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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Interview
사이펀의 시인들
배주열 - 정안나 시인
사이펀현대시인선 시집발간 시인들을 찾아가는 ‘사이펀의 시인들’은 배주열 시인과 정안나 시인을 찾아간다. 배주열 시인은 첫 시집 『나도 매춘부다』(사이펀현대시인선 17번)를 발간하였으며 정안나 시인은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사이펀현대시인선 18번)을 발간했다. 배주열 시인은 첫 시집에서 도발적인 제목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데, 현대인 모두가 정신과 육신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들이므로 매춘부를 욕하지 말라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즉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도 나도 매춘부나 진배없다는 것. 정안나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인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은 흔히 모더니즘시를 쓴 분으로 알려진 평소의 시적 활동과는 달리 보다 더 사회적인 관시도가 높은 시인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특한 정안나 시인만의 어법은 개성이 사라진 사단에 나름 주목의 시집이 되고 있다. 두 시인을 사이펀 편집실과 용두산공원에서 미팅을 가졌다. 두 시인의 인터뷰 진행은 본지 편집위원인 정훈 문학평론가가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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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Interview
사이펀의 시인을 만나다
정훈 -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설 명절이 지난 지가 좀 되는군요. 늦은 감이 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선 독자들께 한 말씀 부탁합니다. 근황이나 최근 달라진 개인사를 포함해서 하고 싶은 말씀을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정안나 – 네.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너무 푸근하군요. 첫해를 환대하며, 여러분(독자)에게 좋은 일 많이 생기는 한 해이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사이펀에서 네 번째 시집이 나왔습니다. 시집이 예쁘고 깔끔하다고 그러더군요. 가까이 두고픈 느낌 있는 시집이 되었습니다. 배재경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쁜 중에 시집 해설을 맡아 써주신 김남영 선생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집이 조목조목 해설의 덕을 보고 있어요.
시집을 내고는 왁자지껄한 나를 끌고 다녀올 여행을 생각해, 바닷가에 살면서도 고흥과 여수의 바닷가 쪽으로 며칠 저를 다잡아 갔습니다. 바닷길을 걸으며 문득 남도창을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남도창을 배워볼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머리 아픈 시는 때려치우고 남도창을 배워보라, 부르다 보면 울고 있더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아마 그 친구 영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첫 시인 친구는 나를 이만큼 밀어두고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친구와 나는 창(唱)과 시(詩)는 창과 방패처럼 서로를 나은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렇게 남도 바닷가를 걸으며 뭘 사야겠다는 요량도 없이 남도창의 사투리에 골똘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얼굴의 가게들과 맛난 음식만 보며 단순하게 다녔지요. 비닐봉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돌아가면 구첩반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숙소 위에서 짚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고함이 지금 생각납니다. 여행의 출발과 돌아오는 길은 다릅니다. 처음의 기대에서 더 멀리 뛰어넘고 헤쳐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시집의 길도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 시집은 한 걸음씩 머리가 맑아지며 후회가 없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제가 2년 임기의 부산작가회의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네 명의 부회장 중 한 명입니다. 대담하게 된 여기 정훈 선생님도 부회장이 되었잖아요. 2년이 빠르게 흘러갈 것 같다고, 부족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그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배주열 - 모두들 잘 지내시지요. 다행히 올겨울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서 겨울나기가 조금 수월한 것 같습니다. 요즘이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한가로울 때이지요. 거기에다 나 같은 어쭙잖고 조그만 텃밭 농사꾼에게는 게으름피우기에 최고의 나날들입니다. 올해는 눈도 많이 안 내려 눈 치울 일이 없어 더더욱 좋습니다. 근황을 물으셨는데 저처럼 산중에 사는 농사꾼에게는 특별한 근황이랄 게 없습니다. 겨울철은 아무래도 연세든 어른들이 취약한 계절이니까 돌아가시는 분들이 다른 때보다 많지요. 여기저기 조문을 여쭈며 상갓집 공짜 술로 낮술이나 취하며 지내는 게 모두입니다.
