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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벌을 장악하기 위한 실마리를 열고자, 매아리와 수련이, 전과 다른 방법으로 비사벌의 총군 광중행에게 우직하게 정면으로 부닥쳐, 그의 의중을 떠보고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일은 외견상 실패로 끝난 것 같았으나, 며칠 전 저녁 연달아 벌어진 일들을 상기해 볼 때 그것이 실패의 악수惡手인지 성공의 묘수인지는 예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은, 수풀을 뒤적여 뱀을 놀라게 하고, 자는 사자를 건드려 깨운 결과가 도출된 듯하니, 우선은 광중행이 거느리는 완산관아의 체포대를 피하고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았다. 괜스레 광중행을 만나, 그의 호기豪氣와 의협심, 국가 종복으로서의 충성심을 자극한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만일을 위해 두 분이 하루 속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같습니다.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요?”
매아리와 수련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다물이 염려스런 투로 말했다.
“한 가지 있긴 한데, 공자님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호호! 저희 두 사람이 신혼부부가 되고 공자님은 마부가 되는 거예요. 저희를 태우고 친정으로 신혼 나들이를 가면 되죠. 그러려면 공자님이 그럴 듯하게 변장해야 하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모험을 하는 거군요. 광중행이 속아 넘어갈까요?”
“광중행이 요로에 군사를 숨겼을 수도 있으나, 비사벌성(완산성)밖으로 오십 리만 벗어나면 안전해요. 거기서부터는 우리 군사들이 잠복해 있으니까요.”
“그러면 큰 길을 버리고 우회해서 가야 할까요?”
“아녜요. 오히려 왕의 대로가 안전할 것 같아요. 왕의 대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가 삼가촌三家村에서 동쪽으로 우회하면 됩니다.”
“혹시 만에 하나 광중행의 군사들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해 생각해 둔 비책은 있습니까?”
“없어요. 공자님이 바로 대책이에요. 공자님의 기지와 무예에 맡기기로 했어요.”
수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광중행에 의해 밖으로 유인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인당하더라도,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안전할 것 같아요.”
수련은 정탐을 보내 산채로 가는 길목을 조사하게 했다. 정탐이 돌아와 과연 산채로 가는 큰 길 몇 군데에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고, 다른 우회 도로들에서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알렸다.
“길목을 지키는 군사력이 얼마나 되던가요?”
수련이 정탐에게 물었다.
“각 길목마다 겉보기엔 이삼십 명이었습니다.”
“군사들을 따로 숨겨둔 기미는 보이지 않던가요?”
“그건 알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매아리와 수련은 신혼부부로 변장하고 다물 역시 사십대 마부로 꾸몄다. 누가 보아도 그럴 듯하게 얼굴을 바꾼 그들은, 준비한 마차를 타고 사해제일관 문을 나섰다.
여홍은 사해제일관에 남아 장원을 관할하며 관아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사해제일관은 하루에도 드나드는 손님들과 우마차, 말과 나귀들이 무수히 많으므로 세 사람이 특별히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매아리와 수련은, 불안감 속에서도 마치 신혼 후 친정 나들이라도 가는 듯 가슴이 설레고 흐뭇했다. 다물이 마부석에 앉아 그들의 길을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물이라는 존재는 믿음직스럽고 든든했다. 어떤 환난이 오더라도 다물과 함께 있으면 괜찮을 것 같고, 설사 함께 죽는다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다물과 동행하는 여인들의 마음은 가시덤불 속에 활짝 핀 꽃처럼 넉넉하고 행복했다.
다물은 그녀들과 달리 책임감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말을 몰고 사해제일관의 출입로를 나와 드넓은 왕의 대로로 접어들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마차 마부석과 손님석 사이의 칸막이를 두들겼다. 그 사이의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수련의 웃음과 함께 음성이 들린다.
“호호, 공자님, 이것은 공자님의 수고에 대한 선물이에요. 받으세요.”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물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머나! 그게 정말,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에요?”
매아리의 음성이다.
“그래도 손을 내밀어 보세요.”
다물이 손을 뒤로 돌려 내밀자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다물의 손바닥을 스쳤다. 다물이 받아 보니 그것은 구운 알밤이었다.
“잡수세요. 아주 맛있어요.”
다물이 입에 넣어보니 아주 달콤하고 맛있다.
“누구의 솜씨인지 모르나 참 맛있게 구웠군요.”
“호호호!”
두 여인이 동시에 웃었다.
“저희랑 같이 지내면 이보다 맛있는 것도 드실 수 있어요.”
