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1879~1944)은 한국 근대사에서 최대의 인물이다.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로서,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등을 저술한 걸출한 사상가로서, 문학사에서 불멸의 시집 《님의 침묵》을 낸 시인으로서, 일제에 조국을 잃어버린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잃어버린 님을 찾아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사회가 필요한 모든 방면에서 다면적이고 전인적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진기충인(盡己忠人)이요, 의인이었다. 인재가 빈곤했던 시대를 살면서 그는 다방면에서 뚜렷한 능력을 발휘한 천재였다. 따라서 만해를 말하려면 적어도 선승으로서의 만해, 시인으로서의 만해,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으로 만해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말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이 세 측면에서 종합하여 그를 조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만해의 그림자일 뿐이다. 전보삼의 《한용운 관계 문헌 연구》에 의하면 만해에 대한 연구물이 1980년까지 300여 편에 달하였고, 1992년까지는 600여 편에 달하는 연구 성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1) 인권환은 ‘만해학’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만해 연구를 개괄한 바 있다.2)
그 동안 만해에 대한 연구는 ① 전기적 연구 ② 사상적 연구 ③ 문학적 연구 ④ 종합적 연구가 되어 왔으며, 문학적 연구는 ㉠ 작가론적 연구 ㉡ 작품론적 연구 ㉢ 항일 저항문학 연구 ㉣ 비교문학적 연구 등으로 분류되어 연구되어 왔으므로 본고에서는 재론하여 열거하지 않고, 만해 연구에 있어서 가장 부족했던 그의 한시(漢詩) 가운데서 만해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선적 체험과 오도의 경지를 읊은 선시(禪詩)의 세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선시가 역사적으로 한시와 만나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선시가 한시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은 불문율이다. 그러나 만해의 《님의 침묵》은 송욱이 《전편해설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에서 “시집 《님의 침묵》은 전체로서 하나의 증도가를 이루고 있다.……만해의 시집은 사랑의 시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이를 ‘사랑의 증도가’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따라서 그는 이 시집을 통하여 선의 세계를 처음으로 인간화하고 역사화함으로써, 동시에 그것을 현대화하고 보편화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3)라고 밝혔듯이 그의 시집에 나타난 88수의 시 속에는 선취(禪趣)가 스며 있고,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선시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조도 마찬가지다.
만해의 선시 세계를 그의 한시에 나타난 선시를 중심으로, 시조와 《님의 침묵》에 나타난 선시를 살펴보는 것을 이 논문의 목표로 삼았다.
2. 한용운의 사상과 선교관(禪敎觀)
만해의 제자였던 김관호는 〈심우장 견문기(尋牛莊 見聞記)〉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의 명작을 보고 당대 문장대가 운양 김윤식 옹은 근대에 그 짝이 없다고 말하였다. …… 홍벽초 선생은 ‘7천 승려를 다 합하여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1인을 아는 것은 만인(萬人)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조선 청년들은 만해를 배우라’고 설한 적이 있다”4)라고 하였다. 만해는 승려로서 선과 교에 통달한 대선사이다. 그 사상의 바탕은 불교사상임이 명백하다. 1910년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1913년 발행)한 후 만해는 조선불교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조선불교유신론》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세상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는가. 사람에 의거하여 결정될 뿐이다. 모든 일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소위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이니, 만약 사물이 자립하는 힘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에 성패가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책임일 뿐이다.”5) 〈불교의 유신은 파괴로부터〉에서는 유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을 대개 말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比例의 학문에 있어서 推理를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6) 《조선불교유신론》은 조선불교의 부조리와 무질서를 타파하는, 불교 유신을 통한 불교 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불교시론이다. 이러한 그의 불교유신사상은 확산되어 사회유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으려는 독립정신으로 나타났다. 그의 독립정신은 호국불교사상이요,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하려는 보살의 자비사상이요, 해탈 자유사상이다. 만해는 혁명가요, 계몽사상가이다.
만해는 〈불교유신회〉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불교가 민중과 더불어 동화하는 길이 무엇인가. 첫째 그 교리를 민중화함이며, 그 경전을 민중화함이다. 둘째 그 제도를 민중화함이며, 그 재산을 민중화함이다”라고 설하였다. 만해는 사원의 위치를 세간으로 이끌어 내려야 하며, 경전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화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만해는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1914년 범어사 발행)을 국한문 혼용으로 편찬하였다. 이 《불교대전》은 《조선불교유신론》이 1910년에 탈고가 된 것으로 보아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통도사에서 한역대장경과 남전대장경 444부를 열람하여 대장경을 주제별로 재구성한 동서고금에 드문 명저이다.
강석주 스님은 〈만해스님을 기리며〉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만해스님은 평소에 과묵하다고 할 정도로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는데 설법이나 대중강연에서는 아주 말씀을 잘 하셨지요. 우리 승단에 보면 글을 잘 쓰는 이는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잘 하는 이는 보통 글을 잘 못쓰는 경향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해스님은 글과 말을 모두 잘하셨습니다. 말과 글에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습니다. …… 선학원에 계실 때 제가 방을 자주 치웠지만 스님 방에는 책이 한 권도 없으셨습니다. 글을 쓸 때도, 강연을 할 때도 참고도서를 보신 적이 없어요. 또한 책 보는 일도 없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그 전에 모든 책을 다 봤다는 걸 말해 주지요.”7)
기존의 연구 성과물에 나타난 만해 사상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화엄일심사상 ② 반야공사상 ③ 유마의 선과 보살사상 ④ 선사상 ⑤ 유신개혁사상 ⑥ 민족사상 ⑦ 자유와 평화사상 ⑧ 대중불교사상 ⑨ 대승보살의 자비사상 등이다.
본 논문에서는 만해 사상 가운데서 그의 선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그의 선교관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만해의 저서 가운데서 그의 선교관이 나타난 것은 《조선불교유신론》의 〈논참선(論參禪)〉과 《불교대전》의 〈제3장 수심(修心)〉,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 92호(1932. 2. 1)에 발표된 〈선과 인생〉, 《불교》 108호(1933. 7. 1)에 발표된 〈선과 자아〉, 《불교》 신 제5집(1937. 7. 1)에 발표된 〈선외선(禪外禪)〉, 《불교》 88호(1931. 10. 1)에 발표한 〈조선불교의 개혁안〉 등에 나타나 있으며, 그의 한시나 시조, 그리고 《님의 침묵》의 시에도 나타나 있다.
〈조선불교의 개혁안〉의 ‘선교의 진흥’에 나타난 만해의 선교관은 한국 선종사에서 가장 명확한 선교관을 피력하고 있다.