정훈 - 네. 두 분의 시집 이후의 소소한 일상들이 재밌군요. 그럼, 간단히 자신의 소개를 부탁합니다. 등단한 해나 등단 지면을 비롯해서 최근까지 발간한 시집에 대한 소개도 아울러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안나 – 저는 2007년 계간지 《시와사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는 『A형 기침』이 첫 시집인데 등단 7년 만에 나왔습니다. 『붉은 버릇』, 『명랑을 오래 사귄 오늘은』 그리고 이번에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이 네 번째 시집으로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는 고양이가 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골목길의 노인정 난간 위에 있습니다. 한쪽 눈이 다친 것으로 보인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어쩌면 오수를 즐기다 깬 눈일 수도 있는데 일방적으로 내가 다쳐본 눈인 듯 봅니다. 고양이를 우리가 아는 소리(야옹!)로 부릅니다. 자꾸 부르는 소리에 고양이는 더 다쳐서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봅니다. 오락가락 중인 비에 내 소리에 반응한다고 믿습니다. 한참을 부르던 나는 어느새 난간을 걸어가는 고양이가 됩니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들에서 봄이 오는 기운을 느낍니다. 매화 몇 아이 벌써 핀 난간으로, 나는 발에 잠을 얹어 지나갑니다. 난간과 산 쪽의 울타리를 지나갑니다. 울타리를 뛰어넘고 난간에서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뒷걸음질치며 중얼거렸지만 그래도 놓치지 못합니다. 역시 난간입니다. 울타리 안으로 사뿐히 들어갑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내던 소리와 다른 가벼운 허밍을 남기고 고양이는 사라집니다. 발만큼 가볍습니다. 너는 내가 아니라며, 내 소리는 네 소리가 아니라서 우습다는 듯 사라집니다. 고양이를 방해하는 폭력적인 소리와 지붕 없는 비에서 사라집니다. 울타리와 산 사이를 쳐다보다 골목길을 내려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따라옵니다. 고양이와 비슷해지려 내 목소리로 혼잣말을 해 봅니다. 더 비슷하고 다르게 퇴고하면서 도시의 골목에서 내가 모르는 소리를 내 맘대로 불러본 것입니다.
배주열 – 정안나 선생님은 말씀을 참 잘하시는군요. 자기소개를 하라셨는데... 저는 별로 소개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사는 사람이에요, 한때는 밥벌이를 위해 잠시 잠시 명함을 가진 적이 있는데 그것도 별 내용 없는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먹고사는 일에 더는 비루하지 말자고 고심한 끝에 하루에 끼니를 두 끼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술병 치레 말고는 잔병치레를 잘하지 않는 체질이라 아직은 병원에 들락날락하지 않고 버틸만하고요, 또 살아 보니 하루에 꼭 세 끼니를 먹지 않아도 살만하더라고요. 그러다 조금 더 부족해지면 하루 한 끼니로 줄여 볼 작정입니다.
등단한 해는 2016년이고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시집은 2023년 7월에 출간한 『나도 매춘부다』가 제 첫 시집입니다. 특별히 소개드릴 것은 없고요. 제목이, 시집 제목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지요. 그런 지적에 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이 시집은 그들에게 주는 시집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들은 결코 나 같은 매춘부가 아니었고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었어요."
정훈 – 하하! 배주열 선생님의 ‘그들은 나 같은 매춘부가 아니고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정안나 선생님은 마치 한 편의 시를 쓰듯 고양이를 통한 주체와 객체의 혼합으로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두 분 다 재미난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럼 자신이 지향하는 시적 세계를 듣고 싶습니다.
배주열 - 지향하는 시적 세계라... 저는 굳이 지향하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프로다운 시인이 아닌가 봅니다. 17세기 독일 문예비평가였던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자란 곳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라는 이 말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의 첫 시집에 쓰인 언어들이 이미 의도한 듯 어느 한 곳으로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언어의 편린들이 체화된 나의 세계를 지금처럼 그냥 갈 것입니다. 그게 지향이라면 지향일까요?
