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칙 대력량인大力量人
松源和尙云: “大力量人, 因甚擡脚不起?” 又云: “開口不在舌頭上。”
송원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역량 있는 큰 사람이 다리를 풀고 일어서지 못하는가?” 이어, “왜 말하는 것이 혀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1
無門曰: “松源可謂傾腸倒腹, 只是欠人承當。縱饒直下承當, 正好來無門處喫痛棒。何故, 聻。要識眞金火裏看。”
무문이 말하기를,
송원은 가위 배를 열어 창자까지 드러내 보였지만, 그것을 곧바로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설혹 알아들고 깨달은 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나, 무문의 처소에 오면 몽둥이찜질을 당하기 십상十常일 것이다. 왜 그런가? 흠! 진짜 금인지 알아볼려면 불 속에 넣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頌曰: “擡脚踏翻香水海, 低頭俯視四禪天。一箇渾身無處著, 請續一句。”
노래하기를,
다리를 들어 향수해를 밟아 뒤집고, 지긋이 고개 숙여 사선천을 내려다보네!2
이 한 몸 어디 둘 곳 없으니......, 청컨대, 이어지는 구句나 한 번 일러주시게!
I. 배경
송원숭악松源崇岳3 화상은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 선사로 밀암함걸密庵咸傑4의 법을 이었다. 간화선看話禪의 창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를 참문하였으며,『무문관無門關』의 저자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와는 동 시대를 살았다. 송원이 71세로 입적했을 때 무문은 약관弱冠 20세로 서로 만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松源崇嶽(송원숭악: 1132~1202): 송대 임제종 양기파의 밀암함걸(1118~1186) 선사의 법을 계승하였다. 그의 전기는『속전등록』35권,『대명고승전』제8권 등에 전하고 있는데, 그는 23세에 출가하여 경산의 대혜종고 선사 등의 여러 선지식을 참문하였다. 항주杭州 영은사에 거주하면서 불법을 펼친 선승으로 그의 면밀한 선풍은「松源黑頭의 선법」이라고 불린다. 그의 어록을 모은『송원숭악선사어록』2권이 전하고 있다. 송원은『무문관』에 등장하는 선승으로서는 최후대의 인물이며, 무문혜개와 거의 동시대의 선승이다.5
희수소담希叟紹曇6이 지은『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1254)』에는, 밀암의 법제자로 본칙의 주인공인 송원숭악과 파암조선(破庵祖先, 1136~1211)이 올라있고,『新版 禪學大辭典 下』「禪宗法系譜」에는 밀암의 제자로 파암조선, 조원도생曹源道生, 송원숭악을, 그리고 송원의 제자로 무명혜성無明慧性, 운암보암運庵普巖, 무득각통無得覺通, 멸옹문예滅翁文禮, 엄실선개掩室善開 등을 올려놓았다.
양기파의 제일인자인 원오극근圓悟克勤 문하에서 나온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와 호구소융(虎丘紹隆, 1077-1136)은 남송 초에 크게 활약하였으며 법맥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보면 남송 초기에는 대혜파가 번성하였고, 남송 말엔 입장이 역전되어 호구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호구파 문하 밀암함걸(密庵咸傑, 1116-1184)에 이르러 그 법계에 파암조선(破庵祖先, 1136-1211), 송원숭악松源崇岳, 조원도생曹源道生 세 분파가 나타났다.
그 중에 송원파나 조원파는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심한 대립 양상을 일으킬 조짐마저 보이며, 이 두 파는 모두 동방으로 활로를 찾게 된다. 그러나 파암조선을 계승한 무준사범無準師範 계통은 왕실의 신앙을 얻어 번영했다. 당시는 불교도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배불론排佛論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불儒·佛 조화의 사상도 이루어지고 있는 때로, 무준사범이 정계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자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사상보다도 선유일치禪儒一致를 주장하게 되었다.7
파암조선의 맥은 무준사범(無準師範, ? ~1249)을 거쳐 하나는 설암조흠雪巖祖欽, 급암종신及庵宗信,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을 거쳐 한국 임제종의 종조인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로 이어지고, 또 하나는 일본 유학승 동복원이東福圓爾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다. 무준의 제자인 무학조원無學祖元은 아예 도일渡日하여 일본에서 크게 일가를 이룬다.
조원도생曹源道生의 맥은 후대에 일산일녕(一山一寧, 1247~1317)으로 이어졌는데, 일산은 도일하여 일산파一山派의 시조가 된다. 송원숭악의 맥은 제자인 무명혜성을 법을 이은 난계도륭蘭溪道隆이 도일하여 일본에 법을 전했고, 운암보암運庵普巖의 법은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를 거쳐 일본의 남포소명(南浦紹明, 1235~1308)으로 전해져 크게 융성하였다.
유학승들도 있었지만 중국에 원元나라(1271-1368)가 들어서면서 많은 수의 선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가마쿠라(鎌倉겸창, 1185-1333)시대 이후 일본에 선이 전파된 횟수는 총 46회였고, 이중에 법맥이 이어져 일본에 뿌리내린 종파는 24개 파라고 한다. 이중 유학승에 의한 것이 11개 파이고, 도래승에 의한 것이 13개(임제종 10개, 조동종 3개) 파이다. 이들이 일본선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어 선종의 기본적인 성격은 도래渡來불교이다.8
가마쿠라시대부터 도쿠가와 초기에 걸쳐, 일본의 유학승과 중국 승려에 의해, 송 ․ 원 ․ 명에서 일본에 전해져 온 선종은, 46명의 선종 승려들에 의해 전해져, 이 중 사법嗣法의 제자가 생겨, 법손法孫이 유파를 형성한 것이 23유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24류, 46전’이라고 한다(도쿠가와 초기의 석반인자선술釋半人子選述『24류종원도기24流宗源圖記』에 기초). 이 46전의 선종 가운데, 希玄道元(1200-1253), 東明慧日(1272-1340), 東陵永璵(?-1365)이라는 조동선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선승은 모두 임제선의 법맥을 잇는 사람들뿐이다.9
송원의 <삼전어三轉語>
송원 화상이 제기한 의제議題는 본칙에 제시된 두 가지 외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눈 밝은 사람이 왜 발아래 매인 붉은 실을 끊지 못하는가?[明眼衲僧 因甚麽脚下紅絲線不斷]’이다. 이 세 가지를 묶어 송원의 <삼전어三轉語>라고 부르는데, 세 번째 것은 그의 어록인『송원숭악선사어록松源崇嶽禪師語錄』이나『속전등록續傳燈錄』에는 보이지 않아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송원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枯崖漫錄』卷中에는「불법의 안목을 구족한 능력 있는 사람(大力量人)이 어째서 다리[脚根下]에 붉은 선[紅線]을 끊지 않고[不斷] 있는가?」라는 일절을 첨가하여「송원의 三轉語」라고 하고 있다. 무문혜개는「明眼人이 어째서 脚下의 紅系線 끊지 않는가?」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紅絲線이란 사량분별과 남은 습기 餘習을 말한다. 송원의 삼전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본래는 여기서 제시한 두 가지 문제가 송원의 설법이라고 할 수 있다.10
본칙에서 제기한 이전어二轉語는 선병禪病에 빠져 좌선만 하거나 대중들을 위해 설법하는 것을 등한시하는 선승들을 향해 말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두 번째 <개구부재설두상開口不在舌頭上>은 그의 깨달음의 기연과 깊은 연관이 있다. 먼저 송원의 깨침에 대한 이야기를『고애만록枯崖漫錄』에서 인용한다.
