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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증기 기관차
가) 모갈 탱크형 기관차
한국에서 운행된 최초의 기관차는 경인철도에서 사용된 미국 브룩스 공장제 모갈탱크형 기관차였다. 1899년 7월 인천공장에서 조립한 모갈탱크 기관차는 차륜배열이 2-6-0형으로 중량이 35톤이었는데 이 기관차는 그 후 수 십 년 동안 사용되었다. 탱크기관차는 석탄과 물을 직접 기관차에 적재한 기관차이다.
나) 만주철도 위탁 경영시대(1917.7~1925.3)
1917년 7월 31일 일본은 한국철도의 경영 주체를 총독부 철도국에서 남만주 철도(주)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위탁경영이 시작되었다. 초창기 차량은 주로 미국제 수입제품이었으나, 만주철도의 자체제작 방침에 따라 1922년 미국 Baldwin사의 파시(Pacific)형을 설계를 변경한 후 제작하여 운행하였다.
개량된 파시형의 운전정비중량은 150ton으로, 이후 5차례에 걸쳐 개량이 이루어졌고, 국내철도의 선로상태 및 환경에 적합한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여객열차용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화물열차의 경우 역시 미국제인 미카(Micado)형을 개량 설계하여 사용하였으며, 주요 특징으로는 한국산 저칼로리 갈탄 사용을 위한 화상면적 확대를 통해 연소율과 함께 보일러 효율을 높인 것을 들 수 있다.
다) 총독부 철도국 직영시대(1925.4~1945.8.15)
1925년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대륙으로의 교통량 증가에 대처하고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만철의 위탁경영을 해제하고 총독부 철도국을 설치한 후 직접경영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미국제 차량의 근본적 개조를 통한 자체설계 및 제작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개조차는 푸러4형으로 서울역사가 신축된 1925년에 제작되었으며, 주요특징으로는 예전에 비해 60% 확장된 화상면적, 취약점이었던 불꽃방지에 대한 배려, 확대된 기관차의 크기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만주침략을 위한 산악지대의 지하자원 개발과 관련하여 급구배와 산악지대에 적합한 강력한 견인력을 갖는 기관차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마터(Mountain)형 기관차를 개발하였다.
최대축중이 22ton으로, 주요 특징으로는 복원력이 큰 4륜 보기대차형식의 새로운 장치가 설치되고 자동급탄기와 보일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경제적인 장치가 설치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라) 광복이후 교통부 시대(1945.8.15~1963.8)
광복직전인 1945년 7월 국내에서 운행되던 증기기관차는 총 1,167량이었으나 광복후 남과 북으로 분단됨에 따라 남쪽은 총 534량의 기관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때의 증기기관차 차종으로는 푸러, 사타형의 탱크식 증기기관차와 터우, 소리, 미카, 마터, 파시형의 텐더식 증기기관차 등을 들 수 있다. 또 여객열차용으로 푸러, 타우, 파시형이 사용되었으며, 화물열차용으로 소리, 미카, 마터형이 각각 사용되었다.
1954년 4월 전쟁 중 UN군이 사용하던 디젤전기기관차 4량을 인수하면서 증기기관차시대가 디젤차량시대로 전환이 되었다. 이후 상태가 양호한 증기기관차를 선별하여 연소장치를 기름연소식으로 개조한 후 사용하였다.
마) 철도청 시대(1963.9.1~현재)
1963년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수립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철도차량분야에서도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디젤차량이 도입되었고, 1967년 8월에는 증기기관차의 공식 운행이 마감되었다. 이 후에 운행되는 열차는 주로 관광열차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디젤기관차
6.25당시 UN군이 운용하던 디젤전기기관차를 휴전과 더불어 UN군 철수시 SW8형(2000형)기관차 4량을 우리 철도에 기증하면서부터 디젤기관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디젤전기기관차는 견인력 3000HP, 최고속도 150km/h, 중량 124ton이 대표적인 기관차로, 여객 및 화물열차 견인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디젤 기관차
공장이나 역구내에서 차량들을 붙이거나 떼는 데 주로 사용하는 입환용 디젤차량의 경우 액체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디젤기관차의 수가 많은 미국에서는 전기식을 채용하고 있다. 아래 그림에 나와 있는 차량은 현재 인천지하철에서 사용되고 있는 70ton급 입환용 디젤기관차이다.
가) 발달사
1955년 3월 유엔군으로부터 견인 800마력(정비중량 94.5ton, 최고속도 105km/h)의 소형 기관차 2000호대(SW-8형) 4량을 인수받아 국내에서 최초로 운행하였다. 이후 어려운 국내경제상황으로 인해 1970년대말까지 대부분 차관자금에 의해 도입을 하였고, 미국의 EMD/GMC사로부터 완전조립체 형태로 도입을 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경제발전으로 인해 1979년 현대정공에서의 디젤기관차 7581호(견인 3000마력, 정비중량 132ton, 최고속도 105km/h) 조립 및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해연도 9월 18일 서울역에서 국산 디젤전기기관차 운행식을 거행하였다.
이때부터 외국업체와의 기술협력 또는 자체개발을 통해 대부분 국내에서 조립, 생산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984년에는 현대정공에서 제작된 국내개발차량이 최초로 외국에 수출되었다.
