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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 이해와 선교적 접근
I. 종교의 의미와 기원
종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동물들과 구별된 것 중 하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무엇인가 의지하기 위하여 섬기는 대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 물론 체계화되지 못한 종교들도 있지만, 국가나 민족에 따라 오랜 기간 국민성이나 민족성, 그들의 문화나 사상, 생활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고도의 교리와 체제를 갖춘 종교들도 있다.
(1) 종교의 어원
종교는 어원으로 보아 ‘최고의 가르침, 마루 宗, 가르칠 敎’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영어의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에서 나온 말로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 혹은 ‘묶는다,’ ‘결합한다.’의 뜻으로 “인간의 죄로 신과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2) 종교의 기원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대체로 인류의 기원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며, 과학이나 무신론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소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종교도 역시 계속 존재할 것으로 보고 있다.
(3) 종교의 기능
흔히 종교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설명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심리적인 기능, 사회적인 기능, 문화적인 기능, 교육적인 기능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대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으로 이해한다. 가령 삶의 안정과 추구하는 욕구들에 대하여 만족심리적인 기능, 공동체의 질서와 사회통합적인 기능, 다양한 문화 창출을 통한 인간의 숭고한 가치정립문화적인 기능, 개혁과 변화로 인한 사회 적응과 새로운 가치정립교육적인 기능 등은 모두 순기능에 해당하지만, 창조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나 죄악을 조장하고 이를 당연시하거나 합리화하는 것,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함으로 우매화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자체를 제한함으로 맹목적인 인간으로 끌고 갈 가능성 등은 종교의 역기능에 해당하는 것이다.
II. 주요 종교 이해
1. 유교
1) 유교와 천명(天命) 사상
동양의 대표적인 종교라고 하면 유교를 꼽지만, 유교를 종교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유학’이라고 하며, 그 기원으로 보면 ‘유가’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중심 사상인 하늘 天의 개념만 하더라도 분명히 윤리적 관점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츰 만물을 낳고 기르는 주재자(主宰者)로 보게 되어 하늘 그 자체가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천명(天命), 천의(天意), 천도(天道), 천심(天心) 등은 모두 하늘의 작용을 이르는 말로 마치 명령하는 것과도 같다는 의미와 함께 하늘은 궁극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은 그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는 뜻으로 천명(天命)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진(先秦) 시대의 유학에서는 천을 ‘창조하는 자’로 표현하여 ‘하늘이 온 백성과 초목을 낳았다’는 뜻으로 시경의 천생증민(天生烝民)이나 좌전의 천생민이수지군(天生民而樹之君) 등과 같은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인간은 하늘로부터 인성을 명받은 존재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은 이 본성을 따라 행하면 곧 길(道)이 된다고 하였고(率性之謂道), 상제(上帝)의 개념은 차츰 후대에 내려오면서 천명과 인간성을 동일시함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는 하늘(天)이라는 글자 속에는 인간(大)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 초월적인 권위가 인간에게 내재된 것으로, 인간(小我)은 천명을 따름으로써 비로소 군자(大我)가 되는바 이는 곧 하늘과 사람은 하나라는 것이다.하늘을 도덕적 규범으로 윤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속에 내재된 윤리적 명령자로 규정한 것은 공자이다.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는 천명에 있으나 사실 공자는 천에 대해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것을 깨달았다(五十而知天命). 그러나 그는 하늘(天)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생사화복이 하늘에 있다(死生有名, 富貴在天)고 보았고, 도덕적인 책임까지도 하늘에 결부시켰다(獲罪於天無所禱也). 사실 천명을 만물의 창조 원리와 운명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한 사람은 주희(朱熹, 송대의 성리학자)이다. 그는 “하늘이 음양오행을 가지고 만물을 화생(化生)하는 데, 기(氣)로서 형(形)을 이루고, 이(理)가 거기에 부여되는 것이 마치 명령에 의한 것과 같다”고 하여 천명(天命)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또 부귀 사생(富貴死生)과 화복귀천(禍福貴賤)이 모두 태어나면서 결정된다고 함으로서 이는 모두 하늘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17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
2) 유교의 종교성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힘을 빌려 발전하게 된 유교의 천과 천명의 개념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론일 수는 있어도 절대적일 수는 없음을 스스로 자증하였으나, 하늘과 인간의 관계가 한국 유학에서는 천인무간(天人無間)으로 표현됨에 따라 천과 인의 매개체는 없어지고 결국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의 개념으로 연결되고 만다. 더구나 유교의 천명사상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론에서 떠나 결국 운명론으로 귀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에 엄청난 폐해를 끼치게 된다. 소위 복술과 사주팔자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의 유교에는 종교적인 측면이 없었다. 사실 공자(孔子)의 천명사상에도 두 가지의 측면은 있었다. 그 하나는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윤리적 측면이지만 다른 하나는 확실한 종교적인 측면이다. 물론 그의 신인동격사상(神人同格思想)은 이 두 가지 방향으로 구별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귀신 숭배, 천(天)의 숭배, 제왕 숭배를 용인하며, 산천 신들을 향한 제사와 식사 전의 ‘고수레’ 등은 분명한 종교적 측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이러한 종교적 관심을 ‘효(孝)’의 근거를 삼아, 제사행위를 오히려 ‘효행의 극치’로 설명하고 예찬하게 된다. 물론 유교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히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이며,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무슨 대가나 보상, 구복(求福)을 요구하지 않으며, 소위 주술적 요구나 세속적 욕망을 배격하며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입장은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하는데,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하지 않았으며, 다만 인간이 수도하는 것은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는바, 부자관계는 부자자효(父慈子孝)로 나타나게 되므로 조선(祖先)에 대한 제사는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효성으로서 의례는 효성의 정감을 담는 그릇이요,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살아있는 자들의 진실성 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3) 유교와 제사문제
공자 이전인 하(夏) 나라와 상(商) 나라 때에도 제사를 지낸 기록은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사의 대상은 부모가 아니었다. 뛰어난 옛 황제에 대한 제사로서, 그것도 자기 할아버지가 황제이기 때문에 지낸 제사가 아니고 어떤 황제가 훌륭하였기 때문에 지낸 제사였다. 한나라 임금인 야호순은 그의 아버지가 구수이고, 할아버지는 찬류이지만 그가 지낸 제사는 요임금이었다. 그러나 차츰 자기 아버지가 훌륭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황제만 지내던 것을 제후들이, 다음은 재상들까지 제사를 지내다가 그 후에 평민들까지 왕의 허락 없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강조타종교 이해 177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성리학자 주희 때부터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나 고구려 때에는 특수한 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까지도 불교국가에서는 조상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특이한 현상으로 불교가 무속종교와 혼합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여하튼 조선 태조 이후 고려의 국교인 불교가 유교라는 이름으로 성리학으로 그 자리가 바뀐 이후 사당과 신주, 제사가 강조되었으나 성종 때 김호라는 사람이 임금께 상계를 올려 사당과 신주에 대한 규찰을 건의한 것으로 보아 평민들에게는 제사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는 제사의 종교’라는 등식은 잘못된 생각이다.결론적으로 유교의 천명사상은 우주관이나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음으로 종교적 측면이 없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적 천명설 내지는 국가 태평을 추구하는 단순한 ‘충효의 윤리’로 축소 해석하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는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의 “신(神)”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불가지론(不可知論)’적 입장을 취한 공자의 천명사상은 우주관이나 신관이 뚜렷하지 않은 일원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불선교와 힌두교의 공통분모 격인 범신론적 사상을 가진 유교의 흐름은 후대의 신유교를 통하여 음양론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남녀 불평등론, 만물에 부여된 성별, 자연의 인격화 내지 신격화로 발전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조선말 대동교에서 발전된 ‘공자교’라는 이름의 종교가 실제로 선을 보인 적은 있으나 오래지 않아 스스로 소멸한 경우도 있다. 여하튼 우리나라의 유교의 형태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을 참고하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분명한 우상숭배요, 혼합종교인 것이다.
4) 유교의 구원관
공자의 경우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되, 인간적 각성과 자기 성숙을 강조하고, 추상적이고 논리인 용어인 성(性)이나 이(理)라는 용어는 즐겨 사용하지 않았다. 공자의 인간관 핵심은 인(仁)사상이다. 인간의 바람직한 덕의 총체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다. 또, 공자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천명(天命)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천(天)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거니와 이 본성을 따르지 않음이 곧 죄요 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맹자는 ‘천의 뜻’, ‘천의 섬김’, ‘성(性)과 천(天)의 통일성’ 등 공자보다 더 뚜렷한 범신론 사상으로 인간론에 결부시킨다. 물론 당시 순자(筍子)는 성악설을, 고자(告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음을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기 유교는 맹자의 성선설을 유교의 원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육신을 받았고, 하늘로부터 성품(性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누구나 수양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성178 세계선교의 길라잡이품을 따르면 요순이 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심(人心)이 천성(天性)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천인무간(天人無間)이 상태가 되나, 성(性)은 하늘에 가깝고, 심(心)은 인간에 가깝다. 그래서 맹자는 고자(告子)와의 논쟁에서‘맹자’라는 책의 ‘고자편’에서 성(性)은
➊ 버드나무(杞柳)와 같고, ➋ 고여 있는 물과 같으며, ➌ 선천적이며, ➍ 내면적이므로 결국 이 성(性)은 천명의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로 표현된 흐름(流)이다. 이 흐름이 조화를 이루며, 이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심(心)은 성(性)의 끝으로서, 곧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은 인(仁)이라는 성(性)의 끝이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羞惡之心)은 의(義)의 끝이요,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은 예(禮)의 끝이요,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은 지(智)의 끝(四斷)이라 함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다. 이 인성은 ‘선(善)’이라고 하는 천명(天命)의 작용으로, 인간의 의식이나 생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의식을 초월한 선은 그 밑바닥에 흐르는 성(性)의 움직임 그 자체이기 때문에 꾸준히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인간 자신을 가다듬고 수양하는 것을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고 한다. 이 존심양성(存心養性)이 곧 유교의 구원관이 되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 유교는 구원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사실은 구원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나 억지로 애를 쓰고 노력한다거나, 선을 쌓아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천명(天命)에 의한 인간의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인간도 신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본체와 인간의 본체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만물이 인간 속에 다 구비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 성(誠)이다. 정성이 있으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로되 정성이 없으면 만물의 존재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지성(至誠)을 강조한다. 유교가 말하는 인간 수련 구원의 목적은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天人合一). 소우주인 인간은 바닷가의 작은 파도와 같고, 이 파도는 오히려 큰 바다에 빨려 들어가 전체 바다의 일부로서 우주에 융합되고 합일된다. 이것이 천과 만물과 내가 일체가 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修身). 가정의 소중함도 알아야 한다(齊家). 국가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가 강조된 국가관이며(治國), 천하를 다스리며 평정한다는 개념(平天下)도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조화를 강조하고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아 우주와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사회 질서와 관계로 발전해 가는 최종적인 입장이다. 이 평천하는 질서와 조화의 측면에서 유교의 최종적인 이상(理想)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도 결과적으로 우주 곧 대자연 속에는 기(氣)가 충만하여서, 이 기(氣)가 도(道)에 부합하여 우리의 몸인 소우주에 충만하면 우리는 대자연의 호연지기와 합일이 되고, 이것이 잘 못 길러지면 줄어들어 도(道)에 부합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심양성수양의 원리를 통하여 태어날 때는 다 같이 태어났지만, 수양에 전념하여 호연지기가 잘 길러지면 군자(君子)로서 위로 자라게 되고, 버릇과 습관이 잘못되어 아래로 퇴화하면 소인(小人)이 되고 마는 것이다.