27. 송원숭악松源崇岳선사의 깨침
스님이 처음 민주閩州 건원사乾元寺의 목암木庵스님을 찾아뵙고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하직인사를 드리니 목암스님이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등나무 넝쿨이 나무에 기대있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거론하였다. 그러자 송원스님이 대답하였다.
“싹둑 잘라버릴 것입니다.”
“낭야瑯邪스님은 이에 대해 ‘한 무더기 좋은 땔감이로다.’라고 하였다.11
“화살 위에 화살을 얹는 격입니다.”
“그대의 말을 내 따를 수야 없지만 그렇게 공부가 안 되어 가지고는 뒷날 불자를 잡고 설법한다 해도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사람을 간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온갖 번뇌에 매인 범부를 단숨에 성인聖人의 경지로 뛰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사람을 간파한다는 것은 얼굴만 스치면 말 한마디 안 해도 그의 골수까지 알 수 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에 목암스님은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하였다.
“그만! 그만! 그대에게 명백히 말해주리라. 입을 벌려 말한다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 이듬해 송원스님은 구주衢州 서산사西山寺에서 밀암스님을 찾아뵙고 묻는 족족 대답하였는데, 밀암스님이 웃으면서 ‘황양선이로다’ 하였다. 스님은 뒷날 경산徑山에서, 밀암스님이 곁에 있는 스님에게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하는 말을 듣고 문득 크게 깨치고서 말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날 목암木庵스님이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신 말씀의 뜻을 알았노라.”
송원스님은 처주處州 용천龍泉 오씨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대蘇臺 징조사澄照寺에서 개법開法하였고, 경원(慶元:1195~1200) 연간에는 영종寧宗의 칙명으로 영은사靈隱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의 가풍은 몹시 엄하였으므로 그 문하에서 큰 그릇을 이루지 못한 자는 거의 없었다. 아! 송원(松源 파암破庵 조원曹源 만암萬庵 스님이야말로 중봉(中峰:밀암스님의 탑소)의 도를 일으킨 분들이 아니겠는가.12
여기서 건원사 목암 스님은 황벽희운(黃壁希運, ? ∼850)의 수제자인 목주도종(睦州道蹤, 780~877) 선사로, 임제의현(臨濟義玄, ? ~867)을 독려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고,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다리를 부러트리면서 깨달음을 준 인물로 유명하다. 여기서도 송원에게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다[開口不在舌頭上]’라는 일전어를 던져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다.
송원은 목암이 말한 <開口不在舌頭上>의 뜻을 모르고 있다가, 성철 스님도 자주 거론擧論하였던『無門關』「제27칙 부시심불不是心佛」에 나오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不是心 不是佛 不是物]’라는 화두를 듣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게 된다. 목암의 말에 의정을 일으켜 마음속에 계속 두고 있다가 기연을 만나 그 뜻을 알게 된 것이다.
송원은 자신을 깨달음으로 이끈 목암의 일전어에 ‘왜 대력량인이 다리를 풀고 일어서지 못하는가[大力量人因甚擡脚不起]?’라는 일전어를 더해 학인들의 안목을 점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런 일전어를 추가하였는가? 이는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의 논쟁論爭
송대에는 임제종 간화선과 조동종 묵조선이 “선종禪宗 이대감로문二大甘露門”이라 하여 선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서로 경쟁하는 입장에서 각 종파는 자신들이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조동종에서는 간화선을 깨달음을 기대하는 바보 같은 대오선待悟禪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천연자성심天然自性心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부터 미오迷悟의 망념이 없는데, 다시 깨달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부처인데 또 다시 부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혜의 스승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의 교시를 따라 고인古人의 공안을 참간參看하는 간화선을 ‘하나의 공안을 투과透過하고 또 다른 공안을 투과하는 사다리 형식의 선’13이라 하여 제자선梯子禪(사다리선)이라고 비하卑下하였다.
조동종 승려들은 그들대로 임제종의 접근법을 깨달음을 기다리는 선, 즉 대오선待悟禪이라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깨달음을 ‘가지거나’, ‘가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사물’ 또는 경험으로 잘못 알고 물상화시키는 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동 종도들은 많은 공안들을 참구해 나가는 과정을 점오漸悟를 의미하는 용어인 단계적인 선, 즉 제자선梯子禪이라고 부르면서 비하한다.14
당시 간화선을 사다리선이라고 비난하였다는 것은, 공안을 차례로 투과해나가는 현재의 임제종 산화선법이 이미 송대에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송대 일본으로 전해진 간화선 교육체계는 이심점심으로 다듬어져 내려오다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에 이르러 더욱 체계화 되어 오늘에 이른다.
白隱은 근세 사람답게 선의 수행방법에 있어서도, 그때까지 없었던 합리적인 방법을 창출하였다. 그것이 공안公案의 체계화라고 하는 것이다. 선의 수행과정에 커리큘럼을 설치하고, 이에 따라 하나하나 계제를 올라, 드디어 견성경험으로 이끄는 방법은, 조동종으로부터 ‘제자선梯子禪’으로 과소평가되었다.15
임제종에서는 오로지 앉아만 있는 묵조선을 아무런 지혜작용도 사회성도 없다고 비난하면서, 중생구제의 보살도 정신이 부족한 소승선이라고 폄하貶下하였다. 그리고 수행자로 하여금 이미 깨달았다고 믿으면서 우쭐대며 망상 속에 빠져있게 하는 일종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선인 “무사선無事禪”이라고 비판하였다.16
간화선을 창안한 대혜종고 선사는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死禪’17이라고 하였는데, 조동 선법은 깨달음
이 아닌 정신적 고요함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묵조선에사 행하는 지관타좌(只管打坐, 只管(祗管)이란 다만의 뜻이고, 打는 강조, 坐는 坐禪, 즉 다만 오로지 앉을 뿐이란 뜻)는 혜능이 거부했던 점오漸悟의 선풍禪風이라고 하였다. 비유하자면 한적한 곳에 마냥 앉아있기만 하는 묵조선의 수행형태는 단지 돌로 풀을 누르고 있는 것과 같아서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풀을 누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혜가 판단하기로 묵조선은 단순히 적조정묵寂照靜默이나 현실 도피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중략) 대혜는 그들이 만약 한적한 곳을 발견하고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를 얻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최상의 평화와 축복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이 단순히 돌에 눌려있는 풀과 같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전환의 체험인데 그것은 풀을 돌로 누르는 것처럼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고 풀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이라고 대혜는 주장한다. 그러한 순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동안에 우리는 항상 하나의 화두에 몰두해서 대혜와 백은이 말했던 대의심을 길러나가야 한다. 대혜가 권한 것처럼 한다면 종국에는 확철대오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18
송원은 수행 초기 대혜를 참문하기도 하였고 대혜가 주석하였던 경산사徑山寺와는 지근거리에 있었던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 주지를 지낸 선사로, 그의 공안은 대혜의 주장이나 당시 주위에 팽배해 있던 임제종 선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임제종 승려들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송원은 송대의 간화선의 대성자인 대혜종고와 묵조선의 진헐청료나 천동굉지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 당시 간화선과 묵조선의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당시 선종의 병폐를 지적하고 올바른 선수행의 정신을 천명하고자 이러한 법문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9
그러나 그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안은 불법의 안목을 갖춘 역량인이라면 좌선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중생교화에 힘써야 한다는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다. 우선 깨달음을 얻어야하지만, 깨달았다면 깨닫지 못한 중생을 구제 교화해야 한다는 ‘상구보리하와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보살도의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을 갖춘 선지식이 되려면 좌선수행의 자리문自利門과 중생교화의 이타문利他門을 동시에 실행해야 한다는 선종의 일관된 주장인 것이다. 송원의 삼전어는 이를 은유적이지만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런 맥락은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역사적인 쟁점과도 연결된다. 역사적인 자기 책임이나 역할이 없는 종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다. 사회적인 역할이나 경제적인 어떤 노동이 없는 종교는 결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거나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가치는 당연히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체득했다면 당연히 대중교화에 매진해야 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좌복에 앉아만 있고, 대중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경고로서 위의 공안을 이해할 수도 있다.20
<有句無句 如藤倚樹>와 <開口不在舌頭上>의 관계
한편 목암이 송원에게 거론한 ‘유구무구有句無句는 등나무 넝쿨이 나무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유구무구有句無句 여등의수如藤倚樹>와 <開口不在舌頭上>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먼저 <有句無句 如藤倚樹> 공안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면 위앙종潙仰宗의 종조인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의 상당 설법을 만난다.
