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20. 560년 전 그녀는?
긴 연휴 끝이었던 2016년 5월 8일 일요일. 해설사 근무일은 아니었지만 육신사를 찾았다. ‘제20차 묘골 방문의 날’ 행사와 함께 몇 분의 문중 어르신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매년 양력 5월 2째 주 일요일에 개최되는 이 행사는 순천 박씨 충정공파 종인들의 한마당 큰 잔치이다. 이 행사는 충정공파 종친회와 청장년회에서 주관하는데 2016년으로 20회를 맞았다. 참고로 이 행사는 2017년 현재 순천 박씨 충정공파 종친회장으로 있는 박도규 선생께서 청장년회 초대회장에 취임하던 해인 1996년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행사의 성격은 여느 종중과 유사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들의 문중 세거지인 묘골과 육신사에서 개최된다는 점이다. 박일산[박비]이 묘골에 처음 종택을 지은 것이 1479년[성종 10]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면 540년, 박일산이 묘골에서 태어난 때를 기점으로 하면 묘골 박씨의 역사는 무려 560년이 넘는다. 게다가 묘골에는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는 물론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인 박중림의 사우까지 있는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초창(初創)의 역사로는 오백년이 넘고 중창(重創)의 역사만으로도 사백년이 넘는 묘골 박씨 문중의 랜드마크 태고정이 있는 곳도 묘골이다. 한마디로 묘골은 묘골 박씨 문중의 성지(聖地)인 셈이다.
이날 필자는 육신사 뜰에서 진행된 ‘묘골 방문의 날’ 행사를 객(客)의 입장에서 즐길 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루 종일 해묵은 미스터리가 필자를 괴롭혔다.
‘그녀는 어찌되었을까? 그녀는 어찌되었을까? 그녀는 어찌되었을까?’
1. 충노(忠奴)·충비(忠婢)·충복(忠僕)
‘충노·충비·충복’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혹시라도 다음과 같이 한자로 쓰면 이해에 도움이 될는지?
‘忠奴·忠婢·忠僕’
이 셋은 모두 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종’이라는 뜻이다.
솔직히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동적이라고 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 역사에는 ‘충노·충비·충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알고 있는 ‘충복’의 대표적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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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호수 정세아(鄭世雅)는 영천지역 의병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장남인 백암 정의번이 임란 중 왜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전장에서 정의번이 전투에 함께 참전한 자신의 종 억수에게 “나는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죽을 까닭이 없다. 내 곁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억수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와 노주(奴主)는 일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아버지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는데 종이 어찌 혼자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하고 주인인 정의번과 함께 전장에서 최후를 맞았다. 후에 정의번의 묘소 앞에 충노 억수의 묘를 세우고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 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4백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정씨 집안에서는 묘사(墓祀) 때마다 억수의 묘에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고경명(高敬命) 장군 등을 기리는 광주 포충사(褒忠祠) 경내에는 ‘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는 거대한 자연석비가 하나 있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장군집의 종이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최후를 맞은 공경명 장군과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자신도 나중에는 고경명 장군의 첫째 아들 고종후와 함께 전투에 참전하여 주인과 함께 전사했다. 후대에 와서 포충사가 세워질 때 고씨 문중에서 잊지 않고 이들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연안 이씨(延安李氏) 집성촌에는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芳草亭)’과 마을 연못인 ‘최씨담(崔氏潭)’이 있다. 또한 그 곁에는 화순 최씨 부인의 정려각과 풍기 진씨 부인의 열행비각이 있다. 그런데 화순 최씨 부인의 정려각 앞에는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 새긴 작은 석비가 하나 있다. 여기에는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임란 때 최씨 부인은 왜적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마을 연못인 최씨담에 몸을 던졌다. 이때 최씨 부인의 몸종인 ‘석이’가 부인을 구하기 위해 연못에 뛰어들었지만 그만 둘 다 죽고 말았다. 이후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남편이 연못가에 세운 정자가 그 유명한 방초정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부인이 빠져죽은 마을 연못은 최씨담이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연안 이씨 문중에서 충복 석이의 비를 만들었으나, 신분의 구별이 워낙 엄격했던 시절이라 차마 비를 세우지는 못하고 최씨담에 던져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가 1970년대에 와서 최씨담에서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는 천하명당으로 알려진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시조 이당의 묘가 있다. 위쪽은 영천최씨의 묘역이요 아래쪽은 광주이씨의 묘역이 되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둔촌 이집과 천곡 최원도의 우정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이 묘역의 한쪽 끝자락에는 당시 최원도의 여종 ‘제비[燕娥·연아]’의 묘가 있다. 제비는 자신의 주인인 최원도의 방 다락에 주인의 친구인 이집과 그의 아비인 이당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집은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자였던 신돈을 비판한 뒤,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아비를 모시고 영천 땅의 최원도를 찾아온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이 비밀이 새어나가면 최원도와 이집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명한 종 제비는 스스로 자결을 택함으로써 주인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이었다. 이에 양 문중 묘역 한 편에 제비의 묘를 조성하고 지금까지 양 문중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 영주 선비촌 입구 한 편에는 두 기의 정려각인 열부각과 충복각이 있다. 