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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초인종과 함께 햇밤 한자루가 도착했습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큰형님과 같이 주운 알밥입니다.
어머니와 형님의 정이 느껴져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
같이 근무하는 선배님이 홈에 올려놓은 글입니다.
오늘 아침 읽다가 우리친구들과 함께 보고싶어 퍼다 올립니다.
몇일후면 추석입니다.
고향과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소꼽친구와 옆집 아주머니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올핸 모두 고향에서 즐거운 추석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운 어머니와 보릿고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두메산골
내가 살던 고향은 산 넘고 물 건너 해가 어둑해져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산골로 우리 집안사람들이 옹기종기 초가집을 지어 한 동네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이 초가집은 뒷산 소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을 삼았고 앞마당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으며, 다랑이 논에서 생산된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이다. 눈비를 겨우 피하도록 지은 보잘 것 없는 오두막집이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전후좌우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라 입에 풀칠할 여력도 없는 초가집에서는 앞마당에 심어 놓은 감나무 해거리 하듯 자식들이 태어났고, 하늘만 보이는 산 아래에서 무엇을 먹고 살라고 하는 지 사나흘이 멀게 동네 어느 한 집에는 금줄이 내걸리곤 했다.
부자(父子)가 같이 자식을 낳는 경우도 더러 있어 고숙질(姑叔姪)인지도 모르고 형제나 자매같이 손잡고 학교에 다닌 경우도 가끔 볼 수 있었다. 한 집에 아이들이 보통 다섯에서 열은 되니 입을 것과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돈이 있어 공부를 시킬 수 있었겠는가. 산골로 시집와서 분칠하고 새색시 노릇할 틈도 없이 농사일이며 집안일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다가 배가 불러오면, 그저 타고난 팔자려니 생각하고 생기는 대로 낳을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세대를 탓할 일도 아닐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께서 악착 같이 일하며 재산을 모아 논밭을 조금씩 사서 농사를 지은 덕으로 동네 다른 집안보다는 배고픔은 덜 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때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신 아버지께서 중공군이 쏜 따발총에 부상을 입어 힘든 농사일을 하지 못하셨고, 여섯 형제들이 커감에 따라 의식비와 학비의 지출이 점점 커져 쪼들리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남의 집에서 거저 일을 하여 주고도 눈치 보면서 어린자식들에게 꽁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 먹여야 했으며, 어느 집에서 초상이라도 나면 상여가 떠나갈 때까지 그 집 근처에 놀면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꽁보리밥 몇 숟가락을 찬물에 말고 고추장에 찍은 풋고추를 반찬삼아 한 끼를 때우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으니, 당시의 산골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여 알만 할 것이다.
우리 조부께서는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라고는 산골짜기 손바닥만한 다랑이 논과 밭, 그리고 키가 큰 우리 형제들이 문지방을 들어설 때 마다 허리를 굽혀야 했던 초가집 밖에 없었다.
팔도의 인구를 다 합해봐야 천만도 되지 않던 조선 시대에 왜 이곳에 정착을 하였는지 한 동안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조상님들이 임란을 피해 사람이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자연적인 조건을 갖춘 곳이라서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어르신네들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겨울이면 눈이 펑펑 내려 온 동네를 뒤덮고 여름이면 지붕위의 호박잎과 싸리문 앞의 감나무가 초가집을 덮어 동네가 있는지 없는지 구분하기도 힘든 곳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조상님들을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번 이해하고 또 이해를 하더라도 그 후손들은 수 백 년 동안 크게 배우지도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지금까지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그래도 하필이면 여기에 터를 정했을까 하는 원망 아닌 원망을 해본다.
강남은 아니더라도 서울 변두리에 자리를 잡던지 그것도 아니면 오두막집이라도 재개발되는 달동네에라도 터를 잡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과, 서울에서 천리 먼 길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그 흔한 개발지역 근처에도 들지도 못하는 이 골짜기에 잡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한(恨) 같은 것이 가시질 않는다.
내가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 하늘 밑에 자리 잡은 지 수 십년이 되지만,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이 고향에 농사를 지으시며 살고 계시기 때문에 가끔 고향을 찾는다. 그 때마다 조상을 모셔야할 후손들이 하나 둘 정든 고향을 떠나 빈터는 해마다 늘어나고, 그 애지중지하던 다랑이 논마저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묵히는 모습을 보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
서울에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걸어서 저녁놀이 질 무렵 고향집에 들어설 때마다 맨발로 달려 나오시어 어린 손자 손녀들을 부둥켜안으시며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에 비할 아픔은 아무것도 없을 테지만.....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조상님들의 묘지를 운동장 삼아 깡통차기를 하거나, 묘 주위에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를 오르내리며 놀았다. 아마 어린 시절에 조상님을 그렇게 원망하지 않았던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른 탓도 있었겠지만 초겨울에 그 후손들이 묘소에 모여 시사를 지내고 난 뒤에 떡 봉개를 어린아이에게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철이 든 후부터는 애증의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명절 때마다 어머니 산소 가는 길옆에 위치한 조상님의 비석을 존경과 원망하는 마음으로 바라다보곤 한다.
오두막집과 사랑하는 나의 가족
이곳에 정착하신 조상님들부터 우리 대까지 가난을 대물림 하여 끼니마다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던 곳이자, 조상님들의 묘지를 병풍삼아 조그마하게 지은 초가집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칠십년대 중반까지는 전기와 TV, 전화와 버스 등 문명 혜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고향이지만 나는 향수병이 생길 정도로 고향을 사랑한다.
나의 선대는 물론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어머니의 뼈와 살이 묻혀 있고, 홀로 고향에서 농사지으시며 살아가시는 아버지께서도 언젠가는 묻혀야 할 곳이며, 내 자식들은 몰라도 나까지는 묻힐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산골의 조마한 초가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와 삼촌 그리고 여섯 형제와 같이 한 지붕 밑에서 자라면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은 안 동네와 조금 떨어진 외딴집으로 윗채와 사랑채, 중간채와 곳간으로 나누어진 초가집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삼촌·고모와 함께 살아서 그 분들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나 윗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갓 태어난 어린 동생이 지냈고 중간 채에는 할머니와 동생들이 거쳐 하였던 기억은 뚜렷하게 난다. 가장 나중에 지은 사랑채에는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위로 두 형제와 같이 지냈으니 형제들 간에도 엄격한 서열이 있었다.
