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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의 백성들이 그곳에 함께 있었기에
"제2차 진주성전투"는 더욱더 기억되어야 합니다.
괜찮아요.
그대와 함께였으니...
누구 한사람
"된다, 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았지만
도움의 손길 하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함께 했잖아요.
끝까지 싸웠잖아요.
똑같은 상황이 또 온대도
달라지진 않을거예요.
그대가 함께니까...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요.
죽음도 우리 앞길을 막을수는 없어요.
혼자는 두렵지만
그대가 함께니까 난 괜찮아요.
_제2차 진주성전투, jiri-깽이 恩敬 아름다운 나의 이야기_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사실 내 안의 두려움이요.
'안된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포기하는 것입니다.
작은 결심의 바람 한 줄기가...
깍지 낀 가녀린 손길 하나가...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해보지도 않았잖아요.
그때 해보기라도 하지 그랬어요.
한 번 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게!
2021년 10월 23일(토)
남해안5구간 사천 지역 해안길을 걸으며
남해안길과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그땐 마음으로만 가 닿았던
진주의 진주성과 남강
어떨까? 어떤 곳일까?... 내내 궁금해서...
잠시 짬이 난 김에 홀로 가벼이 찾아가 봤습니다.
사실 진주성전투라고 하면 김시민장군과 논개 정도로만
너무나 얄팍했던 제 머릿속 편린들...
이번 남해안 걸음 덕에
"제2차 진주성전투"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고
왜? 왜? 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물음표가 따라 붙더라고요.
그래서 진주로 가서 조금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봤습니다.
10월의 끝자락인데
길가에는 철모르는 벚꽃이 피어 있었구요.
아~ 이 꽃을 보니 한떨기 꽃처럼 적장을 품에 안고 남강물에 뛰어들었던
논개의 치맛자락이 이랬을까 싶어졌습니다.
또, 하늘은 어쩜 그리도 눈부실 정도로
샘날만큼,
고약스럽게도 파랗던지...
너무 아름다운 지금의 이곳.
진주가 이런 도시였었구나...
진주역에서부터 어떤 모습들과 마주치게 될지...
기대를 안고 그냥 무작정 걸었어요.
경상국립대학교를 지나고
터널도 이렇게 하나 지납니다.
주약동 마을 계단을 올라 이제는 산으로~
망진산에 오릅니다.
인근 높은 곳에서 진주성과 남강을
가장 먼저 만나 보고 싶었었거든요.
^^
그래서 찾아본 곳이 이곳 망진산.
망진산(望晉山)은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다 하고요.
'진양지'에는...
“망진산은 주(州)의 남쪽 강변을 넘어 6리에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망진(望晉)은 곧 망진(網鎭)이다”라고 기록
[망진(望晉) : 바랄망+나아갈진, 망진(網鎭) : 그물망+진압할진]
근데 저는 망진산이라는 이름에서
높은 곳에서 망을 본다~ 진주 땅을 내려다보며~
그래서... 망진산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싶었었는데...
사실 이 아래 봉수대도 있구요.
망진산 정상에서 진주성은 나무에 가려 보이질 않더라고요.
근데 뜻하지 않게 득템~
오예^^~ 저게 뭐꼬???
지리산이... 어찌나 반갑던지...
계단 따라 내려가다 만난 봉수대.
망진산 봉수대는 진주 8경 중 제5경.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적의 침략을 알렸던 통신수단
진주목사가 주관하구요.
보조 봉수로 남해 금산, 사천 안점의 봉수를 받아
명석 광제산 봉수대로 전달~
진주 망진산 봉수대는 통일의 염원을 담아
백두산 돌, 한라산 돌, 지리산 돌,
독도 돌, 진주의 월아산 돌을 모아
기단에 두었고
금강산 돌은 통일이 되는 날 두기로 했다고 합니다.
한 칸이 비어 있네요.
드디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천수교와 진주성이 보입니다.