357. 유구有句
위산潙山이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유구(有句: 있음의 구절)와 무구(無句: 없음의 구절)는 등 넝쿨[藤]이 나무에 의지한 것 같으니라.”
소산疎山이 물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구와 무구는 등 넝쿨이 나무에 의지한 것과 같다’고 하셨다 하니 홀연히 나무가 쓰러지고 등 넝쿨이 마를 때는 구절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선사가 깔깔거리고 크게 웃으니 소산이 말하였다.
“제가 4천 리 밖에서 베 방석을 팔러 왔거늘, 화상께서는 왜 조롱을 하십니까?”
그러자 선사가 시자를 불러 분부하였다.
“돈을 갖다가 이 상좌에게 돌려주어라.”
그리고는 다시 당부하였다.
“나중에 외눈박이 용(명초가 애꾸였다)이 그대를 점검하리라.”
나중에 명초明招에게 가서 앞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명초가 말하였다.
“위산은 머리도 꼬리도 바르다고는 하겠으나 속마음 아는 이[知喑]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로다.
소산이 다시 물었다.
“나무가 쓰러지고 등 넝쿨이 마르면 구절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명초가 대답하였다.
“위산의 웃음을 다시 새롭게 하는구나.”
소산이 이 말 끝에 깨닫고 말하였다.
“위산은 원래 웃음 속에 칼을 숨겼었구나.”21
<有句無句 如藤倚樹> 공안은 당시 선가에서는 자주 회자되었던 유명한 공안으로, 오가五家중에는 가장 먼저 쇠망하였지만 가장 먼저 일어난 위앙종潙仰宗의 위상을 말해준다. 위앙종은 당唐말에 창립하여 오대五代까지 기세를 떨쳤으며, 한때는 마조 이하 백장 → 위산 → 앙산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정통으로 보았던 시기도 있었다.22 송원은 후에 이 공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송원松源이 상당하였는데, 어떤 스님이 물었다.
“유구와 무구는 등 넝쿨이 나무에 의지한 것 같다하니,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저울추에다 초간장을 발랐느니라.”
다시 물었다.
“나무가 쓰러지고 등 넝쿨이 마른 뜻은 또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뒤, 밤중에 홀로 걷느니라.”
다시 물었다.
“위산이 크게 깔깔 웃은 것은 또 어찌 이야기해야 합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사람을 살리는 검劒이니라.
또 상당하여 말하였다.
“유구와 무구는 등 넝쿨이 나무에 의지한 것 같다하니, 맹팔랑孟八郞이 선뜻 그렇게 했구나.”
선상禪床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소로소로蘇嚕蘇嚕.”23
<有句無句 如藤倚樹> 공안은 원오극근圓悟克勤 선사와 제자인 대혜종고 사이에 있었던 일화로 더 유명한데, 대혜 선사 또한 이 화두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처음 대혜는 담당문준(湛堂文準, 1061∼1115) 문하에서 시자로 있다가, 스승이 열반에 들자 스승의 조언을 따라 원오극근 선사를 찾아가서 수행하게 된다. 다소 길지만 그때 상황을 광덕光德 스님의 책에서 인용한다.
(대혜가) 이곳에서 조석으로 참정하는데 한번은 극근이 말하기를, “한 중이 운문에게 묻되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 하니, 운문 답하기를, ‘동산이 물위로 간다.’ 하였으니 너 한마디 일러봐라.”하는데, 계합하지 못하여 1년을 참구하면서 49회나 대답하였으나, 다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더니, 하루는 한 거사 집에서 극근이 설법하는데, “한 중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 하는데, 운문은 ‘동산이 물위로 간다.’ 하였지만, 천녕天寧은 그렇지 아니하여 ‘누가 와서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이냐?’ 하면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안이 시원해진다.’ 할 것이다.” 함을 듣고 활연히 깨쳤다.
깨친 바를 극근에게 말하니 가지가지로 시험하여 보고는, “아직 멀었다. 네가 비록 얻은 바는 없지 않으나 아직 대법은 밝지 못했다.” 하고, 하루는 “너의 그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다만 죽기만 하고 능히 살아나지 못했으니, 언구를 의심치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뛴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승당할 수 있으나,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남을 속이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모름지기 이런 도리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사 말이 “고杲는 지금의 얻은 것으로 이미 쾌활하니 다시 더 알아 얻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는 매일 서너 번씩 입실하는데 근은 매양 저 “있느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 넝쿨과 같다(有句無句如藤倚樹)”는 공안을 가지고 힐난하면서 입실하여, 입만 열기만하면 “틀렸어! 틀렸어!” 하여 이러기를 반년이 넘도록 인가를 받지 못하고 생각 생각에 잊지 않고 지내는데, 하루는 관객들과 식사를 하다가 사가 손에 수저를 들은 것도 잊고 멍멍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근이 웃으면서, “저 놈이 황양목선(黃楊木禪 - 진취가 없는 공부)을 하여 도리어 쭈그러지는구나!”하는데, 사 비유를 들어 말씀들이기를 “화상이시여,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 가마를 본 것과 같아서 핥으려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리고 갈려야 버리고도 못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더니, 근이 “그 비유가 극히 좋다. 단지 그것이 금강석으로 된 밤송이다.” 하였다.