그 중 사랑채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생들이 하나 둘 태어나서 새로 지은 집이다. 내가 이 집을 지은 년도를 기억하는 연유는 아버지께서 대들보와 마루, 서까래로 쓸 나무를 타기 위해 소를 몰고 재 넘어 동네에 있는 제재소로 가실 때 따라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무를 타서 돌아오시는 길에는 꼭 고모 집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따라 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외가나 고모 집에 가면 밥을 실컷 먹을 수도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외할머니나 고모님께서 십 원의 용돈을 손에 꼭 쥐어 주시기 때문에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형제들이 서로 따라가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냈던 사랑채에는 가운데 미닫이문을 설치하여 두개의 방으로 나누어, 한 방에는 우리 3형제들이 다른 방에는 할아버지께서 기거하셨다. 사랑채에 집안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거처하시는 관계로 동네 어른들이 많이 찾아오시는데, 동지섣달 기나긴 밤에는 동네 노인네들이 모여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시기도 하였다.
가끔 한글을 아시는 어른께서 춘향전 같은 옛 소설을 읽으시면 다른 분들은 이를 들으면서 소설이 전개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신다. 그러면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딱한 주인공 이야기가 절정에 도달할 때쯤에 긴 곰방대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시며 무쇠로 만든 화로에 “땡땡” 소리가 나도록 재들 털고는 “어허”하고 혀를 차시곤 하시었다.
농한기가 되면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보시려 꼭 오시는데, 우리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옆집 할아버지 셋이서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기나긴 겨울철 한 밤중이 되면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도토리묵으로 참을 드시고 또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이 참으로 생생하게 기억난다. 외할아버지께서 오시면 미닫이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밤을 새워야했다.
이따금씩 해질 무렵이면 비단 장수나 어물장수, 약장수들이 고갯마루 밑에 있는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잠을 청하곤 하였다. 당시는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아무리 시골 인심이 후하다한들 나그네에게 식사 한 두 끼 대접할 형편이 되는 집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나그네가 하룻밤을 청하면, 다른 집보다는 형편이 조금 낫고 할아버지 혼자 거쳐하는 사랑방도 있을 뿐 아니라, 마음씨 좋은 종갓집 맏며느리가 계시는 우리 집으로 가보라고 하여 우리 집에서 길손들이 더러 쉬었다 갔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사랑방에서 그들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느라 밤이 세는 줄도 모르셨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에게 넉넉하게 먹일 것이 없는 살림살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방 손님이 오시면 보리쌀에 쌀을 살짝 섞어서 밥을 짓고, 밥솥에는 계란 반죽을 만들어 넣어 찬으로 대접한다. 요즘이야 계란을 시위에 사용하는 도구로 여기지만 당시에는 키우던 닭이 계란을 낳으면 부화시키기 위해서 아들에게도 잘 주지 않았다. 손님이 오시거나 어른들 생신 때라야 계란에 밀가루를 섞어서 계란반죽을 하였으니 귀하신 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먼 길을 가야하는 나그네는 할아버지께 큰 절을 하시고는 극구 사양하시는 할아버지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간고등어나 미역을 던져 놓고 고갯마루로 고달픈 발길을 재촉한다. 어머니는 길손이 떠나고 한 참이나 지난 뒤에서야 고등어를 손질하면서 고맙다는 듯 나그네가 넘어간 고갯마루를 한 번 쳐다보신다.
내가 조금 커서 동생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중간 채에서는 할머니께서 거쳐하시는 곳으로 겨울이면 물레와 고구마를 넣어두는 큰 섶이 있고 천장에는 메주를 새끼줄에 달아 주렁주렁 메어두는 곳이다. 할머니는 가족들의 옷감과 이불을 만들기 위하여 겨우 내내 이 물레를 돌리시며 노래도 하시고 인생 타령도 하신다. 밤에는 여러 형제로 인하여 어머니 젖을 오래 물지 못한 손자들에게 젖을 물려주시기도 하고, 도깨비 이야기며 귀신 이야기며 전설의 고향을 밤새 들려주신다.
할머니로부터 귀신 이야기를 밤이 늦도록 들은 날에는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소리나 겨우내 황소바람이 문풍지를 스치는 소리에도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였다. 이런 날, 자시가 지나갈 때쯤이면 어김없이 요강의 소변은 찰랑찰랑 넘쳐흐를 정도가 되니 오줌이 마려워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무서워서 요강의 소변을 비우러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삽지걸에 가서 소변을 누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새벽이 되어서 닭이 울면 쇠죽을 끓이기 위해 할아버지께서 일어나시어 헛기침을 하신다. 우리는 이 때다 하고 얼른 일어나 무섭지 않은 척 큰기침을 한 번 하고는 삽지걸 퇴비장에 볼일을 보곤 하였다.
부모님이 거쳐 하시는 큰 채에는 부엌과 마루가 딸려 있고 상방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방이 하나 더 있었다. 큰 채는 주로 식사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날이 따뜻한 봄철부터 가을까지는 마루에서 주로 밥을 먹었다. 이 방은 할머니께서 아들 둘과 딸 다섯을, 어머니께서는 아들 여섯을 낳아서 기른 곳이니 우리 집안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집은 백여년 전에 흙으로 지은 집이라 찬바람이 불면 황소바람이 술술 들어오고 군불을 때면 연기가 차는 조그마한 온돌방이지만 한 이십여년 동안 우리 육형제가 태어나서 젖을 먹었던 곳이다. 이런 초라한 초가집이지만 육형제를 낳아 키우시느라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리시며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금방 눈물이 고여 흘러내릴 것만 같다.
아침 식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장남이 겸상을 하고 다른 형제들과 어머니가 둥근 상에서 식사를 한다. 가장이신 할아버지께서 상 앞에 앉으시어 수저를 드시고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께서 수저를 드셔야 우리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농사철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새벽부터 논밭 일을 나가시는데, 아침 식사 때면 우리는 들에 나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향하여 진지 드시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일이었다. 학기 중에는 빨리 학교가야 한다는 핑계거리라도 있어 먼저 밥을 먹을 수 있지만 방학이나 일요일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어떤 날에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배가 너무 고파 산골짜기 밭으로 아버지를 찾아가 진지 드시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이 고랑만 메고 갈테니 먼저 먹어라”고 하시면 집으로 달려와서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먼저 먹을 수 있었으나, 곧 간다고 말씀하시면 마냥 기다려야 하는데 그 게 한 시간은 보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교적인 사고가 뿌리 깊은 집안 탓에 보수적인 관습이 곳곳에 베어 있었던 같다.