2. 불교
불교의 신도들은 이 삼보귀의(三寶歸依)를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삼는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불타(佛寶, Buddha)와 이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는 사성제 팔정도(八正道)로 요약되는 교리(法寶, Dharma), 그리고 석가모니의 도교(道法)를 설파함으로 추종하는 제자를 얻어 이를 조직화한 승가(僧寶, Sangha)로 이를 삼보(三寶)라고 한다. B.C 560년경 고타마 싯달타(Gautama Siddhartha)가 등장하여 불교라는 새 종교를 창시할 당시 인도의 중요한 사회적 특징은 카스트제도였고, 종교적 진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원천이라고 하는 베다(Veda)라는 경전을 사용하였으나 싯달타는 이것을 배격하였으며, 해탈을 얻기 위해 지적인 방법을 강조한 우파니샤드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업과 순환적 세계관인 윤회의 이론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석가는 아버지(淨飯王, Suddhodana)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모습을 본 후 출가하게 되어 각자불타(覺者佛陀), 지혜로운 자, 깨어 있는 자가 되기까지는 6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그는 혹독한 고행에 몰입하였으나 고행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어서 보드가야(Bodhgaya)의 보리수나무 아래 고요히 앉아 자기가 소년 시절에 경험하였던 무아경을 회상하게 되었고,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 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어 수백에서 수천 번의 전생을 회상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밤중에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한 업에 따라서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벽녘이 되어 사성제(四聖諦)를 깨닫고 해탈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감각적 욕망, 생존의 욕망, 무명(無明), 사견(邪見)을 없애는 길을 알게 되므로 그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여 그에게는 깨달은 사람, 곧 붓다(Buddha)라 불리게 되었다.
1) 佛寶(Buddha)
불교는 인간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도달한 불타(佛陀)가 되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수양과 노력의 성과로서 불타(佛陀, Buddha)가 될 수 있다. 이 불보 개념은 대승불교에서보다 소승불교상좌불교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불타, 싯달타(悉達多)등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각각 성자, 깨달은 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다. 상좌 불교의 이러한 인간적 스승으로서의 아라한(arhat)을 향한 생각과는 달리 대승 불교에서는 보살(菩薩, bodhisattva)로 붓다의 인간적인 요소보다는 초월적인 성격,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결정된 존재로서 자비,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의 표본으로서 특징지어지는 구원자임을 강조한다. 특히 대승불교가 제시하는 보살의 길은 발심(깨달음을 성취하여야하겠다는 보리심)을 냄, 서원붓다 앞에서의 진지한 소망 토로와 포부에 대한 서원, 예언의 과정을 거쳐 수행을 나서게 된다. 그 수행의 단계는 모두 열 가지로서 이는 소승불교의 아라한에 비교하면 보살 지망자는 매우 적극적이어야 하는 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정진(精進), 인욕(忍辱), 방편(方便), 지혜(智慧) 등이 그 18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중요한 덕목들이다. 그 외에도 상좌불교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특징들을 비교하여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소승불교 대승불교 사람을 개개로 분리된 개인으로 봄 사람을 다른 사람과 관련된 존재로 봄인간은 우주에서 자기 자신 밖에 없으며자신의 노력으로 해탈함 사람은 혼자가 아니며 자비로운 은총에 의하여 구원핵심 덕목: 지혜 핵심 덕목 : 자비종교는 수도승을 위한 것으로 전문적 직업 평신도를 위한 것으로 세상적 삶과 관련됨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라한(Arhat) 보살(Bodhisattva)부처 : 성인 부처 : 구주(구원자)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을 피함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정성들여 만듬 종교의식을 거부함 종교의식을 따름명상 기도(기원)보수적인 자유로움
2) 法寶(Dharma)
석가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Dharma)이 사성제 팔정도(四聖諦 八正道)이다. 체(諦)란 진리 인식의 대상이요, 팔정도(八正道)는 그 인식에서 오는 행위의 규범이다. 이러한 인식과 행위는 세계를 해탈하며, 열반(涅槃)으로 들어가기 위한 교훈이 된다고 한다. 불교의 교리는 이 사성제 팔정도에 있다. ⑴ 고제(苦諦, dukkha):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이다. 인생은 생로병사는 물론 인간 존재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의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는 최고의 문제는 이 고(苦)이다. 일반적인 지상생활에 만족을 줄 수 없으며(無常), 기쁨과 슬픔이 덧없음(無我)을 깨달아야 하는 데 진정한 삶에 이르려 한다면 이러한 사실에 부딪쳐야하고 또 그것이 수용되어야 한다. 인간 존재의 자체인 이 고(苦)를 형성하고 있는 경험의 덩어리를 5온(五蘊)이라고 하며, 물질적인 요소(色), 감정, 감각적 요소(受), 의식, 생각(想), 행동성, 의지작용(行), 순수 정신적 인식작용(識)으로서 이 모두가 무상함에 고뇌가 있는 것이다. 이 5온(五蘊)적 존재가 없어짐이 무아(無我)이며, 이 5온(五蘊)의 해체가 곧 열반(Nirvana)이다.⑵ 집제(集諦, tanha): 고(苦)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말한다. 때때로 욕망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나 산스크리트어로 탄하(tanha)는 집착(執)이라는 뜻으로 고(苦)의 생기(生起) 즉,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서의 욕망을 말한다. 무상한 5온(五蘊)으로 구성된 존재를 사람들은 영원한 자아타종교 이해 181(Ahtman)로 생각하고 이에 고집하며 무상한 세상에 집착함으로 과거 생활의 욕망이 현재 생활의 고뇌적 존재를 가져왔고, 현재의 욕망이 미래의 번뇌를 가져오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윤회(輪廻) 가운데 고(苦, Dukkha)의 생성원인이 되는 이 욕망은 무명지(無明知) - 욕(慾) - 업(業) - 생(生) - 무명(無明) - 으로 진행 되는 데 이 과정의 차단이 곧 해탈(解脫)이요, 열반이다. 이 집(集)이 고(苦)의 원인이며, 이 집(集)은 또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이 인연을 연기(緣起)라 한다.⑶ 멸제(滅諦, Nirvana): 번뇌, 곧 업(Karman)을 멸하여 중생으로서의 당하는 고(苦)를 면하는 것으로 절대적 진리 내지 구체적 실재인 열반(Nirvana)이다. 고뇌의 원인인 욕망을 멸하고, 단념하고, 일체의 집착을 버리면 고뇌를 떠나 열반에 이르게 된다. 불교인에게 있어서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반에 대한 입장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서 각각 다소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상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존재의 불행과 반복되는 환생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열반의 성취라고 하나 대승불교는 텅 빈 공(空)의 상태, 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열반이다. 존재의 현상적 요소들과 열반이 모두 공이라면 결국 현상과 열반은 서로 같아지고 그래서 현상 세계가 열반이고 열반이 현상세계가 된다(生死卽涅槃).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소승불교는 열반이 현상세계에 대하여 반대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나, 대승불교는 모든 차별과 대립을 소멸한 차별 없는 공(空)이 절대 유일의 진리인 동시에 이것을 깨닫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실현하는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佛性)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즉 이상향인 열반의 세계를 가리키며,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渴愛)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한 해탈을 얻음을 말하는 것이다.⑷ 도제(道諦, samy-ak, summa): 불교의 이상향인 열반(滅)에 도달하는 길(道)로서 구체적으로는 8정도를 이르는 말이다. 이 8정도에 의해 모든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集)을 제거하게 되고 열반(滅)에 이를 수 있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고,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고,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고, 정명(正命);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며,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노력하고, 정념(正念); 바른 신념을 가지며, 정정(正定);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법이다.
3) 僧寶(Sangha)
불교는 스승이 정해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진리를 신봉하는 자로서 그들에게 맞는 적합한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를 승가(僧伽, Sangha)라 한다. 본래의 어원으로는 ‘밀접한 결합’이란 뜻이며, 이 제도는 당시 인도 사회에 있었던 제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석가는 도를 닦으려면 출가하여 수도함으로 제자들의 공동체인 승가단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물론 재가 수도도 허용하였으나 그는 출가 수도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제자들이 182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출가하면 먼저 사문석자(莎門釋子)가 되는데 이들에게는 소위 평등의 원리가 적용된다. 일단 출가하면 가문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원리이다. 승려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승려의 규율 역시 매우 엄격하다. 범죄자, 군인, 채무자, 노예, 결핵 환자, 나병과 간질병 환자는 승려가 될 수 없고, 20세 이상으로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승가의 생활 역시 승려와 평민이 함께 지켜야 하는 5계율-살생, 도둑질, 음욕, 중상, 술 취함-의 금함은 물론 승려가 지켜야 5가지 계율이 추가된다. 머리를 깎고 독신생활을 하며 구걸과 명상과 연구를 하는 이들은 재가자들로부터 오히려 존경을 받으며 물질적 혜택(財施)을 받았으며, 대신에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에게 법시(法施)를 해야만 하였다. 가정에서 안주하지 아니하고 출가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사회, 우주 안에서의 안주함을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한 자들이었으나, 또 규율 자체가 출가자들에게는 매우 엄하고 재가자들에게는 매우 관대하였다. 누구든지 범죄자 불구자를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가할 수 있는 것처럼 환속 역시 가능하였다. 석가는 처음 여성을 승려로 받지 않으려 하였으나 유모의 권유에 의해 비구니 종단이 형성되었다.명상을 강조하고 소수의 수도승에게 국한된 소승상좌불교와는 달리 구원을 일반 대중에게 확대하고 교리도 진보적으로 해석, 적용하는 대승불교는 중국, 몽고, 한국, 일본 등 동남아로 전파되었고, 자유적인 성격이 강하여 나라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불교는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게, 학적으로도 변증과 이론의 체계화에 앞서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정토종(Amidism)은 중국의 그것보다 심오할 뿐만 아니라 호오넨의 제자 신란(Shinran)의 신앙 원리는 악한 사람의 구원을 이야기하므로 기독교의 신학적 분위기와 흡사하여 승가 발전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다.