서쪽 끝에 위치한 서쪽 문의 지휘장대 서장대.
진주성... 이곳에서 보니 평지는 아니고
살짝 언덕처럼 솟아올라와 있는 곳이었네요.
남쪽에는 남강이 자연 방어를 해주고 있고.
천수교로 바로 건너지 않고,
진주성 맞은편으로 와서 바라보며 천변을 가만히 걸어 봅니다.
지금은 강물이 많이 없어 바닥이 보이지만...
1593년 6월 22일~6월 29일까지인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에는 물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양력으로는 7월 중순 이후가 되니
비가 많이 왔겠고, 물이 많이 불어있었겠네요.
촉석루(矗石樓)
이곳이 바로, 전쟁시 중앙에 위치했던 지휘본부였습니다.
바로 저 곳에서
우리 조선군 장수들이
9일 동안 분전하며 잘 버텼지만
총사령관이었던 황진 장군이 전사하고
이후 진주성이 함락되며
결국 몇몇 장수들도 저곳에서 남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창의사 김천일 장군은 아들과 함께,
벼랑끝까지 몰렸던 논개의 지아비 최경회 장군도,
김해부사 이종인 장군은 왜적 두놈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나 김해부사 이종인, 여기에서 죽는다.”
라고 외치며 남강에 뛰어들었고.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에 위치, 남장대(南將臺)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鄕試:初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임진왜란 당시의 장수였다면...
나는 과연 고민하지 않고 기꺼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는 권율, 선거이, 곽재우처럼
내 휘하 장졸들의 목숨이며
내 한 목숨 보전코자
임금의 명을 거부하고, 상관의 명을 거부하며
비겁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진주대교구요.
이곳에 논개의 열 손가락 반지~가 숨어 있었네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이곳 남강물에 투신한 논개.
손가락이 풀어지지 않게
반지 낄 생각을 어찌 했을까요?!
논개는 철저하게 다~ 계획이 있었네요.
이것만 봐도 그냥 보통의 조선시대 여인이 아니었던게지요.
최경회 장군이 그녀의 이런 떡잎부터
진작 알아봤던건 아니었을지...
사실 저도 진주 하면 논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저는 오늘, 저 문으로 들어가 보려구요.
가장 먼저 뚫린 쪽도 바로 평지에 가까웠던 동쪽이었고
아무래도 비탈진 곳보다는
뚫고 들어가기가 동쪽이 수월했겠지요.
임진왜란 당시에는 촉석문 밖으로
진주대교 동쪽까지도 크게 성이었습니다.
왜란시 기존보다 성을 더 넓게 동쪽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고
5일째까지는 조선군이 선전하며 잘 싸우며 버텼지만
6일째 되는날 장마비가 내렸고
이후 싸움에서는 비에 우리쪽 화포 등
불화살이 힘을 못쓰며 전세가 흔들~
7일째 귀갑차 공격으로 약해진 동문쪽이 뚫리며
하루종일 공격이 이어졌고
성 밖 시신 더미에 숨어있던 적의 총구... 탄환이
8일째, 종횡무진 활약해왔던
총사령관 황진 장군에게 맞아 그대로 전사ㅠㅠ
평지쪽으로 늘려놨던 동쪽 성벽이 무너지며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입~
9일째 북문마저 적이 넘어,
결국은 진주성이 함락 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의 반 이상으로 줄어든 작은 규모
내성 안쪽만 복원, 보존되고 있는 상태~
진주대교 건너며 내려다 본 남강 물~
헉! 진주 남강 물 왜 이러노???
지금도 진주 시민들에게는 으뜸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님~
그 영향력은 시대를 초월하고.
우리가 기억해야할 장군님은
김시민 장군님 외에도 있었거늘...