禪敎를 떠나서 불교를 말할 수 없으니 선교는 곧 불교요, 불교는 곧 선교다. 禪은 불교의 형이상학적 純理를 이름이요, 敎는 불교적 言文을 이름이니, 교로써 智를 얻고 선으로써 定을 얻는 것이다. 정을 얻어야 바야흐로 생사고해를 건너서 열반피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교를 말미암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寶筏의 지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하나를 闕할 수가 없으니, 불교의 성쇠는 선교의 興替를 영향하는 것이다.8)
만해의 선교관은 선교겸수설이다. 이는 보조의 정혜쌍수설과 휴정의 선교일치설을 계승한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만해는 《십현담주해》를 통해서 선사상의 심화와 그 발현을 꾀하였고, 《불교대전》을 편찬하여 불교 교리의 대중화를 기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서 불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선과 인생〉에서 그가 밝힌 선의 의의를 통해 만해의 선관을 엿볼 수 있다.
禪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걸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을 일종의 종교적 행사로만 아는 것은 오해다. 선은 종교적 신앙도 아니요,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도 아니요, 沈寂한 灰心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아니 하면 아니 될 것이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동시에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다. 그러면 마음은 무슨 필요로 닦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닦느냐는 것이 순서의 문제일 것이다.9)
《조선불교유신론》 〈참선〉에서는 다음과 같이 참선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다.
陰陽의 천변만화는 太極에 근거를 두고 있고, 繪畵의 여러 모습은 흰빛깔이 있은 뒤에 생긴 것들이며, 크고 작은 모든 현상은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인바, 마음의 정체를 밝히는 길을 참선이라고 한다. …… 참선은 體요, 철학은 用이며, 참선은 스스로 밝히는 것이요, 철학은 연구며, 참선은 頓悟요, 철학은 漸悟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참선의 요점을 나타낸다면 ‘寂寂惺惺’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寂寂 즉 마음이 고요하면 움직이지 않고, 惺惺 즉 마음이 늘 깨어 있으면 어둡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흐트러짐이 없고, 어둡지 않으면 昏惰함이 없으니, 흐트러짐이 없고 혼타함이 없으면 마음의 本體가 밝혀지게 마련이다.10)
만해는 1911년 범어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3월에 관장에 취임한 임제종 종지를 추종하였고, 간화선을 강조하였다. 그의 저서인 《불교한문독본》 제35과에 보면 임제종은 조선불교가 계승한 종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공민왕 때 태고보우 선사가 원나라에 가서 강남 석옥화상으로부터 전법을 받아와서 임제종을 창설하였다. 지금 조선의 승려는 다 태고의 후예로서 임제종 아닌 사람이 없다.”11) 마음을 닦는 방법 즉, 선의 방식을 설명함에 있어 간화선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을 닦는 방법 즉, 선도 그러한 것이다. 선에 있어서도 화두를 드는 이외에는 무슨 방법이든지 방법을 쓰는 것은 금물이다.”12) 만해는 선사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산 속에만 들어앉아 묵선(墨禪)만 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활선(活禪)과 생활선(生活禪)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 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厭世가 되는 것뿐이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獨善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을 것이다. 불교는 救世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13)
禪이라는 것은 枯寂을 墨守하는 死禪이 아니오, 機鋒을 활용하여 任運騰騰하는 活禪이다. 禪은 능히 危懼를 除하고, 선은 능히 哀傷을 驅하고, 선은 능히 生死를 超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수양이냐.14)
3. 한용운의 문자관(文字觀)
만해의 선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그의 선에 대한 문자관이 1935년 《선원(禪苑)》 제4호에 발표한 글 〈문자 비문자(文字 非文字)〉에 잘 나타나 있다.
不立文字가 見性成佛의 한 길이라면 不離文字는 性의 圓成인 동시에 度生의 大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의 三處傳心은 문자를 여읜 것이라고 하지마는 형색이 있으면 곧 문자가 이루느니 格外禪典도 일종의 문자이며, 八萬藏經은 문자라고 하지마는 未曾說一字로 보아서 49년 설법도 일찍이 문자를 여읜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자는 능히 色에서 空을 보고 공에서 색을 볼지니, 다시 말하면 禪에서 문자를 보고 문자에서 선을 얻을지니 선을 위하며 글을 쓰는 자는 마땅히 이렇게 쓸 것이요, 선을 위한 글을 읽는 자는 마땅히 이렇게 읽을지니라.15)
정통 선의 문자관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다. 중국 선종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라고 한 언명(言明)을 충실히 신봉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49년 중생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나는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였다. 진리의 세계는 언설로써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이다. 《장자》에서도 도(道)는 유일무이한 절대가치였다. 그런데 그것이 일단 인식의 세계로 들어와 언어로 표현됨과 동시에 그 절대성은 상실되고 상대적 가치로 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莊子》의 齊物論篇). 《장자》에는 도와의 대비에 있어 언어의 불완전성이 자주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도의 절대성과 비교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문화현상은 언어문자로 기록되고 사유마저도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문자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선 또한 마찬가지로 불리문자(不離文字)요, 인언현리 의언진여(因言顯理 依言眞如)이다. 만해 또한 선의 불립문자를 인정하면서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으로 불리문자를 주장하였다.
만해의 문자관은 “색(色, 현상계)에서 공(空, 본체계)을 보고, 공에서 색을 보듯이 선에서 문자를 보고 문자에서 선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해의 선시는 선 언어의 이러한 특성과 역설과 고도의 상징적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만해의 언어문자는 한문, 한글 그리고 국한문 혼용을 구사하였다. 그의 최초의 저술인 《조선불교유신론》(1914년)은 한문체이다. 한글로 된 그의 글은 1918년에 발행하는 《유심》 잡지에서 국한문체와 한글이 처음 나타나서, 1922년 〈무궁화 심으고저〉란 시조에서 한글을 사용하고, 《님의 침묵》(1926)과 소설, 수필에서 한글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만해의 문체는 《조선불교유신론》과 한시에서는 한문 문체, 《님의 침묵》과 시조, 소설에서는 한글 문체를 사용하였다.주요한은, 1926년 6월 22일과 26일 동아일보에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고 쓴 독후감인 〈애(愛)의 기도, 기도의 애(愛)〉에서 만해의 조선어(한글) 소화 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저자의 韻律的 기교 표현은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조선어의 운율적 효과를 나타낸 최고 작품의 水平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솜씨라 하겠다. 氏의 作品은 ‘타고르’의 散文的 英詩와 같은 것이다. 장래에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조선어로써 押韻及音脚數를 맞추어 운율적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성공치 못하였고 오직 散文的이면서 自然 韻律을 가진 一時形이 성립된 것은 승인할 수밖에 없다. 장래에 있어서 其 以上의 발견을 얻을는지 모르나 현재에 있어서는 저자의 조선어 소화에 대하여 탄복 아니 할 수 없다.16) 주요한이 《님의 침묵》 독후감에서 평한 대로 1926년 당시 만해는 한글을 구사하는 능력이 조선에서 가장 탁월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해는 6세(1884년)에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우고 9세에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과 《서경기삼백주(書經碁三百註)》를 통달할 정도로 한문에 능숙하였다. 만해는 한문과 한글로 자유자재하게 글과 시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국문학사에서 한시에서 현대시(한글시)로 옮겨오는 과도기에 있어 징검다리 역할을 한 시인이다.
