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깍쟁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동대문구 전농동이다. 지금은 시립 산업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동네의 한 한옥집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부터 대학교를 그곳에서 다니면서 졸업을 했고 무려 16년을 전농동에서만 살았다. 태어나서 청소년, 청년기의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고향이라기 보단 그저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로 밖에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간혹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질문에는 전농동이라고 확실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 망설이며 생각을 한다.
지금도 거리는 그 당시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서울 외곽에 형성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좁은 골목에 연이어 붙은 기와집들이 대문을 맞대고 있고 밤이면 희미한 백열등이 흔들리는 불빛으로 긴 골목을 비추는 곳이다. 앞집에서 큰 웃음소리가 나면 뒷집에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이면서도 그 집에 누가 사는지 몰랐다. 그저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서너 가구 식구들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문을 나서면 시멘트 벽돌담과 역시 시멘트로 된 보도 블록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가로수 외에는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는 삭막한 동네였다.
그래서일까? "고향"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향수, 안개빛 그리움, 막연히 나이 들어 돌아갈 안식처라는 느낌이 전농동에는 없다. 오히려 고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떠오르는 곳은 유년 시절에 잠깐 살았던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늠노리이다. 이 곳의 지명도 네 다섯 살 때의 기억력에 의한 것이고 보면 내게 있어서 이 곳이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지고 인식되어 있는 지 짐작할 만 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약 3년 동안 나는 그곳에서 자연을 위대한 스승 삼아 유아원, 유치원을 다녔다.
물빛 쪽빛 하늘, 바람이 불 때면 푸른 물결로 출렁이는 넓은 들판, 하이얀 구름이 떠 있는 담청색 강, 사 계절 각기 다른 자태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과 들풀들, 풀숲에서 야상곡을 연주하듯 떨며 떨며 울어대는 풀벌레들, 겨울이면 하얀 벌판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따사로운 햇살을 사모하며 서로의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마른 나무줄기들, 눈발이 가늘게 날리는 회색 하늘에 꼬리를 길게 흔들며 높이 날아오르던 가오리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이 운동장이었고 교실이었으며 배움의 교재였다. 자연이 4계절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선물로 주었고, 제 스스로 교실의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어 놓고 잔칫날처럼 우리를 초대했다. 지금도 그곳의 산과 들에서 뛰어 놀았던 추억을 떠올리면 내 마음은 마냥 설렌다. 그래서 나는 파주군 파평면 늠노리에 고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인생에 있어서 고작 15분의 1에 해당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주에서 자란 이 기간은 내 감성의 샘이 되어 때로 실비 같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때로 상실되어 가는 순수의 아픔으로 인해, 태풍을 동반한 격정적 비통함으로 떠오르곤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곳 역시 도시의 바람으로 오염되어 이제는 어릴 적 그곳이 아님에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회귀성을 지닌 연어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는 더해져 간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나는 지금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서너살 때 잠시 떠났다가 일곱 살에 정착한 이후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서울 그리고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에...
하루종일 흙 한 번 밟지 않아 발바닥조차 하얗게 표백되어 가는 이 낯선 이방인의 도시에서 여름이면 까뮈의 뫼르소가 되어 한없는 외로움과 고독에 빠져 말을 잃고, 가을이면 낯모를 그리움에 갈 곳 없는 방랑자처럼 방황을 한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10년 후에는 이 회색빛 낯선 도시를 떠나리라고. 도저히 정들지 않아 이 나이 되도록 외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도시, 낯선 곳을 떠도는 나그네처럼 진한 그리움과 향수로 몸살을 앓게 만드는 이 빌딩 숲에서 탈출하리라고 결심을 하는 것이다.
하긴 나이 들면 굳이 고향이 아니더라도 전원생활로 돌아가 흙내음 맡으며 살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어찌 나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와 가슴 한 켠에 진한 향수를 묻어두고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낯선 도시를 고향 삼아 살고 있을 게다. 때문에 TV나 신문에서 간혹 자신의 고향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눈이 커지고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경기에서는 고향 팀에 더 큰 애착을 가지고 응원을 한다. 또한 요즘도 고향 출신들끼리의 동창회나 체육대회는 타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즐거운 잔치자리가 된다.
남보다 앞서가지 않으면 퇴출 될 수밖에 없는 경쟁 속에서 바삐, 바삐를 외치다 어느 날 돌아보면 어릴 적 모습에서 너무 많이 떠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불현듯 돌아가고 싶어지는 시절, 돌아가고 싶은 곳... 고향!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삶에 지친 몸을 안고 찾아가면 언제나 버선발로 뛰어나오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 이제는 하얗게 쇤 머리카락과 얼굴 가득 주름 투성이인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지친 몸을 누여 단잠을 잘 수 있는 그러한 곳... 못나고 부실한 자식이어도 말없이 품에 안아 위로해주며 아침 일찍 떠나는 자식을 위해 새벽잠을 설치시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은 곳...
때문에 각박한 인심 속에서 분주히 생활하다가 일년에 두어 차례씩 고속도로 위에서 전쟁을 치르며 몸서리를 쳐도 다시 또 그 때가 되면 선물 꾸러미 알음알음 들고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리라.
그러나 메마른 가슴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봄비처럼 적셔주는 고향은 이상 속의 유토피아는 아닐까? 세월이 흐르면서 고향산천도 변하고, 게 살던 사람도 변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도 변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 속에서 다시 또 그리움을 안고 떠올리게 되는 이상향...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고향이 그리워 찾아갔더니 어릴 적 그 산천은 도시화의 물결 속에 뭉텅 잘려나가고 정겨운 얼굴들 간 데 없어 상실의 슬픔을 안고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 온 사람은 알게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깊어 가는 이 그리움증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향수병이다.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이 바람처럼 이 땅을 떠나 저 영원한 본향에 안겨 참 안식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는 병이다. 때문에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늘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가 고향을 떠나 이 땅에 잠시 소풍 나온 여행객들이다. 해지고 어두워지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땅에 사는 동안 얻어진 것 땅의 것이니 땅에 두고, 흙으로 지어진 육신은 흙으로 보내고 실바람 영혼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 그대, 우리 모두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리라. 떠나 와 있는 동안 진한 향수병으로 몸살을 앓게 만들었던 우리들의 본향, 참 고향으로... 저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하리라. 이곳, 제 2의 고향에서의 여행은 참으로 즐겁고 아름답고 행복했었노라고.
(동은)
첫댓글 고향,그 누구의 마음 속에도 영원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곳.그것은 아마도 특정 장소라기 보다는 지난 시절과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까 합니다.그러기에 고향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 하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