어 하느님을 더 잘 사랑하도록 도와줌으로써. C. 전 세계 사랑의선교회와 협력자회가 기도와 희생으로 하나가 됨으로써. D.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가족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E. 다양한 나라들 간의 원조를 촉진하고 사랑의선교회 각 센터마다 노력과 원조가 중복되지 않도록 조치함으로써."22)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120개국에서 600개 이상의 지부, 학교, 병원, 쉼터를 운영하는 사랑의선교회에 속한 수녀의 수는 4500명, 수사의 수는 450명이 넘었다.23) 콜카타에서 처음에 가난한 이들과 병자, 홈리스를 돌보는 일로 시작된 선교회는 오늘날에는 사회적 지위나 성별, 종교에 관계없이, 난민, 성 노동자, 정신 질환자, 어린이 환자, 유기된 아이들, 보행장애인, AIDS 환자, 한센병 환자, 노인, 요양이 필요한 이들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취약한 이들'(the vulnerable)을 여러 공간과 조직을 활용하여 돌보는 선교회가 되었다.
2. 성녀 |
마더 테레사의 사역을 살피다 보면, 13세기 탁발 수도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182~1226)의 활동이 연상된다. 실제로 1995년에 학자 존 케언스(John Cairns)는 영문판 <단순한 길> 서문을 쓰면서, 프란치스코와 테레사를 대비했다. 이 세상에 영적 안내자가 급히 필요할 때, 이따금 그런 영적 지도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영적으로 막강한 힘이 있었고, 가르침도 혁명적이었다. 부자의 상속 아들이었던 프란치스코는 부르심에 따라 그 부를 포기하고 탁발托鉢(구걸)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회도 설립했고, 그 수도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가르침은 급진적이었지만, 그는 제도권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테레사도 마찬가지다. 가난과 탁발과 단순함에 대한 테레사의 가르침과 삶은 급진적이지만, 가부장제 근본주의 위에 세워진 교회에 절대복종(순명)한다는 점에서는 극히 보수적이다.24) 둘은 모두 죽은 후에 성인(saints)으로 시성諡聖되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국제마더테레사협력자회 정관에서도 이 연관성은 분명하다. 모든 협력자회 회원은 다음 기도문을 매일 암송하기로 서약하는데, 이 기도문은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앞에 사랑의선교회가 만든 한 단락을 덧붙인 것이다.
"주여, 저희가 전 세계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게 살다가 죽어 가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섬기게 해 주소서. 우리의 손을 통해 오늘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게 하옵시고, 우리의 이해심 많은 사랑으로 그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게 하옵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25)
1985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게 '평화의 메달'을 받고 있는 테레사 수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마더 테레사의 사역은 1960년대 초부터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후 한 해에 20개 이상 받는 일이 잦을 정도로 상이 많아졌다. 사랑의선교회에서 수상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아예 포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몇 가지는 언급할 만하다. 마더 테레사의 업적을 가장 먼저 기린 나라는 그가 사역한 바로 그 나라였다. 1962년 1월 26일 인도공화국 기념일에 인도 대통령은 테레사에게 '파트라슈리상'을 수상했다. 인도인이 아닌 이로서는 테레사가 이 상의 첫 수상자였다. 몇 달 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는 상으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이 있는 상이었다. 같은 해에 이 상의 민주주의 분야에서 장준하가 상을 받았는데, 테레사는 인권 분야 수상자였다.