4. 한용운의 선시(禪詩) 세계
선시는 불교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그 오도적 세계나 과정, 또는 체험을 시화한 종교시이며 심오한 세계를 담은 철리시(哲理詩)이다. 선은 마음의 깨달음을 내세우기 때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종지로 삼는다. 따라서 언어문자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정서적 감정, 분별적 사유마저 배격한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현상이 언어문자로 기록되고 인간의 사유마저도 언어화된 개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어문자를 완전히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선 또한 언어문자를 완전히 떠날 수 없다.
양(梁)나라 보지(寶誌)화상이 지었다고 전하는 《대승찬(大乘鑽)》에는 “만약 도의 참모습을 깨닫고자 한다면 겉으로 드러난 이상(理象), 성색(聲色)과 언어를 없애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다(《전등록》 권29).17) 따라서 선가의 언어는 지극히 압축되고 고도로 상징화된 언어, 그리고 비약적이고 역설적인 반상(反常)의 언어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가 아니다. 일언지하돈망생사(一言之下頓忘生死)하고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는 촌철살인적인 언어이다. 선사들은 극도의 역설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려고 노력하였다.
만해의 《님의 침묵》은 역설의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 시가 많다. 예를 들면 〈반비례〉에서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 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역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여요”라고 한 것이나 〈선사의 설법〉에서 “그럼으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등이 그렇다. 시가(詩歌)의 역사는 선종사상이 흥기하기 이전의 중국에서 이미 장구하게 흘러왔으나, 그때는 시와 선의 연계가 필요치 않았었다. 그러나 선종사상이 중국에서 유행된 이후부터는 많은 문필가들이 시와 참선의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되었다.
선종은 당대(唐代)에 크게 흥성하였으며, 초 중당 시기에 많은 시인들이 선종의 영향을 받았고, 시를 창작함에 있어 선의 묘오(妙悟) 경지를 수용하여 원선입시(援禪入詩)로 선미(禪味) 농후한 시를 읊게 되었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운외지치 미외지미(韻外之致 味外之味)의 시론은 사람들에게 명확한 선시일치(詩禪一致) 이론을 인식시켰고, 후세 중국 문예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이 선시가 역사적으로 한시와 만나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선시가 한시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불문율이다. 그러나 만해의 시에서만큼은 이런 불문율을 깨고 그의 선시가 한시에서는 물론이고 한글로 쓴 현대시집인 《님의 침묵》과 시조에서 두루 나타나고 있다.
먼저 그의 한시 속에 나타난 선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 동안 만해문학의 연구 성과물 가운데 만해의 한시에 대한 논문은 최초로 1979년 김종균이 쓴 〈한용운의 한시와 시조〉(《어문연구》 21호, 1979), 이병주가 1980년 발표한 〈만해선사의 한시와 그 특성〉(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0년), 송명희의 〈한용운의 한시론〉(《한용운 연구》, 새문사, 1982년), 김미선의 〈한용운의 한시 연구〉(청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8년), 김대춘의 〈만해 한용운의 한시 연구〉(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년), 최태호의 《현대시와 한시(만해·지훈의 한시를 중심으로)》, 은하출판사, 1994년)가 있을 뿐이고, 만해의 선시 연구는 육근웅의 〈만해시에 나타난 선시적 전통〉(한양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3)이 있다. 육근웅의 〈만해시에 나타난 선시적 전통〉은 《님의 침묵》에 나타난 현대시를 가지고 살펴보았을 뿐 만해 선시에서 핵심이 되는 한시를 그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본 논문은 만해의 한시 속에 나타난 선시를 중심으로 그의 시조나 《님의 침묵》에 나타난 선시 작품을 분석하고자 한다.
1) 한시에 나타난 선시 만해의 한시는 《증보 한용운 전집》 1권에는 163수가 수록되어 있고, 최동호 편 《해설 한용운시전집》 제2부 〈만해한시〉에는 165수(송광사 박물관에 족자로 소장된 무제의 시 2수 포함)가 있다. 165수 가운데 근체시가 160수로 5언절구 61수, 7언절구 64수로 절구가 125수이고, 5언율시 12수, 7언율시 23수이다. 만해는 선시의 특성이 언어의 압축과 고도의 상징적 언어로 표현되듯이 가장 시어가 절제된 시체(詩體)인 오언절구와 칠언절구가 대부분이다. 만해는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유마힐소경 강설》(미완성) 등의 저서를 남긴 선교(禪敎)에 통달한 종장(宗匠)으로서 그의 선시 또한 문학적으로도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 만해의 시 가운데 최초로 시라 할 수 있는 오도송을 통해 그의 선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만해는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에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疑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달아 이내 칠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 대장부는 머무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수많은 나그네 시름 속에서 애태웠네. 一聲喝破三千界 臨濟의 할 버럭 지르니 삼천세계가 깨지고 雪裡桃花片片紅 눈 속에 붉은 복사꽃 흩날리네.
〈丁巳十二月三日夜十時頃坐禪中忽聞風打墜物聲疑情頓釋仍得一詩〉
이 오도시는 정형적인 선시다. ‘고향(故鄕)’과 ‘객수(客愁)’ ‘일성할(一聲喝)’과 ‘편편홍(片片紅)’이 소리와 색깔이 대구를 이루는 색성오도(色聲悟道)의 선시이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향(鄕)·중(中)·홍(紅)의 운도 정확하고 언어문자로써 나타낼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격외언어(格外言語)인 ‘설리도화(雪裡桃花:눈속에 핀 복사꽃)’로 멋지게 표현한 격조 높은 시이다. 깨달음을 얻은 남아 대장부는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부처가 아님이 없고, 온 세상이 정토다. ‘고향’은 깨달음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상징한다. 곽암(廓庵)의 《십우도》 가운데 마음을 깨달아가는 수행과정을 10단계로 밝힌 제7 도가망우(到家忘牛, 忘牛存人)의 송에 보면 소(마음)를 찾아 헤매이다 드디어 소를 타고 고향집에 돌아오는 경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騎牛已得到家山 소를 타고 고향집에 이르렀으니 牛也空兮人也閑 소 또한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紅日三竿猶作夢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鞭繩空頓草堂間 채찍과 고삐는 초가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十牛圖, 제7 忘牛存人〉
마음을 깨달은 천하 대장부가 되고 보니 지난날 나그네의 설움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어 한가하고 평화롭다. 삼천대천 세계가 부처의 세계가 아님이 없다. 잡념망상과 집착심은 말끔히 사라지고 생각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눈 속에서도 붉은 복사꽃이 피어난다. 처처불상(處處佛像)이요, 사사불공(事事佛供)이다. 그런데 깨닫기 전에는 법계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잠시 왔다가는 떠돌이 나그네처럼 근심과 고통 속에서 윤회하였다.
