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1. 가창 상원리 박곡서당과 문평공 전백영
글·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시 달성군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 가창면 상원리. 대구에서 가창로를 청도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행정리가 있고, 다음 만나는 마을이 상원리다. 상원리는 달성군 가창면과 경산시 남천면 경계인 병풍산 남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뒷산 병풍산만 넘으면 경산 땅이다. 이 마을 병풍산 자락은 한때 인근 용계리 대한중석공장에서 운영한 중석광산[1975년 폐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상원리 박실[박곡]마을에 있는 박곡서당에 대한 이야기다.
원(院)이 있어서 상원리
상원(上院)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에 이곳에 있었다는 ‘원(院)’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원은 고려·조선시대 역원(驛院) 제도에 의해 중앙과 지방을 잇는 도로상에 설치된 국가운영 시설로, 역은 교통수단인 역마[馬]를, 원은 숙박시설을 제공했다. 참고로 조선후기에 발간된 조선시대 대구읍지 「역원(驛院)」조에는 지금의 다사읍 박곡리에 있었던 박곡원(朴谷院)은 확인되지만, 가창면 상원리에 있었다는 원은 나타나지 않는다.[다사읍 朴谷과 가창면 樸谷은 한자가 서로 다르다.] 참고로 현풍읍 원교리(院橋里)란 지명도 과거 그 지역에 있었던 ‘풍제원(豊濟院)’에서 유래됐고, 대구 북구 노원동(魯院洞)도 ‘대로원(大櫓院)’에서 유래된 것이다.
상원리는 1914년 상원동·창산동·박곡동·전평동을 합쳐 상원동이 됐고, 이후 상원리가 됐다. 상원리 자연마을로는 전평·창산·박실[안박실·바깥박실]·가재골·광정·내상원 등이 있다. 행정리를 지나 상원리로 들어서면서 우측 들판 가운데 자리한 마을이 전평이다. ‘넓은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전평(典坪·田坪), ‘논 모양이 마치 돈을 닮았다’ 해서 전평(錢坪) 혹은 ‘돈바지기’, 뒤편에 있어 ‘된바지기’라 했다는 등 다양한 설이 있다. 다음 만나는 마을은 창산(昌山)인데 다른 말로 마산(馬山)이라고도 한다. 과거 역졸들이 이곳에서 말을 사육했다는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박실[樸谷]은 옛날 이곳에 고을 관청에서 운영할 곡식창고를 세울 때 처음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도로변에 자리한 바깥박실과 북쪽 골짜기 안에 자리한 안박실이 있다. 가재골[가자곡]은 상원지 아랫마을로 산에 가죽나무가 많아서, 또는 계곡에 가재가 많아 붙은 이름이라 한다. 광정(廣亭)은 상원지 위쪽 마을로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 다래덩굴 너머로 크고 좋은 정자가 있어, 혹은 광정사라는 절이 있어 광정이라 했다고 한다. 내상원[안상원]은 이름 그대로 상원리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참고로 창산마을에는 한때 ‘사택마을’이라 불렸던 곳이 있다. 과거 ‘대한광업주식회사 달성광업소’ 사택이 있었던 곳이다. 1915년 처음 광산이 개발되고 한국전쟁 때 중석광산이 재개발되면서 광산촌이라 불릴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기도 하다.
문평공 파계 전백영
전백영[全伯英·1345-1412] 선생은 지금의 대구 수성구 고모동 출신으로 고려 말, 조선 초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벼슬을 한 문신이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러 대구읍지 「인물조」에는 고려 조 인물로 빈우광·배정지·서균형 등이 나타나고, 조선 조 인물로는 첫머리에 전백영 선생이 올라 있다.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 요약해보면 대략 이렇다.
선생의 본관은 옥산(玉山)인데 옥산은 지금의 경산이다. 옥산전씨 시조 옥산군 전영령(全永齡)의 6세손이며, 아버지 광정대부 판밀직사 상호군 전의용(全義龍), 어머니 정부인 월성최씨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수성구 시지 고모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후 파동으로 이거했다.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사마시(1368) 장원을 거쳐 문과(1371)에 급제했다. 고려 우왕 때 간관으로 있으면서 이인임의 죄를 탄핵하다 좌천된 후, 경남 하동으로 귀양 갔다. 조선조에서 간의대부·경상도도사·병조전서·풍해도[황해도]도관찰출척사·대사헌·동지경연사·예조판서·경상도도관찰출척사·경기도관찰사·지의정부사 등을 지냈으며, 1404년(태종 4)에는 하정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68세 때인 1412년(태종 12)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기를 청해 태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았고, 그해 고향 시지에서 향년 68세로 졸했다. 청백리에 올랐으며, 호는 파계(巴溪),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선생의 호 파계는 선생이 거처했던 신천 상류, 지금의 파동[파잠]을 말한다.
박실 박곡서당
박곡서당(樸谷書堂)은 상원리 박실[바깥박실]에 있다. 문평공 전백영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재실이자 서당이다. 본래 이 재실은 내상원[안상원]에 있는 선생 묘소 곁에 있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근 행정리 한천서원이 헐릴 때, 그 재목을 가져다 1872년 경 안박실에 있는 정부인 인천이씨 묘소 옆에 재실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재실 화재로 인해 다시 선생 묘소와 정부인 묘소 중간쯤, 후손들이 많이 세거하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박곡서당이라 이름 했다. 이때 ‘재(齋)’가 아닌 ‘서당’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묘소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재’가 아닌 ‘서당’으로 했다고 한다. 이후 1964년 중건하고, 1984년 7월 담장 바깥에 새로운 문평공 신도비를 다시 세우고, 1993년 기존 강당 북서쪽에 건물 한 동을 더 건립했다.
현 박곡서당 강당 숭정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좌측에서부터 2칸 방, 2칸 대청, 1칸 방이며, 전면에는 모두 유리창호를 설치했다. 대청에는 박곡서당·숭정당·박곡서당기·박곡서당 상량문 등이 걸려 있다. 대청 종도리에는 묵서(墨書)로 ‘1964년 2월 20일 진시(辰時)에 기둥을 세우고, 21일 미시(未時)에 상량했다’는 상량문이 적혀 있다. 대문은 앙지문(仰止門)으로 3칸 솟을대문인데 가운데 한 칸만 문이고 좌우 각 한 칸씩은 행랑이다. 박곡서당 동쪽으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재 문평공 종손이 거주하고 있는 종택, 옥산고택(玉山古宅)이 있다.
에필로그
우리나라 전(全)씨는 본관이 다양하다. 정선·죽산·천안·완산·성주·옥산·경주·옥천·나주·용궁·팔거 등이 있다. 하지만 본관과는 상관없이 대부분 우리나라 전(全)씨 도시조(都始祖)는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이라는 인물이다. 전씨는 본관은 달라도 뿌리는 같다는 동족(同族) 의식이 있다는 것. 가창면에는 상원리 박곡서당 외에도 또다른 전씨 문중 유적이 있다. 가까이 전평에 검암(儉庵) 전동식(全東植)이 건립한 거연정(居然亭), 행정리에 고려개국공신 전이갑·전의갑 장군을 모신 한천서원과 옥천전씨 재실인 염수재, 인근 수성구 파동에는 문평공 전백영의 5세손인 계동 전경창을 기리는 무동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