나) 특징
디젤차량은 전기차량과 마찬가지로 동력을 집중한 디젤기관차와 동력을 분산한 디젤동차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긴 편성의 간선열차에는 디젤기관차를, 지선의 소단위 열차에는 디젤동차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새마을호 열차로 사용되는 Push-Pull형 디젤동차는 명칭은 동차이지만 8량 편성의 양쪽 끝에 기관차가 붙어 있어 동력집중식 차량으로 볼 수 있다.
다) 형식
1989년 한국 현대 정공(주) 디젤차량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동력 즉, 열차를 끄는 힘을 내는 엔진과 이 엔진의 회전력을 바퀴에 전달하여 바퀴를 돌려주는 동력전달 장치이다. 동력 전달장치에는 기어의 이빨수를 적당히 조합하여 필요한 회전수를 만들어 내는 치차식도 있으나 주로 전기식과 액체식을 많이 사용한다. 전기식은 엔진의 회전력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낸 다음 이 전기로 모터를 돌려주고 다시 이 모터가 바퀴를 회전시켜 주는 방식을 뜻한다.
반면, 액체식은 엔진과 연결된 1차 회전축과 바퀴에 연결된 2차 회전축 사이에 액체를 이용한 트랜스미션을 사용하여 동력을 전달하는 방식을 말한다. 디젤동차의 경우 경량화 등의 이유로 주로 액체식을 사용한다.
승객운송 디젤동차
편성 전/후부에 운전실이 설치된 3, 4, 5량 단위의 고정편성 차량으로, 자체 하부에 315HP의 견인용 엔진이 차량당 2기씩 탑재된 액압변속구동방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최고속도는 120km/h이다. 승객편의성을 최대로 고려한 편의시설과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석을 갖추고 있다. 넓은 시야와 시원한 냉방시설을 가지고 있어 도시간 출/퇴근용으로 적합한 차량이다.
http://www.future-top.com/web/open_product/history_list_02.asp
철도변천사 (기관차)
증기 기관차 (1899.9.18~1967.8.3)
증기기관차는 일제통치하에서 그 양적인 증가를 계속하여 1945.8.15일 해방당시에는 166량의 증기기관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8.15해방후 남북한이 분단될 당시 남한에는 488량의 증기기관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5. 12. 27일 처음으로 우리의 기술로 만든 기관차(해방 제1호)가 영등포-수원사이에서 시운전되었으며, 이 기관차는 용산 공작소 영등포공장에서 제작한 차량으로 객차 20량을 연결, 100km/h 달릴 수 있는 2000HP 힘을 가지고 있었다.이후 부족되는 기관차를 보충하기 위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차륜공장에서 3대를 제작하는 등 계속해서 자체제작 계획을 세워진행하였으며, 1946. 5. 7일에는 사설철도의 국유화에 따라 사철에서 보유중인 58량의 기관차가 편입되고 19 48년에는 631량의 기관차를 보유 함으로서 화물 및 여객수송난을 완화시켜 나갔으나, 디젤전기기관차 출현으로 1967. 8. 31일 증기기관차의 본선 운전이 중지되었다. 철도대동맥을 이끌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증기기관차 시대는 사라졌으나 철도청에서는 칙칙폭폭하고 다니던 추억과 낭만이 가득한 관광열차용 중거리열차로 교외선(서울-의정부)에 운행하기 위하여 '94. 8. 5일 중국 장춘 기차공장으로부터 1500HP 증기기관차 1량을 도입하여 '94. 8. 21일부터 일, 공휴일에 무궁화객차 4량을 연결 80km/h로 운행하여 고향의 향 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특히 예식객차운행으로 고객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전기 기관차 (1924~1950.6.25) (1973.6.20~현재, 금강산선)
우리나라 전기철도의 효시는 1899년 음력 4월 8일 서대문에서 홍능까지 운행을 개시한 전차이며 이는 철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간 33.2Km 의 경인 철도가 개통된 시점보다 빠르다 할 것이다.
1924년 경원선 삼방∼복계간과 금강산 철도에 직류 3,000V의 전기기관차를 운행하였는데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들 보다 지하 연료자원이 적은 나라, 산이 많은 나라에서 발전을 보게 된 전기철도는 오늘날 가장 우수한 철도의 수송방식으로 각광을 받아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일찍부터 전기철도화를 이루었으며 속도 향상의 절대 적인 위치를 점유하고있고 현재 최고속도 516Km/h(상업최고 속도300Km/h)의 고속철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조류에 따라 우리철도도 태백지구의 생산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1968년 5월 10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선 전철화 지시에 따라 1969년 9월12일 산업선인 중앙, 태백, 영동선 전철화를 착공하여 1972년 6월 9일 고한 ∼ 증산간 10.7Km 전절화가 완공되어 시운전에 들어감으로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전기 철도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디젤전기 기관차 (1950.6.25~현재)
우리철도에 있어서 디젤전기기관차는 1950.6.25 동란당시 UN군에 의해 디젤전기기관차 50여량을 운용하다. 1953년 휴전과 더불어 UN군이 철수하면서 SW8형(2000대형) 기관차 4량을 우리철도에 기증하면서 디젤기관차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디젤기관차 4량을 당시 구배가 심하고 터널이 많아 증기기관차운전에 어려움이 많던 중앙선 풍기-단양간의 시험운용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바 있어 1956.3.15일 현 제천기관차 사무소에 부산공작창 기관차 공장 제천분공장 을 창설하여 우리철도 역사상 처음으로 디젤전기기관차 정비업무를 전담하여 우리의 기술로 정비하여 운용하는데 자신감을 얻었다.