정안나 – 배주열 선생님은 지향이 확고하신 것 같군요. 저의 경우는 언어와 행동의 불일치를 경계하며 자기검열을 지향하고자 합니다. 언어가 앞서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감각하고 인지하느라 넘치는 건 아닌지,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 지향점인 셈입니다. 세상을 쓰는, 성공 하나 실패 하나에도 시적 세계는 담겨있습니다만, 자기검열에 걸린 제 시를 보면 부끄럽습니다. 얼른 고개를 돌립니다. 그저 부끄럽지 않은 시를 써야되겠다는 생각이지요.
정훈 – 두 분의 시집을 보면 지향점이 어느 정도 보입니다만, 독자들에게 시인의 육성으로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시인은 자신만의 시적 경향과 언어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인이 되고 싶어 했을 때 대부분의 시인은 또한 선배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딱히 영향을 주지 않았더라도 닮고 싶은 시인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듣고 싶습니다.
정안나 – 저에게는 김종미 시인이 있습니다. 두 해 전 돌아가신 유병근 선생님께 시 수업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좋은 시 2편을 복사에서 나눠주었는데요. 그때 시인의 시를 처음 읽고는 그 흔한 고등어를 어릴 때부터 밤낮으로 먹으면서 이런 안아주는 생각은 왜 못해봤을까, 그런 자책을 했습니다. 그리고 등단을 하고 시인을 처음 봤을 때 시와 다른 사람의 멋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멋만 부릴 것 같은 시인과 치열한 시는 무언가 서로 위반의 분위기였지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는 해보지 않았지만 치열한 시적 언어를 잡고 널을 뛰는 그런 시인의 공간이 좋았습니다. 김혜순 시인도 좋아합니다. 후배 시인들이 시인의 선구자적인 시 쓰기의 덕을 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들고 있는 것이 맞아, 마음대로 뛰놀아봐 괜찮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멍석을 깔아주는 고수의 역할이라고 생각됩니다.
배주열 – 저는, "한번은 시인이어도 좋겠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시인이 되어야겠다"라는 구체적 지향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입술 빨갛게 칠한 연애시며, 국어시간에 밑줄 그으며 외우던 모범답안의 시들을 따라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 쓰기에 대한 열망이 더 강렬해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아무에게도 시로 가는 길을 묻지 않았어요. 좋은 시는 필사하면 도움이 된다고 누가 그러던데, 전 단 한 편의 시도 필사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나의 언어로 가는, 나 혼자 가고 싶은 길이었어요. 그 흔하디흔한 백일장에 장려상도 받은 적이 없어요. 어느 누가 시집 제목을 『나도 매춘부다』라고 쓰는가? 이런 기본도 안된 불편하고 불량한 자세의 언어들에게 누가 쉽게 동의하겠습니까? 하여간 누구의 동의에도 귀 기울이지 말자, 어디선가 기다리는 한 사람에게 도착할 수 있는 시, 그것을 내가 가질 수 있는 시적 세계의 최대치이다. 그런 시를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향을 받았거나 닮고 싶은 시인을 물으셨는데, 영향을 받은 시는 있으나 닮고 싶은 시인은 없습니다. 너무 단선적인가요? 그러나 영향을 받은 시들은 다음의 시편들입니다.