추억으로 변한 보릿고개의 봄
입춘이 지나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서서히 해동이 되면서 길이 질퍽해지고 앞산 그늘진 곳의 마지막 남은 잔설이 녹아내린다. 시냇가 그늘진 곳의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내리는 사이로 버들개지가 움을 트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벽돌담 밑에 옹기종기 모여 따뜻한 햇살을 쬐고, 겨울 내 꽁꽁 얼었던 얼음이 서서히 녹아 깨어질 듯한 얼음 위로 위험하게 썰매를 타다 물에 빠지곤 하면서도 그 스릴이 좋아 가는 겨울을 아쉬워했다.
이른 봄에는 농부들이 논두렁과 밭두렁을 태우고 온 식구들이 들판으로 나가 보리밟기를 하며 논에 볏 집을 깔아서 쟁기질을 시작하는 등 한해의 농사일을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 때부터 신록이 우거지는 늦봄까지가 보릿고개라 불렸을 정도로 가장 먹고 살기가 힘든 때다.
앞뒷집의 처자는 말할 것 없고 동네 아주머니와 어린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소쿠리나 보자기를 들고 들로 냇가로 나가 냉이를 캐어 무침이나 국을 해서 먹어야 했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쑥과 고사리 등은 보릿고개의 해결사로서 없어서는 안 될 봄나물이었다. 요즘은 쑥이 사람 몸에 좋다고들 하여 약으로 쓰이고 있지만 옛날에는 쑥을 뜯어다가 나물이나 국으로 해서 먹고 밀가루에 무친 후 솥에 쪄서 반찬으로도 먹었으며, 특히 콩가루를 무친 쑥떡은 맛도 있어 허기를 채우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뜻한 봄날, 어머니께서 보리논을 메거나 쟁기로 못자리용 논을 가시는 어른들 새참으로 쪄온 누런 보리개떡, 그 맛은 요즘 애들이 즐겨 먹는 단팥빵보다도 더 맛이었다. 그 누런 보리개떡을 담아온 소쿠리를 들고 집으로 오면서 소쿠리에 붙은 떡 부스러기를 남김없이 먹는데 정신이 팔려 논두렁에서 떨어졌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보리개떡, 보기에는 떡 같아 보이지 않은 보리개떡의 맛을 한 번 느끼고 싶다.
춘삼월이 지나고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해질수록 한결 먹을 것이 많아져 보릿고개는 어느 정도 넘어가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연에서 나는 것만으로도 허기는 면할 수 있었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 때면, 시냇가 버들개지, 찔레꽃 순 그리고 참꽃을 많이 따 먹었다. 풀잎이 파릇파릇 나고 속살이 차면 그 풀의 껍질을 벗기어 속살을 모으고 모아 비벼서 먹었다.
송홧가루가 날리기 전에 물오른 소나무를 비틀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우리는 송구(기)라 불렀다. 봄이 되면 중학교 다니는 산길 옆의 소나무 가지는 송구를 만들어 먹기 위해 껍질을 다 벗겨 버리기 때문에 물이 오르지 못하여 하얗게 말라 버린다.
뒤뜰에서 돼지감자도 캐어 먹고 텃밭에 익어가는 완두콩도 따다 먹었으며, 앞마당 모퉁이에서 자라는 감나무 꽃을 주워 먹거나 소쿠리에 담아 놓았다가 두고 먹기도 하였으며, 실에 끼워서 주렁주렁 메달아 놓고 먹기도 하였다.
텃밭에 심은 채소와 완두콩이 무르익어가고 온 정성을 다하여 담근 볍씨가 싹이 터 어느덧 파릇파릇하게 자라 모내기를 앞 둘 무렵이면, 한층 먹을 것이 많아져 배고파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런 아픔은 완전히 지나간다. 봄에 심은 감자와 완두콩에 꽃이 피어 벌과 나비가 찾아들고 밀과 보리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이 계절에 가장 많이 먹은 것은 역시 오디다. 당시에는 밭이 많고 양잠업이 성행하여 집집마다 누에를 치어 공납금 밑천으로 삼았다. 오월 한 달 동안 농사로서 양잠은 큰 부업이었는데, 여기서 나는 부산물인 오디는 보릿고개를 이겨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간식 중의 하나였다.
봄에는 뽕나무를 통째로 베어다가 멍석 위에 잎을 따 놓고 수시로 누에 먹이로 준다. 이 때가 되면 아침 일찍이 아버지께서 이슬 먹은 뽕나무를 멍석에 수북이 쌓아 놓으면, 우리 형제들은 뽕잎을 다 따놓아야 아침을 먹고 등교할 수 있었다. 이 때 뽕잎을 따면서 나무에 달린 오디란 오디는 다 따서 먹었을 뿐 아니라 하굣길에는 남의 뽕밭에 몰래 들어가 손에 물이 들도록 오디를 따 먹었다.
오늘날에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에로 누에그라를 만들고 누에가 먹는 뽕잎으로는 차나 음식을 만들며, 간식으로 먹던 오디는 건강식품화 하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하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 할 것이다.
이 시절을 생각하면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싸리다. 더위가 오기 시작하는 오월말경 저녁을 먹고 뒷동산에서 친구나 형제 또는 형과 동생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시장끼가 들면 밀싸리를 해먹는다.
나무를 하여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밭에서 베어온 밀을 통째로 올려놓고 익혀서 먹는 방식이다. 사그라져가는 남은 불빛에 그슬린 밀을 손으로 비벼서 숯검정과 껍질을 벗긴 후, 입으로 ‘후’ 불어서 남은 밀알을 씹어서 먹던 그 때 그 시절! 그립기만 하다. 밀싸리는 오뉴월에 콩싸리는 가을에 하는 것이 다르지만, 둘 다 먹을 것이 없었던 시대에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었던 식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십년대에는 육십년대 보다 더하였겠지만, 육십년대의 보릿고개를 그나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원조로 가난한 학생들에게 삼일에 한 번씩 지급되는 분유가루, 옥수수가루, 누런 빵(쇼빵)과 어른들이 사방사업에 하루 종일 일한 대가로 배급받은 밀가루 한 자루였다는 사실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우리 학교는 벽촌이라 잘 사는 학생 못사는 학생 할 것 없이 전학생들에게 모두 무료로 지급되었다. 쇼빵은 겉은 딱딱하고 속은 식빵 같은 것이 냄새가 구수하고 한 개 먹으면 배까지 부르기 때문에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빵을 배달하는 세발트럭이 고장이 나서 학교에 오지 않으면 우리도 집에 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놀았을 정도다. 우리 동네는 골짜기라 칡이 많이 나기 때문에 우리 보다는 조금 나은 동네 애들이 받은 쇼빵과 바꾸어 먹기 위해 일요일에는 칡을 캐는 것이 일이었다.
