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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누리무리 정기전(1994.10.1~10.12 서울 예술의 전당) 포스터
'혼돈 그리고 불확실성 시대'- 칼라 스프레이 작업을 위한 사전 리허설 장면/1994년
이건 행위 미술이 아니다.
나의 작업 과정에서 제2의 행위일 뿐…
구상과 작업이 작가의 영역이라면,
사진 행위와 미술관 안에서 관람객의 사고는
나의 몫이 아닌 그들만의 고유 영역이다.
전시관에 걸릴 작품은 사진 이미지와 다를 수 있다.
그 이유는 나의 제3의 행위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팸플릿의 도판을 섣불리 믿어선 안 된다.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
P. S. 위 글은 팸플릿 속의 작가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작품 '혼돈 그리고 불확실성 시대'는 1994년 가을 어느 삼삼한 날,
대형 광목을 아파트 옆벽에 걸고, 엄청난 양의 칼라 스프레이로 작업하였다.
그런데 그때 의미있게 그렸던 그 작품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어디엔가 태극기처럼 차곡하게 잘 접혀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날 우연히 행운이 따라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 믿고 싶다.
나도 그땐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 사진 촬영하여 자료로 남길 것이다.
지금은 대단히 아쉽지만, 그 날까지 차분히 기다리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
‘불확실성의 시대’ 저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
▽ 美 민주당 경제 입안 ‘대부’
“행운에 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기회와 준비’가 결합하는 것이다”(존 케네스 갈브레이드)
‘주류 경제학’의 우상을 철두철미 집요하게 파괴해온 갈브레이드! 1908년 캐나다 온타리오 남부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갈브레이드는 1926년 온타리오 농업대에 입학하여 토론토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어 1933년에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석사를 1934년에는 농업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주류경제학의 정반대에선 갈브레이드는 특히 진보적 미국 민주당의 경제정책 입안을 주도하였다. 1934부터 39년까지는 하버드대에서 1939년부터 42년까지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낸 갈브레이드는 1948년 다시 하버드대로 돌아온다.
1960년에는 인도대사로 부임했다가 3년 뒤에 재차 하버드대에 복귀하여 1975년 은퇴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한 갈브레이드는 1943년에는 ‘포천(Fortune)’지 편집위원을 맡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 그를 인도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했지만 아쉽게도 국무부와 알력으로 27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203cm의 큰 키 때문에 거부당하기도 한 갈브레이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시 정부의 물가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경제학뿐만 아니라 경영학 ·역사학 ·사회학에도 박학다식했던 갈브레이드는 ‘올다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와의 두터운 친분에 힘입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부터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0여년동안 민주당 정권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동하며 미 행정부의 경제 운용에 깊게 관여했다.
▲ 1968년 2월 16일 타임지 커버의 갈브레이드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등 무려 3명의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할 정도로 글 솜씨가 압권이었다.
1952년과 1956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애들라이 스티븐슨에게 경제학 시야를 넓혀주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과는 가재 요리를 함께 먹으며 경제 전반에 조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 재임시에는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입안하는 등 신뢰가 두터웠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견해가 상반되면서 결별했다.
▽ 미 경제 ‘모순과 치부’ 통렬한 비판
갈브레이드 교수는 50여 년간 ‘미국 자본주의’ ‘풍요한 사회’ ‘불확실성의 시대’ 등 33권의 다양한 저작을 발표하면서 미국 경제의 치부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었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은 갈브레이드를 농업경제학자에서 정부 개입주의자로 바꾼 운명적 계기가 됐다. 1937년 그는 대공황 대처론을 제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수요 이론’을 학습하기 위해 시카고대에 특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케인스와 동등하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유한계급론’의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런이었다. 그는 베블런을 ‘미국 역사상 가장 통찰력 있는 사회과학자’라고 칭송했다.
▲ 갈브레이드는 '풍요로운 사회'에서 과점기업들의 폐해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1899년 베블런의 첫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논리, 즉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하며,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 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란 가격이 오르는 데도 불구하고 일부 계층의 과시욕이나 허영심으로 인해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신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미 경제가 학교, 고속도로 등 공공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개인의 부만 만들어낸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해온 갈브레이드는 ‘개인’보다는 ‘공공’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역설했다. 갈브레이드를 세계적 학자로서 바라보게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역저 ‘불확실성의 시대’의 출간이다. 1975년도에 출간된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는 지금까지도 베스트 셀러 중의 베스트 셀로로 많은 사람들의 애독서이다.