또 하루는 근에게 묻기를, “화상께서 오조에 계실 때 오조화상께서 이 공안을 들으셨다 하온데, 그때 오조 화상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근이 묵묵히 응하지 않으니, 사 “그때 대중 앞에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이제 다시 말씀 하셔서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근이 드디어 “내가 그때 묻기를 ‘있느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쿨 같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오조 말씀이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그림으로 그릴수도 없느니라.’ 하시기에 또 묻기를 ‘문득 나무도 쓰러지고 등藤도 말라 죽었을 때 어떠합니까?’ 하니 ‘서로 따라 오느니라.’ 하시더라.” 하는데, 사 곧 깨치고 근에게,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하니, 근은 “아직 네가 저 공안을 뚫지 못하였을까 걱정이다.” 하고, 여러 가지 까다로운 공안을 들어 대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으니 이에 근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후로는 병의 물을 거꾸로 세운 것 같고 둥근 바위를 천길 언덕에서 내 굴리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그 기봉을 당하는 사람이 없으니, 혹 근에게 누가 와서 참문하면 “나의 저 선자禪者가 마치 큰 바닷물과 같으니 너희들은 저 큰 바닷물에 가서 물어 가라.” 하였다. 이때부터 극근과 분좌설법하고 납자를 제접하니 그 이름이 총림에 떨쳤다. 극근이 운거사雲居寺에 옮기자 거기서 제일좌第一座가 되고, 극근이 성도成都로 떠난 뒤는 여러 곳을 거쳐 경산(俓山-절강성 여항현)에 있었는데, 납자 도속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중이 항상 2천명이 넘어 종풍을 크게 떨치니, 세상 사람들은 임제臨濟의 재흥이라 하였다.24
<有句無句 如藤倚樹> 공안이 당시 선가에서 얼마나 많이 거론되었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데, 공안의 점검 전개과정도 재미있지만, 당시 임제종에서 어떻게 수행자를 지도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하여 흥미롭다. 대혜는 ‘동산이 물위로 간다[東山水上行]’라는 공안을 1년 넘게 참구한다. 49회나 입실하였다고 하니 1주일에 한 번 꼴로 입실점검을 받은 것이다. <有句無句 如藤倚樹> 공안 때에는 매일 서너 번씩 입실하여 반년이 넘도록 참구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럼 <有句無句 如藤倚樹>와 <開口不在舌頭上>의 뜻과 둘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이 두 공안의 논리는,『無門關』「제24칙 이각어언離却語言」이나「제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과 연관 지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離却語言」에서는 ‘말을 해도 진리에 어긋나고 안 해도 어긋나니, 어떻게 해야 진리에 어긋나지 않고 통할 수 있겠는가[語黙涉離微 如何通不犯]?’라고 묻고 있고,「外道問佛」에서는 ‘유언으로도 묻지 않고 무언으로도 묻지 않겠다[不問有言 不問無言]’고 말하고 있다. 즉, <有句無句 如藤倚樹>나 <開口不在舌頭上> 또한 결국 “어묵語默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라”는 선가의 상투적인 화두인 것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 “칼날 위의 일[劍刃上事]”25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송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루 종일 다녀도 다닌 바 없고, 하루 종일 말해도 말한 바 없는 대자유인, 나아가서는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자유로운 무의도인無依道人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묘용을 갖추어야 대역량인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임제가 제창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또 다른 모습이다.
참고로, 대혜가 활동하였던 절강성浙强省 여항현余杭縣 경산사는 당나라 중엽 우두종牛頭宗 계통의 대각선사 도흠(道欽, 715~793)이 개창하고, 宋代에는 능인흥성만수선사能仁興聖萬壽禪寺라고 하여, 오산五山의 하나로 설립된 사찰이다. 대혜와 파암조선破庵祖先의 제자인 무준사범無準師範, 송원의 손제자인 허당지우虛堂智愚 등이 주지로 있었으며, 송대 임제선 발전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26
경산은 용정차龍井茶로 유명한 항주杭州와는 2시간 거리로, 이미 당송唐宋시대부터 차로 유명하였던 역사적인 곳이다. 선과 차가 둘이 아니라는 원오의 ‘다선일미茶禪一味’27 사상과 선원청규를 바탕으로 한 사찰다례 의식인 ‘경산다연徑山茶宴’으로 현재까지 명성이 높다.
임제의 동정일여動靜一如
『無門關』「제8칙 해중조차奚仲造車」에서 언급하였지만 수행법의 변천사를 일견해보면, 불교전래 초기 염처念處 수행(또는 위빠사나)은 몸(身), 느낌(受), 마음(心), 존재의 법칙(法) 등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변화를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온갖 대상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일종의 관법觀法수행으로『대념처경大念處經』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안반수의(아나빠나사띠)는『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에 의거하여 들숨과 날숨의 호흡 수련을 통해 정신의 안정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천태의 관법수행은 이들 사념처관四念處觀인 ‘위빠사나’와 수식관數息觀인 ‘아나빠나사티’를 답습하여, 독자적인 견해로 체계화한 이른바 “지止”와 “관觀”을 동시에 닦는 수행 체계이다. 이를 천태지관天台止觀(『마하지관磨訶止觀』)28이라고 하는데, 고요하게 망념을 쉬고 마음을 거두어 한 곳에 집중하면서[止], 관조하여 진여에 계합하는[觀] 수행법이다.
이때는 선禪과 정토교淨土敎 등 실천운동이 일어나는데, 그 중 염불수행법은 염불念佛을 끊임없이 해나가면 마침내는 자성염불이 되고, 일념-무념에 이르러 결국 법신法身이 드러나 본래면목을 회복하는 수행법이다. 후대에 오면 염불하면서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者是誰]?’라는 화두를 들기도 하는데(염불선念佛禪), 당시 핵심적인 불교개론서인『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도 실재적인 수행방법으로 지관과 염불을 들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던 수행법이다.
이어 나타난 것이 “일체의 진리가 본래 완성돼 있다[本證自覺]”는 원칙에 입각하여 다만 좌선을 하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묵조선’이 등장한다. ‘묵조黙照’란 묵묵히 좌선하는 곳에, 그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던 진리의 작용이 일어나고 또 지혜의 빛이 비쳐 나온다는 뜻으로,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그대로 깨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고 만사를 휴식하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오로지 지관타좌하여 견성하는 수행법이다.
이는 앞서 논의한 대로 부처가 되려고 좌선하는 마조(馬祖道一, 709~788)에게 벽돌을 갈아보였던 남악(南嶽懷讓, 677~744)의 충고처럼 잘못하면 대혜의 말처럼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빠지기 쉬운 단점이 있다. 공부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더욱 어렵다고 하겠다. 그래서 옛사람의 공안을 들고 일념으로 몰입하여 의단疑團을 타파해 나가는 간화선법이 개발 된 것이다.
이후 임제종 간화선과 조동종 묵조선이 서로 자신들 수행법이 우수하다고 다투게 되는데, 임제는 이들 간화선과 묵조선의 논쟁을 예견이나 한 듯 수행방법에 대한 철학적 논거論據를 “동정일여動靜一如” 설법에 제시하고 있다.
13.25 동정일여動靜一如
대덕들이여, 산승山僧이 밖으로 향하여 불법佛法을 찾지 말라 설하여도 학인은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밖으로 헤매어 마음 붙일 곳을 찾는다. 그래서 벽을 의지해 앉아서 혀끝을 윗잇몸에 버티고 고요 속에 침잠沈潛하는 것을 구경究竟으로 삼아서 조사문중祖師門中의 불법佛法이라고 하지만, 이는 큰 잘못이다. 그대가 만일 움직임이 없는 적정한 경지를 진리라고 여긴다면, 그대는 무명無明을 잘못 알아 주인공을 삼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깊고 깊은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그대들이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 도道라고 한다면 나무도 움직이고 있으니 당연히 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動하는 것은 바람의 성질[風大]이며, 동하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地大]이다.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모두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일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그대들이 만일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마치 샘물 속에서 사는 고기가 물결을 일으키며 팔팔 뛰는 것과 같다. 대덕大德이여!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견해일 뿐이다. 실제로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움직이는 것을 쓰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29
도입 부분에서는 고요히 앉자 면벽묵좌面壁黙坐하는 것이 조사문중祖師門中의 불법佛法이 아니라고 하고 있어 묵조 형식의 수행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 묵묵히 앉아 생각을 쉬고 가만히 있는 것은 소위 무기無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적寂寂은 될 수 있지만 성성惺惺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마냥 비판 한 것은 아니어서 ‘동여부동動與不動’, 동動, 부동不動의 차별을 경계하고 있다. ‘움직임이 없는 적정한 경지’를 진리로 여기지 말라고 하면서도 動도 不動도 우리들 마음의 움직임일 뿐, 그 어느 것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면 움직이는 것을 쓰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쓰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간화선법이 구체화되기 전이라 動도 不動을 간화선과 묵조선으로 직접 비정할 수는 없지만 둘의 조화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최소한 임제종의 초조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도겐(희현도원希玄道元, 1200~1253)도 초기 영서의 문하에서 임제선을 배웠고 송에 가서는 임제선과 조동선을 수선하여 순수선을 주장하였지 종파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현대 들어 일본 선사들에 의해 묵조선과 임제선이 차별 없이 병행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옳으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다.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중도中道다.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선과 악의 상대적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쪽으로든 치우쳐 있으면 그것은 편견이고 변견邊見이다. 잘못된 견해다. 그래서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위진인은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쓰고 다 수용한다. 양변을 멀리 벗어나서 치우치지 않는다. 차遮와 조照의 동시적 삶을 산다. 그것이 불교적 삶이다. (중략) 영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행할 때도 선이고 앉을 때도 선이다. 어·묵·동·정에 그 마음 편안하다.”라고 하였다.30
II. 사설
혜능에서 선도회까지
중국의 불교사는 크게 5기로 나눈다. 제1기는 전한前漢으로부터 동진東晋초까지 이르는 전역傳譯시대이고, 제2기는 동진東晋 초부터 남북조南北朝에 이르는 연구硏究시대, 제3기는 수당隨唐의 건설建設시대, 제4기는 오대五代로부터 명말明末에 이르는 계승繼承시대, 그리고 제5기는 청淸 이후의 쇠퇴衰退시대가 그것이다.