학교에서 주는 분유가루와 옥수수가루는 집으로 가져와 쪄서 먹는데, 옥수수가루야 해먹는 방법을 모를 리가 없지만 분유가루는 먹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우유를 먹어본 적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시킨 대로 끓인 물에 분유가루를 타서 먹었으나 하도 느끼하여 식구들이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분유가루를 옥수수가루와 같이 졌는데 너무 딱딱하게 굳어져 입에 넣고 깨물다가 도저히 씹을 수가 없어 뱉으며 아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봄이 완연한 오월을 지나 보릿고개를 벗어날 쯤에 자리 잡은 우리의 명절인 단오가 되면 동네 일꾼과 청년들이 모여 집집마다 십시일반으로 그네를 삼을 짚이며 곡식을 조금씩 거두어 조상의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에 그네를 마련한다. 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그네를 타고 닭을 잡아 육개장을 끓이고 술도가에서 막걸리를 받아다가 한바탕 신명나게 논다.
이 때 얼굴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던 부잣집 며느리가 옥색 모시치마를 입고 하늘을 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단오는 본격적인 농사철을 맞아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품앗씨로 대표되는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화합하자는 의미인 동시에 머슴들에게 음식을 융성하게 대접하여 일 년 농사를 잘 짓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음(陰)의 기운이 완전히 물러가고 땅의 양기가 솟아오르는 단오가 지나면 기온이 올라 여름의 문턱인 유월로 접어들고, 들판의 밀과 보리가 누렇게 변하면서 보릿고개는 잠시 물러나게 된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산골의 여름
아카시아와 밤꽃 향기가 산골의 밤공기를 가득 채우고 지나간 후에 소쩍새와 풀벌레 소리가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면 여름이 다가오는 소리요, 청하지도 않은 손님인 모기에 밤잠을 설치게 되면 산촌의 여름은 점점 깊어 간다는 뜻이다.
내 고향의 여름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청포도다. 그래서 그런지 “청포도”란 시의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와 산딸기와 산머루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곳으로 배 불리 많이 먹을 수 있어 청포도가 아닌 이 여름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여름이면 소가 풀을 뜯도록 산중턱에 올려놓고는 산딸기랑 산머루를 많이도 따다 먹었다. 잘 익은 산딸기 맛에는 견주지 못해도 양도 많고 주렁주렁 열린 머루는 줄기 채 따오기도 쉬울 뿐 아니라 그 맛도 포도맛과 비슷하니 여름 자연식 먹을거리 치고는 최고였다.
한 여름에 풀을 베기 위해 산 중턱에 올라서 마주치는 넝쿨딸기는 그 맛도 맛이려니와 큼지막한게 보기에도 참 복스럽다. 이 넝쿨딸기를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통째로 꺾어 풀을 가득 실은 지게 위에 달아매고 내려올 때에는 신이 나서 짐이 하나도 무겁지가 않게 느껴지곤 했다.
나의 고향은 산골이라 산에서 나는 것은 대부분은 반찬으로 먹지만 농외소득이 별로 없는 농촌에서 도라지나 약초는 농가경제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물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과 같이 도시락을 싸서 도라지를 캐러 간다. 야산의 도라지는 다 캐고 없는지라 더 깊은 산으로 도라지를 캐러가야 했다. 숲이 빽빽한 골짜기에 들어서면 온통 천지에 하늘과 숲만 보이는지라 방향을 구분할 수 없는 그곳에서 계곡의 흐르는 물로 목을 축이면서 도시락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무조건 산 정상을 향하여 올라간다. 그러면 잠시 후 내 눈앞에 온통 연보라색 꽃이 풀 사이로 만발한 장관이 펼쳐진다. 우리 일행은 노다지를 만난 기분으로 그곳에서 도라지를 캐어 망태기에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온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고생은 숙명같이 여기면서도 자식이 힘들게 도라지를 캐는 것이 괴로워 그 다음 날부터 도시락을 싸주시지 않아 더 이상은 도라지를 캐러 가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거나 도시락을 싸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캐온 도라지를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놀려도 못가고 어머니와 함께 껍질을 벗기느라 혼이 났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무리 나이가 어렸지만 부모님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였더라면 하는 마음에 철이 없던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어찌 여름 먹 거리로 이것만 있었겠는가? 밤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계곡 옆에서 자라는 까칠한 복숭아를 몰래 따 먹거나 옆 동네로 원정을 가서 참외와 수박 서리를 하여 먹는 재미도 잊을 수가 없다.
보리와 밀을 베어 마당이나 뒷산에 쌓아놓고 천수답이라 비가 내리길 기다려 겨우 모내기를 마친 후, 농사 중에 제일하기 싫은 보리타작을 끝내면 농번기는 지나가고 다소의 여유가 생긴다. 이 때면 동네 할머니, 어머니들은 보리 서너 되를 들고 지친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낙동강 백사장으로 모래찜질을 간다.
모래찜질을 마치고 난 후 가져간 보리로 수박과 참외를 사서 조금 드시고는 집으로 가져오신다. 가족에게 사랑한단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지만 그 무거운 수박과 참외를 머리에 이고 수 십리 길을 걸어서 집으로 오시는 당신이야 말로 진정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날 밤 우리 형제들은 그 수박을 우물 속에 담가 놓았다가 시원해질 쯤 꺼내어 숟가락으로 수박 속을 긁어서 커다란 양푼에 담은 후, 물을 한 바가지 넣고 사카린을 풀어서 먹는다. 모처럼 보는 귀한 몇 조각의 수박에 물과 사카린이 어우러져서 내는 단맛도 맛이려니와 수박 보다 더 많은 단물을 양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행복이었다.
당시에는 밀농사를 많이 지어 여름이면 풋고추나 애호박, 배추나 파 등에 밀가루만 무쳐 지지면 부침개가 되니 배고픔은 어느 정도 해결된다. 한 여름이면 어머니께서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국수를 자주 만들어 주셨는데, 반죽을 칼로 썰어 손국수 재료를 만드시고는 마지막 꽁지부분은 꼭 남겨서 우리 형제들에게 주셨다. 이 밀가루 반죽을 불에 구우면 뻥튀기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다. 이것을 먹는 재미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재미에 국수 만드는 날에는 어머니 옆에서 서로 심부름을 하고 국수 반죽의 꽁지부분을 얻으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손국수에 배추와 호박 등 집에서 나는 채소를 듬뿍 넣어 양을 엄청나게 많게 하여 온 식구들이 먹고 남은 것은 커다란 다랑이에 담아서 뒤 안 모퉁이 서늘한 곳에 두신다. 당시 허기에 시달려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는 육형제들에게 이 손국수라도 실컷 먹도록 한 어머니이시다. 툇마루에서 홍두께로 반죽을 미는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거늘 다시 그 맛을 볼 수 없으니 마음이 아프다.