호남으로의 길을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을 했던 이곳 진주
진주 그 땅 중에서도 들여다보지 않고는
그냥 지나갈 수 없었던 진주성
임진왜란 당시의 성 모습보다는 축소가 됐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성보다 참 많이 작았습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진주성으로 들어왔던 인근 6만의 백성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웠던
타지역의 장수와 군사들
제2차 진주성전투 임진왜란(1592년 4월) 발발 1년 후인
1593년 6월 22일~ 6월 29일
병력으로는 6천 & 9만 3천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자면
일본에 얼마 만큼의 타격을 입혔었는지가 또한 중요하겠지요.
1차 김시민의 진주대첩(1592년 10월6일~10일)에서는
3천8백 명의 진주성내 조선군과
진주성 외곽에 3천7백 명의 지원군이 수성에 큰 도움
5일간 버티며,
2만의 적과 싸워 대승을 거뒀구요.
권율의 행주대첩(1593년 2월 12일)에서는
12시간을 버티며
조선군 수천의 병력 대 3만의 적과 싸웠습니다.
이곳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무려 9일을 버티며
(비록 폐전이기는 했지만)
조선 병력 6천 대 일본군 10만과 대치하며
임진왜란 중 최대 수 3만5천~4만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습니다.
일본군의 시신이 성 주위로 얼마나 높이 쌓여 있었을지...
한여름이라 또 냄새는 얼마나 났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자~동쪽 문인 촉석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해 10월 나가오카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 대군이
진주성에서 김시민 장군과
인근 주둔 중이었던 곽재우, 최경회 등
의병들에 무참히 깨지며 참패
김시민 장군은 이 전투 마지막날 맞은 탄환 때문에
진주성전투 승리 며칠 후 숨을 거두었고.
(당시 일본은 김시민 장군이 전사한 것도 모름)
그때, 김시민 장군 나이 38세였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였었네요.
일본측에서는 1차 진주성전투 패전 이후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지요.
"진주 목사 김시민 어디 두고 보자~
우리 일본군에게 이런 굴욕을 안겨주다니..."
하륜의 <촉석루기>에 따르면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에
누의 이름을 촉석이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촉석루는 6.25 때 불탔던 것을 1960년에 재건~
제2차 진주성전투로 성이 함락되고
일본군들은 바로 이곳에서 승리 축하 연회를 펼쳤었지요.
고즈넉한 이 누각의 담장 안과 밖에서는
하세월이라~ 언제부터 있던 나무인지
모과가 노랗게 노랗게 익어가고~
우리나라 3대 누각
_남원의 광한루 _밀양의 영남루 _진주의 촉석루
진주의 촉석루는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촉석루에 올라 남쪽 방향 조망~ 망진산도 보이네요.
지리산, 남덕유산 골짜기에서부터 흘러온 남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그 위로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반짝 소곤소곤~
무슨 할 말들이 그리들 많은지...
가을 바람도 살랑살랑~
지금이 바로 호시절입니다.
사람들은 촉석루 햇빛이 드는 곳에 앉아
이 평화로움, 이 자유의 따뜻함을
흠뻑 온몸으로 맞고 있습니다.
양지바른 마룻바닥이 열기를 받아서
따뜻하고 엄청 기분 좋더라고요.
촉석루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의기사(義妓祠)
제2차 진주성전투 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해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영조16년(1740)에는 사당인 의기사를 세웠습니다.
논개야 '기생'이니 뭐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다할지 모르겠지만
최경회 장군은 자신의 부인이 기생이라 불리는 걸
참 못마땅해할 듯 합니다. 싫어할 거 같아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의암바위 보러 내려가니 한쪽에
'의암사적비'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이 있더라고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
사적비에 적혀 있다는 시
논개는... 그저 여인이었어요.
누군가의 사랑 받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꽃다운 조선의 한 여인...
논개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義巖).
이전에는 주변 물결이 거세어서 위험하다는 의미로
위암(危巖)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조 7년(1629)에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구요.
저는 잡아줄 사람이 없어서 의암에 못 올라가봤어요.
