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치킨 (한봉희, 67세, 80년부터 34년 영업)
요즘이 지금까지 영업해온 중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된다. 젊은이들의 인터넷 활용이 일상화되고 블로그나 휴대폰으로 실시간 자신의 생활을 공개하면서 저절로 맛집으로 광고가 되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옛날에는 눈비 올 때 나들이 나오는 낭만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런 낭만이 없다. 다만 음식을 집에서 안하고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경향이 많다.
처음에 튀김장사를 3년정도 하다가 치킨을 하게 되었다. 80년도 연탄을 이용하던 때 3천원, 석유 버너 사용후부터 계속 상승하던 치킨이 현재 후라이드 치킨 한마리 1만5천원(작년까진 1만3천원)이다. 그러나 양은 체인점의 배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요리도 추가하여 남녀노소가 어울려 같이 먹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학교에 주문이 있어 한꺼번에 300마리를 판적도 있다. 작년부턴 카드 매출 확대로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손님과 친숙하고 친구들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천주교 봉사도 열심히 하여 손님이었던 분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도 있다. 매일 가게에 나오는 까닭으로 건강유지는 낭월동 집에서 10km를 달려 가게에 나오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아주 착한 사람 이혼하고 혼자 애 키우는 모습, 오래 사귀다 혼자 폐백닭 준비하는 모습, 가난하고 배고팠던 학생이 취업하고 15년만에 장미 다발 선물을 해 왔을 때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많이 주고 실컷 먹게 밥까지 갖다 주고도 가진 돈이 부족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던 적도 있다. 안지사도 검정고시때 왔다고 하고 운동선수, 교수 등 지금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대학원출신 아들부부에게 치킨업을 권해서 작년부터 낭월동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오늘날 중앙시장에서 가장 잘 되는 가게는 구제집인것 같다. 몇십군데의 구제집이 성업중이다.
중앙키 (정봉래, 83세, 25세때인 1958년부터 현재까지 55년간 영업)
1. 4. 19 이전 1958년 25세쯤부터 영업을 했다. 6.25사변후 드럼통을 주워 깎아서 열쇠를 만들었다. 그때 열쇠, 가방 장인들이 현재 짝퉁 기술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한국은행 금고도 취급한 적이 있다. 경찰 보안대 정보국 경찰청 회원이기도 하다. 현재는 고문이다.
2. 일본에서 태어나서 1달 되었을때 대전으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4.19전쯤에 비닐 가방으로 교체 되어 성행하였고 그전엔 전부 가죽 가방이었다.
당시 집안 종손으로 객지에 나가지 못하게 어른들이 잡아서 대전에 있게 되었다. 가게는 은행벽에 덧대어 50cm를 점유하게 허용 되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7-8년전 화재로 바로 옆 가게까지 불길이 삼켰다. 그 때에 옆가게까지 모두 다시 정비를 하면서 가게 면적을 그 전보다 조금 더 점유할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중앙 주차장 자리에는 중앙극장이 1937년에 생겨 2004-5년까지 있던 자리이다. 당시 대전의 중앙통이 이 곳이었다. 그 후 중앙통은 은행동 문화의 거리쪽으로 옮겨 갔다가 둔산쪽으로 넘어가면서 이 거리는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열쇠 만드는 기계가 가격이 낮아지면서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1998년 정도부터 열쇠 기술의 대중화 시대가 되었다. 현재 번호키가 일반화 되고 기계도입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70년대 대전에 6명정도이던 열쇠공이 현재는 1천명 이상이다. 그러나 지금도 열쇠를 모두 잃어버렸을 때 자물쇠를 분해해서 열쇠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20명 남짓밖에 안된다.
재질로 봤을 때 금강제품이 다른 제품에 비하여 3분의 2정도 가격이 더 비싸다고 할 수 있다. 금강은 절단기로도 자르기 힘든 제품이라 할 수 있다. 절단기는 원래 등록자만 소지가 가능하지만 현재 누구나 구입해서 쓰고 있는 실정이다.
3.
4. 그동안 기억에 남는 일은 애기 잠자고 있는 집 문을 열어 준 일, 기관의 금고 열쇠 만들어준 일, 한국은행 금고 열쇠 만들어준 일 등이다. 그 후 한국은행 금고 출입가능인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털어도 먼지 안나는 순수인이라는 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신원, 사상면에서는 말이다. 생질의 신원 조회시 1등을 할 정도이다.
옛날 오래된 열쇠는 남아있지 않다. 골동품 수집상들이 수시로 와서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5. 대흥초등학교 4회 졸업생이다. 12남매중에 8번째이다. 전쟁 폭격시 허리를 다쳐 후유증이 있으나 지금도 20년 이상된 기계와 함께 자식들에게 부담되지 않고 스스로의 생활비정도는 하고 있다.
문화빵 (황의택, 아버지78세, 아들 44세)
아버지는 시계 수리일을 하다가 42세쯤부터 빵을 만들었다. 아들은 작년부터 2년째 아버지일을 도와주고 있다. 아버지는 팥빵만 하다가 지금은 땅콩슈크림빵도 같이 한다. 아들이 도와주면서 국화빵도 추가했다. 그리고 포장지는 종이에서 비닐 포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틀까진 처음 만들었을때 맛을 유지하고 냉장상태로 1주일은 가능해 전자랜지에 1분이면 처음 맛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냉동 상태로는 두달도 가능하다. 처음에 중앙시장내에서 식당도 했는데 그 식당 앞에서 하다가 여기로 오게 되었다. 빵의 비법은 아버님만 가지고 있다. 아들의 전수 결심 이전엔 절대 반죽 노하우를 물려 주지 않겠다고 한다. 가격은 한 개 50원에서 다섯 개 1천원으로 변하였다.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힘들지만 7년째 그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