갈브레이드가 영국 BBC 방송에서 ‘불확실성의 시대’ 타이틀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집필된 이 책은 지난 2백 년에 걸친 경제의 변화상과 경제사상사를 당시의 역사와 연관 지워 다루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핵심 논조는 이러하다. 일찍이 지난날에는 사회경제체제하 지도 원리에서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철학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체계성을 갖고 사람들의 판단력을 위한 기준이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그처럼 확신을 갖게 하는 철학이 부재한데서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1952년 저술한 ‘미국 자본주의’에서 “광고의 현혹이 소비자들의 욕구를 과도하게 자극해 불필요한 상품을 소비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 과점(寡占) 기업들의 폐해를 비판했던 갈브레이드는 1958년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 출판으로 또다시 주목을 끌었다.
▲ 갈브레이드는 기업의 번성과 경쟁력은 도덕에 토대 두지 않으면 사상누각의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고 누누히 강조해왔다.
1999년 미국 도서평가위원회가 금세기 최고의 영어 논픽션 100권 중 46위로 선정된 ‘풍요한 사회!’
이 책의 1996년 개정판에서 갈브레이드는 “빈곤층이 더더욱 공정 경쟁의 장에서 배제되면서 미국은 부자들만의 민주주의 국가가 돼가고 있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갈브레이드는 공산주의의 멸망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핵심키워드로 자본의 쇠락에다 또 하나를 내세웠으니 ‘자율과 개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갈브레이드 교수는 기업윤리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설파하여 왔다.
“경제는 도덕이란 바다에 떠 있는 섬”이라며, 윤리와 도덕 위에 토대를 두지 않는 경제발전은 사상누각일 뿐이란 것이다. 마치 최근 현대자동차의 비자금 사건을 생생히 예견한 듯만 하다.
“70년간 경제학자로 일하면서 꽤 자주 공직과 정치적 외도를 했고 또 한때 언론에 몸담았던 오랜 삶을 통해 나는 정의롭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회적 통념(conventional wisdom)이라고 불렀던 일반적 신념과 진실 간의 끊임없는 괴리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놀랄 일도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지난달 29일 서거한 미국의 원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가 ‘선량한 사기의 경제학’이라는 저서에서 남긴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된 이 책에서 갈브레이드는 “사기가 어떻게 선량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여기서 ‘선량하다’는 것은 스스로 사기를 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기를 친다는 의미이다. 그는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한층 빈번히 사회적 혹은 습관적인 선호성과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금전적 이해관계에 이끌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인식하고 행동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장경제’라는 용어의 속임수
갈브레이드는 오늘날 자본주의경제를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그러한 사기의 일종이라고 설명한다.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는 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지칭한다. 그러나 기업의 실권은 오래 전에 자본가, 즉 주주로부터 기업경영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퇴조하면서 시장경제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지만 현대경제사회는 독점적인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은 경제학 교과서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갈브레이드는 또한 소비자 주권이나 소비자 선택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진실을 호도하는 사기라고 말한다. 선거가 유권자들의 표에 의해 결정되듯이 시장경쟁의 승패는 소비자들의 구매 혹은 불매 결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가 TV보도나 유세 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듯이 소비자들은 기업의 광고 공세와 판촉 활동에 의해 그 이상의 영향을 받는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사기 형태의 하나이다.
갈브레이드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구별 역시 진실을 호도하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03년 미국정부의 재량적 지출액 가운데 절반가량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그 중 상당 부분이 무기의 구매와 혁신 및 개발에 쓰여졌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의 무기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국방부 관리들이 아니라 무기제조산업과 관련 기업들이며 미국의 국방예산은 그들의 로비와 이해관계에 따라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를 ‘군산복합체’의 폐해로 규정했다.
갈브레이드는 엔론을 비롯한 미국 대기업들의 충격적 비리를 언급하면서 “유익한 경제적 행위를 위한 경영진의 자율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율성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착복과 축재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 경영진의 권한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외견상으로 선량한 절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기업 경영진에게 특히 적절한 경고이다.
경제정책 빈번히 복지와 마찰
갈브레이드는 정부의 통화정책과 공공지출이 불황의 치유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경제정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신랄히 비판한다. “그 감동적인 역사에서 경제정책은 빈번히 경제적 복지와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도 그 명백한 영향은 간과되고 있다. 돈을 쓰지 않을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궁핍해진다. 정부의 공공정책은 불황을 외면한다. 경기회복은 정부의 정책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책의 말미에서 그는 “인류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는 잔혹성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각성을 촉구한다. “죽음과 무차별적 잔혹성, 문명적 가치의 유보, 혼란스러운 후유증 등 전쟁의 결과는 회피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 인간사회의 조건과 전망은 지극히 명백하다. 집단적 빈곤과 기아와 마찬가지로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경제적 및 사회적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인류의 결정적인 실패로 남아 있다.”