정말로 유쾌한 나들이라도 가는 듯한 두 여인의 태도에 다물은 고소를 지었다.
396년 봄, 다물 22세
쌍두마차 한 대가 늦은 오후의 따스한 봄볕과 아득한 들판을 누비며 외견상 한가하고 정겨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다물은 이 위태로운 지경에 여인들이 태평한 태도를 보이자 자신이 부끄러웠다. 심기일전해 담대한 기백을 끌어올렸다. 그는 여인들의 호의와 인생의 행복을 생각하며 긴장 속에서도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노력해 보았다.
봄바람이 그의 품을 가득 채운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쉼과 더불어 하나님을 부르면서 심장에 의식을 집중했다.
396 봄 다물 22 매아리 17
이 무렵, 장당경의 제실에서는 구물 임금이 붕어하고 스물 두 살의 태자 여루가 보위에 올랐으니, 때는 을유년乙酉年(서기전 396) 봄이었다. 얼마 후 장당경의 첩자들로부터 임금의 백일잠행百日潛行(비밀 민정시찰)이 곧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갈이 천국화의 산채에 도착했다. 이 소문은 그 후 남녘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로부터 관가의 움직임이 더욱 기민해지고 천국화의 산채는 예전 어느 때보다 많은 긴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물의 마차가 북으로 십 여리 쯤 달렸을 때, 과연 수십 명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관문이 나왔다.
“멈춰라!”
맨 앞에서 창을 꼬나 든 한 군사가 소리를 질렀다.
다물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마차를 세웠다.
“안에 누가 있는가?”
“네, 저희 집 작은 주인 내외께서 타고 계십니다.”
“내리게 하라!”
다물이 안을 향해 말했다.
“나으리, 이 분 나리께서 내리라 하십니다.”
마차의 포장 문이 열리며 젊은 신랑과 신부가 조심스레 내려왔다. 군사는 남장의 매아리를 유달리 세밀하게 훑어보았다. 매아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본다. 다물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곁에서 보니, 남장 매아리의 매혹적이고 미염美艶한 얼굴에 군졸은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흠! 어디에 살며 목적지가 어디요?”
“소인들은 비사벌에 거주하옵고, 저희 집 작은 나리께서 갓 결혼해 장인어른 댁으로 나들이를 떠나고 있는 중입니다.”
다물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 세월 좋군.”
그가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 좋소.”
그들이 올라타려 할 때 군졸이 다시 불렀다.
“잠깐!”
두 사람이 뒤돌아보자 그가 물었다.
“여인네, 잠시 나를 보시오.”
신부로 분장한 수련이 고개를 들락말락 했다.
“거 참 예쁘게 생겼소. 완산성 인근에 산적 떼가 출몰하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조심하시오.”
“염려해줘서 고맙습니다.”
두 여인이 마차에 올라타고 다물이 말을 몰아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부 아저씨, 그간 잘 있었나?”
다물이 섬뜩해 돌아보니,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뜻밖에도 미목이 빼어난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사나이가 청포를 입고 긴 수염을 날리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서 있지 않은가! 완산관아의 총군 광중행이었다.
움찔 놀란 다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광중행의 얼굴을 주시했다. 광중행은 역시 무서운 자였다. 그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변장한 자신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는 듯했다.
다물은 침착을 잃지 않고 대꾸했다.
“덕분에 잘 있었소.”
“어디 가는 길이오?”
“나들이를 가는 길입니다.”
“오, 그래요? 아가씨는 잘 계시오?”
“네, 잘 계십니다.”
마차 안에서, 광중행과 다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매아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아리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려 하자 수련이 만류하며 속삭였다.
“괜찮을 거예요. 과히 염려하지 마세요.”
그 때 밖에서 광중행의 음성이 들려왔다.
“좋소. 어서 가보시오. 몸조심하시오.”
다물은 한바탕 치열한 악전고투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광중행은 그들을 선선히 보내주었다.
다물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고맙소. 대인도 몸조심하시오.”
다물이 다시 마부석에 올라앉았다.
“광중행이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우리 길은 이미 그가 손바닥 보듯 훤하게 보고 있을 것이오. 틀림없이 그가 앞쪽에 그물을 쳐놓고 있으리라 짐작되오.”
“이미 되돌아갈 수도 없는 기호지세예요. 그냥 부닥쳐보는 거죠.”
수련의 대답이다.