조선말 이곳 순흥 땅의 반남 박씨 부인이 여흥 민씨 가문으로 출가를 했다. 그런데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어 그만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이웃에 살던 천석꾼 김아무개가 박씨 부인에게 연정을 품고 못된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부인은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함으로써 스스로의 결백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었으니 박씨 부인집의 하인 고만석(高萬石)이었다. 그는 마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자 홀로 상경하여 우여곡절 끝에 임금에게 알려 마님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이에 반남 박씨 부인에게는 열부의 정려가 내렸고, 고만석에게는 충복의 정려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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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노들은 자신의 주인을 빛내기 위해 조연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요즘은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도 있다지만 충노들이 살던 시대만해도 그렇지는 않았다. 신분상의 차별이 너무나도 분명했던 시절, 혹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이 있었다한들 그 스토리가 사실 그대로 세상에 전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충노들은 태어나기를 애시 당초 종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오직 주인의 손발 역할을 하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부모로부터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배웠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는 이번 이야기에서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의 ‘묘골 박씨’를 있게 한 것은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인 박일산[박비]이 살아남은 덕분이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여기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3대가 멸족되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무사히 박일산[박비]을 출산한 성주 이씨 부인. 그렇게 태어난 박일산[박비]을 몰래 거두어 키워준 것으로 알려진 성주 이씨 부인의 친정. 또한 성종 임금에게는 용서를, 박일산[박비]에게는 자수를 권유했다고 알려진 박일산[박비]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주인이 출산한 사내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낳은 딸과 바꾸어 길렀다고 전해지는 한 충비(忠婢).
다음은 정조(正祖) 임금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1799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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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아들 생원 헌(憲)·순(珣)·분(奮) 등도 함께 죽었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는 막 임신을 하였는데, 아들을 낳을 경우 연좌되게 되어 있었다. 여종 역시 임신을 하였는데,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이라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하였다. 출산을 하니 과연 아들이어서 여종이 맞바꿔 기르며,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는데, 성장한 뒤 자수하자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일산(壹珊)으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 17]에 복관되었으며…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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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부터 방초정, 화순 최씨 절부정려각, 풍기 진씨 열행비각. 가운데 화순 최씨 정려각 앞쪽의 붉은 원 안의 작은 비석이 충노 석이의 비석이다.
영주 선비촌 입구의 열부각[좌]과 충복각[우]
최원도의 충비 제비[연아]의 묘
2. 아! 진정 그녀는 어찌되었나!
묘골에서 파회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 정상부 우측에 박일산[박비] 부부의 묘와 함께 아버지인 박순과 어머니인 성주 이씨의 합폄묘가 있다. 이중 박순과 성주 이씨 부부의 합폄묘는 일명 ‘의관장묘(衣冠葬墓)’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의관장묘는 말 그대로 박순이 사육신 사건 때 참화를 입었던 탓에 그의 의관으로써 그의 시신을 대신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한편 묘골 옆 마을인 도채에는 박일산[박비]의 외할아버지인 이철주[이철근]와 외할머니인 능성 구씨의 묘가 있다. 이 역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려 540년의 세월을 본손인 성주 이씨가 아닌 외손인 묘골 박씨 문중에서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해왔다. 지금의 생각으로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왜 그녀(?)는 묘는 고사하고 조그만 빗돌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을까?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홍재전서·연려실기술·육선생유고·청장관전서·계당집·궁오집’ 등 수 많은 옛 기록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그녀(?)인데 어찌하여 이름 한 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제20차 묘골 방문의 날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지금의 묘골과 묘골 박씨를 있게 한 주연 같은 조연, 이름 모를 그녀. 지금이라도 그녀를 다시 되살려내면 안 되는 것일까!’
조선 후기 천재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는 자신의 저서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묘골의 박일산 이야기를 적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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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평소 긴 수염을 늘어뜨리며 높은 관(冠)을 쓰고 대장부로 자처하다가도 어려움에 다다라서는 이 여종만도 못한 자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여기에 절실히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덕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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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골 육신사 경내에서 개최된 2016년 「묘골 방문의 날」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