3. 이슬람(Islam, 회교)
이슬람은 무함마드(Muhammad)가 세운 일신교이며 서아시아, 아프리카, 인도대륙,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현재 약 10억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한 신 알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자를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다. 검은 보석으로 불리는 원유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전쟁무기가 될 수 있고,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그들은 시간에 맞추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열성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주의자로 생각하기 쉬우나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며, 대단히 선교적이다. 아시아의 종교인 힌두교나 불교는 산을 배경으로 하는 사색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회교는 ‘아라비아 사막’이 그 배경이며, 대단히 동적이고 전투적이며, 호전적이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종교를 비판하거나 타종교와 비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구나 하늘로부터 직접 받은 종교라는 생각 때문에 역사적 배경이나 그 형성 과정을 논하는 자체를 인타종교 이해 183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아라비아의 애니미즘과 유대교, 기독교 심지어 다른 여러 종교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순종과 맹신만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와 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섯 개의 교리(五敎)와 회교를 지탱하는 다섯 개의 기둥(五柱)가 있다. 무함마드(Muhammad)은 A.D.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Mecca)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마저 여섯 살 되던 해 죽게 되어 그 할아버지의 손에 잠시 맡겨졌다가 삼촌인 오비드 알라에게 손에서 자라게 된다. 당시 무함마드에 속한 쿠라쉬족들은 달신인 알라를 섬겼는데 이들은 달신 알라가 메카의 카바신전에 있는 것으로 믿었다. 삼촌의 보호 아래 목동 생활을 하던 무함마드는 후에 대상 생활을 하다가 25세의 나이로 40세인 과부 카디야(Khadija)와 결혼을 하게 된다. 동굴을 좋아하던 그가 메카 근처 히라산의 어느 동굴에서 명상 중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데 그 때가 40세 무렵이다. 이것이 분명한 계시라는 확신을 심어준 사람은 그의 아내 카디야였으며, A.D. 632년 죽을 때까지 그는 22년 동안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교의 원년은 A.D. 622년 7월 16일이다. 그의 고향 메카에서 심한 박해를 받고 메디나(Medina)로 도망하게 되는데, 이것을 헤지라(Hijira)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으나 이러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자 예루살렘을 예배 중심지로 삼았던 그는 메카를 예배 중심지로 삼고, 유대인을 적으로 삼아 하루에 유대인 남자를 700명에서 1000명까지 죽였으며,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았다. 모든 예식도 기독교에 반하는 체제로 바꾸었으며, 메카 수복을 위하여 평화협정을 깨뜨리고 메디나 천거 8년 만에 무력으로 메카를 정복하여 유명한 검은 돌 카바(Ka’aba)를 안치하면서 우상들을 제거하고 알라를 유일한 신으로 선포하게 된다.1. 회교의 경전인 코란과 5개 기둥 회교의 경전인 코란(The Qur’an)은 ‘암송’ 혹은 ‘낭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14개 장(章, Sura)으로 된 코란은 모두 무함마드에 관한 것이다. 성경을 오염된 책으로 보는 이유는 무함마드만이 절대적인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란은 신에 의하여 직접 수령되어 암송되어 진 그대로 기록된 것이며, 본래 하늘에 있는 것을 알라신이 최초로 예언자에게 들려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예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만 인정한다. 코란을 다 암송하는 자들을 하피즈경건자라고 부른다. 회교도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개의 기둥은 반드시 순종해야 할 기본적인 준수 사항이다.
첫째 기둥, 신앙고백(Kalima): “야일라하 일라 알라(Iailaha illa Allah)”.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 기둥, 기도(Salat): 매일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한다. 해 뜰 때, 정오에, 오후 중반에, 해질 때, 잠잘 때. 경찰은 범인 체포보다 기도가 더 중요한 이유는 나라에 따라 기도하지 않는 죄를 더 크게 다스리기 때문이다.
셋째 기둥, 구제와 봉사: 무함마드가 고아로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구제와 봉사를 강조한다. 법적 구제(zakat)는 금전과 상품의 1/40, 농산물의 1/10이며, 자유헌금(sadaqa)있다.
넷째 기둥, 금식(Ramadan): 회교 월력 9월로 아라비아어로 라마단은 ‘태운다’는 뜻이다. 자기 절제와 헌신으로 어떤 형태의 음식, 술, 흡연, 성생활 모두 절제하여야 한다.다섯째 기둥, 순례(Haji): 일평생 한 번은 반드시 해야 한다. 구원의 필수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늙고 허약한 사람은 대신이라도 해야 한다.최근 걸프전으로 되살아난 것은 여섯째 기둥이다. 성전(聖戰, Jihad)을 말하며, 이방 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적인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2. 5대 교리와 공동 생활
첫째 교리: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으로 은혜나 자비보다 심판과 권위가 더 강조된다.
둘째 교리: 천사에 대한 신앙으로 가브리엘은 최고의 천사로 무함마드에게 코란의 계시를 전달하였다. 사탄은 인간과 천사 사이의 진(Jinn)이란 귀신 중 하나이다.
셋째 교리: 경전인 코란에 대한 신앙이다. 알라는 모세에게 율법(Torat)을, 다윗에게 시편(Zabur)을, 예수에게는 복음(Injil)을 주었으나, 최고의 거룩한 책인 코란을 무함마드에게 주었다고 믿는다. 코란을 들고 다니는 것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귀를 쫓기 위해서이다.
넷째 교리: 예언자에 대한 믿음이다. 구약의 22명을 꼽는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롯, 이스마엘,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 엘리사, 요나 등이며, 신약의 사가랴, 세례요한, 예수, 알렉산더 대제 등이다. 최고의 예언자는 무함마드이다.
다섯째 교리: 최후의 심판과 천국으로, 알라신이 저울로 심판하며 알라를 잘 믿는 사람은 음식과 술대접을 받고 미인과 결혼할 수 있다. 회교의 낙원은 ‘쾌락의 전당’이다. 이 땅에서는 엄하게 금하는 것이지만 천국에서 향락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기록에 없는 여섯 번째는 운명의 교리이다. 엄격한 운명론을 믿고 있다. 움마(Umma)는 그들의 공동체로서 정치와 종교가 하나이기 때문에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없는 엄격한 공동체이다.
회교의 사원은 이맘이 주재하나, 사원의 건립은 평신도 위원회가 담당하되, 절대로 한 개인의 헌금으로는 건립을 허용치 않는다. 성직자는 극장 출입, 담배, 술, 댄스, 노름, 소설 읽기, 재물 축적, 텔레비전 시청이 금지되며, 성법(聖法)으로 불리는 샤리아(Shari’ah)는 아라비아어로 ‘밝혀진 길’이라는 뜻으로, 정치, 사회, 종교, 사생활까지 규정하고 있다. 한 남자는 네 명의 여인을 거느릴 수 있되, 동등하게 취급하라는 원칙도 이 법이며, 도타종교 이해 185둑질한 사람의 손목을 자르는 것도 모두 이 법에 의한 것이다.
4. 샤머니즘과 그 외의 혼합주의
종교샤머니즘은 어원적으로는 퉁구스-만주어인 ‘샤먼(shaman)’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며, 만주어의 뜻은 ‘흥분하는 자’, ‘자극하는 자’라는 뜻이지만 파리어(Paris)의 ‘samana’, 산스크릿어의 ‘saramana’, 페르시아의 우상이나 제사를 의미하는 ‘shemen’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원시종교의 한 형태로서의 샤머니즘을 ‘무교’ 혹은 ‘무격신앙’이라고 한다. 민속적인 입장에서 ‘무속’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오히려 ‘무당 풍속’이 더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속 기능을 가진 이들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민속적인 예술 기능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속 기능은 테크닉만으로 되어 있지 않으며, 제도적으로는 신앙을 전제로 한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샤머니즘은 귀신을 섬기는 종교이며, 애니미즘과 함께 자연 숭배, 우주에 편만해 있는 초월적인 신에 대해 경배하는 ‘다신교’이자 ‘잡신교(polydemonism)’이다. 이들은 신령이 실재하며, 인간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앙은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범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특별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전역과 북아메리카 인디언, 심지어 에스키모인들에게까지 퍼져 있다.