그후 연차적으로 미국 GMC에서 357량, ALCO에서 49량등 428량을 도입하여 우리철도 수송동력의 주요임무를 디젤전기기관차로 대체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1967.8.31일 드디어 증기기관차 본선운행의 종운식을 거행하므로 1899.9.18일 노량진-제물포간 철도개설 이래 68년간 우리강산을 누비며 많은 물자와 인원을 수송하던 증기기관차는 사실상 사양길에 접어들고 대신하여 디젤전기기관차 가 수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 함으로서 철도동력의 현대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후 계속 디젤전기기관차는 증가하여 현재 490여량에 이르렀으며, 1980년부터는 현대정공(주)에서 미국 GMC사와 기술제휴하여 국산디젤전기기관차를 생산하기에 이르러 우리 철도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최근에는 연료펌프전동기를 DC→AC로 교체하고, '97년부터 도입되는 신조기관차에는 BTR대차를 장착시키므로 검수를 용이하게 하고 무보수화하므로 안전운행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고객중심경영혁신과 관련 내부고객만족을 위하여 기관차 운전실에 에어컨을 설치 쾌적한 환경에서 업무에 임하도록 하고 있고, 앞으로 1인 승무에 대비하여 기관사 졸음방지장치, 열차발차통보장치, 객차 출입문개폐장치 등 운전 보안설비를 보완 경영개선에 기여하고 있는 등 대동맥인 철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디젤동차 (1961~현재)
디젤동차는 주로 단구간 반복운행이 잦은 구간운용 및 관광열차용에 주로 층당하고 자체 동력을 갖고 있으므로 운행의 간편함과 여객수송의 기동성 등으로 그 운용상 효율을 높이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1961년에는 일본에서 도입 운용중인 동차엔진(일본제 Nigata)이 노후되어 성능이 저하됨에 따라 '73년 부터 미국제 Cummins엔진으로 교체하여 사용하였으며, '61년 이후 일본에서 도입된 동차는 승객의 선호도가 낮아지고 내용년수 초과 및 차량 노후로 새로운 형식의 디젤동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전기동차 1호선 (1974.8.13~현재)
수도권 지하철 건설은 1950년대부터 구상되었으며 1962년 철도청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작업시 수송의 보다 효율적인 방안과 이용객에 대한 편의 제공을 위해 현 서울역과 청량리역 서편에 위 치하는 하차장까지를 지하철로 연결하는 도상작업으로 계획안을 작성하고 차관사업으로 추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산업개발을 위한 신선건설사업과 기존선로 수송력 보강을 위한 제사업의 시급성으로 지하철 건 설을 재정형편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 서울시장에 양택식시장이 부임한 후, 서울시 지하철 건설본부가 설립되고『수도교통의 현황과 대책』이 수립됨으로서 지하철 1호선 및 수도권 전철화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 4월 12일 기공식과 함께 지하구간이 건설되고 기존철도와 연결키로 하고 직류/교류 직통 운전을 위한 무가압구간을 만들기로 하였다.
당초 일본 조사단은 타당성 조사에서 종로선을 교류 25,000V 전기방식을 추진키로 했으나 기 매설된 통 신선에 유도장해가 발생케 되는 문제가 있어 과학기술처, 교통부, 체신부, 건설부, 경제기획원, 서울특별시, 철도청, 한전, 한국 과학기술연구소 등 관계기관이 30회에 걸친 회의와 협의 끝에 지하철은 직류방식으로, 철도청 전철화는 교류방식으로 차량은 직교류 겸용으로 결정됨으로서 현재 운행중인 1호선 차량의 방식이 결정되었다.
PP동차 (1974.8.13~현재)
1980년 중장거리용으로 DEC 10량(5×2)을 국내에서 제작하여 초기에는 서울-남원간을 새마을열차로 운 행하였고, '84년부터 '89년까지 NDC 36량(2량, 3량,4량편성)을 국내제작 도입하여 경춘선 및 경부선에 운행하게 되었다.
이후 여객열차의 속도향상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여 동력차의 축중, 주행성능, 승차감 환경소음, 열 차의 탄력운용 및 기동성 등을 고려한 유선형 전후 동력새마을동차(150km/h)를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1987 - 1994) 404량(50 개 편성)이 국내에서 제작구입되어 6량,8량,16량 편성으로 운용 새마을 열차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는 등 디젤동차의 새 시대를 열게 되었다.
신도시용(과천선, 분당선, 일산선) 전기자동차 (1994.4.1~현재)
1988년 신도시 건설계획에 따른 교통대책의 하나로 과천선, 분당선, 일산선 건설이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이 선로에 운용할 차량에 대해서 1988년말 부터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차량 시스템 선정에 있어서 기존 전기동차는 여러가지로 문제점이 많아 상호 직통 운전이 불가능하기 때문 에 신시스템의 도입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89. 3. 23 교통부 주관하에 수송정책실에서 관계 기관대책회의가 있었고 여 기서 상계-산본간 지하철 신조차량 직통운전과 철도청 차량의 안산-상계간 직통운전이 검토되었다.