먹을 것 없는 어린시절에 그래도 이 정도 자라도록 한 일등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여름철 물고기일 것이다. 수리시설이 되기 전에는 마을마다 저수지가 있어 초봄부터 가을까지 낚시로 고기를 많이 잡아먹었지만 그것으로는 영양보충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오뉴월부터 마지막 태풍이 지나가는 초가을까지 비만 왔다하면 물꼬 뿐 아니라 집 앞 보에 까지 붕어와 미꾸라지가 가득 찬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이 고이면 보나 도랑으로 다니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비가 그쳐 시냇물이 어느 정도 마르면 조그마한 웅덩이 또는 늪에 물고기가 바글바글 거리니 몇날 며칠은 이것을 잡아 매운탕으로 해서 먹거나 구워서 먹고, 그래도 남으면 물고기의 배를 따다가 바짝 말려서 고추장을 발라 구워서 반찬으로도 먹었다.
특히, 웅덩이에 모여 있는 미꾸라지를 몇 망태기나 잡아 통째로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들판이 황금물결로 변할 무렵 논에 도랑을 치면 누런 미꾸라지들이 기어 나오는데, 이것을 잡아 호박잎에 싸서 구워 먹는 맛은 아마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상상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영양부족으로 지금의 나 정도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온 가족들이 모여 칼국수를 모처럼 배부르게 먹고서는 모깃불 주위에 둘러 앉아 밤하늘의 북두칠성 별자리를 보면서 잠을 자다보면 새벽이슬이 내린다. 이 때쯤이면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자던 식구들이 하나 둘 새벽이슬과 선선한 바람을 피하여 방으로 들어가 나머지 잠을 청한다.
좀처럼 가을에게 자리를 내 줄 것 같이 않던 그 무더웠던 여름도 처서를 맞이하면서 한풀 꺾인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구름은 한결 높아 보이고 길가에 코스모스는 바람에 한들한들거린다. 이어서 낮에는 고추잠자리가 수숫대 위를 맴돌고 밤에는 섬돌 밑에서 귀뚜라미가 합창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시골에서 자라는 코 흘리게 어린 아이도 이 소리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이라는 것쯤은 다 안다.
먹을 것이 많아 가장 좋아한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이 되면 여름철에 살찌운 누런 황소도 고된 가을이 오는 것을 아는 듯이 “음~메” 하고 엄살을 부리는 것 같다. 초가지붕 위에는 보름달 같은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싸리문 앞의 감나무에서는 빨갛게 홍시가 익어간다. 산비탈 다랑이 논에서는 여름의 가뭄을 이겨내고 벼가 고개를 숙인다. 앞마당 멍석 위에 널린 붉은 고추가 가을 햇살에 더 붉게 물들어가고 통풍이 잘되어 어서 여무라고 네 발로 묶어 세워둔 참깨자루에서는 고소함이 풍긴다. 텃밭에 심어놓은 조선무와 김장배추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매일 물을 주어야 하고 징그러운 배추벌레도 잡아 주어야 한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부터 가을걷이가 끌날 때까지가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것은 연중 먹을 것이 가장 풍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살찐 개구리를 잡아 돌로 뒷다리를 잘라서 구워먹기도 하고, 때로는 한 망태기 가득 잡아서 돼지를 기르는 집에 가져가 십원을 받고 팔기도 한다.
또한 깊은 산속에서 밤이나 호두를 따다가 깨물어 먹기도 하고 고구마나 무 뿌리도 캐어 먹었으며, 콩싸리도 해서 먹고 감 홍시도 주워서 먹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뒤뜰에 떨어진 알밤을 남보다 먼저 주워 할아버지께 보여드리며 자랑하는 시기도 이 가을이다.
내가 가을을 제일 좋아 하는 이유는 쌀을 수확하지 않아도 배고픔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을 것이 많은 만큼 가을 농사일을 거드는 것은 힘든 일 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쇠풀을 한 망태기 하는 것이나 고추 따는 것이나 깨 찌는 것이나 콩 뽑는 것 등 어느 하나 힘이 들지 않는 일이 없었다. 가을 햇볕이 따가운 들판에서 낫으로 벼를 벨 때에는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파서 수확의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해도 해도 줄지 않는 논을 원망해보기도 하였다.
농사일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새참인데 모내기할 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품앗이로 일하기 때문에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 가을철 벼베기는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끼리 주로 하기 때문에 따로 새참을 준비 할 수 없어 익은 감자나 고구마로 때울 때가 많았고 형제들이 전부 일하는 일요일에는 간편한 숙수가 최고의 참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새참으로 막걸리를 드시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막걸리에 물과 사카린을 타서 드셨다.
사카린과 물을 탄 막걸리는 술이 안 취하면서 배도 부르고 힘도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약간의 술기운이 아픈 허리 통증을 잠시 해소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이 사카린 탄 술을 많이 먹어 보았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
벼베기가 끝나고 볏단을 거두어들인 논에는 어린아이들이 벼이삭을 줍기 위하여 망태기를 들고 들판을 다닌다. 가난에 허덕이는 때인지라 양식이 절대 부족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벼이삭은 공책과 연필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계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벼이삭을 열심히 주워야 했다.
내가 너무 어려서 낫을 들고 벼를 베지 못하던 초등학교 저학년 일때에는 소를 몰고 풀을 먹이는 일을 많이 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으로 꽁보리밥에 물을 말아서 먹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뒷산으로 소에게 풀을 먹이는 친구들이 모인다. 친구들이 모이면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처음에는 기마전도 하고 소나무 타기도 하는 등 노는데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배가 조금 고프면 자연에서 나는 감이나 밤은 말할 것도 없이 온갖 먹을 것은 다 해먹는다. 그 중 가장 맛있게 먹었던 것 중 하나가 벼이삭으로 만든 현미다. 갓 고개 숙인 벼이삭을 꺾어다가 묘지의 상석 위에 올려놓고 돌로 갈면 현미가 나오는데, 쌀밥이라고는 어른들 생신 때나 겨우 먹을 수 있었던 형편에 찰 찌고 고소한 현미를 도란도란 둘러앉아서 먹었으니 어찌 그 맛을 잊을 수가 있을까.
