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가파도 가는 날. 오늘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제주 올레 2주간의 봄여행을 끝낸다. 기분이 묘했다. 벌써 끝이라니. 1코스부터 10코스까지 어제 끝내고 10-1코스 가파도로 이어지는 지난 2주 간의 올레여행이 짐을 챙기고 세수를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어제 일찍 잠을 청했던 아들 녀석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지 평소와 다르게 제 때 일어나 짐을 챙긴다. 사실 오늘 가파도를 걷는 것은 5km 조금 넘는 거리라 급할 게 없었지만, 요즘 한창 가파도 청보리축제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 드는 탓에 일찍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제 주인장이 예약 안했냐는 반문에 마음이 찜찜하기도 했다. 만약 오늘 가파도를 가지 못한다면 11코스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아들 녀석은 11코스로 갈 수도 있다는 내 말에 그리 호응을 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오늘 무조건 가파도를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서둘러 숙소를 나와야 했다. 나오기 전 어제 여주인의 특식인 주먹밥을 신청했는데, 거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라 있는 주먹밥이 놓여 있어 챙겨 가지고 나왔다. 물론 비용을 지불한 밥이었지만 주인장의 따뜻함이 배여 있는 주먹밥이어서 내심 흐믓했다.
모슬포항까지 숙소에서 걸어가는 시간은 10분 남짓. 이미 모슬포항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가 먼저 줄을 서고 아들녀석에게 개인신상 정보를 적으라 했다. 배를 타는 것이라 사고에 대비해 만일을 위한 정보를 기록하는 데 이는 이미 우도항에서도 경험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부탁을 할 수 있었다. 이미 예약한 사람들 있어 접수하는 직원은 첫 배를 못탈 거라며 다음 배를 기다리라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옆에서는 노인관광객들이 아침 6시부터 기다렸는데, 첫배를 못한다는 것에 항의를 하며 한 여직원을 곤역스럽게 했다. 다른 직원들이 나와 노인관광객들에게 주의를 주고 이해를 구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예약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몰른 데다 새벽같이 와서 기다렸는데 원했던 첫 배를 못 탄 것에 대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무 잘못 없는 직원이 쩔쩔매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다. 여행을 하며 느낀 것이지만 젊을 나이에 여행을 못한 노인인분들과 장년층의 여인들의 모습들이 제주에 곧잘 보이는데 그분들의 여행매너가 썩 보이게 좋지 않아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을 자주 접하지 못했던 세대. 가 늦게 나름 비용을 들여 모처럼 나선 여행에서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그들의 목적에만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시대의 아픔과 세대의 고통이 겹치는 그림이어서 처음에는 불쾌했다가 이제는 이해하려 노력 중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라 생각하며.
다행히 그리 늦지 않은 9시 40분 배표를 끊을 수 있었다. 왕복 2인 2만원. 일찍 표를 끊었던 지라 아직도 한 시간 넘게 시간이 남았다. 아들과 나는 건너편 체육공원으로 가서 쉬면서 숙소 여주인장이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기로 했다. 따뜻한 두 가지 맛의 주먹밥으로 우리는 아침 식사를 챙겼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다 배를 타러 모슬포항 부두로 나서자 이내 우리가 탈 배가 보였다. 오늘 파도가 심하게 쳐 큰 배로 바꿔야 한다는 소리를 표를 끊다가 들었는데, 정말 나름 큰 배였다. 파도가 심하게 치는 관계로 배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모슬포항에서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는데, 10분이 지나면서 가파도를 앞두고 배가 엄청나게 좌우로 기우렀다. 마치 바이킹을 타듯 흔들리는 배 앞머리와 유리창으로 파도가 강하게 내리쳤다. 사람들은 '우~'하면서 나름 긴장들을 한다. 그래도 10분 뒤 우리가 탄 배는 가파도 상동포구에 안전하게 도착을 했다. 내려서 바라본 가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이라는 말 대로 상동포구에서 바라보는 가파도는 너른 평지처럼 산이 보이지 않고 시야가 확 트여 보였다. 이곳에도 숙박시설이 있고 식당들이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도 있으니 있을 건 다 있는 이 땅의 가장 낮은 섬 가파도. 그것도 청보리 축제가 한창일 이 때 이 곳을 찾은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아들과 나는 상동포구 들머리에 놓여 있는 스탬프를 찍는 곳에서 패스포트를 꺼내 놓고 출발확인 도장을 찍고 이내 올레 리본을 따라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른쪽에 상동할망당을 기점으로 장택코 정자까지 이어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자전거를 타며 가파도 풍경을 맞았다. 