1. 樂府-東門行
2. 정약용-哀絶梁
3. 이용악-낡은 집
4. 박목월-萬述 아비의 祝文
4. 나오미 녜(Naomi Nye)-How palestinians Keep Warm
6. 황지우-나는 너다
그리고 근간에는 김소연의 시 「바깥에 사는 사람」을 자주 읽습니다. 이런 시를 가까이 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시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영향권에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정훈 – 김종미 시의 언어적 치열함도 우리가 주목해 볼 만 하지요. 그리고 배주열 선생님께서 열거해주신 영향을 받은 시들을 저도 다시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시인에게 시 쓰기의 괴로움은 결국 시 쓰기의 행복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시를 쓰면서 어떤 때에 가장 행복한지, 혹은 시를 쓰면서 어떤 때에 가장 괴로운지 경험담을 곁들여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안나 - 시는 시인 자신의 검열을 먼저 통과해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고를 퇴고해 나가다 보면 어떤 시는 황홀합니다.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야. 귀신이 써놓고 갔어. 하면서 반짝입니다. 그러나 발표를 하고 지면으로 별 같은 시를 만나면 아... 이건 분명 내가 쓴 게 맞아. 귀신이 쓴 건 아니야. 하면서 저와 귀신 사이에서 저를 괴롭히지요. 이건 오래전의 버전이고요. 요즘은 모두 제가 쓴 것이 맞고요. 제 시가 발표된 책이 오면 쓱 제 글이 아닌 듯 훑어보고는 ‘뭐... 시집 낼 때 퇴고하지. 지금은 어쩔 수 없어’ 하며 책꽂이에 꽂습니다. 시집 엮을 때까지 모르는 일이고 제가 모르는 시입니다. 시집 엮을 때쯤이면 또 다른 시가 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에서 살아내려는 저만의 방식 같아요. 잠시의 귀신을 만난 후유증으로 저를 배반하는 시를 보면서 그 힘으로 퇴고하며 시를 씁니다. 언제쯤 귀신이 쓴 시가 지면으로 올지 궁금해서 씁니다.
배주열 - 저는 시를 쓰는 것이 괴롭고 힘들지 않아요. 시를 쓰게끔 하는 시대와 저들의 오만함이 힘들지요. 그리고 항상 방관자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 괴로울 뿐이에요. 그래서인지 시를 쓰면서 행복했던 기억은 별로 없었던 같군요. 사는 게 늘 작열하거나 폭설로 길이 끊이는 밤이었어요. 그 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할 때 무엇인가를 긁적이며 뒤척이는 불면, 그것이 행복까지는 아닐지라도 때때로 조우하는 통증을 버티게 하는 지구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시 창작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정훈 – 네, 자신의 시를 ‘귀신의 시’라고도 생각했다는 정안나 선생님의 재미난 말씀이군요. 또 시인이 시 쓰기가 즐겁지 않다는 배주열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시인인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그럼, 오늘 ‘사이펀의 시인들’ 인터뷰를 위해 두 분이 함께 하셨으니 상대의 시집을 보고 느낀 짧은 소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안나 선생님 말씀해주시지요.
정안나 – 네, 이 자리에 말씀드리기 어려운데... 제가 본 소감은 이렇습니다. 배주열 선생님의 시는 무시무시한 속도전이네요. 속도에 매력까지 붙었습니다. 반대편의 눈치 같은 건 볼 필요 없다고 달립니다. 확실한 세상에 대해 할 말만 하겠다고 합니다. 수식어는 개나 줘버려! 하며 남긴 공간을 읽어봅니다. 통쾌한 익살과 냉소 분위기의 리액션이 강렬하게 남습니다. 따라가다 섧어지기도 합니다. 할말을 못하며 이때껏 시만 읽으며 시에 대한 심사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궁금해집니다. 두 번째 시집도 망설이지 않을 것 같다고 감히 짐작해 봅니다.
배주열 – 정안나 선생님, 그리 봐주셔 고맙습니다. 선생님 시집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을 받아 들고 나의 오랜 버릇이 되어버린 독법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짧게 메모한 것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집을 읽는다. 맨 처음 펼치는 '시인의 말', "달맞이꽃이라 하고 양귀비꽃을 쓴다."
-시인은 왜 달맞이꽃을 달맞이꽃이라 하지 않고 양귀비꽃이라 쓴다.-고 했을까?