또 하나는 연기가 나도 잘 보이지 않은 골짜기 계곡으로 가서 낙엽을 끌어 모아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몰래 뽑아온 콩을 올려놓고 구워 먹는 콩싸리인데, 콩밭 주인이 오는지도 모르고 하도 정신없이 먹다가 들켜 혼이 난 적도 많다. 요즘 같이 라이터라고는 없고 성냥이 전부인 시대에 불을 구하기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어머니 몰래 부엌에서 성냥 몇 개비와 성냥통 옆을 조금 오려 와서 불을 피우곤 하였다. 가끔은 몰래 훔쳐온 성냥개비가 녹거나 오려온 성냥갑의 조각이 너무 적어 불을 피우지도 못하고 입맛만 다시던 때도 더러 있었다.
이 산골에서 가장 많이 나는 과일은 역시 감이다. 감은 별도의 땅을 차지하지도 않고 집 주위 또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하여 봄에 나는 감꽃부터 시작하여 여름철에 덜 익어 떨어지는 푸른 감도 며칠을 두었다가 삭으면 먹었다. 가을 운동회가 돌아오면 떫은맛을 제거한 삭힌 감이 단골 메뉴였고 감을 깎아 지붕위에 말려서 생산한 곶감은 제사용으로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을에 감을 따다가 두지에 넣어두면 겨우내 살짝 얼린 홍시가 되는데 요즘의 아이스크림 보다 더 맛을 뿐 아니라 인절미를 여기에 찍어 먹는 맛은 그만이다. 또한, 자연적으로 익은 빨간 홍시에 햇볕이 통과하면서 발하는 그 붉은 빛은 석양보다 더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다. 그 만큼 우리 시골에서의 감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식품이었다.
한번은 친구들과 같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옆 동네의 감나무에 달린 홍시가 탐이 나서 친구의 일부는 망을 보고 일부는 나무에 올라가 홍시를 따다가 주인한테 들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밑에서 망을 보던 친구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감나무에 올라간 나와 다른 아이 둘만 주인한테 붙잡혀 책보자기와 옷을 빼앗기어 집에도 못 들어가고 뒷산 묘지 옆에 숨어 있다가 저녁이 되어서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는 산골이라 추석이면 인근 동네의 학생들부터 청년들까지 우리 동네와 산속에 있는 절로 많이 모이는데 그 이유는 친구들과 만나서 즐거운 한가위를 보내기 위함도 있겠지만 산골이라 도시에 나가지 않고 집안일을 돌보는 처녀들이 유독 우리 동네에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가을 홍시와 계곡 사이로 빨갛게 익은 보리죽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도 많이 모였다. 우리 할머니 묘소에는 이 열매가 많이 열려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꼭 이것을 따가다 자식들에게 주면서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하곤 하였는데, 요즘은 너무 가물어 이 열매가 잘 열리지 않아 구경조차 하기 힘드니 참으로 아쉽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재와 인분에 섞은 보리와 밀을 논과 밭에 뿌려서 흙으로 덮거나 마늘을 심고나면 들에서 하는 농사일은 거의 끝이 나게 된다. 곧 이어서 아이들이 노는 일요일을 택하여 마당에 탈곡기를 설치하고 뒷산에 가려놓은 볏가래의 볏단을 날라다가 탈곡을 한다. 잘 익은 알곡이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년 농사 중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때이기도 하다.
황금물결이 출렁이던 들녘도 맨 바닥을 드러내고 허수아비도 제 역할을 다하여 쓰러질 무렵이면 풍성하던 오곡백과도 다 수확하여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어 진다. 서산으로 기우는 태양이 점점 빨라져 어느덧 산골마을에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아침저녁으로는 손이 시려 세수하러 개울가에 갔다가 한 참 망설이게 될 때쯤이면 저물어 가는 가을도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눈 내리는 기나긴 산골의 겨울
벼 타작이 끝이 나고 감나무의 꼭대기에 까치밥만 남으면 서리가 내리고 쌀쌀한 기운마저 돈다. 이 때부터 아이들의 겨울방학과 더불어 긴 농한기로 접어드는 계절이 겨울이다. 겨울하면 눈썰매와 스케이트도 타고, 팽이, 구슬, 딱지를 치며, 깡통차기와 자치기와 술래잡기를 하던 놀이도 재미있었지만 연날리기와 쥐불놀이도 빼놓을 수 없는 놀이 중 하나이다.
이 맘 때가 되면 산과 들에 널려 있던 먹거리들은 거의 없어지고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아두었다가 하나 둘 빼어먹듯이 시골에서도 여름 내 고생하여 지은 오곡백과를 저장하였다가 겨우내 먹어야 한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곡간마다 보리쌀과 밀 그리고 벼를 채우고 디딜방아간에도 호박, 콩을 한 자루씩 가득 쌓아 두어야 하며, 뒤뜰에 있는 뒤주에는 곶감과 감을 섶 위에 가지런히 정리 해놓고 그 아래에는 참깨며 고추를 가득 넣어 둔다.
할머니가 거처하는 중간 방은 쌀자루와 고구마를 가득 채운 섶이 자리하고, 천장에는 콩으로 메주를 쑤어 짚으로 엮어 메달아 두는 곳이다. 또한, 할머니는 실을 뽑을 물레를 설치하고 목화를 담은 자루를 구석에 가득 쌓아 둔다. 할아버지께서 기거하시는 사랑방에는 가마니틀을 설치하고 화로와 긴 곰방대에 쓸 담배 잎을 천정에 매달아 놓는다.
겨울부터 이듬 해 봄까지 없어서는 안 될 반찬으로 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밭에서 잘 자란 무와 배추를 뽑아다가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어서 김치와 동치미를 담아 독에 담은 후, 뒤 안에 구덩이를 파서 묻는 다음 볏짚으로 영을 이어 덮는다. 그리고 가을 내내 멍석에 말린 무말랭이에도 고춧가루를 뿌려서 항아리에 담고, 그러고도 남은 무와 배추 그리고 배추뿌리는 그냥 땅을 파서 묻으면 겨우내 먹을 양식 준비는 끝이 난다.
마지막으로 시장에 가서 한지를 사다가 풀칠을 하여 문에 바르고 여름비에 무너진 굴뚝과 흙벽돌을 손질하고 나서, 소도 겨울을 나게 외양간을 짚으로 보온을 하고 나면 산골에서의 월동준비는 거의 끝이 나게 된다.