1960년대에 이미 아시아 지역에서 명성을 얻은 마더 테레사가 전 세계 봉사와 희생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영국 언론인 맬컴 머거리지(1903~1990)와의 만남이었다. 마더 테레사를 만난 1968년 당시 영국에서 가장 냉소적인 언론인 중 하나이자 신앙에서는 불가지론자였던 머거리지는 테레사와 인터뷰를 하고, 그 사역을 참관하고, 다큐멘터리영화(1969)를 만드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실상 신앙에 대한 인식이 크게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테레사와 만난 인상과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글로 정리해서 1971년에 출간한 <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 Something Beautiful for God>에는 여전히 자신이 신자가 아니며, 부패와 추문으로 가득한 가톨릭교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발언이 나온다.26) 그러나 가톨릭 신앙과 교회에 대한 이런 태도와는 달리, 마더 테레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의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를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다.27) 이런 태도는 그의 방송 인터뷰, 다큐멘터리, 책에 그대로 반영되어, 결국 마더 테레사를 서양 세계 전역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머거리지에 의해 '발굴'된 1968년 이후에는 서양 세계가 거의 모든 주요 상을 테레사에게 수여했다. 1971년에는 교황 '요한23세평화상'을 교황 바오로 6세에게서 받았고, 보스턴에 본부가 있는 전미가톨릭발전회의의 '선한사마리아인상'도 받았다. 같은 해에 조지프케네디2세재단이 주는 상도 받았다. 이듬해에는 뉴델리에서 '네루상'을 받았다. 1973년에는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이 '템플턴상'을 수여했는데,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권위 있는 상의 첫 수상자였다. 1975년에는 '알베르트슈바이처국제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고, 1976년에는 미국 아이오와주 오키프 주교로부터 '지상의평화상'과 마틴 루터 킹도 받은 바 있는 '가톨릭이인종간협의회상'을 받았다. 1979년 3월에는 로마국립아카데미가 주는 '발잔상'을 받았다. 이런 수상 행렬의 최정점에는 그해 12월에 받은 '노벨평화상'이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이름을 다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상을 받은 테레사는 '세계에서 상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에는 모두 상당한 포상금이 있었다. 예측할 수 있듯이, 테레사는 이때 받은 모든 상금을 사랑의선교회 및 다른 기관의 구제 사역에 사용했다.28)
살아생전 가난한 이들 안에서(in), 그들과 함께(with), 그들을 위해서(for), 그들처럼(like) 살던 마더 테레사는 1997년 9월 5일에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3년(73세)에 로마 방문 중 병원에 입원하면서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79세에 바티칸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선교회 총장직 사임과 후임자 선출을 요청했다. 사실은 1973년(63세)과 1979년(69세)에도 같은 요청을 한 적이 있었으나, 투표 결과 마더 테레사가 총장직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7년에는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따라서 그해 3월에 처음으로 테레사가 아닌 다른 인물, 즉 1934년생이자 테레사의 제자인 마리아 니르말라 수녀가 총장이 되었다.
생전에도 거의 성자 같은 삶을 살았던 테레사는 사망한 지 6년밖에 지나지 않은 2003년에 복자福者로, 19년밖에 지나지 않은 2016년 9월 4일에는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 역사에서 대체로 시성에 사후 오랜 시간, 심지어는 수 세기가 걸리는 현상을 고려할 때, 마더 테레사의 이른 시성은 특별한 경우였다. 성인으로 시성되는 데에는 2건 이상의 기적이 필요하므로, 신유에 대한 증언이 필수였다. 2002년 인도 여인 모니카 베스라의 위종양 치유, 2008년 브라질 남성 마르실류 안드리뉴의 뇌종양 치유가 보고되면서, 테레사는 성인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29)
테레사 수녀에게 헌정된 코소보의 성테레사성당(왼쪽). 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오른쪽)에는 테레사 수녀의 생애가 묘사돼 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3. 우상 파괴 |
테레사 수녀의 가르침·실천·찬사·시성 등의 생애 여정을 들으면, 지상에서 그는 거의 한 점 흠 없는 삶을 산, 딴 세상의 거룩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마더 테레사를 만난 이들은 그 만남에서 그런 유사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테레사와 그의 사역에 대한 비판은 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다.
① 한 나라, 혹은 도시 가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순히 최소한의 식량과 의약품을 나눠 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정부 및 전문 기관이 나서 체계적인 복지와 교육, 재활, 개량 및 정책 구성 등을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테레사와 사랑의선교회 사역이 실제 효과보다 부풀려 알려져, 오히려 실제 나서야 할 정부가 현실에 안주하며 뒷짐만 지고 있다.30)
② 테레사와 사랑의선교회가 엄청난 후원을 받음에도, 의료 활동이 너무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실제 예방이나 치료, 재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자포자기하며, 고통과 죽음을 그냥 수용하게 만들고 있다.