시인은 모든 걸 이미 보고 있다. 저물어야, 그것도 겨우 달빛에서야 피는 세상의 후미진 그늘, 또는 골목에서 피는,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보려고도 하지 않는 꽃, 미세한 몸살까지도 놓치지 않는 미시적 광각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시각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세상은 이미 충분히 분열적이다. 시인은 이미 제정신으로는 설득할 수 없는 세상, 보통의 언어로는 이미 틀린 것으로 읽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지점에서 시인은 달맞이꽃을 달맞이꽃이 아닌 "양귀비꽃"이라고 우기는 중이지 않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 나는 이 시인이 보고 있는 달맞이꽃을 아직 기억하고 달맞이꽃을 맞이하려 30리쯤 밤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끝으로 모든 시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의 골목들이었지만 특히 시 '수작'에서 보여주는 풍경, “우리가 우리를 잘 몰라 장미도 잘 몰라 한 송이 들어 놓으며 지키는 꽃에 눈엣가시를 내놓는다 이상하다 다행이다”라는, 마지막 연이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시인의 시적 의도는 몰라도 좋다' 싶었다.
네, 이상 제가 정안나 시인의 시집을 보면서 느낀 바입니다.
정안나 – 배주열 선생님. 제 시집을 꼼꼼히 보신 듯하군요. 메모까지..... 고맙습니다.
정훈 – 네. 상호 시집에 대한 단평을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개인별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정안나 선생님부터 하겠습니다. 정안나 선생님은 2007년 《시와 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지난 12월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작가마을, 2023)을 발간하기 전에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현대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모던하면서도 일상의 경험을 시적 형상화로 보여주는 시편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시 세계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정안나 - 현실의 문제를 호명하는 감각이라고 할까요.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다름’의 경험을 재배치하는 시적태도에서 출발합니다. 다름에서 나만의 소설을 씁니다. 제 시의 <나는 나의 구경꾼으로>에 나오는 점쟁이처럼 ‘나는 너를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해’ 하며 읊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다 ‘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나의 그림자’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나와 다름없어, 나는 내가 어떻다는 말과 동의어 같습니다. 한 손엔 엽전 한 손엔 부채를 들고 흔듭니다. 퇴고할수록 50프로는 맞추는 이름난 점쟁이가 된 것 같습니다. 점쟁이의 소설이 진실 같다는 그 시점에서 시가 됩니다. 처음 시의 씨앗은 서너 단어이지만 퇴고할수록 저도 모르게 현실에서 다친 감정과 반성이 스며들어 마무리가 되어 있습니다. 자꾸 빠져나가는 기후문제, 불신, 불평등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은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불러봅니다. 벗어날 수 없어 다가가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더 깊이 견디고 더 가까이 견디는 이들이 시가 되어 있습니다.
정훈 – 선생님은 퇴고를 아주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을 보면 전래동화나 고전에서 모티프를 따온 시들이 눈에 띕니다. 이런 전략을 취한 동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안나ㅡ꼬마 손님이 제 가까이 있습니다. 그 꼬마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기회는 드물지만요. 꼬마 자체가 동화고 울음도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동화의 세계입니다. 동화만큼 단순한 상상이 있는 곳이 없어요. 용서되고 이해되는 권선징악으로 마무리해서 잠이 잘 오는 동화의 나라지요.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그 세계를 꿈꾸며 품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도 전래동화는 잘 안보더군요. 워낙 생활과 밀접하고 공감하기 쉬운 동화가 많이 나와 있어 전해 내려오는 동화는 시대성에 뒤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엄마들이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지요. 아이들은 책보다 유튜브와 만화영화에 빠져있고 <나무꾼과 선녀> 같은 이야기는 요즘은 ‘미투’에 걸리는 일이라고 해석을 하더군요. 제가 가는 연제도서관 로비에 그림 동화를 한 페이지씩 크게 세워두더군요. 유쾌한 이야기들이 그림 아래에 있습니다. 그걸 도서관을 빠져나오는 중에도 보려고 합니다.
정훈 – 네, 전래동화도 요즘 아이들은 잘 안본다니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집니다. 최근 방송의 대세인 트로트나 게임에 빠지는지 모르겠군요.