산촌에서 겨우살이 준비를 끝내고 나면 조석으로 얼음이 얼고 이따금씩 눈발이 휘날린다. 이 때까지만 해도 가을 추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리밥에 쌀이 어느 정도 섞인 밥에 내륙지방에서 나는 유일한 해물인 간고등어 맛을 볼 수 있고, 하다못해 간식으로 호미에 찍힌 고구마와 감 그리고 무나 배추뿌리를 먹을 수 있어 기나긴 겨울밤 중 초겨울 밤을 나기는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겨울방학이 중반으로 접어들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북적이면 이리저리 나뒹굴던 고구마와 배추뿌리 같은 것도 차츰 동이 나고 할머니 방에서 꺼내 먹던 성한 고구마도 어느덧 섶 높이 밑으로 내려가 어린 손이 닿지 않게 된다.
이럴 때면 이런 간식거리도 서서히 통제가 시작되며 겨울이 더 깊어질수록 고구마는 주식으로 변하게 되어 삶은 고구마에 김치로 점심 한 끼는 때워야 한다. 큰 광주리에 삶은 고구마를 내어놓으면 우리 형제들은 서로 고구마를 등 뒤에 숨겨 놓고 먹었다. 나중에 놀다가 배가 고프면 먹기 위해서였다. 친구들과 돌담 밑에서 딱지치기를 하면서 먹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가던 고구마는 물론이요 저녁에 소죽 끊인 불에 구워 먹던 고구마도 어른들 몰래 꺼내 먹어야 했으며 한밤중에 뒤주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들어서 몰래 홍시를 꺼내먹고는 표시 나지 않게 가지런히 다시 정리해 놓아야 한다.
이 산골에서 겨울 영양식은 토끼나 꿩이 단연 으뜸이다. 보리나 밀의 싹이 올라오고 산속의 잎들이 다 말라 먹을 것이 귀해지면 토끼나 꿩이 집근처 밭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이 때를 틈타 찔레열매나 콩 속에 독극물인 싸이나를 넣어서 토끼나 꿩을 잡는다. 돈이 없어 싸이나를 구하기 어려운 어린아이들은 찔레 열매를 꺾어 오거나 콩의 속을 파는 등 형들의 심부름을 주로 하게 된다.
오전에는 땔감으로 나무를 한 짐하여 놓고는 오후부터 토끼 잡이를시작하는데 저녁 무렵 밭으로 나가 토끼가 어제 먹었던 보리싹 그 다음에 찔레열매 안에 싸이나를 넣어 꽃아 둔다. 그러면 순진한 토끼는 독극물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보리싹과 찔레열매를 같이 먹고 죽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죽은 토끼를 서너 마리씩 가져와 가마솥에 끓여서 온 식구가 보신을 한다.
눈이 펑펑 내리면 새끼줄로 고무신을 동여매고 온 동네 애들이란 애들은 다 나와 막대기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토끼몰이를 하는데, 그 토끼 잡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토끼 고기 한 점 먹기 위해 눈에 파묻히고, 계곡으로 넘어져서 사람 찾고, 새끼줄이 떨어져 고무신 찾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발이 시려 눈물을 흘리면서 겨우 잡은 토끼를 집으로 가져와 가마솥에 무와 물을 듬뿍 넣고 끓여서 꿀맛 같이 먹던 때도 있었다.
농한기인 겨울철에는 결혼식이 많아 그 추운 겨울날에도 잔치 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공이라고는 하나 없는 산골에서 잔치나 제사 때에 잡은 돼지의 오줌보를 얻어 바람을 넣고 축구를 하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양쪽에서 동시에 오줌보를 차서 “펑”하고 떠져버릴 때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여름철에 도라지를 캐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약쑥을 베어다가 말려서 겨울이 되면 ‘쑥꼼’이라는 것을 해먹는다. 가마솥에 끓어서 우려진 쑥물과 단맛을 내는 조청에 대추와 밤을 넣고 푹 고면 건강식인 쑥꼼이 되는데, 겨울철에 딱 한 번 하는 이것을 먹기 위해 육형제들이 수시로 가마솥 솥뚜껑을 열어 보다가 어머니에게 혼이 난적도 있었다
지금도 가을에 시골에 가면 옛날과 같이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누런 호박인데, 가을철에 밭둑이나 지붕 위에 널려 있는 호박을 따다가 디딜방앗간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겨울철에 해먹는 것이 호박범벅이다. 호박을 삶아서 팥, 고구마, 밤, 강낭콩을 넣고 끓여서 만든 호박범벅은 겨울철 또 하나의 별미이자 귀중한 먹거리였다.
사대봉사를 하는 종갓집에서는 제삿날이 자주 돌아온다. 제삿날이 되면 아이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삿밥을 먹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면 다음 날 내내 제삿밥을 못 먹은 것이 원통해 깨우지 않았다고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다. 지금은 새벽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곤 하는데 그 때는 웬 잠이 그렇게 오는지 제삿밥 먹으라고 깨우는 줄도 모르고 잤다. 다 세월 탓이다.
기나긴 겨울밤 동네 청년과 처자들이 모여서 화투놀이로 밥풀과자(오꼬시) 내기를 많이 했다. 때로는 옆 동네로 원정 가서 닭서리도 하였다. 그런 날이면 오꼬시 하나 얻어먹으려고 잠도 자지 않고 형과 같이 구멍가게까지 어두컴컴한 시골길을 심부름 다니곤 하였다. 닭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국물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 혹시 들킬까봐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부엌문을 짚으로 막아놓고 가마솥에 불을 지펴 닭을 삼곤 했다.
농사일이 없는 겨울에는 밥을 실컷 먹기 위해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외할머니께서 손에 쥐어주시는 십원의 용돈을 받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걸어서 외갓집에 서로 가려고 했다. 어린 외손자들이 오면 모두 데리고 구멍가게로 가서 눈깔사탕과 과자를 사주시던 외할아버지와 속치마 속에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십 원짜리 지폐를 꺼내어 용돈으로 주시던 외할머니가 그리워 눈물이 나기도 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처음 외가를 찾았을 때, 말씀 한 마디도 못하시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
이 겨울철에는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끼게 되는데, 음력설이 되면 세뱃돈도 받을 수 있고 먹을 것도 많으며 연날리기와 윷놀이 등 다양한 놀이 문화가 있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들떠서 온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때가 농한기인 한 겨울인지라 아이들은 일할 것도 없고 겨울방학이라 학교도 가지 않아도 되니 매일 친구들과 놀 수 있어 추석 보다 설이 더 좋았다.
설이 가다오면 올수록 설빔과 음식 준비로 산골 동네가 바빠진다. 옛날에는 떡을 집에서 만들어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디딜방아를 찧어 쌀가루나 콩가루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 형제들은 번갈아 가며 디딜방아의 양 갈래를 밟고 움푹 페인 돌 속에 넣은 곡식을 빻으면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채로 걸러서 고운 가루로 만든다. 쌀이나 콩의 전부가 가루가 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하여야 하니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다.