‘할(喝)’은 중국 당나라 이후로 선가에서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낼 때 꾸짖거나 호통을 쳐서 학인의 미(迷)함을 타파시켜주는 지도 방법이다. ‘할(喝)’은 ‘임제의 4할(四喝)’ 이후에 유명해져 덕산(德山)의 방(棒)과 함께 임제종의 대표적인 가풍이 되었다. 《선가귀감》에 ‘할’이 임제종의 근원이 된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날에 마조스님이 한 번 ‘할’하는데 백장스님은 귀가 먹고, 황벽스님은 혀가 빠졌다. 이 한 ‘할’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며, 또한 달마대사의 처음 오신 면목이다.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 된 것이다.”18) 전구의 ‘일성할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는 백장선사가 귀가 먹고 황벽선사가 혀를 내둘린 경계이고,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고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밝힌 경계이다. 미당 서정주는 ‘큰 한소리 외쳐서 우주 한 집 만드니’라고 번역하였다.
만해가 ‘임제의 4할(四喝)’ 가운데 일할을 타파하여 우주심으로 삼천대천 세계를 집으로 삼는 대오를 한 것이다. 1908년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야합하여 원종 종무원을 설립하여 대종정으로 선출되자, 만해는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장금봉 등과 송광사에서 대규모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이회광 무리의 원종에 대하여 임제종으로 대결할 것을 다짐하여 임제종을 설립하여 33세에 임시 관장의 서리에 추대되었다. ‘설리도화(雪裡桃花)’는 의로불도(意路不到)이고, 언전불급(言詮不及)인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경지이다. 《속고승전》 26권 〈법융전〉에 ‘설중개화(雪中開花)’가 나온다. 법융이 647년 겨울 우두산 유서사(幽棲寺)에서 《법화경》을 강설하는데 얼어붙은 얼음 속에서 두 송이 꽃이 피어났으며, 그 꽃은 연꽃을 닮았으나 금빛으로 빛났다고 한다.
《선문염송》 590에 ‘영운견도(靈雲見桃)’라는 화두가 나온다. 당나라 영운선사가 산에서 참선하다가 복사꽃을 보고 도를 깨달은 기연(機緣)을 설한 것이다. 만해의 오도의 기연은 ‘홀문풍타타물성(忽聞風打墜物聲)’이다. 그는 오도의 경계를 읊은 시에서 영운선사의 복사꽃을 용사(用事)하였다. 전구의 ‘일성할(一聲喝)’과 결구의 ‘편편홍(片片紅)’은 청각 심상과 시각 심상이 극적으로 결합하여 시적 승화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벽암록》에서 밝히고 있는 깨달음의 기연인 색성오도(色聲悟道) 즉, 견색명심(見色明心) 문성오도(聞聲悟道:사물의 색상에 응하여 심성을 밝히고, 자연의 소리로 본성을 깨친다)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절창이다.
미당 서정주의 《만해 한용운 한시선》에서는 결구가 ‘설리도화편편비(雪裡桃花片片飛)’라고 되어 있다. 만해가 처음 오도송을 읊을 때는 ‘비(飛)’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영호 박한영에게 보이자 ‘홍(紅)’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홍’이 되었다는 것과 수덕사 원담스님은 어릴 때부터 항상 만공스님 곁에서 시봉을 하였는데 만해가 오도 후 인가를 받기 위해 만공스님을 찾아와 오도송을 보이자 ‘홍’으로 고쳐주는 것을 직접 보았고 증언하였다. 뜻으로 보면 ‘비’가 좋으나 한시의 운으로 보면 ‘홍’이 압운자로서 적합하다.
만해의 한시 가운데 ‘달(月)’을 소재로 하여 읊은 시가 많다. ‘월(月)’은 45회나 나타나는 시어이다. 만해의 시에서 달은 잃어버린 조국의 어둠 속에서 꿈과 희망, 생명을 주는 의미를 지닌다. 달은 조국 광복을 상징하는 빛이요, 항상 마음 속에서 광명을 발휘하는 불성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심월(心月)’,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하여 밤하늘의 달이 천강(千江)에 비추듯이 부처의 광명이 모든 중생들의 마음 속을 비춘다고 한다. 깨달음이라는 황홀한 종교적 신비 체험이 달빛을 통하여 탐미적으로 묘사되는 관월시(觀月詩)가 만해의 한시에 6수 있다. 밀교의 관법에 월륜관(月輪觀)이 있다. 금강계 만다라의 모든 부처님은 월륜 가운데 앉아 계신다. 둥근 달이 형상이 원만하여 부족함이 없어 그의 빛과 청정과 청량하여 밀교에서 종종 상징적으로 활용한다. 달이 곧 마음이 되고 마음이 곧 달이 된다. 월륜 밖에 다시 심념(心念)이 없고 심념의 자체 전부가 월륜에 의지한다. 오직 월륜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반연이 없어야 한다.
《보리심론》에는 “나와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월륜의 형상과 같다. 월륜으로써 비유하는 까닭은 만월원명(滿月圓明)의 체가 보리심(깨달음의 마음)과 상류(相類)하기 때문이다.”19) 송나라 곽암선사가 마음을 소(牛)에 비유하여 수행 과정을 소를 찾아가는 10단계로 도식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 아래에 송(頌)을 한 《십우도》가 있고, 티벳에서는 코끼리(象)를 묘사한 《십상도(十象圖)》가 있고, 중국에는 소 대신 말을 묘사한 《십마도(十馬圖)》가 있다.20)
만해가 달을 보고 달의 변화하는 모습을 마음이 깨달음의 과정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표현한 것은 선시사에서 처음 있는 창작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월욕생(月欲生)〉 〈월초생(月初生)〉 〈월방중(月方中)〉 〈월욕락(月欲落)〉 4수의 연작 관월시(觀月詩)를 짓기 전에 달을 보고 묘오(妙悟)의 경지에서 시작(詩作)을 시도하는 〈견월(見月)〉과 달과 함께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에서 노는 〈완월(玩月)〉을 살펴보자.
幽人見月色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달이 안 보이랴 一夜總佳期 밤새도록 좋은 밤이네. 聊到無聲處 달을 따라 말 없는 경지에 이르러 也尋有意詩 좋은 시를 찾느니. 〈見月〉
空山多月色 빈 산에 달빛이 흘러 넘치고 孤往極淸遊 홀로 거닐며 마음껏 노니는 이 밤. 情緖爲誰遠 누구에게 멀리 달려가는 마음인가 夜?杳不收 밤은 깊어 가는데 정을 걷잡을 수 없네. 〈玩月〉
〈견월〉은 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며 무성처(無聲處)의 경지 즉, 차별과 분별이 끊어진 적멸의 경지인 오도의 경지에서 시선일여(詩禪一如)에 젖어 읊은 시이다. 관월시 4수를 읊기 전의 서시라 할 수 있는 시이다. 《십우도》의 ① 심우(尋牛) ② 견적(見跡) ③ 견우(見牛)의 경계를 지나 ④ 득??(得牛)의 경지에서 깨닫기 전의 마음의 모습과 깨닫고 난 후의 마음의 모습을 시화하기 위해 밤새도록 뜬 눈으로 달과 함께 노니는 모습이다. ‘온갖 소리가 끊어진 경지(聊到無聲處)’는 깨달음의 경지로 《십우도》의 ⑧인우구망(人牛俱忘)의 경계이다. 만해는 이 묘오(妙悟)의 경지에서 시를 찾고 있다. 완전히 선과 시가 만나는 순간이다. 선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유인(幽人)’은 만해 자신을 뜻한다.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달이 안 보이랴(幽人見月色)’는 휴정의 시 〈산거(山居)〉에 나오는 “산하는 주인이 있다지만 풍월은 공물이라 다툴 것이 없네(山河雖有主 風月本無爭)”를 연상케 하고,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진실로 내 것이 아니면 아무리 어려워도 한 올도 취할 수 없지만 오직 강 위의 시원한 바람과 산 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음악이요, 눈으로 보면 좋은 빛깔이네(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21)를 연상케 하는 시구이다.