제가 허공 뛰어넘는 걸 쫌 무서워~해서...
ㅠㅠ
저 꼬마는 아빠가 잡아주니 껑충 뛰어 넘더라고요.
근데 논개는 고무신 신고 치마 입고
어찌 저 의암 바위 위로 뛰어넘어 올라갔을까요?
죽음을 앞두고 무서울게 없었던 것이었으려나요?!
ㅠㅠ
그냥 이런 곳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에
화가 나고...
아주 콩알만한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촉석루와 의기사, 의암 둘러보고 나오니
진주성 옛날 사진 몇 점이 전시되어 있더라고요.
자료화면으로 쓰려고 찍어왔죠^^
지금 돌담으로 되어 있는 성벽이
그냥 언덕 흙으로 된 성으로 보입니다.
쌍충사적비는
일명 제씨상충비(諸氏雙忠碑)라고도 부르는데
반가운 이름이 보이네요. 제말 장군^^
임진왜란 때 크게 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 장군의 충의를 기리는 비
제말장군은 의병을 일으켜 웅천, 김해, 의령 등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고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조카 제홍록 장군도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셨다고 하고요.
남해안길 걸으며,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던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있던 볕이 좋았던 제말 장군님의 묘
그곳에서 돗자리 깔고 잠시 쉬었다 왔었는데...
^^ 아, 그때 기억이 납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우물이라고 하고요.
성내 식수 공급원 역할을 했습니다.
공북문 안으로 들어오면 이 우물이 보입니다.
<진주성도>에는 총 3개의 우물이 표시되어 있대요.
복원해 놓은 건 이거 1개.
진주성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문인 공북문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으로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라는 의미로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을 표한다~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으로 주 출입문되시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이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더라고요^^
영남포정사 문루(門樓)는
진주성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렸습니다.
미(美)는 미인(美人)의 준말로
망미루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라는 뜻
조선시대 말엽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관아인
영남포정사의 정문.
광해군 10년(1618)에 경상우병사 남이홍이 처음 세웠고
고종 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고종 33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청사의 정문으로 사용.
여기에도 하마비가 있네요.
병사 및 관찰사 이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가라는 표시입니다.
관찰부의 정문인 영남포정사 입구에 있어요.
진주성 북쪽 지휘소인 북장대는 공사중이더라고요.
북장대는 진남루(鎭南樓)라고도 부르고요.
북장대는 내성(內城)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습니다.
북장대 성곽 아래로는 제법 낭떠러지~
성 밖이며 성내와 외성(外城)의 병사들까지
지휘할 수 있었던 누각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
내성의 포루는 3곳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
외성의 포루는 9곳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3읍 소속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며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해 놓았다고 합니다.
***
임진왜란 때 1592년 제2차 진주성대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킨 분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창렬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를 지나고
김시민 등 39명의 신위를 모셨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하며
원래 내성사(內城寺)라고 했는데
고려 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이 절을 창건~
임진왜란 때 승군의 근거지라고 합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임금이 호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서장대로 올라가는 성곽과 계단, 그리고 서문.
진주성 서쪽 끝의 지휘 장대
누의 이름은 회룡루(回龍樓)이고 다락집
진주성 서쪽 끝 서장대에서 바라본 남강과 망진산의 모습~
이렇게 진주성을 한 바퀴 둘러보고
성내에 국립진주박물관에 잠시 들러봅니다.
임진왜란 당시 세계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동영상 속에서... 나온 문구 한 줄.
<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아시아의 운명을 바꾼 하나의 세계대전이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시작은...
도요토미의 공명심과 정복욕,
영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해외의 영토 확장 야욕
영주들의 군사력을 잠재워 체제의 안정 모색
이런 복합적인 원인이
인근 조선 땅에서의 전쟁을 만들었습니다.