그중 제3기 건설시대는 이전 시대에 경經, 율律, 논論이 번역되고 연구된 불교가 일반에게 활발하게 보급된 시기이다. 수당시대에 이르면 각 종파가 독립, 대성하게 되는데, 특히 혜능慧能의 선종禪宗이 등장하여 중국 불교의 한 전형典型을 이룬다. 선종은 북위北魏때 보리달마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혜능(慧能, 638~713)과 그의 제자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에 의해 확립된 가장 중국적인 종파라고 하겠다.
혜능은 이른바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종교의禪宗敎義에 입각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소의경전所依經典도 갖지 않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독자적인 사상이었다. 그의 교의는 마조馬祖와 석두石頭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으며, 뒤에는 임제臨濟,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法眼, 위앙潙仰의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전하였다.
중국불교는 당當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이후 경전經典과 문물의 파괴가 몹시 심해짐으로 말미암아 각 종파가 모두 쇠퇴하게 되었고, 오직 많은 경전과 의궤儀軌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종만이 법맥法脈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종은 당 말기부터 오대五代 말기에 다시 “하나의 꽃에 다섯 잎이 펼쳐진 것[一花開五葉]”과 같은 ‘오조분등五祖分燈’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위앙종潙仰宗은 당唐말에 창립하여 오대五代까지 번영하였고, 가장 먼저 개종하여 가장 일찍 쇠망하였다. 전후가 겨우 4대代이며, 앙산혜적仰山慧寂 이후의 법계法系가 분명하지 않다. 법안法眼은 다섯 종파 가운데 창립이 가장 늦으며, 오대 말에서 송宋초까지 흥성하고 송 중엽에 이르러 쇠망하였다. 운문雲門은 오대五代에 발흥하여, 송초에 크게 떨쳤으며, 설두중현雪竇重顯에 이르렀을 때 종파의 위세가 가장 성하였다. 조동종曹洞宗은 운거도응雲居道膺 이후부터 추세가 쇠미하다가 부용도해芙蓉道楷 이후 종파의 위세를 다시 떨치고, 단하자순丹霞子淳 이후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나와 ‘묵조선黙照禪’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이 조송趙宋 일대 선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임제臨濟는 다섯 종파 가운데 전해져 내려오는 기간이 가장 길며 영향도 가장 커서 “임천하臨天下”라는 말까지도 있었다. 임제종은 석상초원石霜楚圓 아래로부터 황룡黃龍과 양기楊岐 두 계열이 갈라져 나와 송 중엽에 크게 성하였고, 불과극근佛果克勤에 이른 이후 대혜종고大慧宗杲가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여 일대를 풍미하였고, 후세에 대한 영향이 가장 깊고 크다. 전법세계傳法世系상에서 보면 이 다섯 종파는 모두 혜능 문하에서 나와 남종선南宗禪에 속하며, 선종 자체의 발전사에서 보면 이 다섯 종파는 모두 ‘분등선分燈禪’에 속한다.31
제4기 계승시대는 당말唐末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5-847)과 그 후 5대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폐불(현덕 2년, 955)에 의하여 쇠퇴하기도 하였으나, 송대에는 ‘북송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 972-983)’ 조판 사업 등 불교가 활성화되어 수당의 불교를 계승하고 보급함과 동시에 점점 민간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6조 대감혜능大鑑慧能이래 11조 임제의현(臨濟義玄, ? ~867)의 법이 흥화존장興化存奬 → 남원혜옹南院慧裵 → 풍혈연소風穴延沼 → 수산성념首山省念 → 태자원선太子院善 → 자명초원慈明楚圓으로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임제종은 송대에 이르러 수산성념(首山省念 926-993),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 석상초원(石霜楚圓 987-1040)이 뒤를 잇고 초원楚圓 문하門下에서 황용혜남(黃龍慧南1002-1069)과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가 배출되었으며 혜남은 황룡파, 방회는 양기파를 세움으로써 5家에서 7宗이 되었다. 북송 대에는 황룡파가 우위를 점령하는 듯했으나 더 이상 두드러진 발전이 없었으며 남송대에는 양기파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남송 말에는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조동선도 융성하여 결국 임제종의 양기파와 조동종만이 남게 되었다.32
18조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의 법은 백운수단白雲守端을 거쳐『벽암록碧巖錄』의 저자 20조 오조법연(五祖法演, ? ~1104)으로 이어지고, 오조의 법은 21조 원오극근에 의해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종고와 호구소륭虎丘紹隆으로 이어진다. 호구소륭의 법은 23조 응암담화應庵曇華을 거쳐 밀암함걸密庵咸傑로 이어지는데, 밀암함걸의 법은 25조인 송원숭악松源崇岳과 파암조선破庵祖先으로 갈라지게 된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송원숭악의 맥은 운암보암運庵普巖, 허당지우虛堂智愚을 거쳐 일본의 28조 남포소명南浦紹明으로, 파암조선의 맥은 무준사범無準師範, 설암조흠雪巖祖欽, 급암종신及庵宗信, 석옥청공石屋淸珙을 지나 30조인 한국의 태고보우太古普愚 선사로 이어진다. 참고로 일본 남포소명의 법은 46조인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 백은혜학白隱慧鶴에 이르러 만개하였으며, 임제종 묘심사파 경성별원 주지와 남선사파南禪寺派 관장管長33를 지낸 54조 화산대의(하나야마 타이기, 華山大義)에 오면 한국으로 건너와 55조 의현종달義賢宗達 노사님에 의해 선도회로 이어진다.
도쿠가와 시대 중기가 되면, 오산의 중림은 문화생활에 빠져, 선종의 법파를 이을 자가 없어져, 서로가 교체로 회장을 잇는 ‘연환 결제’라고 불리는 결제 안거를 개최하였지만, 그 지도자 측에 해당하는 종사가宗師家조차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관산파에서 사가를 초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중세에는 오산의 관사였던 교토나 가마쿠라의 선종 사찰이 지금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 경내의 한쪽 구석에 있는 전문도장의 사가는, 어느 한 곳 빠짐없이 白隠 밑의 공안선의 법계인 것은 정말로 얄궂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34
그림 駒澤大學內, 禪學大辭典編纂所編,『新版 禪學大辭典 下』「禪宗法系譜」 p. 2.
III. 참구
송원의 실중수어室中垂語인 <三轉語>를 순서적으로 풀이하면, 1. 대장부가 왜 다리를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고? 2.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왜 혀에 있지 않는고? 3. 큰 선지식이 왜 발에 매인 붉은 실을 끊지 못하는고?35가 된다. 그 배경을 보면 복잡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하다. 여러분의 견해를 밝히시라.