미국 경제학계의 중심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경제학자와 일반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석학이면서 98세로 타계할 때까지 줄곧 주류경제학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 온 갈브레이드의 명복을 빈다.
no.1
2미터 3센티 신장의 그는 문자그대로 큰 사상가였다. 경제학과 정치학의 얽힘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그는 한때 미국을 "행운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했으며 그의 사상은 린든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계획의 근거가 되었다. 그는 때로는 신랄하게 직설적인 기지로 유명한데, 한번은 "경제 예측의 유일한 기능은 점성술을 존중할만한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전환점이된 저서 '풍요한 사회'의 개념은 독자들 이후세대에 까지 너무나 널리퍼져서, "그것은 마치 햄릿을 읽고 그것이 인용구로 가득차있다고 결론내리는것과 같다""여러분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깨닫게 된다" 라고 노벨상 수상의 경제학자 아마타 센은 말했다
no.2
“불확실성의 시대”를 쓴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하버드대 명예교수인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 97)가 지난 4월 29일 9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무려 1세기의 삶을 풍미하며 진보경제학의 거두였던 갈브레이드가 남긴 족적을 살펴본다.
美 민주당 경제 입안 ‘대부’
“행운에 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기회와 준비’가 결합하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의 우상을 철두철미 집요하게 파괴해온 갈브레이드! 1908년 캐나다 온타리오 남부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갈브레이드는 1926년 온타리오 농업대에 입학하여 토론토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어 1933년에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석사를 1934년에는 농업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4부터 39년까지는 하버드대에서 1939년부터 42년까지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낸 갈브레이드는 1948년 다시 하버드대로 돌아온다. 1960년에는 인도대사로 부임했다가 3년 뒤에 재차 하버드대에 복귀하여 1975년 은퇴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경제학뿐만 아니라 경영학 ·역사학 ·사회학에도 박학다식했던 갈브레이드는 ‘올다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와의 두터운 친분에 힘입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부터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0여 년 동안 민주당 정권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동하며 미 행정부의 경제 운용에 깊게 관여했다.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등 무려 3명의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할 정도로 글 솜씨가 압권이었다.
1952년과 1956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애들라이 스티븐슨에게 경제학 시야를 넓혀주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과는 가재 요리를 함께 먹으며 경제 전반에 조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 재임시에는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입안하는 등 신뢰가 두터웠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견해가 상반되면서 결별했다.
미 경제 ‘모순과 치부’ 통렬한 비판
갈브레이드 교수는 50여 년간 ‘미국 자본주의’ ‘풍요한 사회’ ‘불확실성의 시대’ 등 33권의 다양한 저작을 발표하면서 미국 경제의 치부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었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은 갈브레이드를 농업경제학자에서 정부 개입주의자로 바꾼 운명적 계기가 됐다. 1937년 그는 대공황 대처론을 제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수요 이론’을 학습하기 위해 시카고대에 특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케인스와 동등하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유한계급론’의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런이었다. 그는 베블런을 ‘미국 역사상 가장 통찰력 있는 사회과학자’라고 칭송했다. 1899년 베블런의 첫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논리, 즉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하며,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 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란 가격이 오르는 데도 불구하고 일부 계층의 과시욕이나 허영심으로 인해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신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미 경제가 학교, 고속도로 등 공공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개인의 부만 만들어낸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해온 갈브레이드는 ‘개인’보다는 ‘공공’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역설했다 갈브레이드를 세계적 학자로서 바라보게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역저 ‘불확실성의 시대’의 출간이다. 1975년도에 출간된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는 지금까지도 베스트 셀러 중의 베스트 셀로로 많은 사람들의 애독서이다.
갈브레이드가 영국 BBC 방송에서 ‘불확실성의 시대’ 타이틀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집필된 이 책은 지난 2백 년에 걸친 경제의 변화상과 경제사상사를 당시의 역사와 연관 지워 다루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핵심 논조는 이러하다. 일찍이 지난날에는 사회경제체제하 지도 원리에서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철학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체계성을 갖고 사람들의 판단력을 위한 기준이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그처럼 확신을 갖게 하는 철학이 부재한데서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1952년 저술한 ‘미국 자본주의’에서 “광고의 현혹이 소비자들의 욕구를 과도하게 자극해 불필요한 상품을 소비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 과점(寡占) 기업들의 폐해를 비판했던 갈브레이드는 1958년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 출판으로 또다시 주목을 끌었다.