남원성(1597년 8월 12일 남원성전투)이 함락되고
일본군들은 닥치는대로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죽이고
코를 베었다고 했었지요.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금구와 김제 지역에서 절취한
조선인의 코 3,369개에 대한 일본군의 증빙 보고서래요.
조선인을 죽이고, 그 증거물로 코를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가 상하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고.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갔던 나쁜 일본군들
나쁜 짓 많이 하면
용서받지 못할 짓 많이하면
천벌 받는겨.
"에비!"
어릴 때 그런 소리 많이 들어봤지요.
근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사 알았어요.
아이들이 위험한 행돌을 하려고 할 때 "에비~"하며
겁주는 소리로
귀와 코를 뜻하는 한자어인 이비(耳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요.
아~ 이렇게나 무서운 말인줄
진짜 몰랐었네요.
조선 땅 곳곳에 왜성의 모습들
지난번 구간에서 다녀왔었던 야밤 반딧불이가 노닐던
순천 왜성의 모습 사진도 있더라고요.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후방에 거점을 확보하고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쌓은 성들로...
1592년 4월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바로 점령지를
방어하고 물자 보급을 위해 부산 왜성을 쌓기 시작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이 되자
남해안 일대로 후퇴한 일본군은 경상도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중요 지점에 왜성을 축조하고
장기전에 돌입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직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기존 왜성을 점령하고
울산에서 순천에 걸쳐 새로운 왜성을 축조
왜성은 선박이 출입하기 쉬운 바다나
큰 강이 가까운 구릉지에 세워졌고
이는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이런 왜성은 외곽에 해자를 비롯한 여러 방어 시설을 두고
높이가 여러 단이나 여러 겹의 곽을 배치한 구조.
하나의 성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방어에 효율성을 높인 것이 특징입니다.
진주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로
일본군이 곡창 지대인 호남으로 가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
그리고, 제2차 진주성전투는...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김시민에게 참패 당한 쌓인 복수도 한몫 거들었었지요.
이 때문에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1차 전투는 1592년(선조25) 10월5일~10월10일까지
조선수성군 3,800명이 일본군 2만여 명을 맞아 승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체계적인 지휘 체제를 형성했고
전라도 최경회, 임계영, 경상도의 곽재우, 윤탁, 최강 등
3~4천 명의 지원군이 후방에서 지원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내의 수성군과 지원군의 일심단결 콜라보~
명과 조선군이 연합 평양성을 탈환하며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명군은 개성을 함락한 뒤 전진을 서두르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일격을 당하자
일본과 강화 협상에만 골몰~
전쟁이 지속되면서
조선.명.일본 모두 병력 손실과
군량 부족 등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명과 일본은 강화 협상을 진행
일본이 명에 무리한 요구를 하며
강화 협상이 지지부진~
결말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전투가...
2차 전투는 1593년 6월 22일에서 29일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본군의 1차 진주성 전투의 참패를 만회하고자
보복 전투가 대규모로 전개되었던거죠.
"김시민의 목을 가져와라"
"생명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살려두지 마라"
"진주성을 꼭 함락하라"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 장군들이란 장군은 모두 출동명령 앞세워
일본 10만의 대군과 강력한 화력으로 물밀듯 공격
당시 진주성 조선군 병력은 기껏 6천 명에 지나지 않았고
명군과 의병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
진주성의 조선군을 지휘하던 총사령관 황진과,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이종인, 서예원 등
죽음으로써 진주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지만
잘 싸우며 일본군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면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지만
끝내 진주성은 도움의 손길 없이 열흘을 넘기지 못했고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진주성전투 총사령관이었던 황진 장군(43세)과
꽤나 연로~ 노장이었지만
죽을 자리인줄 알면서도 함께했던 당시의 김천일, 최경회의 모습.
이순신 장군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듯 해요.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황진 장군님이 어떤 분이셨냐~ 하면요.
황진은 황희정승의 5대 손으로 1550년 남원에서 태어났구요.
