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음악역사의 자긍심
레너드 번스타인
1987년 7월 미국의 탱글우드 페스티벌. 학생 오케스트라와 한창 리허설 중이던 당시 69세의 노(老) 지휘자가 휴식 시간에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작곡가들은 나를 진정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고, 지휘자들은 나를 진짜 지휘자로 생각하질 않아. 게다가 피아니스트들은 나를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업종 분화와 전문화가 미덕으로 정착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만능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토로했던 주인공은 레너드 번스타인입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인기 뮤지컬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교향곡과 미사곡 등 진지한 클래식 음악을 여럿 남겼고,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던 명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이 다재다능한 음악인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노릇입니다.
1958년부터 14년간 뉴욕 필하모닉에서 <청소년음악회>를 진행했고, 1972년에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에서 강연을 맡아 ‘대답 없는 질문’이라는 책으로 묶어냈으니 방송인이자 교육자라고도 불러야겠네요.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예술혼
1918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집안 출신입니다. 조부는 저명한 랍비였고, 아버지는 가게 점원에서 출발해서 가발과 미용 제품을 만드는 경영자로 성공을 거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유대교와 탈무드를 뼛속 깊이 새기며 자라난 번스타인의 음악 입문은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10세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지만 쇼팽과 바흐의 쉬운 작품은 거뜬히 소화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하지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클래식 연주회에 가본 것도 15세가 되고서였습니다.
번스타인은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을 배출한 300년 역사의 명문인 보스턴 라틴 스쿨에 1929년 진학할 정도로 빼어난 성적을 보였습니다. 학문의 길을 충실히 걷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음악에 뜻을 두고 있던 아들은 때때로 충돌을 겪기도 했지요. 그는 “아버지가 피아노 교습비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구 집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워갔다”고 술회합니다.
흔히 아슈케나지로 불리는 동유럽 유대인에게 음악인이란 결혼식과 잔치에서 연주하면서 푼돈을 버는 거리의 악사에 불과했습니다. 훗날 음악가로 대성하자 아버지는 “그 녀석이 레너드 번스타인이 될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모든 아들은 어떤 점에서든 아버지를 거역하고 투쟁하며 떠나지만 결국은 더욱 밀접해지고 확고해져서 돌아온다”는 번스타인의 말에는 아버지와의 오랜 애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935년 졸업한 번스타인은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합니다.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만남이 1937년부터 이어집니다.
번스타인에 앞서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었던 지휘자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를 하버드 대학 파티에서 만났고, 같은 해 11월 뉴욕의 피아노 리사이틀에서는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의 옆자리에 앉게 됩니다. 1940년에는 보스턴 심포니를 이끌고 있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를 만나기에 이릅니다. 번스타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쿠세비츠키는 자부심과 놀라움을 섞어 “이 소년은 새로운 쿠세비츠키이자 환생”이라고 격찬했지요.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해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를 사사한 번스타인은 23세 때인 1941년 야외 콘서트에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데뷔하는 동시에, 이듬해인 1942년에는 첫 교향곡인 ‘예레미야’를 완성해서 아버지에게 헌정합니다. 1943년에는 코플랜드의 피아노 소나타를 초연하지요. 피아노와 지휘, 작곡과 편곡 등 음악적 재능이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한 것입니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엄숙하고 종교적인 유대인 세계와 코플랜드로 대표되는 뉴욕의 현대적인 예술계는 이후 번스타인의 삶을 떠받치는, 거대한 두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聖)과 속(俗), 가족 중심의 보수주의와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주의, 이성애와 동성애는 때때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공존하기에 이릅니다.
1943년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된 번스타인에게 극적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같은 해 11월입니다. 당초 지휘자로 예정됐던 브루노 발터가 이틀 전 급작스럽게 취소하면서 번스타인이 대타를 맡은 것이지요. 당시 연주회가 방송 중계되고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면서 번스타인은 전국적인 스타로 급부상합니다.
이러한 열광 이면에는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교육받은 첫 지휘자를 배출했다는 자긍심과 ‘유럽 콤플렉스’가 병존했을 것입니다. 1957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빛을 보고, 이듬해인 1958년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취임하면서 번스타인은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초연 직후 732차례나 연속 공연되고, 1957년 토니상을 수상하면서 번스타인의 대표작으로 떠오릅니다.