③ 테레사와 선교회가 도시 빈곤 문제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과도한 출산율이나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거나, 전문적인 해결책에 역행하는 입장을 취한다. 즉 낙태, 산아제한, 피임 등에 무조건 반대만 하는 가톨릭 근본주의가 문제를 악화시킨다.31)
이런 비판은 흔하고 오래되었지만, 빈곤·생명·신앙·고통·죽음을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테레사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테레사는 이런 비판들은 주로 인간과 세상을 '목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나오는 해결책이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은 항상 한 개인으로서의 '사람'을 향한다고 응수한다. 자신들은 그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따름이라고.
이런 일반적인 비판을 강력하고 날카로운 예봉으로 만들어, 테레사를 "근본주의적 종교인, 정치 공작자, 원시적 설교가이자 세속 권력의 공범자"32)로 그려 낸 인물이 바로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1949~2011)였다. 영국 출신의 진보적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무대를 옮긴 후에 21세기 새로운 무신론(New Atheism) 운동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활발히 활동한 인물이었다. 1994년에 그는 영국 방송국 Channel4에서 방영된 'Hell's Angel'을 만들어 테레사를 비판했다. 이어서 1995년에 위트와 빈정댐이 뒤섞인 <자비를 팔라 The Missionary Position>33)라는 제목의 책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몇 에피소드를 더하여 테레사를 더 가혹하게 비판하고 조롱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부패하거나 사적 목적이 있는 정치인, 경제인, 고위 지도자 등과 거리낌 없이 만나 사진을 찍고 후원금을 받는다. 예컨대, 아이티의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를 선전하는 기관지에 그의 아내와 함께 경건하게 연출된 사진을 싣고 거액의 후원금을 받았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식으로 만나서 사진을 찍고 후원금을 받아 낸 부패한 인물들의 명단은 아주 길다.34)
② 유난히 시성 절차를 좋아하는 요한 바오로 2세 때문에 너무 쉽게 복자와 성인이 된다.35) 또한 성인으로 공식 시성되기도 전에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도 너무 쉽게 테레사를 성인으로 숭배한다.36)
③ 마더 테레사의 가난 이론은 굴종과 감사 이론이고, 신이 정한 세속 권세에 굴복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력 이론에서 파생한 것이다.
④ 마더 테레사는 단호하고 정치적인 교황 체제가 파견한 사절로, 그녀의 세계 순회는 순례자의 여정이 아니라 권력의 필요에 부응하는 일종의 캠페인이다.37)
결국 논지의 핵심은 테레사는 믿음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여 먹는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환상은 만들어졌고,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테레사의 선교사 자세(missionary position)는 청중을 속이고 꼬드기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스스로 사기꾼이자 영악한 눈속임쟁이라고 밝히면서도 청중을 꼬드길 수 있다. 라틴어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속기를 바라니, 속여 먹으라"38)고 빈정대기도 했다.
"모든 종교는 그 자체로 악이다", 또는 "사기다"는 식의 막무가내 비판만 걸러 낸다면, 마더 테레사에 대한 다른 비판자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히친스의 자세(Hitchen's position)는 모든 기독교인이 한번쯤 귀 기울여 볼 만하다. 폐쇄적 진영주의, 문자주의, 절대 복종(순명)주의, 근본주의적 권위주의가 만들어 낸 폐해가 얼마나 큰 지는 오늘날 한국 정치사회와 교계(개신교/천주교) 전반에서 확인된다. 이 점에서, 비둘기 같은 순결을 강조한 마더 테레사의 정신과 더불어, 뱀같이 지혜로운 정신도 신학·신앙·실천·교회·삶 전반에 뿌리내리고 자라나야 한다.
충분히 가능한 여러 비판에도, 결국 마더 테레사가 걸은 길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은 '단순한 길'이었다. 땅에 발을 디뎠으나 땅에 속하지는 않은 존재, 하늘에 속하였으나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 존재. 마더 테레사는 언젠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테레사의 다중 정체성, 한편으로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개별 적용이 가능한 발언이 아닐까.
"혈통으로 말하자면 나는 순전한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국적은 인도고요. 신분은 가톨릭 수녀입니다. 소명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전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마음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온전히 예수님의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39)
주 1) 2018년부터 한국 천주교 분도출판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이라는 시리즈 제목으로 교부들 설교를 선별해 번역 출판한 책들(http://www.bundobook.co.kr/goods/catalog?code=000300290011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book&wr_id=735&main_visual_page=gis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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