1576년 무과에 급제 후~
황윤길, 김성일의 조선통신사 행렬에 선전관으로 동행
일본 동향을 살폈었습니다.
일본에 갔을 당시...
일본 측에서 자신들의 무예 실력을 과시하려~
활쏘기를 했는데
황진이 그 곁에 더 작은 과녁을 놓아 명중시키고는
연달아 두 발의 화살을 쏘니
지나가는 새 두 마리가 한꺼번에 떨어지더랍니다.
황진은 그렇게 젊은 시절부터 주위를 놀라게 했을 정도로
이미 무예가 출중했던 인재~
김성일은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반면
황윤길은 조만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했고
황진도 황윤길과 생각이 같았으므로
일본에 다녀온 후, 전쟁에 대비해 매일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 바로 용인전투(6월4일~6월6일)에 참여해
그의 부대만 온전히 살아서 이끌고, 전주 권율 부대로 합류.
그리고 이어진 웅치와 이치 전투.
사실 이 전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잘 몰랐었구요.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이라고들 말하잖아요.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3대 전투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웅치+이치 전투”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본인들에게는 가장 뼈아팠던 전투.
일본이 순조롭게 조선을 장악해가던 중
호남지역인 전주로 입성을 목전에 뒀고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식량을 확보하고
남해를 지키던 이순신을 고립시키며
수륙병진 작전을 위해 꼭 호남(전주)이 필요했던 게지요.
일본의 고바야카와 다카카케,
모리 가문의 승려였던 안코쿠지 에케이
임진강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남하한 고바야카
***
1592년 임진년,
부산(4/13)~상주(4/25)~충주 탄금대(4/28)~한강(5/2)까지 함락~
드디어 이순신 장군이 움직이며 활약하게 되었고
옥포, 합포 해전(5/7)을 시작으로 적진포(5/8)~
해유령전투(5/16, 부원수 신각 경기도 양주 육지 사실상 첫 승리)
사천(5/29)~당포(6/2)~당항포(6/5)~
용인전투(6/5)
***
웅치(7/7), 이치대첩(7/8)은
(이 7/7일, 7/8일 이어진 날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
며칠의 차이가 있다고도 합니다.)
진주대첩(1592년 10/10)이나 행주대첩(1593년 2/12)보다
임진왜란 육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첫 전투로 기록.
지금의 마이산과 운장산 사이의 고개였던 웅치고개(곰티재)
1592년 7월 7일 웅치에서 1선, 2선
김제 군수 정담, 나주 목사 이복남의 조선 군대가
일본 안코쿠지 군대에 무너지며
뒤로 밀립니다.
정담은 부하 장수가 후퇴를 권했음에도 남아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 없다.“며
끝까지 활을 쏘며 저항, 결사 항전하다가 전사
나주 판관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여리 떨어진 안덕원까지 밀리며 후퇴했습니다.
이때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었던
황진 장군이 도착했고
일본의 배후를 기습 공격해
일본군은 그대로 줄행랑~ 후퇴하게 됩니다.
전주성 함락이 바로 코 앞, 목전이었는데...
황진장군의 군대 덕에 안덕원에서 다행히 전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웅치전투라기 보다는 안덕원전투에서 승리였던게지요.
황진 장군은 바로 남은 병사들을 모아
운장산과 대둔산 사이 이치고개(배티재) 권율 장군에게로 갔습니다.
연려실기술에는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며 쓰러지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이치 전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안이라는 일본승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 이치 전투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의 황진 장군의 공을
최고로 꼽았습니다.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히
호남 땅을 공격하지 못했다고 하니...
황진 장군의 종횡무진 활약 덕분.
웅치 이치에서의 공을 조정에서도 인정받아
이후 전례 없던 파격 승진에 승진.
1593년 6월 7백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진주성으로~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당시 진주성주도 아닌 충청병마사 황진장군은
진주성의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누구보다도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움에 임하며
진주성 방어 철벽 수비, 싸워 지켰습니다.
