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새벽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대개 그렇듯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은 일부러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아니 생각을 해도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비로소 자신의 아이가 눈앞에 보일 때 ‘나도 아버지가 되었구나.’ 한다.
첫째를 임신하고 있을 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구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작은 교회의 교육전도사란 직함으로 헌신하였다. 넉넉하진 못해도 매월 꼬박꼬박 월급을 받던 몸이 개척교회에 해당하는 곳에서 교육전도사로 살아가려니 하루아침에 생활수준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게 다 신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다 신에게 나아가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했다. 구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남편인 나의 생각이었지 아내의 생각은 아니었다. 신학교 입학을 앞두고 인성 및 진로 상담을 맡은 교목이 내게 물었다. “형제님의 신학교 등록을 아내가 찬성하셨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껏 여러 신학생들을 보았는데 아내가 협조하지 않는 학생은 거의 중도에 포기하였습니다.” 난 그 말을 깊이 헤아려 듣질 않았다.
교회에서 받는 사례금으론 생활비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지금도 첫째 놈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건 한참 무럭무럭 자라야 할 때 아비로서 분유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한 것이다. 이마저도 난 신을 위한 희생이라며 정당화했었다. 교회에서도 전도사에게 주는 사례비는 의례히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만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금도 아마 그럴 것이라 본다. 이는 정말이지 잘못된 생각이다. 신학생 그것도 나이 들어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양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도 그런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비를 주려는 태도는 구도자의 길을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못할 짓이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에서 그런 행태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을 말하면서 정작 자기 교회에 속한 교직원들을 홀대하는 건 앞뒤가 도대체 들어맞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우니 아이와 아내에게 몹시 미안하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고물 오토바이를 하나 장만해서 새벽에 우유배달을 시작하였다. 팔팔 오토바이라고 요즘 집배원들이 주로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다. 이걸 타기 위해서 정식으로 원동기 면허까지 취득하였다. 구도자의 길을 간다는 사람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말이 새벽배송이지 교회 새벽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 2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집마다 정해진 우유, 요구르트, 요거트를 주머니에 넣고 와야 했다. 배달하기 위해 골목골목을 누볐다. 그러다가 버려진 가구 중에 쓸 만한 물건이 보이면 배달을 얼른 마치고 집으로 주워왔다. 집사람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먼지를 닦고 말렸다. 거실에 보이지 않던 소파가 생기고 탁자가 생기는 걸 집사람은 영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못 살아도 남이 쓰다 버린 물건으로 신혼살림을 대체하고 싶은 여자가 있을까 그러나 난 아내의 서글픈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 짓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다 드디어 아내가 폭발하였다. 없는 살림에 남편이 그런 거라도 가져오니까 처음엔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던지 꾹 참고 있던 아내가 이젠 제발 버린 물건 집안으로 가져오지 말라고 짜증을 냈다. 아무리 쓸 만한 물건일지라도 주인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는 법 비록 내가 주워왔어도 사용하면서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 결국은 죄다 버리게 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교회로 출근을 한다. 담임목사님은 주일에 보았던 밝고 환한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 같은 결연한 얼굴로 내게 그날 할 일을 명령조로 말씀하셨다.
“정 전도사, 오늘은 미장원일세.” “정 전도사 오늘은 아파트라네.” 이게 뭔 소리가하면 내가 전도할 대상을 지정해 주는 말씀이다. 그러면 나는 “예”하고 하루 종일 지정해 준 대로 방문전도를 다녔다. 난 타고나길 숫기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뭔가 부탁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목사님의 주문을 소화하기 위한 나의 행동이 얼마나 힘들고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로 쌓여만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은 내게 강한 목회자로 연단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주문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새내기 신학생 그것도 만학 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어야 할 시기에 매일 끼니걱정 아이 분유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또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제대로 봉양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고 나니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신학교 이학년 여름방학을 맞았다. 교회에선 여름성경학교니 학생 수련이니 정신없이 바빴다. 특히 청년회 수련회에 가장 많은 애정을 쏟았다. 이태 전 만 해도 나 역시 청년회에 속해 있던 몸이다. 그들과 함께 강원도 횡성에 있는 폐교된 학교를 빌려 삼박사일 동안 수련회를 가졌다. 아침 일찍 기상하는 동시에 시골길을 뛰어 구보를 했다. 말이 구보지 거의 걸어가는 수준이다. 젊은 여자 청년들이 있어서 살살 봐주는 정도로 뛰었다. 구보를 마치고 넓은 운동장에 집결하여 아침 체조를 하였다. 아침을 먹고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춰 일과를 보냈다. 마지막 날 밤 하일 라이트로 운동장에 모여 캠프파이어를 진행하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동안 멋진 점화식이 거행되었다. 미리 준비한 바람개비 폭죽을 터트렸다. 바닥을 이리저리 돌며 불꽃을 튀며 날아다니는 폭죽이 청년들 속으로 들어오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러댔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던가. 얼마나 싱그러운 청춘이던가. 그렇게 막을 내린 수련회 장소에서 돌아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고 삼일 뒤에 올 중고등부를 기다리며 난 혼자 학교 내 작은 숙소에서 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젊은 청년들이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지나온 내 청춘이 그립기도 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미래를 꿈꾸던 직장생활이 너무도 그리웠다. 지금처럼 가난하게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주일 새벽 그날도 난 어제처럼 우유배달을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곤한 잠에 빠진 아내와 아들 녀석의 포동포동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나 못할 짓을 하고 있은 것 같았다. 슬그머니 거실로 나가 불을 켰다. 그리고 편지지 한 장을 꺼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분간 갈 곳이 있어 떠나니 날 찾지 말라고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곧 돌아올 것이라고.