선불교에서 화두話頭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미혹되어 있는지, 아니면 깨달은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깨달은 마음을 무엇인가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마음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은 마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보는 마음, 다시 말해 희론이나 가치평가에 물들지 않는 근본적인 경험을 직시하는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중략)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공을 찬다고 해보세요. 제대로 찬다면, 우리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헛발질을 한다거나 혹은 차고 난 뒤 발이 아프다면, 우리는 자기의 다리를 의식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다리가 아플 때나 불편할 때에만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노력을 의식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리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힘이 센 사람일 수 없습니다. 다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힘이 센 사람, 그러니까 대역량인大力量人은 그냥 다리를 들고 무엇인가를 세차게 걷어찹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중략)
아직도 송원의 첫 번째 화두가 이해하기 힘든 딜레마로 보이시나요.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요.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린다는 의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무엇인가를 걷어찰 수 있다는 것이고, 혀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는 제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don’t think, but look)” ‘이것은 이렇고 저것을 저럴 거야’라고 가치평가나 희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직시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36
희론(戱論 prapañca)37이란 ‘희롱戱弄의 담론談論’이란 말로,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로서 사람들을 망상의 세계 속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라는 뜻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킨다.『대지도론大智度論 805』에는 ‘단지 희론戱論 때문에 여래如來가 있다고 설명할 뿐이니, 쓸모없는 이론이 끊어지면 여래는 없다.’고 하고 있을 정도이다.
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소년 ‘파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도 비슷한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구조된 후 소년이 회상하면서 하는 두 가지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꾸며낸 이야기로 일종의 희론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事實이다. 판타지Fantasy와 팩트Fact의 문제인 것이다.38
처음 영화를 볼 때는 판타지에 빠져 실제로 일어난 팩트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의 선박회사 직원은 보고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었고 ‘상식적인 그럴 듯한 이야기’를 요구한다. 판타지일 뿐인 첫 번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항우는 세계를 봐야하는 대로 본 사람이고 유방은 세계를 보여 지는 대로 본 사람이다. 그래서 유방은 항우를 이긴다. 한편 유비는 유교를 그대로 지키려고 했던 사람으로,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본 사람이고, 반면에 조조는 세계를 보여 지는 대로 보고 현실적 결정을 한 사람이다.
세계를 봐야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 지는 대로 볼 수 있는 힘을 가져라. 그러려면 우리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버리지 말고, 나의 독립적 자발성을 끝까지 확보해야 한다. 집단 속에서 자기의 자발적 생명력이 사라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39
모호한 것 같지만 최진석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첫 번째 이야기는 봐야하는 대로 본 것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보이는 대로 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첫 번째 이야기는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보이는 대로 본 것이다.
화두란 가상의 이야기이고 화두참구란 그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화두 참구란 우리가 보려고 하는 세계, 즉 선입견과 기존의 관념으로 포장된 세계에서 탈피하여 이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게 하는 안목을 기르게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성립될 것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보이고 싶은 대로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하라. 그것과 하나 되어 그 생각조차 없으면 완벽하다.
IV. 감상
들길을 걸어간다.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만난다.
계곡을 건너 초록이 쌓인 오솔길을 한 발 한 발 오른다.
다져진 흙을 밟고 바위를 지나 빛을 다투는 나무 끝을 본다.
물 농도를 따라가며 풀들이 서로의 고개를 내민다.
숲을 빈틈없이 빽빽이 채운다.
아우성치는 모습이
우리 같다.
숲의 아우성은
다양함으로 피어난다.
각각의 이름으로 화려하다.
우리는 하나로 향한다.
하나로 향하는 것은 피곤하다.
아우성치면서 살면 모두가 아우성이다.
세상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있을 뿐이다.
Amor Fati40
V. 참고한 책과 글
1) 송원화상이 말했다. “불법의 수행으로 뛰어난 지혜와 인격[力量]을 갖춘 사람이 어째서 가부좌한 다리를 풀고서 좌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가?” 또 말했다. “(불법의 수행으로 훌륭한 지혜와 인격[力量]을 갖춘 사람이) 어째서 입을 열고 혀를 사용해서 설법을 하지 않는가?” 불법의 지혜와 인격을 구족한 대력량인은 가부좌한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설법하려고도 하지 않고, 무심의 경지에서 조작 없이 살고 있는 것. 그런데 왜 그렇게 살고 있을까? 대력량인의 입장과 작용을 파악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82). 뒤 구는 문맥상 ‘開口(因甚)不在舌頭上’로 보아 ‘因甚’이 생략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2) 향수해香水海:『화엄경』「화장세계품」과『능엄경』제5권에 있는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설화에 의거한 것. 노사나불의 장엄된 국토가 있고 그 국토는 하나의 큰 연꽃 가운데 있으며, 이 세계의 최하부에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다고 한다. 수미산을 둘러싼 9山 8海 가운데 7번째 바다이다. 8海 가운데 한 바다만이 염분을 함유하고 있는 함수鹹水이고 나머지 일곱 바다는 香水로 되어 있다고 한다. 대력양인은 온 우주의 법계와 하나가 된 입장에서 향수해를 뒤집어 차버리고 머리 숙여 사선천四禪天을 쳐다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선천四禪天: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는 중생의 살고 있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 중에 색계에 初禪天, 二禪天, 三禪天, 四禪天이 있다고 하며, 욕계에 있는 중생은 좌선수행을 닦음으로서 사선천에 태어날 수가 있다고 믿었다.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85)
3) 송원숭악(松源崇岳, 1132~1202): 남송 때의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 승려. 처주(處州, 浙江) 용천龍泉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오吳씨고, 호는 송원松源이다. 어릴 때부터 출가의 뜻을 품어 23살 때 오계五戒를 받고 사미沙彌가 되었다. 이후 영석묘靈石妙와 대혜종고大慧宗杲, 응암담화應庵曇華 등 선림禪林의 숙로宿老들을 참알參謁했다. 융흥隆興 2년(1163) 서호西湖 백련정사白蓮精舍에서 득도得度하고, 강제江淛의 여러 고승들을 참알한 뒤 밀암함걸密庵咸傑의 법을 이었다. 보은광효사報恩光孝寺와 실제선원實際禪院, 천복선원薦福禪院, 지도선원智度禪院, 운암선원雲巖禪院 주지를 역임했다. 경원慶元 3년(1197) 영은사靈隱寺 주지가 되어 현친보자사顯親報慈寺를 개창했다. 가태嘉泰 2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71세다. 제자 선개善開와 광목光睦 등이『송원화상어록松源和尙語錄』2권을 편찬했고, 육유陸游가 비명塔銘을 썼다.(중국역대불교인명사전, 이회문화사)
4) 밀암함걸(密庵咸傑, 밀암걸密庵傑, 천동함걸天童咸傑, 1118~1186) 선사의 법명은 함걸咸傑이며, 응암담화應庵曇華스님의 법제자로 복주福州 정씨鄭氏 자손이다. 그 어머니가 여산廬山의 스님 하나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스님을 낳았다. 삭발하고 여러 총림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끝으로 응암스님을 찾아뵙자 응암스님이 방장실에서 물었다. “무엇이 정법안正法眼인가?” “깨진 사기그릇입니다.” 응암스님이 수긍하였다.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上』「26. 밀암 함걸(密庵咸傑)선사 / 1118~1186」 p. 238).『총림성사叢林盛事』에도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선림보훈禪林寶訓』에는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들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주지는 세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일이 번거로워도 두려워 말고, 일이 없다 해서 굳이 찾지도 말며, 시비분별을 말아야 한다. 주지하는 삶이 이 세 가지 일에 통달한다면 외물外物에 끄달리지 않으리라.’라는 것도 있다.(선림고경총서 6, 백련선서간행회 편,『선림보훈禪林寶訓』「35. 티끌 세속에서 불사를 짓다 / 밀암 함걸密庵咸傑스님 / 1118∼1186」 p. 232)
5)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p. 182~183.