낚시대를 들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오늘 같이 파도가 많이 치는 날에도 낚시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하여간 가파도를 향해 달려오는 하얀물결의 수많은 파도 행렬들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조금은 위험해보였지만, 가파도의 참맛을 느끼려면 오늘처럼만 파도를 쳐주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저렇게 힘차게 파도가 육지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오랫만에, 아니 처음 보는 것인양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걸음마저 가벼워 걷는 내내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가지 놓치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파도의 돌담이 제주 본섬의 돌담과 다르다는 것을. 색깔도 다른 가파도의 돌담은 바다에서 주워와 다듬지 않고 쌓은 돌이어서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가파도도의 청보리만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작은 풍경이다. 나와 아들은 놓치지 않고 걸으면서 자세히 보았다. 본섬의 돌담과 정말 다르다. 색깔 모양, 크기와 쌓는 방식까지. 그렇게 담을 보고 걷다보면 큰 왕돌이 보인다. 큰 왕들은 바람돌이라고도 부르는데 바위 위에 사람이 올라가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진다 ㅐ서 지금도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냇골챙이 앞에서 섬 안쪽으로 곧게 뻗은 길을 걸으면 마침내 양쪽으로 온통 청보리밭이다. 무려 17만평에 이른다는 이 청보리 밭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운이지. 이곳은 직접 와 봐야 안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제주에 와서 줄곧 내 뱉는 말이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지?'라는 것. 그냥 멋지다 아름답다로는 담아낼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풍경에 나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소리를 자주 내뱉곤 했다. 내가 본 책자에는 청보리 밭을 걷는 길이 포장돼 있어 아쉽다고 했는데, 이는 노인분들과 장애인을 배려한 조치로 보여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그렇게 청보리를 보고 가노라면 어느새 가파도의 한 가운데 위치한 가파도초등학교가 보인다. 안 들어가 볼 수 없다. 작고 아담한 학교. 역시나 잔디가 깔려 있는 그곳에서 20여분을 쉬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교사도 교사지만 아이들은 얼마나 또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곳에서 사는 아이들도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스마트한 어린이여야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시 일어서 청보리 밭은 가로지른다. 멀리 산방산과 송악산이 보이고 하얀 줄을 잇고 몰려 드는 파도줄이 보이고 세찬 바람에 청보리가 넘실 대는 바로 그 청보리 밭. 걸음을 멈추고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하염없이 보고 또 보고 사진 찍고 또 찍었다. 아~ 자연이여.
그렇게 상동포구를 돌아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가파도는 거리가 짧아 정말 아무리 천천히 돌아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맞다. 그러나 아들과 나는 마지막 일정인 가파도를 그렇게 끝낼 수는 없어 더 천천히 쉬고 또 쉬며 걸었다. 걷다가 만나는 마을 제단을 바라보기도 하고 저 멀리 보이는 마라도(그날은 파도가 심해 가파도까지만 허용되고 마라도는 갈 수가 없었다.)를 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마라도가 가장 아름답다는데, 가파도에서는 또 제주도 6개의 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제주에서 오름이나 봉이 아닌 산은 모두 7개인데, 가파도에서는 영주산만 빼고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군산, 고근산, 단산 등 6개의 산을 모도 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찾은 가파도의 날씨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산방산과 송악산만이 눈에 들어올 뿐 나머지 풍경은 온똥 뿌연 하늘로 채워져 있어 아쉽기만 했다. 실제로 제주에 2주간 머물면서 하늘이 파랗고 한라산이 제대로 보이는 날씨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현지인들도 제주가 정말 맑은 날씨를 보이는 날이 드물다며 어쩌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렇게 해서 하동포구에서 스탬프를 찍고 나머지 못다 걸은 해안길을 걷다 다시 청보리 밭을 지나 한동안 머머물다 상동포구에 왔다. 아직도 우리가 예약한 뱃시간인 2시 20분이 되려면 1시간 30분 넘게 남아 우리는 비싸지만 점심을 이곳 가파도에서 먹기로 했다. 춘자네 칼국수 집으로 언론에 많이 알려진 그곳에 들어가니 딱 한 자리만 비고 모두 채워져 있었다. 아들과 나는 보말칼국수와 성게칼국수를 시켰다. 벽에는 연예인 이특이 다녀간 흔적도 보이고 시끌 벅적하다. 이내 받아든 칼국수. 정말 집에서 만든 것 같은 맛이다. 보말과 성게가 생각보다 가득한 칼국수를 맛나게 먹었다. 대단한 맛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가파도에서 먹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점심식사를 다 했는데도 아직 50여분 남아 대합실로 가서 아들과 나는 책과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우리가 탈 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배가 오고 아쉬운 마음을 가득담고 가파도를 바라보며 배에 몸을 실었다. 언제 다시 이 곳을 올까 하며.