선생님의 최근 시들에서 보이는 난수표 같은 실험시와 전통적인 서정시의 중간 쯤 선생님의 시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합니다. 평소 즐겨 읽는 경향의 시집이나 독서 리스트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안나 - 어느 시인이 제 시집을 받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멈추어야지 더 나가면 서정시가 된다고. 그리고 지인은 고차함수보다 더 읽기 어려워 첫 시의 첫 줄을 세 번 읽고는 시집을 덮어두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제 시의 강도도 선생님이 짚어 둔 것처럼 중간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다는 이들에게 중간쯤이라고 말하거든요. 요즘은 자연과학 계열의 책장 앞에 서 있는 빈도가 높아요. 그림과 인문학적인 사변이 숨 쉬는 책에 손이 갑니다. 자신의 세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밝혀놓은 인간에서 사물까지 넓히는 책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안규철 미술가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읽었습니다. 화가의 인문학적 소양이 미술에 그대로 드러나서 반가웠습니다. 글과 미술이 서로 질문을 던지며 함께 있었습니다. 미술품 하나마다 붙여진 제목에 들인 집중에 매달려봤습니다. 오래 사유해야 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무제>란 제목으로 던져져 있지 않아서 고마웠습니다.
정훈 – 네. 시인들이 그림을 좋아하고 또 변용도 많이 하는 편이지요. 크게 보면 싱의 이미지도 한 폭의 그림 같은 맛도 나잖아요. 그럼, 시의 소재나 시상(詩想)을 주로 어느 때에, 어느 상황에서 가져오는지 경험을 곁들여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안나 - 시상은 느닷없이 제게 다가오는데요. 「퍼즐가방」이란 이번 시집의 시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지하 공간이었습니다. 인텔리 분위기의 그가 캐리어에서 깻잎을 꺼내놓는 걸 보았습니다. 깔끔한 그 공간 안에는 깻잎밖에 없었습니다, 보통 캐리어는 여행용품의 옷이나 세면도구 책 한 권 등을 생각하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캐리어 사용법이었지요. 그렇다고 깻잎이 질질 끌어야 할 만큼 무게가 나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것이지요. 백조는 하얗다고 알고 있는데 왜 저 백조는 검지? 그 이후는 보편적인 동료에게 돌아갈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닿을까? 그 자리를 빠져 나와 눈앞의 검은 구멍을 적어둡니다. 어떻게 시상을 의도적으로 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닌 슥 다가오는 다가가 지는 것이지요. 흰 것을 따라가지 않는 검은 일이 궁금하고 시적이더군요. 저는 시상은 그런대로 잡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다양한 예술세계에 들어가 보는데, 그곳은 제게 즉답을 하진 않더군요. 지난한 그 과정은 시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무의식 속에 저장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비슷한 분위기의 글과 마주치면 번쩍, 융합을 하기도 합니다.
정훈 – 네, 그 어느 것도 나의 답은 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스스로 깨닫고 찾아야 하는 구도자 같은 것이겠지요. 앞으로 계획이나 다음 시집의 구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정안나 - 첫 시집을 냈을 때 3번째 시집까지만 내야지 했는데 4번째가 되었습니다. 첫 시집을 낼 때 힘들어 떠내려갔던 경험이 이유인 것 같아요. 다음 시집은 하나의 큰 주제 위에서 시집을 엮고 싶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떤 빛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멀리 견디며 가장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빛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여간 열심히 상상하고 찾아다니며 시를 쓸 요량입니다.
정훈 – 네, 정안 선생님께 이런저런 궁금증들을 잘 들어봤습니다. 그럼 배주열 선생님으로 시선을 돌리겠습니다. 선생님은 2016년 《문학청춘》으로 등단해 2013년 첫 시집 『나도 매춘부다』(작가마을, 2023)를 펴냈습니다. 시집 제목이 도발적인데요, 시제와 관련한 예피소드라든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부탁합니다.
배주열 - 시집이 출간되고 나서 시집 제목이 도발적이다, 또는 시집 제목으로는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목에 따른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목을 쓴 것에는 나름에 이유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제 몸뚱어리를 팔 수밖에 없는 매춘은 어찌 불법입니까? 쾌락을 위해 자발적으로 제 몸뚱어리를 열어 제끼는 간통은 어찌 합법입니까?
매국노와 매춘부!
이 둘 중 누가 더 윤리적입니까?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까?