6)『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을 지은 희수소담希叟紹曇은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선사로, 무준사범의 법제자이며 서촉西蜀 출신이다. 이종理宗 순우淳祐 9년(1249)에서 공종恭宗 덕우德祐 원년元年(1275)까지 약 30년간 강남의 불롱선사(佛隴禪寺, 1249)를 비롯하여 법화선사(法華禪寺, 1260), 자성선사(資聖禪寺, 1264), 숭경선사(崇慶禪寺, 1269) 등에 주석하면서 많은 법문을 하였다. 또 일본스님들과도 교분이 있어서 편지 등이 많이 남아 있다.(선림고경총서 9, 백련선서간행회 편,『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上』「해제解題」)
7) 무불 스님의「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 고봉高峯 화상」이 자료는 김숙현 씨의 석사논문을 다수 참고하였다고 함.
8) 충본극기沖本克己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 p. 295.
9)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10)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83.
11) 이것은 다음 일화에서 비롯하였다. 낭야각瑯琊覺이 시중示衆하여 말하였다. “유구와 무구는 등 넝쿨이 나무에 의지한 것과 같나니, 나무가 쓰러지고 등 넝쿨이 마르면 한 무더기의 땔감이로다.”[묘희妙喜가 착어着語하기를 “낭야는 마치 도적을 자식으로 여기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커서 보답하기 어렵도다.” 하였다.]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357. 유구有句」 p. 481)
12) 선림고경총서 21, 백련선서간행회 편,『고애만록枯崖漫錄』 pp. 48~50. 黃楊禪은 황양黃楊의 회양목. 잘 자라나지 않는 생태를 가졌으므로 융통성 없고 답답한 선수행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枯崖和尚漫錄 卷上』松源岳禪師初入閩見乾元木庵。久之。辭去。木庵舉。有句無句。如藤倚樹。源曰。裂破。曰。琅邪道。好一堆爛柴[漸/耳]。曰。矢上加尖。曰。吾兄下語。老僧不能過。其如未在。他日拂柄在手。為人不得。驗人不得。曰。為人者。使博地凡夫一超入聖域。固難矣。驗人者。打向面前過。不待開口。已知渠骨髓。何難之有。庵舉手曰。明明向汝道。開口不在舌頭上。後當自知。逾年。源見密庵於衢州西山。隨問即答。庵笑曰。黃楊禪。爾後。在徑山聞庵問旁僧。不是心。不是佛。不是物。忽大徹。乃曰。今日方知木庵道。開口不在舌頭上。源生處之龍泉吳氏。開法蘇臺澄照。慶元間。被旨住靈隱。門庭高峻。入者鮮不為大器。烏虖。松源.破庵.曹源.萬庵。豈非起中峰之道者耶。
13)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87.
14)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1.
15)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16)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1.
17) 대혜가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死禪’이라고 비난하였는데, 굉지는『묵조명默照銘』을 지어 이에 대응하였다.묵조선이란 명칭도『묵조명』에서 유래한다. 2011년에 개최된 제 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에서 일본에서 유학한 한 스님이 <묵조선>이란 말은 근대들어 일본에서 처음 쓰기 시작하였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그전까지는 대혜 선사가 한 ‘默照死禪’이란 말만 통용되었다고 한다. 한편, 묵조선과 간화선의 대립은 굉지정각 선사가 대혜종고 선사를 도와주는 사건이후 화해로 끝이 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고(『천강에 비친 달』(숭산행원선사 법어집, 불교통신교육원佛敎通信敎育院 1987), 정성본 스님의『선의 역사와 사상』에 따르면, 대혜의『서장書狀』을 보고 추측하는 것일 뿐, 대혜종고 선사가 특별히 조동종을 비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8)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60~361.
19)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86.
20)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선문답 산책]「62. 송원화상의 대력량인」법보신문 1055 호 / 발행일 :
2010-07-06.
21)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357. 유구有句」 pp. 473~474. [說話] “유구와 무구는[有句無句]……”이라 함은 두 구절이 서로 의지하고 기대있다는 뜻이요,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承師有言]……어디로 돌아갑니까?[何處]”함은 나무가 쓰러지고 등 넝쿨이 마른 곳[樹倒藤枯處]에 착안한 것이요, “깔깔거리고 크게 웃었다[呵呵大笑]”함은 웃음 속에 칼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함에는 모름지기 철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가 4천 리 밖에서[某甲四千里]……”라고 함은 위산의 막대한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요, “돈을 갖다가 이 상좌에게 돌려주어라[取錢還這上座]”함은 은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문장에 나타난 뜻과 같다.
『갈등집葛藤集』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三十二】懶山(安)有句: 福州長慶懶安和尙示衆云, 有句無句如藤倚樹. 疎山聞得道, 我有一轉語, 要去問者老子. 夏罷遂入閩見懶安和尙. 又謂之潙山和尙. 裵相國帥閩, 自潙山請住長慶. 疎山到彼, 値師泥壁次, 疎山便問, 有句無句如藤倚樹. 是和尙語否. 潙山云, 是. 疎山云, 忽然樹倒藤枯, 句歸何處. 潙山放下泥盤, 呵呵大笑歸方丈. 疎山云, 某甲三千里外, 賣却布單, 特爲此事來. 和尙爲甚不與某甲說. 潙山云, 侍者將錢來, 與者矮闍黎去. 他日有獨眼龍, 爲汝點破去在. 後到明招擧前話. 疎云,潙山頭正尾正, 只是不遇知音. 疎山云, 忽然樹倒藤枯, 句歸何處. 招云, 更使潙山咲(笑)轉新. 疎山當下有省. 乃至, 潙山元來咲中有刀. 後來, 大慧禪師, 在圓悟會裡. 悟遂令居擇木堂. 作不釐務侍者. 每日同士大夫入室. 圓悟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 大慧纔開口, 悟便道不是. 如是將半年. 一日, 同趙表之, 方丈藥石次, 把筯在手, 忘了喫飯. 圓悟顧師而語表之曰, 只這漢參得黃楊木禪也. 師遂引狗看熱油鐺爲喩. 圓悟曰, 只這便是金剛圈栗棘蓬. 居無何扣圓悟曰, 聞和尙嘗問五祖此話. 不知記其答否. 圓悟笑而已. 師云, 若對人天衆前問, 今豈無知者耶. 圓悟乃至, 向問有句無句如藤倚樹是如何. 祖云, 描也描不成, 畵也畵不就. 又問, 忽遇樹倒藤枯時如何. 祖云, 相隨來也. 師聞擧乃抗聲曰, 某甲會也. 圓悟曰, 只恐你透公案不得. 云, 請和尙擧. 圓悟遂擧. 師出語無滯. 圓悟曰, 今日方知吾不汝欺也. 遂着臨濟正宗記. 以付之, 卑掌記室, 分座訓徒.
22)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333.