1) 샤머니즘의 성격 샤머니즘의 성격은 매우 종합적이다. 종교, 의학, 민속,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 아니라, 학문적인 분야에서도 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도 모두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정신적인 질병으로 보는 견해 심리학이 있는가 하면, 귀신 들린 현상 신앙적 입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더구나 생활과 도무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부지 중에 전승되고, 전달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한국의 경우 아기를 낳아도, 병이 들어도, 시험을 치거나 사업, 여행, 농사, 예절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든 무속 신앙과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특별히 샤머니즘은 혼합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 스스로 타종교에 스며드는 힘이 대단하다. 유교와 샤머니즘, 불교와 샤머니즘, 힌두교와 샤머니즘, 이슬람과 샤머니즘, 어느 종교든 접촉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스며들어 그 종교 자체를 변질시키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강력한 침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래되는 곳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음을 솔직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2) 샤머니즘의 유형과 기능 샤머니즘의 종교적 주관자를 ‘샤먼’이라고 부른다. 샤머니즘은 다른 종교처럼 교리나 세계관이나 경전이 없기 때문에, 형태나 기능은 모두 샤먼에 따라 그 유형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우선 샤먼은 무(巫, 여자(무당))와 격(覡, 남자(박수))이 있으나, 한국의 사회는 분명히 남성 우위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무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것은 한국의 종교가 자연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여, 혈연 공동체인 가족 종교로서의 조상 숭배(Ancestor Worship)가 장자(長子) 혹은 장손(長孫)이 제사장이 되는 것과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무당은 일단 비정상적이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 개입될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매우 천하게 취급을 받는다. 혈연 중심의 가정 공동체에서 후손이 없거나 딸은 불가능함, 객사나 급살을 맞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방치되면 그들은 일단 ‘조상(祖上)’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원귀가 된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거나 불행한 일이 생기게 되면 가장 먼저 무당이 찾게 된다. 그래서 굿을 통하여 한(限)을 풀어주는 역할(解怨)을 하게 된다. 요즈음 멀쩡한 가정에서 굿이니 부적이니 하는 것은 무교에서 볼 때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무당은 유사시에만 제사장이다. 대개 샤먼은 직업무와 가무(家巫)로 구분하지만, 가정적, 모성적, 주부 신앙적인 가무는 그 근거 자료나 개념도 분명하지 않다. 가무(家巫)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미신적인 요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소박한 민중의 종교심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정화수, 고사, 터줏대감, 삼신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직업무는 ➊ 부모의 직업이 무당이라 그 직업을 상속하는 세습무, ➋ 맹인이나 생활 유지가 어려운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배워서 무당이 되는 학습무, ➌ 무병으로 인하여 내림굿을 하게 되므로 재주도 배움 내린 신을 몸주를 모시고 있는 강신무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신무는 주로 중부 이북 지방에서 지배적이고, 세습무는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적이라고 한다. 샤머니즘에서 보게 되는 샤먼의 기능은 사제(priest), 치병(medicine people), 예언(prophet)이지만 한국 무교의 경우 가락예무(歌樂藝舞)의 오락 기능이 있다. 사제의 기능은 신령을 제사하고 복을 비는 것(祈福)으로, 기우제, 기은(祈恩); 왕가의 제사, 기자(祈子); 삼신굿, 제왕마지, 성황제, 별신제시장의 장사를 위해, 안택신제(安宅神祭), 낙성제, 용신제, 대감제등이 있다. 치병을 위한 양재신사(禳災神祀)는 모든 질병과 재앙을 가져 온다는 악령과 악귀들을 제거하기 위한 제사나 금염(禁厭)을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 병원인 활인원(活人院)은 무의(巫醫)들의 몫이었다. 세종 11년 1429년 관설 의료기관을 제정하면서 열병의 경우 의생(醫生)과 더불어 무격(巫覡)이 함께 치료케 하였다. 삼국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유행하는 무당의 기능은 점복(占卜)이다. 소위 예언적 기능으로 신의(神意)를 전달한다고도 하나, 주로 기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샤먼이 신령과의 교통을 위하여 가무를 행하였는데, 한국 무교의 경우 가무행사가 농악과 같이 차츰 민간의 오락 행사로 변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 외의 주요 종교들과 한국의 혼합주의적 종교종교 이름 발생 나라 교조와 연대 주요경전 주요 특징 분포 지역도교(道敎) 중국 (서남부)노자(李耳)BC 770-476도덕경,태평경 등 무위자연 동양각국신도(神道) 일본 일본 전통 민속 신앙 민족 혼합 종교 일본유대교 유대(이스라엘)아브라함포로기 이후토라, 미쉬나탈무드구약에 근거하나유대민족주의전 세계분포 유대인힌두교 인도 브라만족BC 2-3000베다,우파니사드바가바드기타 등업과 윤회설요가와 고행 강조 인도와주변 지역대종교 한국(단군교)나철(1904 유신회로 시작) 삼일신고천부경자주적 항일운동현, 무속혼합주의 한국천도교 한국(혼합주의) 최제우1905 손병희 창시동경대전용담유사인내천(宗旨)유불선 혼합주의 한국원불교 한국(불교혼합)박중빈1916년정전대종경 우주원리: 일원상물질과 정신개벽 한국증산교 한국(혼합주의)증산 강일순1901년팔관법에 근거개벽 후천개벽 사상과仙우위 종교합일 한국 대순진리회 한국(증산교이단)박한경1969년 전경(典經) 옥황상제 강조해원상생 한국
III. 선교적인 접근
현대 사회는 부인할 수 없는 ‘다원주의 시대’이다. 하나의 종교가 많은 다른 종교를 만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혼합주의도 종교 다원주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교적인 면에서도 더욱 다양한 선교방법이 요구된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All things to all men)’ 전도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던 것처럼 여전히 다양한 선교방법이 요구된다. 절대적 진리인 복음을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깨고 나아가 증거 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며, 동시에 타종교에 대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1. 타종교를 보는 시각과 대화의 유형
1) 배타적인 시각
기독교 이외에는 계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는 참된 종교”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하기도 하여야 하며, 타종교인들과의 대화는 곧 개종을 전제로 함을 의미한다. 결국, 타종교는 거짓과 우상의 종교로 구원이 없다고 보는 시각이다. 대개 종교개혁자들과 19세기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이다.
2) 상호보충적인 시각
타종교와의 관계를 거짓과 진리와의 관계로 보지 않고 보충적인 차원에서 보는 시각이다. 즉 자연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몽학선생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자연종교를 통하여 어느 정도의 구원에 이르는 도움을 받고 기독교를 통하여 구원이 완성된다는 시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종교를 전도의 준비로 보았다. 완전히 배타적인 입장이 아닌 그리스도 밖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포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종교 다원주의적 시각
다양한 세계관들을 상대화시키는 다원주의적 상황은 종교적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여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들은 다원화 시대에 다양한 가치관과 종교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정 종교가 유일한 진리이며 가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다양한 종교들을 인정하면서 각 종교의 가치규범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종교 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기반은 자연주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이다. 즉 자연의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고, 그 안에서 점차 진화의 과정을 거쳐 종교도 형성되었으며, 기독교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의 중요성이 없어지고 교회 밖에도 계시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으로서 만인구원론에 근거한 시각이다. 복음전도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신자에게 기독교 신앙을 깨닫게 하여 신앙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으로 본다.
2. 기독교 신앙과 타종교
모든 종교는 그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과 교리와 종교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타종교 이해 189니라 그들 역시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거나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종교들도 있다. 한편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흡수성이 뛰어나 어떤 문화나 종교라도 쉽게 융합하는 혼합주의적 성격이 강한 종교도 없지 않다. 이러한 종교들의 특징과 성격들을 전제로 한 차이점과 유사성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내용이나 방법 면에서 유사점이나 차이점들을 구분하여 낸다 할지라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으며 또 그중에는 우연히 유사해진 것도 있고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대단히 차이가 있는 것도 있고, 차이점도 또한 그러하여 다르기는 다르면서도 내용이 서로 통하는 것이 없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비교법에는 으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신앙이 게재되기 마련이어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복음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복음 자체까지도 왜곡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나 기독교 자체의 갱신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은 고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앙으로서는 자체 갱신이나 선교적인 입장에서 타종교를 바르게 볼 수 없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선교적인 입장이라고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기독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인 조망을 원한다고 하면 신앙적인 접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인 접근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기독교는 믿음을 전제로 한 종교이다. 신앙적인 자세와 삶이 요구되는 종교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복음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원주의 시대에 다양한 종교를 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독교로서 타종교의 경계를 넘어야 하는 선교적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기독교는 종교학적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양한 종교와 신학의 파트너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는 왕좌에서 내려와 겸손과 개방을 지향하는 선교적인 자세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만 독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든 타종교인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요, 서로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그러기에 모두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된 세상,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선교는 다른 종교전통에 대한 상호 이해와 상호연대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도와야 할 것인데, 다른 종교와 가까이하면서,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종교나 문화가 인간의 문제해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중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19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신학적 접근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문화적인 이해로 타종교와 그것의 삶의 양식에 접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복음적인 신앙을 가질수록 타종교인들을 과소평가하거나 그들을 무조건 이단시하는 태도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오직 진리에 따라서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으로써 비판받고, 핍박받고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만, 비윤리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비문화적으로 타종교를 부당하게 취급해서 비난받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기독교 스스로도 사회 속에서 한 종교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질적 차이를 강조하며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고려하더라도 기독교도 현실적으로 하나의 종교이며, 기독교인은 한 사회 속에서 엄연한 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선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타종교에 대해 무지하고 배타적인 태도만을 지닌다면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며, 이것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조차 울타리에 가두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제부터는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혼합주의의 도전을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세계적, 역사적 신앙으로 재정비하여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더욱 분발하도록 자극하는 촉진제로 받아들이며, 위축되고, 배타적 고립의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더욱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굳건하게 기초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더욱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3. 종교 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 선교의 방향
회의론적 인식론, 서구 기독교의 쇠퇴, 종교 간의 교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과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신학의 변화, 그리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영향 등으로 타종교에 대한 문제의 핵심은 선교의 대상이기보다는 대화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오히려 강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각 종교가 다른 종교들 안에서, 다른 종교들과 함께 자신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통일을 꿈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유의해야 할 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 간의 대화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지금 우리는 타종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선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변론이나 진리의 우열을 가리는 토론이 되어서는 안 되며, 토론하거나 설득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고통과 갈망과 의지까지 포용해 주되, 그들이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의 은혜에 들어오도록 해야 하타종교 이해 191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개와 변화는 합리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또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에서 선교의 방법론이나 전략적인 차원의 재점검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가 취하여야 할 태도와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 기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복음은 순수하고 궁극적이다.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많은 표현은 불순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복음과 기독교는 엄격히 구분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복음이 아니다. 복음만이 기독교요, 기독교를 존재케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복음만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수많은 불순물이 포함되어 전해졌다. 그러한 결과가 기독교의 절대성에 손상을 입히며 오늘날과 같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대화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통하여 기독교가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철저히 성경적 검증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굳건하게 섬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에 기초했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오직 말씀으로”라는 모토 아래 이루어졌듯, 오늘날의 신학과 선교도 다시 한번 말씀으로 되돌아가 정체성 회복을 위한 산고의 진통을 치러야 한다. 기독교가 성경 중심주의를 버렸을 때, 즉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비성서적인 종교 다원주의가 발생하는 것임을 기억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종교 다원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계시에 관한 것이었다. 선교 현장에서 늘 마주치고 논쟁이 되는 것이 계시이기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연구와 타종교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함께 비교, 연구, 검토함으로써 참된 계시에 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앙의 재무장이 필요할 것이다.
넷째, 외부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내부의 갱신이 필요하다. 교회의 갱신을 통해 드러나는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의 모습 속에서 케리그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즉 기독교에는 참 진리가 있고, 온전한 구원을 제시하는 계시의 종교라는 복음의 핵심이 긍정적으로 타종교 세계에 드러날 수 있도록 먼저 기독교 내부의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다섯째,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타종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타종교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이지만,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를 지나치게 이분법적 관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멸망의 자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와 동일하게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요, 이웃으로 바라보는 열린 시각과 함께 관계중심의 선교로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들은 죄인이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선포할 책임을 뜻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특권을 뜻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섯째, 타종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전통종교에 대한 이해는 이분법적인 패러다임에서 출발함으로써 타종교 연구의 출발점을 봉쇄하거나, 그 연구방향을 일방적으로 규정지어 버렸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각은 타종교에만 악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자체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인 시각마저 형성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서 사람에 대한 배타성으로까지 전이되고 있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을 발생시키고야 말았다. 결국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는 것은 아직도 시대가 다원주의 상황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거나 혼합주의의 위험부담에 대한 무책임한 기피일 것이다. 성서와 교의는 연구하나 토양인 문화와 전통종교에 관하여는 무지한 복음주의 진영의 현실은 결국 감정적 대응 외에 할 일이 없게 되어버리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보다 깊은 타종교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사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타문화에 대한 적대적 사고, 기독교 우월주의, 그리고 획일주의에 기반을 둔 종교적 제국주의 전통에서 수행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선교는 다른 종교전통에 대한 상호이해와 상호연대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타종교에 맞추어서 그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주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타종교 이해와 선교적 접근
I. 종교의 의미와 기원
종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동물들과 구별된 것 중 하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무엇인가 의지하기 위하여 섬기는 대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 물론 체계화되지 못한 종교들도 있지만, 국가나 민족에 따라 오랜 기간 국민성이나 민족성, 그들의 문화나 사상, 생활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고도의 교리와 체제를 갖춘 종교들도 있다.