다물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로부터 오리쯤 나아갔을 때다. 앞 쪽의 길모퉁이에서 갑자기 수십 명의 기마병이 나타났다. 옷차림을 보니 관병 같았다. 그들은 다물의 마차에 천천히 접근하더니 가로막아 섰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광중행 그 자가 쳐 놓은 그물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
다물이 잔뜩 긴장해 있을 때 맨 앞에 선 장수가 매서운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다가 다물에게 물었다.
“혹시 안에 계신 분이 여왕마마 아니신가요?”
다물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안에서 문이 열리며 매아리가 소리쳤다.
“총군장님!”
“아버님!”
수련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지휘 장수가 말에서 내리더니, 무릎을 꿇었다.
“여왕마마!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다물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장수가 일어나 마차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다물은 그제야 자기 이마를 두드렸다. 그는 완산대렵 우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변장을 하고 있어서 얼른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총군장님,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오셨습니까?”
매아리가 물었다.
“마마의 연락을 받고, 관군과 일전을 치를 각오로 때를 맞춰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지금 뒤에서 우리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아리가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며 다시 물었다.
“혹시 오는 도중 관군과 부딪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여왕마마, 저희가 너무 지체해 큰 죄를 짓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녜요.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때를 꼭 맞춰 오셨어요.”
매아리는 산채의 군사들이 새삼 고마워 감격해 마지않았다.
우원의 군대는 수련의 연락을 받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산채를 내려와 요로의 관군들을 감시하고 있다가 적시에 매아리 일행을 영접했던 것이다.
우원의 기마군은 앞뒤에서 마차를 호위하고 최대한 속력을 내어 길을 재촉했다. 일행이 몇 십리 가지 않아서 수백 명의 기마병과 조우했다. 산채에서 나온 군사들이었다.
산채에 도착한 후 다물은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공자님, 위험한데 어디로 가시나요?”
매아리가 물었다.
“장원으로 다시 들어갈 작정입니다.”
“이미 광중행에게 신분이 노출되었는데, 다시 들어가다뇨?”
“염려하지 마십시오. 계획해 둔 바가 있습니다.”
“공자님, 잠깐만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매아리가 말했다.
“뭐가요?”
“광중행 그 자가 우릴 놓아줄 리 없는데··· 오늘 한 바탕 큰 난리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온 게 아무래도 수상쩍어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쩌면, 공자님 때문일 수도 있어요.”
수련이 의미있는 말을 하며 다물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공자님, 각별히 몸조심하세요.”
‘나 때문에 놓아주었다고?’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다물이 사의를 표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 매아리에게 부탁했다.
“제게 말 한 필만 빌려주십시오.”
다물은 말을 얻어 타고 작별을 고한 후, 잠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고쳐 산뜻하고 멋진 미장부로 되돌아왔다. 오는 길에 보니 관군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물은 광중행이 왜 두 여인을 놓아주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를 얼른 납득할 수 없었지만 다물 자신 때문에 놓아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수련의 말을 떠올리자, 짚이는 데가 있었다.
수련의 추측은 사실에 부합했다. 다물과의 약속이나 여홍을 우군으로 얻은 것도, 광중행이 두 여인을 다시 놓아준 일부 이유였을 것이다.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결정적 원인은 완산성 총군으로서의 그의 명예와, 남녘 명사로서의 그의 자존심이었으리라.
만일 다물이 그에게 다시 일대일 대결을 제의한다면(적장끼리의 일대일 대결은 당대의 관습),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는 부하들 앞에서 어떻게 이를 감당할 것인가? 불과 며칠 전에 다물에게 진 것이 부하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들 앞에서 그의 위신과 체통은 묵사발이 될 게 뻔했다.
또한 힘으로 잡으려 하다가 산채의 군사들과 접전하게 되어, 그들에게 패하기라도 한다면?
이런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원래 광중행은 처음부터 치밀한 계산을 한 후, 산채 여두목 매아리에게 겁을 줄 겸,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자신의 혜안도 과시할 겸, 또한 다물과의 약속에 결부해 그의 공명정대한 인품도 보여줄 겸, 그 곳에 나와 대기하다가 그들을 슬그머니 놓아주었을 터다.
수련은 이러한 사건의 정황과 추이를 사전에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매아리나 다물과는 달리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이번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물도 이런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말을 몰아 자정 무렵 사해제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 여유도 없이 다물은 새벽에 곧장 북쪽으로 길을 떠난다. 여섯 달이 지나 다시 오겠다는, 삼삼촌 촌장에게 주었던 언질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때마침, 매아리와 수련도 산채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다물이 그곳을 떠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제궁에서 밀파된 듯한 자들이 염려되기도 했으나 하나님께 생사를 맡기기로 하고 담대히 길을 나섰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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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1.7.2.한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