당시 현대정공은 ABB(스웨덴), Mitsubishi, 대우중공업은 Hitachi, Toshiba GEC-Alsthom, 또한 한진중 공업은 Toshiba를 각각 파트너로 하여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차량국은 본격적으로 수차례의 기술회의 세미나를 주최하였으며 지하철공사측과도 여러차례의 협의를 거쳐 1991. 12월 7일 최종확정된 91전기동차 제작특수시방서에 의하여 PWM CON & VVVF I NV SYSTEM (PulseWidth Modulation Conv -er & Variable Voltage Variable Frequency Inverter : 펄스폭 변조방식 콘버터 및 가변전압 가변주파수 제어방식 인버터 시스템)에 의한 유도전동기 구동시스템 차량으로 결정되었다.
도시통근형 동차 (1996.4.1~현재)
1996.4.1일 도시통근형동차를 도입하여 운행하였으며 이는 도시간 통근 또는 중거리 여행에 적합 한 구조로서 앞으로 운행될 고속철도 및 본선 장거리 열차와의 연계수송에 적합하며 가감속 및 제동성능이 우수하고 실내설비의 고급화로 쾌적하고 안락한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1997. 3. 31일에는 기존의 획일적인 색상과 도안에서 탈피하여 본 차량의 차외색상을 교외선 차량의 이미지에 맞게 칼라테이프를 이용하여 꽃과 동산을 표현함으로서 자연 친화력을 갖는 새로운 이 미지와 전국 자연을 누비는 철도에 어울리는 동산의 푸르름과 밝은 색상의 꽃으로 정겨움과 피어오르는 희망을 상징하였으며, 대한민국 철도 이미지를 고려하여 무궁화를 상징적으로 적용한 동차를 구입하여 승객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계속 증가하여 현재 디젤동차로 총 보유량은 595량에 이르고 있다.
신형 전기기관차(최고속도 150km/h용) 개발 (1999.10.1~현재)
1996.4.1일 도시통근형동차를 도입하여 운행하였으며 이는 도시간 통근 또는 중거리 여행에 적합 한 구조로서 앞으로 운행될 고속철도 및 본선 장거리 열차와의 연계수송에 적합하며 가감속 및 제동성능이 우수하고 실내설비의 고급화로 쾌적하고 안락한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1997. 3. 31일에는 기존의 획일적인 색상과 도안에서 탈피하여 본 차량의 차외색상을 교외선 차량의 이미지에 맞게 칼라테이프를 이용하여 꽃과 동산을 표현함으로서 자연 친화력을 갖는 새로운 이 미지와 전국 자연을 누비는 철도에 어울리는 동산의 푸르름과 밝은 색상의 꽃으로 정겨움과 피어오르는 희망을 상징하였으며, 대한민국 철도 이미지를 고려하여 무궁화를 상징적으로 적용한 동차를 구입하여 승객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계속 증가하여 현재 디젤동차로 총 보유량은 595량에 이르고 있다
견인전동기
교류(AC) 전동기 사용으로 보수유지 간편 및 예산 절감
접촉기 및 계전기류
접촉기류, 계전기류의 무접점화(Module)로 고장방지 및 보수유지 간편
기계실 검수통로 및 냉각공기 유입 개선
기계실 중앙부에 점검 통로 설치로 검수 편리 도모하며 차체 천정부 공기유입으로 기계실내 먼지오염 최소화 및 기기보호
제동장치
에너지 절약을 위하여 회생제동 사용
1인승무 운전 시스템 적용
운전자 운전경계(Dead-Man)장치, 출발 보조제어스위치설치(운전석 반대측), 열차후부확인장치, 방호무선장치
KTX (2004.4.1~현재)
최고속철도 시대로
건국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 불리는 고속철도가 2004년 4월 개통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프랑스, 일본, 독일, 스페인 등과 함께 시속 300km의 초고속철도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속철도의 개통은 빠른 속도를 통한 시간단축으로 전국을 2시간대 생활권으로 연결시켜 국민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빠르고, 안전하고, 편안하며, 친환경적이고, 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고속철도는 차세대를 대표할 만한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시속 300km로 달릴 수 있는 고속철도의 힘
고속철도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200km/h 이상의 고속으로 주행하?는 철도를 일컫는다.
1964년 일본의 도카이도 신칸센(도쿄~신오사카)이 세계 최초로 210km/h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해 각 국이 속도향상을 위한 기술, 연구 개발에 매달려 현재는 시속 300km/h 대의 고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현재 운행되는 모든 고속열차는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어 고속철도를 고속전철이라고도 한다.
고속철도는 크게 종전의 열차와 같이 바퀴를 사용하여 레일 위를 주행하는 바퀴식(Wheel-On-Rail)과?자력의 흡인 반발력을 사용하여 열차를 부상시켜 주행하는 자기부상식(Magnetic Levitation)두 가지방식이 있다.
바퀴식 고속철도는 레일과의 점착력 한계로 시속 330km/h가 한계라고 생각했으나, 프랑스가 1990년 5월 대성양선의 남부지선 Vendome 구간에서 시속513.3km/h의 시험운행에 성공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자기부상식 고속철도는 독일, 일본 등에서 연구 중이며, 이미 지난 1997년 일본이 시속 550km의 속도?갱신을 세운 이래 시속 580km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중국 에서는 2002년 12월 상하이 국제 공항까지32km 구간을 개통해 시속 430km/h의 속도를 자랑하고 있다.
