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내 이야기가 진담이 될까 봐』(파란)
주크박스
정선우
#1
참새 떼가 후두둑, 오후가 날아간다 나는 플라타너스 그림자를 쥐고 도둑맞은 책을 찾는다 상자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 점점 확장되는 운동장을 빠르게 분류한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열쇠를 움켜쥔 상자 열리지 않고
#2
죽은 여름을 숨겨둔 정원에 파랗게 갔다 소리를 죽이고 끝까지 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상자에서 온전하기를 바랐다 발가락과 발톱은 같은 발에 딸려 있다 나의 시는 네가 없는, 나만 살아 날뛰는 일인칭이다 산산조각 난 고백들이 상자를 적시고 흘러나왔다
#3
뾰족한 내가 숲길을 걷는다 상자를 만지던 감색 종이풍선에 마법처럼 입김을 불어 넣는다 터져 비늘이 벗겨진 무지개 물고기가 쏟아진다 발아래 떨어진 무지개 바늘은 닫힌 어둠처럼 침울하다
#4
그대로다 네모진 상자의 마트료시카, 다층적이다 매번 나와 달라진다
#5
겨울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묵기로 했다 물고기 비늘을 흘깃거리며, 베일을 쓴 집주인은 위조지폐는 받지 않을 거라고 했다 폭설로 쏟아지는 너를 본다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쌓인 눈이 280g이 될 EO를 기다리며 나를 깎고 깎는다 심장만 남게 될 때까지
#6
몸에서
불필요한 구름과 물고기들과 일인칭 문장들이 빠져나간 후의 내가
박자를 타기 시작한다
-시집 『내 이야기가 진담이 될까 봐』(파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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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우 |2015년 《시와사람》 등단. 시집 『모두의 모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