1999년 미국 도서평가위원회가 금세기 최고의 영어 논픽션 100권 중 46위로 선정된 ‘풍요한 사회!’ 이 책의 1996년 개정판에서 갈브레이드는 “빈곤층이 더더욱 공정 경쟁의 장에서 배제되면서 미국은 부자들만의 민주주의 국가가 돼가고 있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갈브레이드는 공산주의의 멸망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핵심키워드로 자본의 쇠락에다 또 하나를 내세웠으니 ‘자율과 개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갈브레이드 교수는 기업윤리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설파하여 왔다. “경제는 도덕이란 바다에 떠 있는 섬”이라며, 윤리와 도덕 위에 토대를 두지 않는 경제발전은 사상누각일 뿐이란 것이다. 마치 최근 현대자동차의 비자금 사건을 생생히 예견한 듯만 하다.
no. 3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역대 민주당 소속 대통령들에게 ‘경제 교사’로 불렸던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Galbraith)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97)가 매사추세츠주의 자택 근처 병원에서 29일 숨졌다.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인 갈브레이드 교수는 1948년 하버드대 교수로 임명됐으며, 루스벨트·케네디·존슨·클린턴 등 미국 대통령들에게 경제를 가르치고 정책 조언을 했다. 그는 각종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개입을 지지했다. ‘미국자본주의’ ‘풍요한 사회’ ‘불확실성의 시대’ 등 33권의 저서를 남겼다.
no. 4
`불확실성의 시대` 저자 갈브레이드 사망
<!--기사본문-->
[이데일리 국제부]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가 사망했다. 갈브레이드는 29일(현지시간)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의 한 병원에서 9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태생으로 1943~48년 '포춘'지 편집위원, 1949~61년 하버드대학 교수, 1960~63년 인도대사를 역임했다. 1963년 하버드 대학 교수로 복귀한 뒤 민주당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로써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불확실성의 시대`를 비롯해 모두 33권의 저서 출간하며 경제학 역사상 가장 명성을 떨친 저자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1958년에 저술한 `유복한 사회`(The Affluent Socieyt)는 영어로 쓰여진 책 가운데 비소설부문에서 '세기의 100대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5년도에 출간된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는 지금까지도 베스트 셀러로 남아 있다. 갈브레이드가 영국 BBC 방송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동명의 제목으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집필된 이 책은 200년 간의 경제사와 경제사상사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 책으로 현대사회에는 확고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경제철학이 부재한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미국의 진보 경제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케네디 대통령을 거쳐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50여년 동안 민주당의 경제정책에 관여했었다.
갈브레이드는 2004년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결백한 사기의 경제학`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를 출간하며 말년에도 식지않은 경제학의 열정을 보여줬다. 이 책에서 그는 시장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통화정책의 유용성, 기업 지배구조의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통적인 경제 원칙에 회의를 표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갈브레이드의 임종을 지킨 그의 아들 알란 갈브레이드가 "아버지의 심리적인 상태는 아주 좋았으며 운명의 순간까지 곧은 자세를 보였다"고 임종의 순간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no. 5
'불확실성의 시대' 저자 갈브레이드 사망
<!!--bodystart-->[이데일리 국제부]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가 사망했다. 갈브레이드는 29일(현지시간)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의 한 병원에서 9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태생으로 1943~48년 '포춘'지 편집위원, 1949~61년 하버드대학 교수, 1960~63년 인도대사를 역임했다. 1963년 하버드 대학 교수로 복귀한 뒤 민주당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로써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불확실성의 시대`를 비롯해 모두 33권의 저서 출간하며 경제학 역사상 가장 명성을 떨친 저자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1958년에 저술한 `유복한 사회`(The Affluent Socieyt)는 영어로 쓰여진 책 가운데 비소설부문에서 '세기의 100대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5년도에 출간된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는 지금까지도 베스트 셀러로 남아 있다. 갈브레이드가 영국 BBC 방송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동명의 제목으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집필된 이 책은 200년 간의 경제사와 경제사상사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 책으로 현대사회에는 확고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경제철학이 부재한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미국의 진보 경제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케네디 대통령을 거쳐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50여년 동안 민주당의 경제정책에 관여했었다.
갈브레이드는 2004년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결백한 사기의 경제학`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를 출간하며 말년에도 식지않은 경제학의 열정을 보여줬다. 이 책에서 그는 시장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통화정책의 유용성, 기업 지배구조의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통적인 경제 원칙에 회의를 표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갈브레이드의 임종을 지킨 그의 아들 알란 갈브레이드가 "아버지의 심리적인 상태는 아주 좋았으며 운명의 순간까지 곧은 자세를 보였다"고 임종의 순간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자료출처/인터넷 웹문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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