고속철도차량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
고속열차는 1편성(1대)당 동력차 2량(칸), 동력객차 2량, 객차 16량 등 총20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차량 길이는 387.9m 이고 총중량은 771.2톤(승객탑승 기준)이다.차량 내 좌석의 경우 특실은 1열차 3석으로 127석이고, 일반식은 1열차 4석으로 808석으로서 총좌석은?1편성당 935석이다. 간이좌석도 1편성당 30석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코레일유통
http://hcs1105.cafe24.com/project1_k-story/html/kr/railroad_storyway/sub1_2_3_9.html
철도기술백서
1. 철도역사 개관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 있어서 서막을 연 사건은 영국(1825년), 미국(1830년), 일본(1872년) 보다 훨씬 뒤인 1899년 9월 18일에 이루어진 경인선의 개통이었다. 조운과 수운, 조랑말과 우마차, 약간의 인력거와 자전거, 그리고 동대문과 흥화문 사이를 왕래하는 전차 이외에 현대적인 교통 수단이 별로 없었던 우리나라에서 철도의 개통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철도는 험난했던 우리의 근ㆍ현대사 속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며,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에서는 지난 100여 년에 걸친 우리 철도의 역사를 철도창설 이전, 일제침략기, 대한민국 시대 등으로 구분한 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1 철도창설의 배경
19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에 서구의 과학ㆍ기계문명이 점차 도입됨에 따라 철도는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7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는 여행기 ‘일동기유’에서 기차의 경이로움을 ‘화륜거’란 이름으로 소개하였고, 1880년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은 국가 운영상 철도가 가지는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882년 서구 열강이 철도부설을 요구하자 당시 한국 정부의 재정 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고종에게 국고의 부족을 이유로 이를 연기할 것을 건의하였다.
1885년 8월 서울~인천 사이에서 전기통신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철도에 관한 관심은 더욱 넓게 확산되어 갔다. 1887년 2월 9일 뉴욕의 한국영사는 공문을 통하여 서울~인천간의 철도부설을 건의하였다. 또한 1889년 당시 주미 조선공사였던 박정양은 정교한 철도 모형을 입수한 후 귀국, 고종과 대신들에게 철도의 편리성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890년대에 이르러 철도 건설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892년 고종은 미국인 모스(J. 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과 이하영에게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토록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쳐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당시 선진 열강들은 우리나라에서 철도를 건설하려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일본은 1885년부터 이미 철도노선에 대한 사전 답사를 시작하였다.
1892년 8월에는 철도기사 ‘가와노 텐스이’가 보조원 3명과 함께 약 2개월에 걸쳐 서울~부산간의 측량을 실시하였다. 또한 1894년 7월 청일전쟁 당시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원활히 수송하기 위해 일본 외상 ‘무츠 무네미츠’는 ‘다케우치 츠나’를 파견하여 서울~인천간, 서울~부산 간의 철도 부설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본은 경복궁을 습격하여 친일 내각으로 개편한 후 내각의 공무아문에 철도업무 중추기구인 철도국을 설치하였다.
1894년 8월 20일 일본은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고, 경인, 경부철도를 부설할 것을 약정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이 계획은 연기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도록 압력을 가하고 한국에서 철도의 주요 이권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이때부터 한국에서의 일본 세력은 다소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7월 우리 정부는 철도의 부설ㆍ감독ㆍ관리를 담당하는 철도사를 설치하고, 국제표준규격에 따라 철도를 건설할 것을 규정한 ‘국내철도규칙’을 제정ㆍ공포하였다.
독립협회 등의 조야에서도 철도 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가하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철도를 건설하자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이에 따라 1898년 우리정부는 서울~목포, 서울~원산~경흥, 원산~평양, 원산~진남포의 철도건설을 검토하였다. 그 후 박기종 등이 회사를 설립하여 우리의 손으로 철도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자금 부족과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1-2 일제 시대
일본을 비롯한 선진 열강이 국내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는 동안 을미사변으로 일본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뒤이어 친일 내각이 물러나고 새 내각이 들어섰다.
이때 미국인 모스는 서울~인천간의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여,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898년 모스는 자금이 부족하자 한국정부의 허락도 없이 일본 정부와 재벌이 결성한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부설권을 매각하였다. 부설권을 인수받은 일본은 공사를 계속하여 완공시켰고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구간에서 임시영업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이 땅에 첫 기적이 울리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의 철도 교통 시대의 막이 열렸다.
한편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한반도 종단철도(부산~신의주)의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경부철도가 한국 남부지방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ㆍ경제적 세력을 확대하는 유효한 수단이라 판단하고, 이의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정부 및 러시아와 부단한 교섭을 거듭하였다. 1898년 9월 8일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1900년 8월 경부철도 부설공사를 착공하였고 1905년 1월 영등포~초량 간을 개통하였다.