또 뉴욕 필하모닉 취임과 더불어 번스타인은 거슈윈과 코플랜드, 찰스 아이브스 등 미국 작품을 대거 프로그램에 끌어들이고 청소년 음악회를 진행하며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비평가 헤럴드 숀버그는 “번스타인의 동작은 당대 지휘자 가운데 가장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꼬았지만, 그 열정조차 새로운 청중 개발에 톡톡한 효과를 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20세기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일찌감치 코플랜드의 좌파 인민주의에 기울었고, 충실한 민주당 지지자로 취임 이전부터 케네디 대통령과 각별한 우의를 보였던 번스타인은 때때로 미국 보수 세력과 길항(拮抗)을 겪기도 했습니다.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1951~52년과 1955~56년 시즌에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에서 지휘를 맡지 못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매카시즘의 마녀 사냥이 기승을 부리면서 번스타인의 좌파적 성향과 동성애적 기질, 인종적 태생으로 인해 미국에서 실질적으로 실직 상태를 겪기도 했다”고 기술합니다.
1970년에는 번스타인의 아내 펠리치아가 뉴욕의 아파트에서 흑인 급진파 행동주의 단체인 ‘블랙 팬서(Black Panthers)’를 위한 자선 파티를 여는 바람에 구설수에 휘말려야 했지요. 배리 셀데스 같은 정치학자는 FBI 문서를 토대로 한걸음 더 나아가 번스타인을 정치적 좌파이자 급진적 행동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작곡가로서 그는 1944년 첫 교향곡 ‘예레미야’와 첫 뮤지컬인 <온 더 타운(On the Town)>, 첫 번째 발레 음악인 ‘팬시 프리(Fancy Free)’를 잇달아 발표한 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1957년 초연한 <캉디드>는 두 달 만에 막을 내리는 참패를 겪었지만, “나는 살기 위해 지휘하고, 지휘하기 위해 산다”는 말러의 말은 그대로 번스타인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번스타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차례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면서 ‘말러 부활’을 일으킨 주역이 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1969년까지 뉴욕 필과 1200회의 연주회와 200여 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번스타인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작곡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11년간 뉴욕 필하모닉에 재직하면서 번스타인이 발표한 곡은 교향곡 3번 ‘카디시’와 ‘치체스터 시편’이 전부였기에 그 열의는 더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쇤베르크 중심의 음렬주의나 극단적인 실험을 배격했습니다. 그는 “조성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존재와 정신,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누가 사랑과 우정, 믿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지요.
대신 그가 자유롭게 넘나든 것은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입니다. 재즈와 흑인 영가를 끌어안고, 오페라와 뮤지컬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행보에 스승 쿠세비츠키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지요. 하지만 번스타인은 “교향곡이 단지 교향곡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노래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조성 파괴가 극에 이르렀던 1960~70년대에는 낡고 저속하며 상투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더 이상 뚜렷하지 않은 1990년대에 이르면 ‘외로운 선지자’로 재평가를 받습니다.
이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에게 단 한 명의 숙적이자 라이벌이 있었다면 역시 지휘자 카라얀(Karajan)일 것입니다. 번스타인이 신대륙 미국을 상징한다면 카라얀은 본토 유럽을 대표했고, 번스타인이 말러를 재조명했다면 카라얀은 베토벤·브람스·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독일 교향악의 전통에 매진했지요.
카라얀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언젠가 번스타인은 “내가 10년 더 젊고, 5센티미터 더 크다는 것”이라고 위트 있게 받아넘겼습니다. 하지만 1989년 카라얀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번스타인은 파리에서 콘서트 도중, 청중을 향해 “동료이자 위대한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추모하며”라고 말한 뒤 묵념을 제안했습니다.
1973년 번스타인의 55세 생일을 맞아 음반사 CBS에서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줬습니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부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 등 당대의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번스타인은 동료 프로듀서 폴 마이어스의 어깨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숨질 때의 베토벤보다 고작 두 살 어릴 뿐이야. 하지만 나는 기억에 남을 만한 어떤 작품도 아직 쓰지 못했어.”
비록 자신은 제대로 발붙일 분야가 없다고 한탄했지만, 번스타인의 영향력 아래 성장한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마린 알솝(볼티모어 심포니), 번스타인의 곡을 즐겨 연주한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과 켄트 나가노(독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등 새로운 세대가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토스카니니처럼 언제나 50여 곡의 같은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을 보내고픈 마음은 없다. 나는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할리우드를 위해서 작곡하고, 교향악을 쓰고 싶다. 나는 훌륭한 단어의 뜻 그대로 음악인이고자 한다.” 이 말처럼 생전에는 지휘자 카라얀의 위세에 눌린 감이 없지 않다고 해도, 사후에는 ‘20세기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음악가. 바로 번스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