결구 ‘야심유의시(也尋有意詩)’에서 시를 찾는다는 ‘심(尋)’으로 보아 곽암의 《십우도》① 심우(尋牛)에서와 같이 달을 통해 마음의 모습을 찾아 읊은 ‘심월시(尋月詩)’ 또는 ‘관월시(觀月詩)’의 연작시를 구상한 것으로 짐작된다. 〈완월(玩月)〉 시는 〈견월(見月)〉 시를 읊고 이어서 읊은 시라고 추측된다. 가을 밤 달빛이 흘러 넘치는 빈 산 속을 홀로 거닐며 달과 함께 마음껏 노닐며 사랑하는 님을 찾아 달려가는 만해의 심경을 노래한 시이다. 〈완월〉 시의 운자인 ‘유(遊)’와 ‘수(收)’를 쫓아서 다음 4수의 ‘심월시(尋月詩)’가 연작시로 읊어진다. 만해가 밤새도록 멀리 찾아가는 정의 대상은 부처요, 불성이요, 깨달음이다.
衆星方奪照 뭇 별들이 앞서나와 되게 쏘아 비치니 百鬼皆停遊 온갖 귀신들 활개치다 멈추네. 夜色漸墜地 밤빛은 점점 땅으로 엎드려서 千林各自收 수풀들이 그것을 모두 빨아들이네. 〈月欲生〉
蒼岡白玉出 푸른 언덕에 흰 달덩이 불끈 솟으니 碧澗黃金遊 산골 물에선 황금덩이 떠서 흐르네. 山家貧莫恨 산가의 가난을 한하지 마라 天寶不勝收 하늘이 주는 보배 다 거둘 길 없나니. 〈月初生〉
萬國皆同觀 이 달을 다 같이 보건만 千人各自遊 천인이 노는 모습 제멋대로네. 皇皇不可取 너무나 눈부시어 가질 수 없고 ??那堪收 너무 먼 하늘에 걸렸으니 손댈 수 없네. 〈月方中〉
松下蒼烟歇 솔 밑에 푸른 안개를 달님이 걷으시니 鶴邊淸夢遊 학 옆에서 맑은 꿈꾸네. 山橫鼓角罷 북과 피리소리 그치고 산도 드러누우니 寒色盡情收 찬 달빛 다하여 아쉽네. 〈月欲落〉
4수 모두 〈완월〉 시와 같이 ‘유(遊)’와 ‘수(收)’를 운으로 하여 읊은 연작시이다. 〈월욕생(月欲生)〉은 달이 막 떠오르려 할 때의 분위기를 인상적으로 묘사한 시이다. 달이 뜨기 전에 뭇별들이 먼저 나타나서 빛을 비추니 온갖 잡념과 번뇌가 사그러들고 울창한 숲속의 고요와 함께 그 위에 달을 뜨려고 준비하고 있다. 깨달음의 대원경지(大圓鏡智)에 이르려면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사그러드는 적멸의 상태에서 침심(沈心)하여 무심에 이르러야 한다. 기(起)구의 ‘뭇별들이 앞서 나와 되게 쏘아 비치니 온갖 귀신들 활개치다 멈추네’는 지혜광명인 발광지(發光智)와 환희심이 나타나 온갖 사량분별과 번뇌망심인 심마(心魔)를 항복받고 전구와 결구에서처럼 무심적멸의 경지에 이르러야 둥근 달을 기대할 수 있다.
〈월초생(月初生)〉은 달이 막 나올 때의 전경을 묘사한 시다. 백옥같이 깨끗한 마음의 달이 푸른 언덕 위에 나타나니, 산 속 시냇물 위에서는 황금덩이가 춤을 추며 놀고 있다. 일월천강(一月千江)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온 강물 위에 비추듯이 모든 중생들의 마음 속에 불성이 활동하고 있다. 기구와 승구는 ‘창강(蒼岡)’ ‘벽간(碧澗)’ 그리고 ‘백옥(白玉)’ ‘황금(黃金)’이 대구를 이루어 색채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회화적인 묘사이다.
전구와 결구의 ‘산가(山家)의 가난을 한하지 마라. 하늘이 주는 보배 다 거둘 길 없나니’는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 제8의 빈인보주(貧人寶珠)의 비유를 시화한 것이다. 보배로운 불성(心珠)이 가난한 산골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모두 평등하게 있으므로 한탄하지 말고 하늘이 본래 부여한 무가보(無價寶)의 천보불성(天寶佛性)을 활용하면 그 이익을 다 거둬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큼을 읊은 철리시이다. 〈월방중(月方中)〉은 달이 하늘 한복판에 떠올랐을 때의 전경을 읊은 시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월주(月珠)를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바라보건만 그 달 아래서 노는 모습은 천태만상 제멋대로다. 사람들이 달빛에 모두 함께 동화되어 부처의 대지대자(大智大慈) 대광명 속에 살았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불성을 찾아 부처가 되는 것을 스스로 너무 높고 먼 것으로만 생각하고 살고 있음을 읊고 있다.
기구와 승구에서 달이 중천에 떠서 만국의 사람이 달을 바라보며 부처의 자비 광명에 흠뻑 젖어 환희의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전구와 결구에서는 불성이 모양이나 크기가 없어서 우주와 하늘에 꽉 차 있어서 중생들의 눈과 마음으로 인식되지 못함을 나타내고 있다. 〈월욕락(月欲落)〉은 달이 지려 할 때의 전경을 읊은 시이다. 《십우도》의 ‘반본환원(返本還源)’의 경계와 같이 달이 처음 푸른 언덕에 떠서 차츰 중천에 이르러 마음껏 광명을 발휘하다가 마지막으로 학이 내일을 위해 나래를 접고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달도 하룻밤의 활동을 정리하는 전경을 묘사한 것이다. 달빛 속에서 울리던 북소리와 피리소리가 끝나니, 산도 자려는 듯 드러눕는 것 같은데, 달 넘어갈 무렵의 늦가을 밤 한기가 오싹하다. 시인은 달이 지려 하자 너무나 그리워 들이숨을 쉬고 아쉬워하고 있다. 달을 보고(觀月) 달이 중천에 승천하는 모습에 따라 깨달음의 심적 과정을 묘사한 심월시(尋月詩)요, 영월시(텇月詩)이다.