시외버스를 타고 경기도 연천군 어느 시골교회를 향해 떠났다. 지금쯤 교회에선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진 전도사 때문에 수근 대고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일 게다. 별의 별 생각들이 교차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차창 밖으로 획획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 시가 넘었다. 이곳은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며 주일예배를 드렸던 작은 시골교회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모님을 극진히 섬기며 교회를 이끌고 계신 목사님이 계신 곳이다. 힘든 군 시절 정신적 멘토가 되어 주신 분으로 각별히 생각하는 목사님이시다. 제대 후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목사님은 무척 놀라고 반가워하셨다. 난 일단 짐을 풀고 언덕 위에 있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예배당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장마루를 깔아놓은 바닥은 여전히 들기름 칠로 반질반질했다. 작은 강대상이 하나 놓여있고 강단 벽에 아주 오래된 십자가가 붉은 등을 뒤에 업고 걸려 있다. 무슨 기도를 한단 말인가. 실패한 구도자로서 할 말이 무엇 있겠는가. 마지못해 몇 마디 기도를 하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장애로 일어서지 못하는 사모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하셨다. 난 금식기도하며 며칠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우선 군대 시절 머물렀던 강둑으로 가보았다. 잡초가 무성했다. 이곳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보냈던 군 시절이 눈앞에 선연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둑을 내려가면 굽이치는 임진강변이다. 그곳 역시 그때나 일반으로 유유히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가를 거닐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사방에 온통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득했다. 거기 적당한 바위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따듯한 햇살이 등에 와서 닿았다. 눈물 반 울음 반 기도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기도를 얼마간 하다가 일어섰다. 강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샛강이 보여서 무심코 그곳으로 걸어갔다. 샛강은 점점 좁아지면서 도랑처럼 변했다. 물속에서 뭔가 꼬물대는 것이 보여서 가까이 다가갔다. 엄청난 숫자의 미꾸라지들이 한데 뭉쳐서 바글대고 있었다. 버려진 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주워 하나 가득 미꾸라질 잡았다. 그걸 들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목사님 내외분께 추어탕을 끓여드리고 싶었다. 미꾸라질 소쿠리에 붓고 왕소금을 듬뿍 뿌렸다. 해캄을 한 미꾸라지를 깨끗한 물에 씻고 삶았다. 그걸 믹서기로 곱게 갈았다. 찌꺼기는 버리고 뽀얗게 변한 국물을 냄비에 넣고 양념은 사모님께서 입맛 따라 넣으라고 부탁을 하였다. 목사님 내외분은 이틀 동안 추어탕으로 식사를 대신하실 만큼 아주 맛있게 드셨다. 정한 삼일 동안의 금식을 마쳤다. 이젠 돌아가야 한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화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그동안 쌓인 감정을 나를 향해 쏟았다. 난 그저 묵묵히 아내의 분풀이를 받아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아내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난 한참 뜸을 들이다가 “나 목회자의 길 포기할 거예요” “그럼 뭐 먹고 살아요” 아내에겐 당장 먹고살 것이 가장 큰 두려웠던 모양이다. 난 이전에 했던 일을 할 것이라 말했다. 그날 담임목사님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삼일 뒤 아무도 모르게 용달차에 짐을 싣고 도망치듯 사역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