25일에는 직접 의관을 벗어던지고
백성들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에 맞서 싸워 격퇴
28일에는 적이 공격해오자
직접 지휘, 대승을 거두며 적의 시체가 성 밖에 쌓여갔고
이날 쌓였던 셀 수 없이 많았던 적의 시신 더미
성벽 밖 적 동향을 살펴보던 황진 장군에게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 병사 한명이 총을 쏘았고,
이때 황진 장군은 왼쪽 이마를 관통당해
즉사하면서 전사하게 됩니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_선조수정실록 27권_
바다에 용장 이순신 장군님이 계셨다면
육지에는 최고의 용장 황진 장군님
하지만 이렇게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웠음에도
이런 황진 장군님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젊은 나이 43세 한순간에
이곳 진주성에서 스러져 간 우리 황진 장군님
이긴 싸움만 최고라 여기는 역사의 폐단
권율 장군 역시 호남을 사수했던 이치전투의 승리를
행주대첩보다 우위로 쳤다고 합니다.
웅치, 이치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곳곳에서 이어진 항쟁으로 퇴각했으며
평양에서 군량 지원을 기다리던 고니시 또한 발목이 잡히게 됩니다.
전라도 호남 땅이 이렇게 지켜지며
우리 아군에게는 군량 보급과
홀로 남해를 지켜냈던 이순신 장군님에게
큰 힘을 실어주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임진왜란의 전반기 일본군에 밀리던 전쟁 양상은
조선에 유리하게 바뀌었고^^
이치 전투의 공로로 황진은 훈련 부정으로 승진
정철이 남쪽 지방을 시찰하다가 이 전투에 관해 알아보고는
격문을 다시 올려
익산 군수(종4품)겸 전라도 조방장(전라도의 군직을 맡는 부장)
통정대부(정3품, 당상)로 승진
이후 공이 더해지며
절충 장군(정3품)겸 충청도 조방장 승진,
1593년 봄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으로 또 승진~
당시 이순신 장군의 품계를 보자면
전라좌수사 정3품 --> 정2품이었던 삼도수군통제사
단, 1단계 상승
이 단기간의 거듭된 승진 사실만 보더라도,
황진 장군님이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을지
자명하네요.
*****
1593년 6월 22일 시작된 제2차 진주성전투
그 소수 6천 병력과 일본군 10만 싸움
진주성 내 6만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치열했던 싸움
25전 24승 1패
단 1패였습니다.
하지만 이 제2차 진주성전투로
10만 일본군 중 직접 싸움에 가담했던 전투 병력 중
3만5천~4만 가량이 죽어나가며 병력손실 초래
너무나도 크게 타격을 입었던 일본군 전투력 상실.
이로써 임진왜란 전반기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쟁은 4년간 휴전기로...
아~ 그 이름난 명장인 권율, 곽재우 장군이
명에 따라 진주성 안으로 들어왔더라면...
아니 밖에서라도 기습 지원이라도 적시에 좀 해줬었더라면
또한 명나라가 뒷짐 지고 한 발 빼고 있었기에...
결국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이름난 다른 장군들은 왜 미리부터 포기했을까?
왜 처음부터 지레 겁 먹고 아무것도 안했을까?
뭐라도 좀 해보고 결국 어쩔 수 없었을 때
포기는 그때해도 늦지 않았을텐데...
ㅠㅠ
이 아쉬움은 두고두고 남을 것 같습니다.
진주 의기사(義妓祠) 안에 영정 사진으로 있었죠.
윤여환이 그린 논개초상으로
2007년에 표준 영정으로 지정 받았습니다.