돌아온 아들과 나는 제주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기다리 위해 홍마트 앞 체육공원에서 또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누워서 쉬기도 하고 책도 읽기도 하고 모처럼 지루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또 기다려 버스를 타고 제주로 가는 길. 길을 묻고 중간에 내려줄 수 있는 지를 묻는 노인들에게 운전사의 "어서 올라 옵서"라는 말을 들으며 그렇게 제주로 갔다. '이제는 돌아가는 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 아쉬운 풍경들. 제주를 언제 또 봄에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아마도 먼 10년 뒤의 이야기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켠이 쓰렸다. 가을에 또 이 곳 제주를 찾겠지만, 그때는 봄이 아닌 가을. 1코스에서 10코스가 아닌 11코스에서 21코스. 또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마냥 아쉬웠다. 그렇게 제주 한라대 입구에서 내린 우리는 우리를 기다린 김경남선생님을 만나 제주에서 화덕 피자를 제일 잘한다는 곳으로 향했다.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 김경남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자리.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음악공부를 한다는 우리 아들보다 한 살 어린 딸도 불러 좀 더 흥겨운 자리가 됐다. 가을 여행때는 우리 아들과 김경남 샘 딸이 제주에서 함께 작은 공연을 해 보는 것은 어떻냐는 제안에 아들 녀석은 쉽게 허락을 했다. 어쩌면 이번 가을 여행의 끝자락은 제주의 아는 지인을 초대해 자그마한 콘서트를 여는 자리까지 마련할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아들에게나 나에게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그렇게 맛난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는 동문시장이라는 곳 옆에 마련한 우리 숙소에 짐을 풀고 인근에서 2차 술자리를 가졌다. 해물파전에 먹걸리를 한 주전자 시켰는데, 아들과 딸에게도 반잔 씩 주었다. 그런데 김경남샘 딸이 생각보다 막걸리를 잘 먹는다. 나중에는 기여코 더 달라고 해서 한 잔을 채운다. 조금 놀란 김경남샘이 자꾸 캐 묻는다. 언제부터 술을 이렇게 잘 먹었냐며. 하하 웃으며 그렇게 또 그렇게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가을에 또 만나자며 김경남샘 모녀와 아쉽게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걸어서 우리가 묵을 숙소로 갔다. 토다게스트 하우스라고 사우나를 개조해 숙소를 만들고 사우나와 목욕이 가능한 제주 구시가지에 위치한 독특한 게스트하우스였다. 2주간의 피로가 쌓인 우리 부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숙박에 사우나와 목욕에 아침 조식까지 2만원에 해결될 수 있는 곳이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숙소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게스트 하우스 로비에 있는 티비와 컴퓨터를 보며 아들과 나는 그렇게 모처럼 하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 제주의 마지막 밤. 가을에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9시 45분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청주로 가서 집으로 가야한다. 이제 집에 가는 구나. 정말. 그러고 보니 집에 가고 싶다. 2주가 짧았지만 어쩌면 딱 적당한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침대에 눕기 전 내 발을 만져 보았다. 지난 2주간 내 몸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부분. 발가락에 잡힌 두 군데가 모두 굳은 살로 바뀐 게 보였다. 겨우 이렇게 바뀌었는데, 여기서 떠나다니. 하지만 내일은 집에 간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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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아도 원문보기 글쓴이: 갈돕선생
첫댓글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노래가 절로 나오는 멋진 풍광입니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 선생님 덕분에 집에서 제주올레 구경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