만해의 선시는 그의 한시 165수 가운데 본 논문에 소개된 7수 외에 〈한적(寒寂)〉 2수, 〈효일(曉日)〉, 〈자락(自樂)〉, 〈한유(閒遊)〉, 〈비풍설폐내외호창흑지간서희작(備風雪閉內外戶窓黑?看書戱作)〉 2수, 〈한음(閑吟)〉, 〈독음(獨吟)〉, 〈청효(淸曉)〉, 〈춘몽(春夢)〉, 〈청음(淸吟)〉, 〈향로암즉사(香爐庵卽事)〉, 〈오세암(五世庵)〉, 〈견앵화유감(見櫻花有感)〉, 〈증고우선화(贈古友禪話)〉, 〈신청(新晴)〉, 〈증고우선화(贈古友禪話)〉와 송광사에 소장된 무제(無題)의 시 2수를 포함하여 25수 이상이 된다.
2) 시조에 나타난 선시 만해의 시조는 《한용운전집》 1권에 39수가 수록되어 있고, 1970년 11월 8일 《독서신문》 창간호 특집 〈한용운 유작시 시조편〉에 37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1989년 발행한, 최동호가 편집하고 해설한 《한용운시전집》 제4부 시조에는 41수가 수록되어 있다. 만해의 시조에도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선시가 많이 있다. 대표적인 선시가 〈춘주(春晝)〉 2수이다.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春晝 1〉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쌉쌀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꿍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春晝 2〉
〈춘주〉는 원래 《불교》 96호 (1932년 6월 발행) 권두언으로 발표된 것인데 뒷날 《민성(民聲)》 29호 (1948년 10월 발행)에 〈공화란타(空華亂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고 있으며, 이때까지도 두번째 시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22) 〈춘주〉는 불립문자인 선의 특성을 시적 미감을 통해서 멋지게 나타낸 시조이다.
유마거사는 재가의 거사이면서도 불교의 깊은 뜻에 통달한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물이다. 중국 당나라 왕유가 유마거사를 자처하였고, 만해도 유마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님의 침묵》에서 ‘침묵’은 유마의 침묵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해는 미완성이지만 《유마힐소경 강끝렝?번역하고 강설하였다. 《유마경》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유마의 침묵’은 선가에서 《유마경》을 선서로 삼는 유명한 법문이다.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이때 ?똑珦?아무 말이 없었다. 문수보살이 찬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리의 세계는 문자나 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진실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禪)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부득이 그 언어는 고도의 상징 또는 역설적 표현일 수밖에 없다. 침묵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래서 《유마경》에서 유마의 침묵은 최고의 법문이 된다.
〈춘주(春晝)〉는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에는 시의 제목이 〈춘화(春畵)〉(344쪽)라고 되어 있는데 〈춘화(春畵): 그림같은 봄날〉보다는 〈춘주(春晝): 봄날의 낮〉가 시의 내용으로 보아 맞다. 그리고 시조 〈춘조(春朝)〉가 있는 것으로 보아 따사로운 봄날 아침과 낮에 시를 쓴 것으로 본다. 〈춘주〉는 따사로운 봄날 낮에 《유마경》을 읽는데 바람에 나는 꽃잎이 글자를 가렸다. 처음에 붙인 제목 〈공화란타(空華亂墜)〉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꽃(空華)’은 허공에 핀 꽃으로 본래 실체가 없는 번뇌 망상을 상징하는 선어이다. 번뇌 망상을 없애고 진리의 길에 이르는 길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인 참선의 체험뿐이다. 그러니 구태여 꽃 밑의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선의 세계를 시화한 것이다. 선가에서는 부처님의 경전을 깨닫고 보면 휴지조각과 같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였다. 내 마음 속에 무진장한 여래지(如來智)가 함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해가 《유마경》을 번역 강설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었는지 모르겠다.
김대행은 〈한용운의 시조와 삶의 문제〉에서 〈춘주〉의 긍정적 의미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공화란타(空華亂墜)〉와 더불어 지금까지 살펴본 바 있는 불교적 시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의 의미 지향은 순접관계에 있는 긍정적 전개다. 이것은 대부분의 시조 작품에서 그 구성의 기본 구조로 초·중장의 병렬 관계가 종장에서 종결된다. 그런데 이같은 긍정적 의미 지향은 한용운의 경우 불교적 혹은 교훈적 작품에만 한정된다는 것이 특색이다. 〈선우(禪友)에게〉, 〈남아(男兒)〉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정서적 시조에 오면 그 의미 지향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23) 시조는 형식면에서 초·중장이 연결되고 종장이 분리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춘주〉의 형태는 초·중장이 전대절(前大節)로 분단되고 종장이 후소절(後小節)로 분립되는 가장 전통적인 시조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음악(唱)과의 관련성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한국 고전 시가 특히 시조의 전통적 특징인 것이다.
봄날에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초·중장에 서술되고 종장에 이르러는 한흥(閑興)이 결구를 이루게 된 것이다.24) 〈춘주〉의 두번째 시조를 “후각 심상인 ‘향(香)’과 청각 심상인 ‘꾸꿍이 소리’가 공감각(共感覺), 심상을 형성하여 고요한 선(禪)감각을 표출한다”25)고 김재홍은 분석하였다. 초장 ‘봄날이 고요키로 香을 피고 앉았더니’는 고요한 봄날 향을 피워 놓고 단정히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중장 ‘삽살개가 꿈을 꾸고 거미가 줄을 친다’고 한 것은 삽살개도 따스한 봄볕 아래 참선하듯이 졸고 있고, 거미도 자신의 본분사인 거미줄을 치고 있다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이 각기 불성을 발휘하고 있는 화엄성기(華嚴性起)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거미는 자기가 친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자유로워, 무애한 해탈 자유를 상징한다.
종장에서 ‘어디서 꾸꿍이 소리는 산을 넘어오더라’라고 결구한 것은 선시 이론의 극치인 뜻을 글자 밖에 나타내는 운외지미(韻外之味)를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산 너머에서 꾸꿍이 소리를 따라 깨달음, 봄의 정취가 들려오는 듯하다. 익재가 “도연명의 동편 울타리 밑 국화를 꺾어 들고 우두커니 남쪽 산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시구는 눈 앞의 경치를 묘사하지만 뜻은 글자의 밖에 들어 있다. 말은 다할 수 있으나, 의미는 다하지 못한다”26)고 한 경지를 표현한 명시조이다. 만해가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는데 총독부 돌집을 마주 보기 싫다 하여 북향집을 지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택호인 ‘심우장’은 곽암이 마음을 찾는 수행 과정을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아가는 10단계 과정을 그림과 송으로 묘사한 《십우도》에서 왔다. 그가 심우장 자택을 두고 노래한 〈심우장〉 3수의 시조가 있다.