어머니께서 쌀을 가지고 장터에 가서 가래떡을 뽑고 오징어 등 제수용을 장만하여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산을 넘어오시는 해질녘 때쯤이면 우리들은 마중을 나가 짐을 받아들고 온다. 그 때 어머니께서 주시는 눈깔사탕 하나와 오징어 눈을 빼서 먹은 재미로 그 먼 길을 마중 나가 짐을 들고 온다.
설 풍경으로 가장 흔한 것이 뻥튀기이다. 옛날에는 설 전에 뻥튀기 장수가 동네에 와서 튀밥을 튀기는데, “뻥”이요 하면 귀를 막고 돌담 밑에 숨었다가 “뻥”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면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흙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곤 했다. 요즘은 쌀로 튀기지만 과거에는 거의 옥수수로 튀겼다.
설날 아침이 되면 가장먼저 때때옷으로 갈아입고 어른들께 세배를 한다. 육십년대 세뱃돈이라 해봐야 일원 아니면 십원에 불과하지만 이 것을 받기 위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바로 설이다. 세배가 끝나면 이어서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식구들이 둘러 앉아 온갖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다음 날부터 온 동네를 다니며 세배를 하면 어느 집 할 것 없이 음식을 주기 때문에 아마 가장 신나게 돌아다녔던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이 큰 명절이었다. 찰밥과 부름, 귀밝이술 그리고 달맞이 행사와 척사대회가 이 때의 대표적인 풍습이다. 대보름날 부름과 찰밥, 귀밝이술은 새벽에 먹었다. 다 없는 탓일 것이다. 정월보름날이 되면 형, 동생 할 것 없이 사랑방에서 새벽까지 놀다가 여자 옷으로 변장을 하고 찰밥을 얻으러 다녔다. 그 찰밥을 숨겨 두고 밤마다 모여서 먹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평소에는 교회 근처도 가지 않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와 부흥회 때에는 눈깔사탕 하나 얻어먹기 위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했던 그 기나긴 겨울이다. 사랑방 섶의 고구마와 땅속에 묻어둔 배추꼬리와 김칫독의 김치가 어느 정도 떨어질 무렵이면 초가집 처마 밑의 고드름이 녹고 이어서 입춘이 다가온다. 입춘이 되면 동지섣달 기나긴 겨울은 봄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물에 생기가 도는 봄이 또 찾아온다.
목련꽃 같이 고와 더 슬픈 나의 어머니
나는 이런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하여 군대를 다녀온 후 고향을 떠나 지금까지 타관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때의 고향 모습은 내 머릿속에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 어디 하나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초가집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좁은 오솔길과 논다랑이는 잘 다듬어져 옛날 모습은 간 곳이 없다. 내가 어릴 적에 수시로 오르내리던 감나무는 고목이 된지 오래고 앞개울에 그렇게 많던 물고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어디 변하고 사라진 것이 그것뿐이겠는가. 어린 아이 손을 잡고 싸릿문을 열고 들어서면 버선발로 달려 나오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이러한 나의 고향이 그리워 아파트 난간에 기대어 명절 때 고향에 가는 모습을 그려보고는 눈시울을 적신다.
요즘과는 많이 다르지만 자가용도 없고 고속열차도 없던 시절인 7,80년대에는 고향 가는 길이 멀고 험하였다. 내가 처음 서울에 왔을 당시에는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가는 열차 표를 사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것은 보통이고, 표가 없으면 대여섯 시간은 족히 가는 간이역까지 입석을 타고 가곤 했다.
만원인 완행열차에서 울다 지쳐 잠든 애를 안고 기차역 대합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새우잠을 청하다가, 새벽 동이 트면 다시 귀성객을 짐짝 싣듯이 실은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 겨우 도착한다. 여기서 다시 한참을 기다려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초등학교 근처 갈림길에서 내린다. 이곳에서부터 나는 큰 아이를 안고 선물꾸러미를 팔에 끼고, 아내는 작은 아기를 등에 업고 귀저기 가방을 손에 든 채로 가다가 쉬다가 하며 육, 칠 리를 걸어야만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이 고생을 하면서도 명절이 되면 고향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고 어쩌다가 사무실 형편으로 가지 못하면 병이 날 정도였으니, 내가 향수병이 생길 정도로 고향을 사랑한다고 표현해도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노스탤지어(notalgia)라고 표현하면 요즘 세대는 이해할까 모르겠다.
봄이 오면 한 많은 보릿고개를 체념한 듯 받아들이고, 여름철 내내 힘든 농사를 지어서 가을철에 수확하여 겨울철을 그럭저럭 넘기면 또 봄이 되서 다시 찾아오는 보릿고개다. 이 보릿고개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맞이해야 하는 것이 산골의 사는 모습이다. 내가 이런 산골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겪은 일들 하나하나가 뼛속에 사무쳐 눈을 감기 전에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또 봄·여름·가을·겨울이 되어도 되풀이되어야 하는 가난한 현실 앞에서 긴 한 숨만 내시는 어머니 모습을 돌아가실 때까지 지켜보았으니, 고향에 대한 애정과 회환은 평생을 같이 하면 된다하더라도 어머니께 지은 죄는 저승에 가서 극락왕생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지 않는 한 용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한 많은 세월이 이십년이나 되어서 그런지 꽃 피고 새가 우는 춘삼월의 따뜻한 봄날에 시골집 마루에 걸터앉아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 한다. 아지랑이 피는 봄이 되면 보릿고개를 맞이하던 어머니의 긴 한 숨소리라도 다시 듣고 싶어서다.
세상 사람들은 봄에 잎도 없이 일찍 피었다가 떨어지는 꽃잎이 안타까워 목련꽃을 싫어 한다하지만 나는 목련꽃을 제일로 좋아한다. 그것은 목련꽃을 보면 하얀 무명 저고리를 입고 계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하얀 목련꽃이 피는 봄이 되면 가슴을 졸인다. 목련꽃이 흰 무명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 얼굴 같아 쉬이 떨어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올 봄에도 예년 봄과 다름없이 시골의 툇마루에 앉아 목련꽃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모습을 그려 본다. 이 산촌으로 시집을 와서 육형제를 낳고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시고 부귀영화도 못 본 채 일찍 눈을 감으신 어머니 생각만 하여도, 금방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고여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다볼 뿐이다.
이천육년 삼월 초, 어머니를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