1896년 7월 한국정부는 프랑스와 ‘경의철도계약’을 체결하고, 부설권을 피브릴르사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피브릴르사는 건설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데다가, 국제 정세의 변화로 경의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감소하자 3년 만에 한국정부에 부설권을 반환하였다. 이때 박기종 등은 1899년 7월 6일 대한철도회사를 설립,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선로 답사를 하는 등 경의선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한국정부는 동년 9월 궁내부의 내장원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고 국가 자본으로 경의선을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북철도국은 1902년 3월 서울~개성간의 건설공사를 착공하였으며, 동년 5월 8일 서대문 밖에서 기공식을 성대히 거행함으로써 경의철도를 우리 손으로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국내ㆍ외에 과시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도 자금 부족에 직면하여 공사는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이때 러일전쟁을 앞두고 대륙침략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은 한국측에 차관의 굴레를 씌워 경의선 부설권을 확보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의 철도문제 등을 주요 쟁점으로 하여 대립한 결과,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앞두고 경의선을 일본 군용철도로 부설할 것을 결정하였고, 동년 2월 21일 임시군용철도감부를 편성하였다. 일본은 동년 2월 23일 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고 경의철도를 일본의 군용철도로 부설할 방침임을 통고해 옴으로써 경의선은 일본 군대가 직접 부설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기간 중 일본은 조기에 공사를 끝내기 위하여 광대한 철도용지를 수용하였고, 또 수많은 한국인 노동자를 공사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1905년 4월에 용산~신의주간 연락운전이 개시되었고, 1906년 4월 3일부터는 용산~신의주간 직통운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당시 삼량진~마산 사이의 철도는 일본의 군용철도로 부설되었다.
1906년 7월 1일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통감부 철도관리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철도 전체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경부선을 매수하는 한편, 군용철도인 경의선과 마산선을 통감부로 이관함으로써 마침내 우리나라의 철도를 모두 국유화하였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만주에 대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이와 접속되는 한국철도를 연결고리로 적극 이용하였다. 일본이 많은 비용을 투입하여 한국에 철도를 부설한 것은 그들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를 확보하려는 팽창정책의 일환이었다. 경부선과 경의선을 개통함으로써 남북 종단철도망을 확보한 일본은 식민지 지배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남서와 동북을 연결하는 교차철도망인 경원선, 호남선, 함경선 등을 차례로 건설하였다.
당시 경원선은 1899년 9월 한국정부 궁내부 내장원에 설치한 서북철도국에서 관장하였다. 이때 프랑스와 독일이 부설권을 요구하였으나, 우리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박기종 등의 국내 철도용달회사에 부설권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동 회사가 자금 조달에 실패하자 1903년 일본은 경원철도 차관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철도부설권을 장악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고자 했으나, 전쟁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게 되자 경원선 부설을 중단하였다. 그 후 일제의 한국 강점기인 1910년에 다시 착공하여 1914년 9월 16일 용산에서 원산까지 경원선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1896년 프랑스는 호남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1904년 6월에는 호남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강경~군산간 철도와 공주~목포간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호남철도주식회사는 주식 공모로 자금을 마련함으로써 우리 손으로 직접 철도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군사상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경목철도(호남선)를 자신들이 건설하고자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부설권을 취소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호남선은 일본에 의해 착공한지 4년만인 1914년 1월 22일 개통되었다.
일본은 함경남ㆍ북도의 지하자원과 산림을 개발할 목적으로 1914년 10월 1일 함경선을 착공하여 1928년 11월 25일 개통하였다. 이로써 흔히 5대 간선이라고 하는 경부ㆍ경의ㆍ호남ㆍ경원ㆍ함경선이 모두 완공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대전을 기축으로 하여 한반도의 사방을 대각선으로 종단하는 간선철도망의 완전한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식민지 지배 체제를 확립한 일본은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고, 대륙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철도망 확장사업인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ㆍ추진하였다. 1927년부터 시작된 이 계획에 따라 도문선, 혜산선, 만포선, 경전선(진주~전주, 원촌~담양), 동해선(원산~포항, 울산~부산)이 전부 또는 일부 완공되고, 사설철도인 경남선(마산~진주), 전남선(송정리~담양), 경동선(대구~학산), 전북철도(익산~전주), 도문철도(회령~동광진) 등이 국유화되었다. 한국의 주요 광산지대와 공업지대를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철도망이 확충됨에 따라 한국철도는 군사철도에서 산업철도로 성격이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만주 침략을 위하여 일본은 가장 단거리로 일본~한국~만주를 연결하는 제2의 대륙간선철도망으로 일본~동해~「북선3항」(나진ㆍ청진ㆍ웅기)~「북선철도」~길회철도(중국)를 연결하는 「북선루트」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사설철도인 도문철도를 매수하여 표준궤도로 개축함으로써 한반도 북부지역과 동북 만주일대의 철도는 동일 궤도상에서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평원선(평양~원산)은 한반도 북부지역의 동서를 연결하는 주요 철도로 1926년에 착공되어 1941년에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서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공산물과 중부의 광물 및 동부의 수산물, 공산물 등의 수송로로서, 또 동해를 건너 일본과 연결되는 선로로서 중시되었다.
중국침략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후반 일본은 또 하나의 한반도 종단철도인 중앙선을 부설하였다. 「조선 중앙철도 부설계획」을 수립하고, 청량리와 경주를 연결하는 경경선(중앙선)을 1936년에 착공하여 1942년 4월 1일에 개통했던 것이다. 이 철도는 태백산맥 인근의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반출하여 대륙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것이다.
1937년에 발발된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철도의 군사적 성격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즉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간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함경선의 복선화를 추진하였다.
당시에 열차의 운행속도와 운행빈도는 갈수록 증가하였다. 경인선 개통시 인천에서 노량진간에는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고, 1일 1~3회 운행되었으나, 1905년에는 1일 4~6왕복으로 증가되었다. 경부선에서는 개통 당시 서대문~초량간 1일 남행과 북행의 2개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편도 약 30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성능이 향상된 급행열차의 투입으로 소요시간은 점차 단축되어 1905년 5월 1일부터는 14시간, 1906년 4월 16일부터는 11시간만에 주파가 가능하게 되었다.