(1) 종교의 어원
종교는 어원으로 보아 ‘최고의 가르침, 마루 宗, 가르칠 敎’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영어의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에서 나온 말로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 혹은 ‘묶는다,’ ‘결합한다.’의 뜻으로 “인간의 죄로 신과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2) 종교의 기원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대체로 인류의 기원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며, 과학이나 무신론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소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종교도 역시 계속 존재할 것으로 보고 있다.
(3) 종교의 기능
흔히 종교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설명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심리적인 기능, 사회적인 기능, 문화적인 기능, 교육적인 기능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대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으로 이해한다. 가령 삶의 안정과 추구하는 욕구들에 대하여 만족심리적인 기능, 공동체의 질서와 사회통합적인 기능, 다양한 문화 창출을 통한 인간의 숭고한 가치정립문화적인 기능, 개혁과 변화로 인한 사회 적응과 새로운 가치정립교육적인 기능 등은 모두 순기능에 해당하지만, 창조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나 죄악을 조장하고 이를 당연시하거나 합리화하는 것,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함으로 우매화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자체를 제한함으로 맹목적인 인간으로 끌고 갈 가능성 등은 종교의 역기능에 해당하는 것이다.
II. 주요 종교 이해
1. 유교
1) 유교와 천명(天命) 사상
동양의 대표적인 종교라고 하면 유교를 꼽지만, 유교를 종교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유학’이라고 하며, 그 기원으로 보면 ‘유가’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중심 사상인 하늘 天의 개념만 하더라도 분명히 윤리적 관점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츰 만물을 낳고 기르는 주재자(主宰者)로 보게 되어 하늘 그 자체가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천명(天命), 천의(天意), 천도(天道), 천심(天心) 등은 모두 하늘의 작용을 이르는 말로 마치 명령하는 것과도 같다는 의미와 함께 하늘은 궁극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은 그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는 뜻으로 천명(天命)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진(先秦) 시대의 유학에서는 천을 ‘창조하는 자’로 표현하여 ‘하늘이 온 백성과 초목을 낳았다’는 뜻으로 시경의 천생증민(天生烝民)이나 좌전의 천생민이수지군(天生民而樹之君) 등과 같은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인간은 하늘로부터 인성을 명받은 존재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은 이 본성을 따라 행하면 곧 길(道)이 된다고 하였고(率性之謂道), 상제(上帝)의 개념은 차츰 후대에 내려오면서 천명과 인간성을 동일시함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는 하늘(天)이라는 글자 속에는 인간(大)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 초월적인 권위가 인간에게 내재된 것으로, 인간(小我)은 천명을 따름으로써 비로소 군자(大我)가 되는바 이는 곧 하늘과 사람은 하나라는 것이다.하늘을 도덕적 규범으로 윤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속에 내재된 윤리적 명령자로 규정한 것은 공자이다.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는 천명에 있으나 사실 공자는 천에 대해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것을 깨달았다(五十而知天命). 그러나 그는 하늘(天)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생사화복이 하늘에 있다(死生有名, 富貴在天)고 보았고, 도덕적인 책임까지도 하늘에 결부시켰다(獲罪於天無所禱也). 사실 천명을 만물의 창조 원리와 운명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한 사람은 주희(朱熹, 송대의 성리학자)이다. 그는 “하늘이 음양오행을 가지고 만물을 화생(化生)하는 데, 기(氣)로서 형(形)을 이루고, 이(理)가 거기에 부여되는 것이 마치 명령에 의한 것과 같다”고 하여 천명(天命)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또 부귀 사생(富貴死生)과 화복귀천(禍福貴賤)이 모두 태어나면서 결정된다고 함으로서 이는 모두 하늘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17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
2) 유교의 종교성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힘을 빌려 발전하게 된 유교의 천과 천명의 개념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론일 수는 있어도 절대적일 수는 없음을 스스로 자증하였으나, 하늘과 인간의 관계가 한국 유학에서는 천인무간(天人無間)으로 표현됨에 따라 천과 인의 매개체는 없어지고 결국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의 개념으로 연결되고 만다. 더구나 유교의 천명사상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론에서 떠나 결국 운명론으로 귀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에 엄청난 폐해를 끼치게 된다. 소위 복술과 사주팔자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의 유교에는 종교적인 측면이 없었다. 사실 공자(孔子)의 천명사상에도 두 가지의 측면은 있었다. 그 하나는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윤리적 측면이지만 다른 하나는 확실한 종교적인 측면이다. 물론 그의 신인동격사상(神人同格思想)은 이 두 가지 방향으로 구별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귀신 숭배, 천(天)의 숭배, 제왕 숭배를 용인하며, 산천 신들을 향한 제사와 식사 전의 ‘고수레’ 등은 분명한 종교적 측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이러한 종교적 관심을 ‘효(孝)’의 근거를 삼아, 제사행위를 오히려 ‘효행의 극치’로 설명하고 예찬하게 된다. 물론 유교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히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이며,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무슨 대가나 보상, 구복(求福)을 요구하지 않으며, 소위 주술적 요구나 세속적 욕망을 배격하며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입장은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하는데,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하지 않았으며, 다만 인간이 수도하는 것은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는바, 부자관계는 부자자효(父慈子孝)로 나타나게 되므로 조선(祖先)에 대한 제사는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효성으로서 의례는 효성의 정감을 담는 그릇이요,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살아있는 자들의 진실성 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3) 유교와 제사문제
공자 이전인 하(夏) 나라와 상(商) 나라 때에도 제사를 지낸 기록은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사의 대상은 부모가 아니었다. 뛰어난 옛 황제에 대한 제사로서, 그것도 자기 할아버지가 황제이기 때문에 지낸 제사가 아니고 어떤 황제가 훌륭하였기 때문에 지낸 제사였다. 한나라 임금인 야호순은 그의 아버지가 구수이고, 할아버지는 찬류이지만 그가 지낸 제사는 요임금이었다. 그러나 차츰 자기 아버지가 훌륭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황제만 지내던 것을 제후들이, 다음은 재상들까지 제사를 지내다가 그 후에 평민들까지 왕의 허락 없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강조타종교 이해 177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성리학자 주희 때부터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나 고구려 때에는 특수한 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까지도 불교국가에서는 조상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특이한 현상으로 불교가 무속종교와 혼합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여하튼 조선 태조 이후 고려의 국교인 불교가 유교라는 이름으로 성리학으로 그 자리가 바뀐 이후 사당과 신주, 제사가 강조되었으나 성종 때 김호라는 사람이 임금께 상계를 올려 사당과 신주에 대한 규찰을 건의한 것으로 보아 평민들에게는 제사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는 제사의 종교’라는 등식은 잘못된 생각이다.결론적으로 유교의 천명사상은 우주관이나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음으로 종교적 측면이 없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적 천명설 내지는 국가 태평을 추구하는 단순한 ‘충효의 윤리’로 축소 해석하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는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의 “신(神)”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불가지론(不可知論)’적 입장을 취한 공자의 천명사상은 우주관이나 신관이 뚜렷하지 않은 일원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불선교와 힌두교의 공통분모 격인 범신론적 사상을 가진 유교의 흐름은 후대의 신유교를 통하여 음양론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남녀 불평등론, 만물에 부여된 성별, 자연의 인격화 내지 신격화로 발전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조선말 대동교에서 발전된 ‘공자교’라는 이름의 종교가 실제로 선을 보인 적은 있으나 오래지 않아 스스로 소멸한 경우도 있다. 여하튼 우리나라의 유교의 형태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을 참고하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분명한 우상숭배요, 혼합종교인 것이다.
4) 유교의 구원관
공자의 경우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되, 인간적 각성과 자기 성숙을 강조하고, 추상적이고 논리인 용어인 성(性)이나 이(理)라는 용어는 즐겨 사용하지 않았다. 공자의 인간관 핵심은 인(仁)사상이다. 인간의 바람직한 덕의 총체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다. 또, 공자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천명(天命)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천(天)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거니와 이 본성을 따르지 않음이 곧 죄요 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맹자는 ‘천의 뜻’, ‘천의 섬김’, ‘성(性)과 천(天)의 통일성’ 등 공자보다 더 뚜렷한 범신론 사상으로 인간론에 결부시킨다. 물론 당시 순자(筍子)는 성악설을, 고자(告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음을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기 유교는 맹자의 성선설을 유교의 원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육신을 받았고, 하늘로부터 성품(性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누구나 수양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성178 세계선교의 길라잡이품을 따르면 요순이 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심(人心)이 천성(天性)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천인무간(天人無間)이 상태가 되나, 성(性)은 하늘에 가깝고, 심(心)은 인간에 가깝다. 그래서 맹자는 고자(告子)와의 논쟁에서‘맹자’라는 책의 ‘고자편’에서 성(性)은
➊ 버드나무(杞柳)와 같고, ➋ 고여 있는 물과 같으며, ➌ 선천적이며, ➍ 내면적이므로 결국 이 성(性)은 천명의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로 표현된 흐름(流)이다. 이 흐름이 조화를 이루며, 이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심(心)은 성(性)의 끝으로서, 곧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은 인(仁)이라는 성(性)의 끝이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羞惡之心)은 의(義)의 끝이요,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은 예(禮)의 끝이요,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은 지(智)의 끝(四斷)이라 함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다. 이 인성은 ‘선(善)’이라고 하는 천명(天命)의 작용으로, 인간의 의식이나 생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의식을 초월한 선은 그 밑바닥에 흐르는 성(性)의 움직임 그 자체이기 때문에 꾸준히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인간 자신을 가다듬고 수양하는 것을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고 한다. 이 존심양성(存心養性)이 곧 유교의 구원관이 되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 유교는 구원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사실은 구원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나 억지로 애를 쓰고 노력한다거나, 선을 쌓아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천명(天命)에 의한 인간의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인간도 신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본체와 인간의 본체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만물이 인간 속에 다 구비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 성(誠)이다. 정성이 있으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로되 정성이 없으면 만물의 존재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지성(至誠)을 강조한다. 유교가 말하는 인간 수련 구원의 목적은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天人合一). 소우주인 인간은 바닷가의 작은 파도와 같고, 이 파도는 오히려 큰 바다에 빨려 들어가 전체 바다의 일부로서 우주에 융합되고 합일된다. 이것이 천과 만물과 내가 일체가 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修身). 가정의 소중함도 알아야 한다(齊家). 국가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가 강조된 국가관이며(治國), 천하를 다스리며 평정한다는 개념(平天下)도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조화를 강조하고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아 우주와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사회 질서와 관계로 발전해 가는 최종적인 입장이다. 이 평천하는 질서와 조화의 측면에서 유교의 최종적인 이상(理想)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도 결과적으로 우주 곧 대자연 속에는 기(氣)가 충만하여서, 이 기(氣)가 도(道)에 부합하여 우리의 몸인 소우주에 충만하면 우리는 대자연의 호연지기와 합일이 되고, 이것이 잘 못 길러지면 줄어들어 도(道)에 부합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심양성수양의 원리를 통하여 태어날 때는 다 같이 태어났지만, 수양에 전념하여 호연지기가 잘 길러지면 군자(君子)로서 위로 자라게 되고, 버릇과 습관이 잘못되어 아래로 퇴화하면 소인(小人)이 되고 마는 것이다.