잃은 소 없건만은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쏘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 1〉
소 찾기 몇 해던가 풀길이 어지럽구야 北岳山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매 정녕코 만나오리. 〈심우장 2〉
찾는 마음 숨는 마음 서로 숨박꼭질할 제 곧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잡은 줄 아옵서라 〈심우장 3〉
〈심우장 1〉은 1937년 12월 《불교》 제9집 12호에 발표된 것이고, 나머지 2수는 〈제심우장(題尋牛莊)〉이라는 제목으로 1938년 10월 《불교》 제16집에 발표된 시조이다. 〈심우장 1〉은 초장 ‘잃은 소 없건만은 찾을 손 우습도다’는 우리의 본래 자성은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다. 따라서 잃어버릴 것도 찾을 것도 없는 자리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소를 타고 소의 등 위에서 소를 찾듯이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찾는다. 중장은 설사 마음을 잃어버렸다 하더라고 실체가 없는 마음을 찾아서 지닐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종장은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는 중국 선종의 6조 혜능의 자성게(自性偈)의 뜻을 용사(用事)한 것이다. 혜능의 “본래무일물 하처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染塵埃: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물들겠는가)”는 마음(一物)은 실체가 없어서 번뇌망상의 진애가 낄 수가 없으므로 닦을 것도 없다는 뜻이다. 찾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마음의 본래자리를 읊은 것이다.
〈심우장 2〉의 초장은 마음을 찾아 참선 수행하느라 여러 해를 보냈다. 그 동안 번뇌와 갈등 속에 시름한 것을 ‘소 찾기 몇 해던가 풀길이 어지럽구야’로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중장은 북악산에 해와 달이 감도니 멀지 않아 종장에서 결구했듯이 소(마음)를 찾아 만나리라고 읊은 것이다. 〈심우장 3〉 초장은 소(마음)를 찾아 고심하는 노력을 표현한 것이고, 중장은 돌길을 뚫고 흐르는 물처럼 어지러운 풀길 속을 뚫고 소를 찾아 가깝게 다가가고 있음을 멋지게 묘사한 것이다. 종장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잡은 줄 아옵서라’ 역시 선가의 침묵과 무언의 시어를 통해 소(마음)을 잡아 깨달음을 완성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깨달음의 환희를 ‘말없이 웃어내거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失題)〉에서도 마음을 소에 비유하여 읊고 있다.
비낀 볕 소 등 위에 피리 부는 저 아이야 너의 소 짐 없거든 나의 시름 실어 주렴 싣기는 어렵잖아도 부릴 곳이 없어라 〈失題〉
‘비낀 볕 소 등 위에 피리 부는 저 아이야’는 《십우도》의 6단계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기우귀가(騎牛歸家)’를 용사한 것이다. 〈선경(禪境)〉과 〈선우(禪友)에게〉의 시조에서도 선의 세계를 읊고 있으나 앞에서 살펴 본 시조보다는 문학성이 뒤진다고 할 수 있다.
가마귀 검다 말고 해오라기 희다 마라 검은들 모자라며 희다고 남을쏘냐 일없는 사람들은 올타글타 하더라 〈禪境〉
天下의 善知識아 너의 家風 高峻한다 바위 밑에 喝一喝과 구름 새의 痛棒이라 묻노라 苦海衆生 누가 濟空하리오 〈禪友에게〉
〈선경(禪境)〉은 이직(李直)의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짐승은 너뿐인가 하노라’의 시조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어리석고 일없는 사람이 옳고 그름의 시비를 일삼는다고 읊은 것이다. 시비와 사량분별이 끊어진 무심무념의 경지가 선경이다. 〈선우(禪牛)에게〉는 정통 임제선풍의 할(喝)과 방(棒) 등의 불교 용어를 직접 시어로 읊은 것이어서 너무 교리를 드러내는 종교색이 짙은 시조여서 예술성과 선취가 없다.
3) 《님의 침묵》에 나타난 선시 《님의 침묵》은 백담사에서 1925년 8월 29일 밤에 시를 마무리하는 〈독자에게〉란 후기를 쓴 것으로 보아 ‘님’을 주제로 하여 여름 한 철에 쓴 연작시임을 알 수 있다. 《님의 침묵》이 세상에 출간되어 나오기 전에는 만해는 시인의 명단에 이름이 없던 사람이었다. 시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적이 없는 시단 외의 인물이다. 〈독자에게〉에서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라고 하였듯이 스스로 시인이라고 자처한 일이 없었다. 《님의 침묵》은 만해의 연구 대상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특히 ‘님’의 정체를 밝히는 논문 또한 부지기수였다.
만해는 그의 장편소설 《박명(薄命)》에서 스스로 님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님이라는 말은 무식한 사람들은 서방님이나 정든 님이나 그러한 데에만 쓰는 말인 줄 알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임금님을 님이라 써 왔고, 그 외에서 부모라든지 부부라든지 나라든지 어디든지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님이라고 쓴다는 것을 말한다.”27) 《님의 침묵》에서 ‘님’의 정체는 ‘부처’ ‘중생’ ‘조국’ ‘깨달음’ ‘불성’ ‘애인’ ‘자유’ ‘독립’ 등 다의적이고 복합적인 상징어이다.