경의선에서는 1905년 3월 10일 용산~신의주간에 1일 1왕복의 열차가 운행된 후 동년 4월 28일부터 연락운전이 개시되었고 1906년 4월 3일부터 직통운전이 시작되었다. 1908년 4월 1일부터는 부산~신의주 간 직통 급행열차인 「융희호」가 운행되었다. 1911년 11월 1일에는 압록강 가교가 완공되어 만주의 안동역까지 연장운행이 되었고, 남대문~장춘 구간에서는 1주 3회 직통 급행열차가 운행되었다. 이어서 1912년 6월 15일부터 부산~장춘 간 직통 급행운전이 개시되었다.
이 후 열차의 운행속도는 급속히 향상되어 갔다. 1932년 7월 1일부터는 서울~부산 구간이 8시간만에 운행되었고, 12시간 소요되던 서울~신의주 구간은 8시간 54분으로 운행시간이 단축되었다. 1934년 11월 1일부터 부산~장춘 구간에 직통 급행열차 「히카리호」, 부산~심양(봉천) 구간에 「노조미호」가 투입되었다. 1936년 12월 1일부터는 부산~서울 구간을 6시간 45분만에 주파하는 「아까쓰끼」호가 운행되었고, 1938년 10월 1일부터는 부산~북경 구간(2,068km)을 38시간 45분에 주파하는 직통급행 여객열차가 운행되었다.
한편, 1907년부터 경부~경의철도와 연안항로의 항구를 매개로 하는 연락운수가 시작되었으며, 1908년부터는 일본철도의 전 선로의 각 역과의 연락운수가 실시되었다. 이 때부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관부연락선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락운수는 1911년 11월 만주 장춘까지 확장되었고, 1915년 이후에는 만주뿐만이 아니라 중국 국유철도 6개선으로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 후 대륙과의 연락운수는 만포선ㆍ함경선 등이 개통되면서부터 더욱 확산되었다.
일본은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패전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물자 결핍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에서의 철도 건설사업과 개량사업은 중단되거나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경북선ㆍ안성선의 레일을 철거하여 병기재료로 전용하고, 차량의 부품을 철거하여 군수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에는 광주선(광주~담양), 경북선(점촌~안동), 경기선(안성~장호원), 충남선(홍성~장항), 금강산 전철선(창도~내금강) 등을 철거하여 군수물자로 전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 때부터 한국 철도는 점점 황폐화되어 갔다.
일제침략기 한국의 간선철도는 한국과 만주의 원료 및 곡물을 일본으로 수송하고 일본의 공업제품과 군대 및 이민을 한국과 만주로 운반하는 파이프 라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역할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일본은 특별운임제도를 마련하는 등 한국철도에 대한 두터운 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거점도 개항장과 포구로부터 철도노선상의 신흥도시와 정거장으로 옮겨졌다.
일제 침략기의 운수상황은 대체로 1930년대 중반을 계기로 크게 변하였다. 즉 전반기(1915~1923) 운수실적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여객이나 화물이 모두 급증하였으나, 중반기(1928~1932)에는 경제공황의 여파로 양자 모두 대폭 감소하거나 답보상태를 유지하였다. 반면에 1932년 이후에는 한국에서의 공업화와 한국ㆍ일본ㆍ만주간 경제 블럭의 형성으로 인하여 철도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였다.
1-3 대한민국 시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해방을 맞았으나 곧바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남북한에서는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당시 남한에서는 미육군 ‘워드멜 해밀턴’ 중령이 교통국장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까지 철도를 관장하였다. 1945년 9월 11일부터 남북간 운행이 중지됨으로써 한반도의 철도는 남북 종단 철도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였다. 해방 당시의 우리나라 철도의 총 영업연장 6,362km 중에서 남한의 영업연장은 2,642km이었고, 기관차는 남북한 총 1,166대 중 겨우 488대에 불과하였다.
1946년 1월 1일부터 교통국은 운수국으로 개칭되었고, 3월 29일에는 다시 운수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조선철도주식회사 소유의 충북선(조치원~충주), 경동선(인천~여주), 안성선(천안~안성), 경남철도주식회사 소유의 충남선(천안~장항벌교), 경기선(천안~장호원), 경춘철도회사 소유의 경춘선(성동~춘천), 삼척철도주식회사 소유의 철암선(묵호항~철암), 삼척선(북평~삼척) 등의 사철철도와 그 부대사업이 모두 국유화되어 운수부에 흡수되었다. 1946년에는 서울~부산 구간에 특별급행인 「조선해방자호」를 운행하는 한편 철도 복구에 착수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하여 운수부가 교통부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소홀하였던 동서 횡단철도망의 구축에 나섰다. 남북분단으로 심각한 자원 부족에 직면한 정부는 산업발전에 근간이 되는 지하자원을 채굴하고 지역사회 개발을 촉진하기 위하여 3대 산업철도인 영암선, 함백선, 문경선을 착공하였다.