2. 불교
불교의 신도들은 이 삼보귀의(三寶歸依)를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삼는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불타(佛寶, Buddha)와 이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는 사성제 팔정도(八正道)로 요약되는 교리(法寶, Dharma), 그리고 석가모니의 도교(道法)를 설파함으로 추종하는 제자를 얻어 이를 조직화한 승가(僧寶, Sangha)로 이를 삼보(三寶)라고 한다. B.C 560년경 고타마 싯달타(Gautama Siddhartha)가 등장하여 불교라는 새 종교를 창시할 당시 인도의 중요한 사회적 특징은 카스트제도였고, 종교적 진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원천이라고 하는 베다(Veda)라는 경전을 사용하였으나 싯달타는 이것을 배격하였으며, 해탈을 얻기 위해 지적인 방법을 강조한 우파니샤드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업과 순환적 세계관인 윤회의 이론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석가는 아버지(淨飯王, Suddhodana)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모습을 본 후 출가하게 되어 각자불타(覺者佛陀), 지혜로운 자, 깨어 있는 자가 되기까지는 6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그는 혹독한 고행에 몰입하였으나 고행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어서 보드가야(Bodhgaya)의 보리수나무 아래 고요히 앉아 자기가 소년 시절에 경험하였던 무아경을 회상하게 되었고,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 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어 수백에서 수천 번의 전생을 회상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밤중에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한 업에 따라서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벽녘이 되어 사성제(四聖諦)를 깨닫고 해탈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감각적 욕망, 생존의 욕망, 무명(無明), 사견(邪見)을 없애는 길을 알게 되므로 그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여 그에게는 깨달은 사람, 곧 붓다(Buddha)라 불리게 되었다.
1) 佛寶(Buddha)
불교는 인간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도달한 불타(佛陀)가 되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수양과 노력의 성과로서 불타(佛陀, Buddha)가 될 수 있다. 이 불보 개념은 대승불교에서보다 소승불교상좌불교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불타, 싯달타(悉達多)등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각각 성자, 깨달은 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다. 상좌 불교의 이러한 인간적 스승으로서의 아라한(arhat)을 향한 생각과는 달리 대승 불교에서는 보살(菩薩, bodhisattva)로 붓다의 인간적인 요소보다는 초월적인 성격,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결정된 존재로서 자비,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의 표본으로서 특징지어지는 구원자임을 강조한다. 특히 대승불교가 제시하는 보살의 길은 발심(깨달음을 성취하여야하겠다는 보리심)을 냄, 서원붓다 앞에서의 진지한 소망 토로와 포부에 대한 서원, 예언의 과정을 거쳐 수행을 나서게 된다. 그 수행의 단계는 모두 열 가지로서 이는 소승불교의 아라한에 비교하면 보살 지망자는 매우 적극적이어야 하는 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정진(精進), 인욕(忍辱), 방편(方便), 지혜(智慧) 등이 그 18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중요한 덕목들이다. 그 외에도 상좌불교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특징들을 비교하여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소승불교 대승불교 사람을 개개로 분리된 개인으로 봄 사람을 다른 사람과 관련된 존재로 봄인간은 우주에서 자기 자신 밖에 없으며자신의 노력으로 해탈함 사람은 혼자가 아니며 자비로운 은총에 의하여 구원핵심 덕목: 지혜 핵심 덕목 : 자비종교는 수도승을 위한 것으로 전문적 직업 평신도를 위한 것으로 세상적 삶과 관련됨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라한(Arhat) 보살(Bodhisattva)부처 : 성인 부처 : 구주(구원자)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을 피함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정성들여 만듬 종교의식을 거부함 종교의식을 따름명상 기도(기원)보수적인 자유로움
2) 法寶(Dharma)
석가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Dharma)이 사성제 팔정도(四聖諦 八正道)이다. 체(諦)란 진리 인식의 대상이요, 팔정도(八正道)는 그 인식에서 오는 행위의 규범이다. 이러한 인식과 행위는 세계를 해탈하며, 열반(涅槃)으로 들어가기 위한 교훈이 된다고 한다. 불교의 교리는 이 사성제 팔정도에 있다. ⑴ 고제(苦諦, dukkha):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이다. 인생은 생로병사는 물론 인간 존재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의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는 최고의 문제는 이 고(苦)이다. 일반적인 지상생활에 만족을 줄 수 없으며(無常), 기쁨과 슬픔이 덧없음(無我)을 깨달아야 하는 데 진정한 삶에 이르려 한다면 이러한 사실에 부딪쳐야하고 또 그것이 수용되어야 한다. 인간 존재의 자체인 이 고(苦)를 형성하고 있는 경험의 덩어리를 5온(五蘊)이라고 하며, 물질적인 요소(色), 감정, 감각적 요소(受), 의식, 생각(想), 행동성, 의지작용(行), 순수 정신적 인식작용(識)으로서 이 모두가 무상함에 고뇌가 있는 것이다. 이 5온(五蘊)적 존재가 없어짐이 무아(無我)이며, 이 5온(五蘊)의 해체가 곧 열반(Nirvana)이다.⑵ 집제(集諦, tanha): 고(苦)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말한다. 때때로 욕망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나 산스크리트어로 탄하(tanha)는 집착(執)이라는 뜻으로 고(苦)의 생기(生起) 즉,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서의 욕망을 말한다. 무상한 5온(五蘊)으로 구성된 존재를 사람들은 영원한 자아타종교 이해 181(Ahtman)로 생각하고 이에 고집하며 무상한 세상에 집착함으로 과거 생활의 욕망이 현재 생활의 고뇌적 존재를 가져왔고, 현재의 욕망이 미래의 번뇌를 가져오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윤회(輪廻) 가운데 고(苦, Dukkha)의 생성원인이 되는 이 욕망은 무명지(無明知) - 욕(慾) - 업(業) - 생(生) - 무명(無明) - 으로 진행 되는 데 이 과정의 차단이 곧 해탈(解脫)이요, 열반이다. 이 집(集)이 고(苦)의 원인이며, 이 집(集)은 또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이 인연을 연기(緣起)라 한다.⑶ 멸제(滅諦, Nirvana): 번뇌, 곧 업(Karman)을 멸하여 중생으로서의 당하는 고(苦)를 면하는 것으로 절대적 진리 내지 구체적 실재인 열반(Nirvana)이다. 고뇌의 원인인 욕망을 멸하고, 단념하고, 일체의 집착을 버리면 고뇌를 떠나 열반에 이르게 된다. 불교인에게 있어서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반에 대한 입장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서 각각 다소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상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존재의 불행과 반복되는 환생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열반의 성취라고 하나 대승불교는 텅 빈 공(空)의 상태, 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열반이다. 존재의 현상적 요소들과 열반이 모두 공이라면 결국 현상과 열반은 서로 같아지고 그래서 현상 세계가 열반이고 열반이 현상세계가 된다(生死卽涅槃).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소승불교는 열반이 현상세계에 대하여 반대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나, 대승불교는 모든 차별과 대립을 소멸한 차별 없는 공(空)이 절대 유일의 진리인 동시에 이것을 깨닫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실현하는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佛性)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즉 이상향인 열반의 세계를 가리키며,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渴愛)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한 해탈을 얻음을 말하는 것이다.⑷ 도제(道諦, samy-ak, summa): 불교의 이상향인 열반(滅)에 도달하는 길(道)로서 구체적으로는 8정도를 이르는 말이다. 이 8정도에 의해 모든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集)을 제거하게 되고 열반(滅)에 이를 수 있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고,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고,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고, 정명(正命);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며,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노력하고, 정념(正念); 바른 신념을 가지며, 정정(正定);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법이다.
3) 僧寶(Sangha)
불교는 스승이 정해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진리를 신봉하는 자로서 그들에게 맞는 적합한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를 승가(僧伽, Sangha)라 한다. 본래의 어원으로는 ‘밀접한 결합’이란 뜻이며, 이 제도는 당시 인도 사회에 있었던 제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석가는 도를 닦으려면 출가하여 수도함으로 제자들의 공동체인 승가단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물론 재가 수도도 허용하였으나 그는 출가 수도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제자들이 182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출가하면 먼저 사문석자(莎門釋子)가 되는데 이들에게는 소위 평등의 원리가 적용된다. 일단 출가하면 가문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원리이다. 승려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승려의 규율 역시 매우 엄격하다. 범죄자, 군인, 채무자, 노예, 결핵 환자, 나병과 간질병 환자는 승려가 될 수 없고, 20세 이상으로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승가의 생활 역시 승려와 평민이 함께 지켜야 하는 5계율-살생, 도둑질, 음욕, 중상, 술 취함-의 금함은 물론 승려가 지켜야 5가지 계율이 추가된다. 머리를 깎고 독신생활을 하며 구걸과 명상과 연구를 하는 이들은 재가자들로부터 오히려 존경을 받으며 물질적 혜택(財施)을 받았으며, 대신에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에게 법시(法施)를 해야만 하였다. 가정에서 안주하지 아니하고 출가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사회, 우주 안에서의 안주함을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한 자들이었으나, 또 규율 자체가 출가자들에게는 매우 엄하고 재가자들에게는 매우 관대하였다. 누구든지 범죄자 불구자를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가할 수 있는 것처럼 환속 역시 가능하였다. 석가는 처음 여성을 승려로 받지 않으려 하였으나 유모의 권유에 의해 비구니 종단이 형성되었다.명상을 강조하고 소수의 수도승에게 국한된 소승상좌불교와는 달리 구원을 일반 대중에게 확대하고 교리도 진보적으로 해석, 적용하는 대승불교는 중국, 몽고, 한국, 일본 등 동남아로 전파되었고, 자유적인 성격이 강하여 나라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불교는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게, 학적으로도 변증과 이론의 체계화에 앞서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정토종(Amidism)은 중국의 그것보다 심오할 뿐만 아니라 호오넨의 제자 신란(Shinran)의 신앙 원리는 악한 사람의 구원을 이야기하므로 기독교의 신학적 분위기와 흡사하여 승가 발전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다.