《님의 침묵》은 만해가 깨달음을 얻어 선지(禪旨)가 무르익고, 3·1운동의 3년 옥살이를 통해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시집의 서문 격인 〈군말〉에서 밝혔듯이 이 땅의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메시지를 침묵의 시를 통해 게시한 시인 것이다. 이 시집의 맨 끝 시인 〈사랑의 끝판〉에서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네 가요, 이제 곧 가요”라고 재촉하듯이 이제 침묵을 깨고 사랑하는 님을 쟁취하고자 행동으로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해가 이 시집을 쓴 목적과 님의 정체가 드러난다. 송욱이 주장한 대로 《님의 침묵》을 자신의 오도의 세계를 님을 통해 한 편의 증도가로 연작해서 읊은 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독자에게〉에서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듯이 깨달음의 증도가로서 노래했다면 이런 후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해는 조국 광복이 이루어졌을 때는 자신의 시집인 《님의 침묵》에 담긴 메시지는 아무 소용이 없어 마치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은 무용지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송욱의 《님의 침묵 전편 해설》은 만해를 새롭게 발견한 만해 연구서 가운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님의 침묵》 88편의 시 가운데 만해가 선사(禪師)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선각자로서 선의 세계와 불교의 사상을 대체로 많이 ?藥?낸 시 몇 편을 골라 살펴보고자 한다.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라고 한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중생의 님이 석가모니가 될 텐데 만해의 경지에서는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고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없어요〉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하였는데,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는 논리적으로 불가한 언어 구조이다. 언어도단이요 반상(反常)의 언어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 즉, 공(空)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색(현상계)이 공(본체계)이고 공이 색이다. 순환하고 윤회하는 진리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밤낮으로 용맹정진으로 수행하는 만해의 마음으로 깨달음을 위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밤을 지키는 등불이 되고자 함이다. 《님의 침묵》 가운데 가장 보살의 자비사상이 드러난 시가 〈나룻배와 행인〉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룻배와 행인〉
〈나룻배와 행인〉은 부처님의 자비 속에서 살면서도 부처님의 은혜를 모르고, 저버리고 배반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날마다 스스로는 낡아가면서 그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대승 보살의 대자대비한 마음을 읊은 시이다. ‘나’는 석가요 불법, 보살을 상징함이고, ‘당신’은 중생이다. 나룻배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중생을 생사고해를 건너서 피안의 언덕으로 실어다 주는 지혜의 용선(龍船)이요 자항(慈航)이다. 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한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지옥에 찾아가 함께 고통을 나누며 먼저 지옥중생을 구제하고 나서 자신은 마지막으로 성불하겠다고 서원한 원력보살이다. 〈선사(禪師)의 설법〉에서도 대승 선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禪師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선사의 설법〉
〈선사의 설법〉은 만해의 혁명적인 선 법문이다. 선이란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창조적인 인식의 전환을 추구한다. 편견이나 집착에서 벗어나 본체의 세계인 공(空)의 세계(진리의 세계)에서 사물을 정견(正見)할 때 올바른 인식작용이 가능하도록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맑은 선정의 연못에 달이 비치듯이 나타나는 것이다. 첫 연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는 불교 교리에서 사람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고통을 면할 수 있음을 서술한 것이다. 만해는 2연에서 1연의 선사의 설법을 부정하고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입각한 대승선 법문을 하고 있다. 만해의 시에서 부정과 역설적 표현은 그의 시의 특징이다. 번뇌가 보리이고, 중생이 부처이다. 《보왕삼매경론》에서도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고 하였다. 현실을 떠난 설법은 관념의 세계요, 논리의 유희일 뿐이다. 만해는 잃어버린 조국에 살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님을 되찾아야겠다는 역사의식을 확고히 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잃어버린 조국을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일이다. 선사상에서는 집착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조국에 대하여 외면하고 무심해 버리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그러나 만해는 님을 사랑하는 밧줄을 끊을 수가 없다. 더 고통스럽더라도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여서 언젠가는 잃어버린 님을 되찾겠다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활선(活禪)을 부르짖고 있다. 그래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라고 읊은 것이다. 만해는 이미 죽음, 구속, 번뇌, 고통 등의 세계를 초월한 초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명상(冥想)〉에서도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天國을 꾸미라고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듯이 만해는 관념의 이데아 속에만 빠지지 않고 슬프고 우울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언젠가 되찾을 님(조국)을 위해 등불이 되고자 하였다. 〈선사의 설법〉은 일심으로 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노래하여 독자에게 짜릿한 감동을 주는 수준 높은 한 편의 대법문시 즉, 선시이다. 이 시에서 님을 불성이나 부처의 상징으로 보면 신앙심을 북돋우는 종교시가 된다.
5. 맺는말
만해는 〈나의 노래〉에서 자신의 시가 다른 일반시와 다른 특성을 시로써 읊고 있다.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닯어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 하면 아니 되는 까닭입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래 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르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幻想으로 들어가서 사그러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光榮에 넘치는 나의 적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沈默의 音譜를 그립니다.”
〈나의 노래〉는 만해 선시의 시론이다. 선가에서 “출격(出格) 대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찌를 기상을 지니고 있으니 부처님의 지나온 자취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만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송욱이 《님의 침묵 전편 해설》에서 만해의 시를 평하기를 “나는 20세기에 중국과 일본에 만해와 같은 대선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물며 현대의 모국어로써 하나의 시집을 증도가로 채운 대선사에 있어서랴! 또한 고래로 동양에서도 선종사상 ‘사랑의 증도가’가 없었던 것은 두말할 여지조차 없다”28)라고 하였다. 박노준·인권환도 《만해 한용운연구》에서 “만해의 한국시문학상의 위치는 육당의 신체시로부터 주요한의 신시에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데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사적(詩史的) 위치는 시어에 있어서 내적이요 동양적이며 사고적인 경지를 개척한 시사상의 사적(史的) 가치를 발휘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29)라고 하여 만해의 문학사적 위상을 평가하였다.
만해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된 시인으로 《님의 침묵》 한 권의 시집만으로도 현대시의 고전이 되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한문과 한글 모두 잘 구사하여 불멸의 문학작품을 일군 소설의 김만중과 가사의 정철과 더불어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은 평가받을 만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해의 한시나 시조는 《님의 침묵》의 큰 무게에 가려져 제대로 연구된 성과도 적고, 평가도 안 된 것이 사실이다. 미당은 《만해 한용운 한시선》에서 74수의 각 시를 번역하고 그 말미에 주석을 붙였는데 만해의 한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의(만해) 한시의 문장 맛은 그의 한글 시집 《님의 침묵》이 못 가진 것들도 상당히 많이 보완해서 가지고 있다. …… 이분의 한시가 이조(李朝)의 사가(四佳) 서거정(徐巨正)이나 자하 신위(紫霞 申緯)의 수준을 잇는 격과 풍미와 구성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게 되어서 참으로 흐뭇하였다. 아니, 그의 한시가 갖는 지조는 사가나 자하 같은 이조 한시의 최고봉으로서도 못 따를 데도 있는 것이다. 그가 전 한시사에 있어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심오하고 유력한 고봉 중의 하나였음을 새로 인식하게 된 것은 내게는 적지 않은 기쁨이 되었다. 신라 고운 최치원의 한시와 공통되는 점을 그의 한시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만, 그 정미(精味)와 지조(志操)에 있어 우리는 만해 쪽에 더 간절함을 느끼기도 해야 할 것이다.”30)
만해의 한시는 선시 문학사에서 그 전통을 계승하여 독특한 만해 선시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한시에서 현대시로 넘어오는 교량적 역할을 한 공적은 크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김재홍은 《한용운 문학 연구》에서 만해 문학의 문학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만해는 오히려 향가를 비롯한 麗謠, 조선조의 한시 시조 가사 등 전통시의 정신과 방법을 바탕으로 하면서 외래시의 구성 방법이나 스타일 상의 장점을 충분히 수용하여 창조적이면서도 독자적인 시세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해의 불교정신과 그의 시에 나타나는 은유법, 그리고 상징과 역설 등을 통해 엮어낸 선시 작품세계는 서정주와 조지훈 등의 시에 계승되어 한국시의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필자가 올해 만해 백일장에서 입상한 시 〈光復佛, 만해시여〉를 소개하며 본 논문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뼈 오그라?欲? 추운 禪房 하늘이 준 보배 얼싸보듬으며 貧道 이겨낸 외로운 禪師시여! 님은 뺏긴 나라 서러운 백성으로 시름 애오라지 만 섬 짊어진 고집 센 ?杖子 憂國 詩人이시지요? 슬퍼 눈물 흘리지 못해 獄中 희망 부여잡고 님은 절로 눈 속 피어난 紅梅花이시지요? 그 사랑과 節操로 雪嶽 百潭 달 비친 골물 속에 박잠긴 黃金 줏으며 님의 노래 불렀던 님은 眞人이시지요? 님 부르다 스곰 님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光復佛, 큰 바위 얼굴이시여!
첫댓글 우선 대충 보고 갑니다.다음날 시간 잡아 다시 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