"자본의 하나님과 세상의 허위에 속죄하지도 부끄럽지도 말자"고 사람들에게 건네는
우리의 전언이고 싶었습니다.
정훈 – 네, 듣고 보니 메시지가 아주 강렬하군요. 매춘이 합법은 아니지만 매국노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만인의 지탄을 받아야 할 역적이겠지요. 이번 시집의 시들을 보면 평이하면서도 소박한 시어로 구성되고 쉽게 읽히는 짧은 시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번뜩이는 시적 재치라든지 세계를 보는 안목에 개성을 느낄 수 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 모든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대체로 뒤늦은 나이에 등단하셨는데요, 시인에 대한 소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배주열 - 시인들만 읽는 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시, 저무는 날 혼자서 빈창자에 쏟아붓는 쓸쓸한 술잔 같은 위로가 있는 시, 보통 사람이면 느낄 수 있는 아픔의 예각들을 보통의 언어로 끌어안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살아남는다는 것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잖아요. 그것도 보통 사람이거나, 보통 사람들보다 허약한 사람들이 용서도 자비도 없는 무간지옥에서 동동거리며 목숨을 뒤척이는 생들이, 정말 위대한 것이 아닐 수 없잖아요, 그럼 박수를 쳐주어야지요, 그게 어떤 존재이든 "산다는 자체가 위대하다." 밟히고 버려지고 잊혀도 살아라. "언젠가 모두 죽는다"라는 확실하고 장엄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위안받아라, 그런 위로를 건네고 싶었어요.
그런 세계와 현실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제 시를 발견했어요. 그러다 한번은 시인이어도 좋겠다는 지향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제 詩는 출발했습니다. 등단이 늦어진 것은 이미 때늦은 출발이었고 세상의 지도가 없어 길을 헤매었던 탓입니다.
정훈 – 맞습니다. 어려운 시기 산다는 자체가 위대합니다. 물론 어떻게 살아야 그 위대함을 내 소에 가둘지는 미지수이지만요. 시집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방랑벽’이 있어 보입니다. 지금 제 앞에 게신 선생님 이미지도 약간 그런 분위기이구요.(웃음) 그만큼 많은 경험을 하셨겠다는 듯인데요. 최근의 시단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을까요?
배주열 – 허!허! 방랑벽까진 아닙니다. 단지 도착해야 할, 그리고 굳이 도착해야 할 이유를 갖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 유년은 거의 대부분 길 위에서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여섯 번의 전학으로 떠돌았습니다. 그때부터 길은 어딘가 도착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고 도착하면 다시 떠나야 할 것을 알아버린 조숙함이 있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떠돈 것이 아니라 빨리 도착하기 싫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시단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그 질문은 답하지 않겠습니다.
정훈 – 네, 시단의 질문은 답을 외면하셨는데, 그저 짐작만 하겠습니다. 등단한 지 7년 만에 첫 시집을 내셨는데, 요즘의 경향으로 보면 시를 추리는 눈이 상당히 예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첫 시집을 내게 된 경위나 배경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배주열 - 등단 7년 만에 첫 시집을 낸 것이 저는 너무 빠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금 더 견딜 걸, 조금 더 참을 걸,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좀 더 깊이가 익은 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시집을 낸 배경은, 누군가의 지워지지 말아야 할 낮과 밤들이 서슴없이 매몰되는데 대하여 침묵한다는 것에 나를 포함 비겁함을 느꼈어요. 그것이 배경이라면 배경이었어요.
정훈 – 네, 경상도 사나이 기질로 읽히는군요. 앞으로 계획이나 다음 시집 등 구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배주열 - 계획이 있다면 "50편의 시만 더 쓰자"이고 그 훗날은 어디론가 떠나면서 살 생각입니다.
정훈 - 하하, 명쾌하고도 확실한 답을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그 50편을 독자들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두 분의 사이펀 인터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포항에서 먼 걸음 해주신 배주열 선생님과 정안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잘 갈무리해 지면으로 독자들과 만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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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훈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평론집으로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 시집 세들 반점이 있다. 현재 《사이펀》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