기존 김은호의 '논개상'이 작가의 친일논란과
복식의 고증 논란으로 인해
16세기 여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을 고증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윤여환의 그림으로는
그 유명한 유관순 열사 영정 및 박팽년 표준 영정 등이 있습니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하는데...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논개는 성은 주씨(朱氏)이고 양반가의 딸로
아버지가 죽고 살림이 어려워지자
후에 어찌어찌 사연으로~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첫번째 부인이 죽고
어엿한 안방마님 후처가 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한성마저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니
전라도 지역 의병 고경명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웠고
경상도에서도 진주성만이 남아
김시민장군 1차 진주성전투로 왜적과 싸우고 있었으니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
1593년 경상우병사가 된 최경회는
제2차 진주성전투에도 함께하며 남강에 투신하며 자결~
7월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는 촉석루 연회에서
기생으로 몸단장한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드니....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사자성어는
최경회와 논개를 이름이네요.
나갈 때는 주 출입문이자 정문인 공북문(拱北門)으로~
주차장도 넓고 좋더라고요.
예전 진주성 모습 지도 정리해 봤구요.
제2차 진주성 전투 우리 지휘군과 병력수(자료 찾아서 첨부)
일본의 지휘군과 병력수 편집해서 올려 봅니다.
조선의 진주성 내 6천 병력 & 왜군 병력 9만 3천(10만)의
제2차 진주성전투
1953년 6월22일~6월 29일
임진왜란 모든 전쟁 통틀어
가장 큰 타격을 일본에 입혔던
이후 일본의 전투력을 상실케 만들었던 전투
그곳의 선봉장이었던 우리의 황진 장군님.
당초에 공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
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_국조인물고_
“황진 장군이 살아계셨다면
진주성은 보전되었을 것이다.“
황진 장군이 죽고 살아남았던 백성이
했던 말이라고 하네요.
그랬었더라면... 그런 아쉬움은 이렇게 남아...
43세의 젊은 나이에도
기꺼이 죽을 자리 진주성에 들어갔던...
기습으로 일본군 허를 찌른 웅치전투,
빼어난 활솜씨로 많은 적을 쓰러뜨렸던 이치 전투에서
(1592년 7월 웅치, 이치 전투)
일찍이 용맹 무쌍함을 보이며 파격 승진했던
황희정승의 5대손
충청병사 총사령관 황진 장군을 기억해봅니다.
동쪽 가장 열악한 곳에서 힘써 싸운
김해부사 이종인 장군을 기억하고,
관군·의병의 지휘관인 도절제(都節制) 창의사 김천일,
논개의 지아비였던 경상우병사 최경회,
고경명 장군 아들이었던 의병장 고종후.
진주 목사로 서예원ㅠㅠ 이름 석자도 잠시.
그리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열 손가락 반지 끼고 적장을 품에 안고
남강 물에 투신했던 주논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은
남강물에 뛰어들어 도망치는 일반 백성들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남강 물 건너편에서 지키고 있다가 도륙했다 하고
진주성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은
노인이나 어린아이, 말이나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어느 것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비명 소리가 이 땅을 얼마나 참혹하게 뒤흔들었을지...
그러니 이순신 장군님이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이 땅을 유린했던 일본군을
단 한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며
이를 악~ 물고 죽음을 불사하면 싸우셨던게지요.
그럴수 밖에 없었던게지요.
이렇게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노량해전으로 종결되었고
1604년 조선은 사명대사 유정을 파견하여 일본을 살피며
일본과 국교를 재개, 통신사를 파견~
이후 명나라는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의 파병을 요청하는 등
조선을 압박~ 이용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 징글징글 맞은 조선의 전쟁사~
도대체 언제 끝나노!!
들여다보며 걷는 재미 쏠쏠한 남해안 걷기.
다음 만나게 될 그래서 또 찾아보게 될 이야기들도
또한 기대됩니다.
Jiri-깽이 恩敬, 아름다운 나의 이야기
남해안 별책부록 <제2차 진주성전투> 이야기로
잠시 외도하며 담아봤습니다.
첫댓글 제목 그대로
정성과 감성가득한
한권의 귀한 역사기행 별책부록
정말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