3. 이슬람(Islam, 회교)
이슬람은 무함마드(Muhammad)가 세운 일신교이며 서아시아, 아프리카, 인도대륙,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현재 약 10억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한 신 알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자를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다. 검은 보석으로 불리는 원유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전쟁무기가 될 수 있고,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그들은 시간에 맞추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열성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주의자로 생각하기 쉬우나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며, 대단히 선교적이다. 아시아의 종교인 힌두교나 불교는 산을 배경으로 하는 사색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회교는 ‘아라비아 사막’이 그 배경이며, 대단히 동적이고 전투적이며, 호전적이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종교를 비판하거나 타종교와 비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구나 하늘로부터 직접 받은 종교라는 생각 때문에 역사적 배경이나 그 형성 과정을 논하는 자체를 인타종교 이해 183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아라비아의 애니미즘과 유대교, 기독교 심지어 다른 여러 종교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순종과 맹신만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와 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섯 개의 교리(五敎)와 회교를 지탱하는 다섯 개의 기둥(五柱)가 있다. 무함마드(Muhammad)은 A.D.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Mecca)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마저 여섯 살 되던 해 죽게 되어 그 할아버지의 손에 잠시 맡겨졌다가 삼촌인 오비드 알라에게 손에서 자라게 된다. 당시 무함마드에 속한 쿠라쉬족들은 달신인 알라를 섬겼는데 이들은 달신 알라가 메카의 카바신전에 있는 것으로 믿었다. 삼촌의 보호 아래 목동 생활을 하던 무함마드는 후에 대상 생활을 하다가 25세의 나이로 40세인 과부 카디야(Khadija)와 결혼을 하게 된다. 동굴을 좋아하던 그가 메카 근처 히라산의 어느 동굴에서 명상 중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데 그 때가 40세 무렵이다. 이것이 분명한 계시라는 확신을 심어준 사람은 그의 아내 카디야였으며, A.D. 632년 죽을 때까지 그는 22년 동안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교의 원년은 A.D. 622년 7월 16일이다. 그의 고향 메카에서 심한 박해를 받고 메디나(Medina)로 도망하게 되는데, 이것을 헤지라(Hijira)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으나 이러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자 예루살렘을 예배 중심지로 삼았던 그는 메카를 예배 중심지로 삼고, 유대인을 적으로 삼아 하루에 유대인 남자를 700명에서 1000명까지 죽였으며,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았다. 모든 예식도 기독교에 반하는 체제로 바꾸었으며, 메카 수복을 위하여 평화협정을 깨뜨리고 메디나 천거 8년 만에 무력으로 메카를 정복하여 유명한 검은 돌 카바(Ka’aba)를 안치하면서 우상들을 제거하고 알라를 유일한 신으로 선포하게 된다.1. 회교의 경전인 코란과 5개 기둥 회교의 경전인 코란(The Qur’an)은 ‘암송’ 혹은 ‘낭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14개 장(章, Sura)으로 된 코란은 모두 무함마드에 관한 것이다. 성경을 오염된 책으로 보는 이유는 무함마드만이 절대적인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란은 신에 의하여 직접 수령되어 암송되어 진 그대로 기록된 것이며, 본래 하늘에 있는 것을 알라신이 최초로 예언자에게 들려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예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만 인정한다. 코란을 다 암송하는 자들을 하피즈경건자라고 부른다. 회교도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개의 기둥은 반드시 순종해야 할 기본적인 준수 사항이다.
첫째 기둥, 신앙고백(Kalima): “야일라하 일라 알라(Iailaha illa Allah)”.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 기둥, 기도(Salat): 매일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한다. 해 뜰 때, 정오에, 오후 중반에, 해질 때, 잠잘 때. 경찰은 범인 체포보다 기도가 더 중요한 이유는 나라에 따라 기도하지 않는 죄를 더 크게 다스리기 때문이다.
셋째 기둥, 구제와 봉사: 무함마드가 고아로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구제와 봉사를 강조한다. 법적 구제(zakat)는 금전과 상품의 1/40, 농산물의 1/10이며, 자유헌금(sadaqa)있다.
넷째 기둥, 금식(Ramadan): 회교 월력 9월로 아라비아어로 라마단은 ‘태운다’는 뜻이다. 자기 절제와 헌신으로 어떤 형태의 음식, 술, 흡연, 성생활 모두 절제하여야 한다.다섯째 기둥, 순례(Haji): 일평생 한 번은 반드시 해야 한다. 구원의 필수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늙고 허약한 사람은 대신이라도 해야 한다.최근 걸프전으로 되살아난 것은 여섯째 기둥이다. 성전(聖戰, Jihad)을 말하며, 이방 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적인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2. 5대 교리와 공동 생활
첫째 교리: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으로 은혜나 자비보다 심판과 권위가 더 강조된다.
둘째 교리: 천사에 대한 신앙으로 가브리엘은 최고의 천사로 무함마드에게 코란의 계시를 전달하였다. 사탄은 인간과 천사 사이의 진(Jinn)이란 귀신 중 하나이다.
셋째 교리: 경전인 코란에 대한 신앙이다. 알라는 모세에게 율법(Torat)을, 다윗에게 시편(Zabur)을, 예수에게는 복음(Injil)을 주었으나, 최고의 거룩한 책인 코란을 무함마드에게 주었다고 믿는다. 코란을 들고 다니는 것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귀를 쫓기 위해서이다.
넷째 교리: 예언자에 대한 믿음이다. 구약의 22명을 꼽는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롯, 이스마엘,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 엘리사, 요나 등이며, 신약의 사가랴, 세례요한, 예수, 알렉산더 대제 등이다. 최고의 예언자는 무함마드이다.
다섯째 교리: 최후의 심판과 천국으로, 알라신이 저울로 심판하며 알라를 잘 믿는 사람은 음식과 술대접을 받고 미인과 결혼할 수 있다. 회교의 낙원은 ‘쾌락의 전당’이다. 이 땅에서는 엄하게 금하는 것이지만 천국에서 향락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기록에 없는 여섯 번째는 운명의 교리이다. 엄격한 운명론을 믿고 있다. 움마(Umma)는 그들의 공동체로서 정치와 종교가 하나이기 때문에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없는 엄격한 공동체이다.
회교의 사원은 이맘이 주재하나, 사원의 건립은 평신도 위원회가 담당하되, 절대로 한 개인의 헌금으로는 건립을 허용치 않는다. 성직자는 극장 출입, 담배, 술, 댄스, 노름, 소설 읽기, 재물 축적, 텔레비전 시청이 금지되며, 성법(聖法)으로 불리는 샤리아(Shari’ah)는 아라비아어로 ‘밝혀진 길’이라는 뜻으로, 정치, 사회, 종교, 사생활까지 규정하고 있다. 한 남자는 네 명의 여인을 거느릴 수 있되, 동등하게 취급하라는 원칙도 이 법이며, 도타종교 이해 185둑질한 사람의 손목을 자르는 것도 모두 이 법에 의한 것이다.
4. 샤머니즘과 그 외의 혼합주의
종교샤머니즘은 어원적으로는 퉁구스-만주어인 ‘샤먼(shaman)’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며, 만주어의 뜻은 ‘흥분하는 자’, ‘자극하는 자’라는 뜻이지만 파리어(Paris)의 ‘samana’, 산스크릿어의 ‘saramana’, 페르시아의 우상이나 제사를 의미하는 ‘shemen’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원시종교의 한 형태로서의 샤머니즘을 ‘무교’ 혹은 ‘무격신앙’이라고 한다. 민속적인 입장에서 ‘무속’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오히려 ‘무당 풍속’이 더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속 기능을 가진 이들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민속적인 예술 기능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속 기능은 테크닉만으로 되어 있지 않으며, 제도적으로는 신앙을 전제로 한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샤머니즘은 귀신을 섬기는 종교이며, 애니미즘과 함께 자연 숭배, 우주에 편만해 있는 초월적인 신에 대해 경배하는 ‘다신교’이자 ‘잡신교(polydemonism)’이다. 이들은 신령이 실재하며, 인간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앙은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범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특별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전역과 북아메리카 인디언, 심지어 에스키모인들에게까지 퍼져 있다.