23)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357. 유구有句」 pp. 483~484. ‘저울추에다 초간장을 발랐느니라’는 칭추초초秤搥醮醋의 번역이니, 저울추에다 아무리 양념을 잘해도 먹을 수 없다. 즉 입을 뗄 수 없다는 뜻이다. 맹팔랑孟八郞은 맹씨네 여덟 째 아들이란 말이니, 용맹스러우나 약간 우직한 성품의 인격을 뜻하는 대명사. 여기서는 위산을 가리키는 말이니 위산이 병통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상禪床을 두드리면서 ‘소로소로’하고 외쳐서 치료하였다. [說話] 송원松源의 상당에서 “저울추에 초간장을 발랐느니라[秤鎚醮醋]”함은 일찍이 바뀐 적이 없다는 뜻이요,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는다[換骨洗腸]”함은 유有와 무無를 초월하는 뜻이요,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殺人刀]……”라고 함은 밝음과 어두움이 뒤섞인 소식이다. 또 상당하여 말한 것에서 “맹팔랑이[孟八郞]……”라고 함은 약이 병이 된다는 뜻이요, “소로소로蘇壚蘇嚕”는 병이 의사가 되는 도리이다. ‘소로소로蘇嚕蘇嚕’는 진언의 일종으로 괴이함을 물리치는 한 방법이다.
24) 雲棲 株宏 編纂 ․ 光德 譯註,『선입문 ․ 禪關策進 - 이것이 선의 길이다』 pp. 186~189. 운서주굉雲棲株宏: 중국 항주(현 절강성) 인화현에서 가정嘉靖 14년에 태어난 스님은 열일곱 살에 이미 사전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박학하였으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가정 45년에 성천性天 화상을 은사로 출가, 제방으로 행각하다가 항주 운서산에 일대총림을 창설하여 크게 종풍을 떨쳤다. 계율의 부흥과 정토법문의 제창, 방생을 권장하는 등 선과 염불과 계율에 두루 관심을 갖고 활약한 대종장이다. 만력 43년(세수 81세, 법랍 50세)에 입적했다.『구계편몽具戒便夢』『범망경소발은梵網經疏發隱』『사미율의 요략』『아미타경 소초』등 저서가 30여 종에 달한다. 광덕: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1999년 열반. 암울한 민족의 격동기였던 50년대, 범어사에서 당대의 대선지식인 동산東山 스님을 만나 참선을 시작, 위법망구의 구도정신으로 수행 정진하였다. ’74년 9월 불광회를 창립하고, ’74년 월간「불광」창간, 불교의식문 한글화, 경전 번역, 찬불가 작시, 불광사 대중법회 등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인의 품으로 돌려주며 대중을 일깨웠다. 역저서에『육조단경』『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삶의 빛을 찾아』『행복의 법칙』『메아리 없는 골짜기』『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반야심경 강의』『보현행원품 강의』등을 비롯하여 대중들의 마음을 밝혀주는 주옥같은 역저서 20여 종이 있다.
25) 上堂。僧問。如何是劍刃上事。師云。禍事禍事。僧擬議。師便打。(『임제록臨濟錄』)
26)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303.
27) 남송말년 일본다도의 비조鼻祖격인 에이사이(명암영서明菴榮西, 1141~1215)는 두 차례나 중국을 다녀오는데, 이때 원오선사가 지은『벽암록』과 함께 원오선사가 친필로 쓴 ‘다선일미’의 묵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191년에는 일본 최고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광범위하게 선도禪道와 다도茶道를 전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28)『마하지관磨訶止觀』은 천태종天台宗에서『법화경法華經』을 주석한 책으로 천태종의 실천적 수행론이 집대성된 책이다.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79)가 구술口述한 것을 제자인 장안관정章安灌頂이 기록한 것이다.『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법화문구法華文句』와 함께 이른바 법화삼대부경法華三大部經 중의 하나이다.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삼종지관三種止觀이란, 이 책에서 설하고 있는 원돈圓頓, 부정不定, 점차漸次의 세 가지 수행법을 말하는데, 원돈지관圓頓止觀은 곧 바로 실상實相의 구극究極을 체득하는 것을 말하고, 부정지관不定止觀은 때와 경우에 따라 깊고 얕음과 전후가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말하며, 점차지관漸次止觀은 얕은 곳으로부터 점차 깊은 곳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지(止, 사마타samatha)는 마음을 한 곳에만 모으는[心一境性] 실천을 의미하고, 관(觀, 위빠싸나vipassana)은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관止觀이란 여러 가지 생각을 그치고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머무르게 하여, 그것에 의하여 올바른 지혜를 일으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磨訶止觀』의 체계는 인도선의 중국적 변용이 최종적인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29)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p. 187~188. 大德 山僧이 說向外無法 學人不會 便卽向裏作解便卽倚壁坐 舌拄上齶 湛然不動取此爲是祖門佛法也. 大錯. 是儞若取不動淸淨境爲是 儞卽認他無明爲郞主. 古人云, 湛湛黑暗深坑 實可怖畏. 此之是也. 儞若認他動者是 一切艸木皆解動 應可是道也. 所以動者是風大 不動者是地大. 動與不動 俱無自性. 儞若向動處捉他 他向不動處立. 儞若向不動處捉他 他向動處立. 譬如潛泉魚 鼓波而自躍. 大德 動與不動. 是二種境. 還是無依道人 用動用不動. ‘담담흑암심갱湛湛黑暗深坑’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구덩이. 담담湛湛은 깊다는 표현.『대혜서大慧書』26에는 ‘흑산하黑山下의 귀신 굴[鬼窟]’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활발발지活潑潑地”의 진인眞人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비여잠천어譬如潛泉魚’는『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의 구절. 원래 의미는 안에는 사업思業이, 밖에는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이 나타난다는 것이나, 사업에도 무표업無表業이 있다는 유식적唯識的인 입장을 보여 준다. ‘고파鼓波’는 물고기가 파문을 그리며 수면에 뛰어오르는 것.
30)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14-25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쓴다」.
31) 중국 宋代 看話禪 및 그 사상의 特質, 賴永海 / 中國 南京大学 교수, 번역: 김진무(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출처; 보조사상 26집.
32) 무불 스님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 고봉高峯 화상」이 자료는 김숙현 씨의 석사논문을 다수 참고하였다고 함.
33) 관장管長은 불교나 신도神道에서 한 종파의 우두머리, 종정宗正을 말함. 관장은 우리나라 총림의 방장보다는 규모가 크지만 조계종 종정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종정을 종파의 우두머리라고 정의했듯이 일본의 경우 임제종 14개 파를 각각 주관하는 대본산 사찰의 우두머리를 종정이라고도 한다.
34)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35) 無門 慧開 原著, 宗達 李喜益 提唱,『무문관無門關』 pp. 219~220.
36) 강신주,「3. 대역량인大力量人 - 원효도 해골도 물도 그대로, 생각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라」법보신문 / 발행호수 : 1180 호 / 발행일 : 2013-01-30.
37) 희론戱論: 희롱戱弄의 담론談論. 부질없이 희롱하는 아무 뜻도 이익도 없는 말. 여기에는 사물에 집착하는 미혹한 마음으로 하는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언론인 애론愛論과 여러 가지 치우친 소견으로 하는 의론인 견론見論의 2종이 있다. 둔근인鈍根人은 애론, 이근인利根人은 견론, 재가인在家人은 애론, 출가인出家人은 견론, 천마天魔는 애론, 외도外道는 견론, 범부凡夫는 애론, 2승乘은 견론을 고집함.(『불교용어사전』동국역경원)
38) tvn 드라마,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에서 나온 말.
39) 최진석, EBS 인문학특강 <현대철학자 老子>에서 인용.
40) Amor Fati, 운명애運命愛,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 소크라테스의 스승이며 유럽 문학 최고 최대의 서사시로 평가받는『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쓴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 BC 800 ? ~ BC 750)의 말이다. 그에 의하면, 운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닥쳐오지만,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이기도 하다. (김상근 교수의 EBS 인문학특강 <인문의 시대, 르네상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