1) 샤머니즘의 성격 샤머니즘의 성격은 매우 종합적이다. 종교, 의학, 민속,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 아니라, 학문적인 분야에서도 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도 모두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정신적인 질병으로 보는 견해 심리학이 있는가 하면, 귀신 들린 현상 신앙적 입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더구나 생활과 도무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부지 중에 전승되고, 전달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한국의 경우 아기를 낳아도, 병이 들어도, 시험을 치거나 사업, 여행, 농사, 예절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든 무속 신앙과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특별히 샤머니즘은 혼합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 스스로 타종교에 스며드는 힘이 대단하다. 유교와 샤머니즘, 불교와 샤머니즘, 힌두교와 샤머니즘, 이슬람과 샤머니즘, 어느 종교든 접촉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스며들어 그 종교 자체를 변질시키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강력한 침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래되는 곳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음을 솔직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2) 샤머니즘의 유형과 기능 샤머니즘의 종교적 주관자를 ‘샤먼’이라고 부른다. 샤머니즘은 다른 종교처럼 교리나 세계관이나 경전이 없기 때문에, 형태나 기능은 모두 샤먼에 따라 그 유형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우선 샤먼은 무(巫, 여자(무당))와 격(覡, 남자(박수))이 있으나, 한국의 사회는 분명히 남성 우위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무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것은 한국의 종교가 자연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여, 혈연 공동체인 가족 종교로서의 조상 숭배(Ancestor Worship)가 장자(長子) 혹은 장손(長孫)이 제사장이 되는 것과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무당은 일단 비정상적이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 개입될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매우 천하게 취급을 받는다. 혈연 중심의 가정 공동체에서 후손이 없거나 딸은 불가능함, 객사나 급살을 맞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방치되면 그들은 일단 ‘조상(祖上)’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원귀가 된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거나 불행한 일이 생기게 되면 가장 먼저 무당이 찾게 된다. 그래서 굿을 통하여 한(限)을 풀어주는 역할(解怨)을 하게 된다. 요즈음 멀쩡한 가정에서 굿이니 부적이니 하는 것은 무교에서 볼 때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무당은 유사시에만 제사장이다. 대개 샤먼은 직업무와 가무(家巫)로 구분하지만, 가정적, 모성적, 주부 신앙적인 가무는 그 근거 자료나 개념도 분명하지 않다. 가무(家巫)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미신적인 요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소박한 민중의 종교심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정화수, 고사, 터줏대감, 삼신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직업무는 ➊ 부모의 직업이 무당이라 그 직업을 상속하는 세습무, ➋ 맹인이나 생활 유지가 어려운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배워서 무당이 되는 학습무, ➌ 무병으로 인하여 내림굿을 하게 되므로 재주도 배움 내린 신을 몸주를 모시고 있는 강신무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신무는 주로 중부 이북 지방에서 지배적이고, 세습무는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적이라고 한다. 샤머니즘에서 보게 되는 샤먼의 기능은 사제(priest), 치병(medicine people), 예언(prophet)이지만 한국 무교의 경우 가락예무(歌樂藝舞)의 오락 기능이 있다. 사제의 기능은 신령을 제사하고 복을 비는 것(祈福)으로, 기우제, 기은(祈恩); 왕가의 제사, 기자(祈子); 삼신굿, 제왕마지, 성황제, 별신제시장의 장사를 위해, 안택신제(安宅神祭), 낙성제, 용신제, 대감제등이 있다. 치병을 위한 양재신사(禳災神祀)는 모든 질병과 재앙을 가져 온다는 악령과 악귀들을 제거하기 위한 제사나 금염(禁厭)을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 병원인 활인원(活人院)은 무의(巫醫)들의 몫이었다. 세종 11년 1429년 관설 의료기관을 제정하면서 열병의 경우 의생(醫生)과 더불어 무격(巫覡)이 함께 치료케 하였다. 삼국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유행하는 무당의 기능은 점복(占卜)이다. 소위 예언적 기능으로 신의(神意)를 전달한다고도 하나, 주로 기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샤먼이 신령과의 교통을 위하여 가무를 행하였는데, 한국 무교의 경우 가무행사가 농악과 같이 차츰 민간의 오락 행사로 변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 외의 주요 종교들과 한국의 혼합주의적 종교종교 이름 발생 나라 교조와 연대 주요경전 주요 특징 분포 지역도교(道敎) 중국 (서남부)노자(李耳)BC 770-476도덕경,태평경 등 무위자연 동양각국신도(神道) 일본 일본 전통 민속 신앙 민족 혼합 종교 일본유대교 유대(이스라엘)아브라함포로기 이후토라, 미쉬나탈무드구약에 근거하나유대민족주의전 세계분포 유대인힌두교 인도 브라만족BC 2-3000베다,우파니사드바가바드기타 등업과 윤회설요가와 고행 강조 인도와주변 지역대종교 한국(단군교)나철(1904 유신회로 시작) 삼일신고천부경자주적 항일운동현, 무속혼합주의 한국천도교 한국(혼합주의) 최제우1905 손병희 창시동경대전용담유사인내천(宗旨)유불선 혼합주의 한국원불교 한국(불교혼합)박중빈1916년정전대종경 우주원리: 일원상물질과 정신개벽 한국증산교 한국(혼합주의)증산 강일순1901년팔관법에 근거개벽 후천개벽 사상과仙우위 종교합일 한국 대순진리회 한국(증산교이단)박한경1969년 전경(典經) 옥황상제 강조해원상생 한국
III. 선교적인 접근
현대 사회는 부인할 수 없는 ‘다원주의 시대’이다. 하나의 종교가 많은 다른 종교를 만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혼합주의도 종교 다원주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교적인 면에서도 더욱 다양한 선교방법이 요구된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All things to all men)’ 전도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던 것처럼 여전히 다양한 선교방법이 요구된다. 절대적 진리인 복음을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깨고 나아가 증거 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며, 동시에 타종교에 대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1. 타종교를 보는 시각과 대화의 유형
1) 배타적인 시각
기독교 이외에는 계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는 참된 종교”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하기도 하여야 하며, 타종교인들과의 대화는 곧 개종을 전제로 함을 의미한다. 결국, 타종교는 거짓과 우상의 종교로 구원이 없다고 보는 시각이다. 대개 종교개혁자들과 19세기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이다.
2) 상호보충적인 시각
타종교와의 관계를 거짓과 진리와의 관계로 보지 않고 보충적인 차원에서 보는 시각이다. 즉 자연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몽학선생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자연종교를 통하여 어느 정도의 구원에 이르는 도움을 받고 기독교를 통하여 구원이 완성된다는 시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종교를 전도의 준비로 보았다. 완전히 배타적인 입장이 아닌 그리스도 밖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포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종교 다원주의적 시각
다양한 세계관들을 상대화시키는 다원주의적 상황은 종교적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여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들은 다원화 시대에 다양한 가치관과 종교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정 종교가 유일한 진리이며 가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다양한 종교들을 인정하면서 각 종교의 가치규범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종교 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기반은 자연주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이다. 즉 자연의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고, 그 안에서 점차 진화의 과정을 거쳐 종교도 형성되었으며, 기독교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의 중요성이 없어지고 교회 밖에도 계시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으로서 만인구원론에 근거한 시각이다. 복음전도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신자에게 기독교 신앙을 깨닫게 하여 신앙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으로 본다.
2. 기독교 신앙과 타종교
모든 종교는 그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과 교리와 종교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타종교 이해 189니라 그들 역시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거나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종교들도 있다. 한편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흡수성이 뛰어나 어떤 문화나 종교라도 쉽게 융합하는 혼합주의적 성격이 강한 종교도 없지 않다. 이러한 종교들의 특징과 성격들을 전제로 한 차이점과 유사성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내용이나 방법 면에서 유사점이나 차이점들을 구분하여 낸다 할지라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으며 또 그중에는 우연히 유사해진 것도 있고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대단히 차이가 있는 것도 있고, 차이점도 또한 그러하여 다르기는 다르면서도 내용이 서로 통하는 것이 없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비교법에는 으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신앙이 게재되기 마련이어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복음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복음 자체까지도 왜곡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나 기독교 자체의 갱신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은 고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앙으로서는 자체 갱신이나 선교적인 입장에서 타종교를 바르게 볼 수 없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선교적인 입장이라고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기독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인 조망을 원한다고 하면 신앙적인 접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인 접근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기독교는 믿음을 전제로 한 종교이다. 신앙적인 자세와 삶이 요구되는 종교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복음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원주의 시대에 다양한 종교를 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독교로서 타종교의 경계를 넘어야 하는 선교적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기독교는 종교학적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양한 종교와 신학의 파트너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는 왕좌에서 내려와 겸손과 개방을 지향하는 선교적인 자세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만 독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든 타종교인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요, 서로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그러기에 모두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된 세상,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선교는 다른 종교전통에 대한 상호 이해와 상호연대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도와야 할 것인데, 다른 종교와 가까이하면서,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종교나 문화가 인간의 문제해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중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19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신학적 접근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문화적인 이해로 타종교와 그것의 삶의 양식에 접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복음적인 신앙을 가질수록 타종교인들을 과소평가하거나 그들을 무조건 이단시하는 태도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오직 진리에 따라서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으로써 비판받고, 핍박받고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만, 비윤리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비문화적으로 타종교를 부당하게 취급해서 비난받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기독교 스스로도 사회 속에서 한 종교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질적 차이를 강조하며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고려하더라도 기독교도 현실적으로 하나의 종교이며, 기독교인은 한 사회 속에서 엄연한 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선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타종교에 대해 무지하고 배타적인 태도만을 지닌다면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며, 이것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조차 울타리에 가두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제부터는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혼합주의의 도전을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세계적, 역사적 신앙으로 재정비하여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더욱 분발하도록 자극하는 촉진제로 받아들이며, 위축되고, 배타적 고립의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더욱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굳건하게 기초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더욱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3. 종교 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 선교의 방향
회의론적 인식론, 서구 기독교의 쇠퇴, 종교 간의 교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과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신학의 변화, 그리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영향 등으로 타종교에 대한 문제의 핵심은 선교의 대상이기보다는 대화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오히려 강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각 종교가 다른 종교들 안에서, 다른 종교들과 함께 자신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통일을 꿈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유의해야 할 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 간의 대화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지금 우리는 타종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선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변론이나 진리의 우열을 가리는 토론이 되어서는 안 되며, 토론하거나 설득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고통과 갈망과 의지까지 포용해 주되, 그들이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의 은혜에 들어오도록 해야 하타종교 이해 191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개와 변화는 합리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또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에서 선교의 방법론이나 전략적인 차원의 재점검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가 취하여야 할 태도와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 기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복음은 순수하고 궁극적이다.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많은 표현은 불순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복음과 기독교는 엄격히 구분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복음이 아니다. 복음만이 기독교요, 기독교를 존재케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복음만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수많은 불순물이 포함되어 전해졌다. 그러한 결과가 기독교의 절대성에 손상을 입히며 오늘날과 같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대화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통하여 기독교가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철저히 성경적 검증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굳건하게 섬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에 기초했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오직 말씀으로”라는 모토 아래 이루어졌듯, 오늘날의 신학과 선교도 다시 한번 말씀으로 되돌아가 정체성 회복을 위한 산고의 진통을 치러야 한다. 기독교가 성경 중심주의를 버렸을 때, 즉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비성서적인 종교 다원주의가 발생하는 것임을 기억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종교 다원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계시에 관한 것이었다. 선교 현장에서 늘 마주치고 논쟁이 되는 것이 계시이기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연구와 타종교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함께 비교, 연구, 검토함으로써 참된 계시에 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앙의 재무장이 필요할 것이다.
넷째, 외부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내부의 갱신이 필요하다. 교회의 갱신을 통해 드러나는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의 모습 속에서 케리그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즉 기독교에는 참 진리가 있고, 온전한 구원을 제시하는 계시의 종교라는 복음의 핵심이 긍정적으로 타종교 세계에 드러날 수 있도록 먼저 기독교 내부의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다섯째,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타종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타종교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이지만,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를 지나치게 이분법적 관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멸망의 자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와 동일하게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요, 이웃으로 바라보는 열린 시각과 함께 관계중심의 선교로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들은 죄인이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선포할 책임을 뜻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특권을 뜻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섯째, 타종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전통종교에 대한 이해는 이분법적인 패러다임에서 출발함으로써 타종교 연구의 출발점을 봉쇄하거나, 그 연구방향을 일방적으로 규정지어 버렸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각은 타종교에만 악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자체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인 시각마저 형성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서 사람에 대한 배타성으로까지 전이되고 있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을 발생시키고야 말았다. 결국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는 것은 아직도 시대가 다원주의 상황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거나 혼합주의의 위험부담에 대한 무책임한 기피일 것이다. 성서와 교의는 연구하나 토양인 문화와 전통종교에 관하여는 무지한 복음주의 진영의 현실은 결국 감정적 대응 외에 할 일이 없게 되어버리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보다 깊은 타종교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사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타문화에 대한 적대적 사고, 기독교 우월주의, 그리고 획일주의에 기반을 둔 종교적 제국주의 전통에서 수행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선교는 다른 종교전통에 대한 상호이해와 상호연대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타종교에 맞추어서 그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주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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