남한에서 한창 철도 건설을 진행 중이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침전쟁을 도발하였다. 우리 철도는 즉각 전시수송체제로 전환되었고, 교통부 청사에 수송본부가 설치된 후 비상차량 동원이 시작되었다. 6월 26일 교통부 청사에 대한 적기의 공습으로 수송본부는 28일 영등포역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6월 30일 대전, 7월 14일 부산으로 이동하는 등 전쟁 속에서 한국 철도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속에서 한국 철도는 객차 3,354량과 화차 11,755량을 동원하여 2백만 명 이상의 피난민을 수송하기도 하였다.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철도복구대는 신속히 북상하면서 파괴된 철교와 터널 및 선로를 복구하였다. 그 결과로 10월 8일에는 서울~부산 간, 11월 12일에는 서울~대동강 간 열차의 운행이 재개되었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사이에 전황이 수시로 변화함에 따라 수송본부는 천안에서 수원과 영등포로, 교통부는 부산으로 전전하였다. 6ㆍ25전쟁으로 인하여 철도원 153명이 순직하였고, 기관차 61%, 객차 69%, 화차 57%, 건물 50%, 공장설비 27%, 전력설비 56%, 교량 13%가 파손 당하는 등 철도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철도인의 피나는 노력과 UN군의 지원으로 1951년 8월 1일을 기하여 남한의 모든 노선에서 열차의 정상 운행이 재개되었다.
1950년대에는 전쟁 속에서도 그동안 중지되었던 산업선 건설에 착수하여 우암선, 울산선, 김포선, 장생포선, 옥구선, 사천선, 가은선, 영동선, 삼척발전소선, 태백선, 강경선, 충북선, 오류동선, 주인선 등을 차례로 개통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자 철도는 다시 경제발전과 지역사회 개발의 주역으로 부상하였다. 정부는 자주경제의 기반 구축을 위해 전력ㆍ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 확보와 기간산업 육성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철도는 이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으로서 온 국민의 기대를 모았다. 그 결과 황지선, 경북선, 정선선, 동해북부선, 능의선(교외선), 경전선, 진삼선, 경인복선, 광주선, 북평선, 문경선, 전주공업단지선, 광주공업단지선, 여천선, 포항종합제철선, 충북복선, 호남복선, 광주제철선 등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1980년대에는 도시 교통난 해소를 위하여 경원선 복선, 안산선 복선전철, 과천선 전철, 분당선 복선전철을 건설하였고, 전라선 개량, 호남선 복선화, 경부선 복복선화, 경인선 복복선화 공사를 추진하였다. 또한 이 기간에는 산업선의 수송능력 향상을 위하여 중앙선, 영동선을 전철화하였다.
한편 철도의 운영주체가 1963년 9월 1일자로 교통부에서 독립한 철도청으로 바뀌었다. 그 후 철도공사로의 변신을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1995년 12월 6일에는 철도의 경영개선을 위한 ?국유철도의 운영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초기의 철도수송은 사회ㆍ경제 구조의 변동과 맞물려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해방직후에는 전 노선의 운행이 거의 중단되었었고, 6ㆍ25전쟁 기간에는 대부분의 철도시설이 파괴되어 제대로 수송업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전쟁으로 파괴된 대부분의 선로를 복구하였고 이에 따라 1960년대까지는 철도가 국가수송의 대동맥으로서 전국 화물수송량의 80%, 여객수송량의 50%를 분담하였다.
그러나 1970년도에 들어서서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도로위주의 투자정책으로 인해 철도의 수송분담율이 여객의 25%, 화물의 52%로 급감하였다. 또 고속도로와 국도가 급속도로 확장된 1980년대 중반에는 여객 21%, 화물 40%로 역할이 더욱 감소하였다. 현재는 도로 수송능력의 한계로 인해 철도 여객이 다소 증가하여 25%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철도의 화물수송은 공로수송의 발달로 인해 16%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수송수요의 감소에 따른 경영적자에 대한 자구책으로서 철도는 내부경쟁제도인 경영평가와 심사분석제를 도입하였으며, 철도병원ㆍ서울역그릴ㆍ열차식당 등을 민영화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여행서비스의 향상과 수입증대를 위하여, 철도종합관광상품을 개발하고 한일공동승차권제도를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민자역사의 건설, 역세권 개발, 화물터미널의 건설 및 운영 참여, 광고대행업, 상가 운영 등을 통한 경영의 다각화에도 진력하고 있다. 또한 철도건설에 민자를 유지하는 등 재정 자립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는 철도 경영수지의 적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철도의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철도산업구조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1-4 미래의 한국철도
철도는 환경친화성, 높은 안전성과 수송 효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매우 선호하는 교통수단이다. 에너지 소비측면에서 볼 때 승용차의 18배, 버스의 4배 이상 효율적이다. 특히 중장거리 대량 수송수단으로서의 철도는 현재 도로위주의 교통체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소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1998년 정부는 철도의 현대화를 위해 2020년까지 철도분야에 약 80~90조원을 투입함으로써 총 영업거리 5000km, 복선화, 전철화 및 자동화율 약 80%를 달성한다는 내용을 담은 ‘21세기 국가철도망 구축 기본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이를 토대로 2001년 3월 19일 ‘제1차 중기교통시설투자계획(2000~2004)’을 확정ㆍ발표하였는데, 2004년까지 철도의 수송분담율을 현재보다 2배 수준(7.6%→14.2%)으로 높이도록 한다는 목표 하에 약 28.6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본 계획에서는 한반도 종단 X자형 고속철도망 구축을 위하여, 경부고속철도의 1단계(서울~대구) 개통과 대구~부산구간 전철화 운행, 2008년까지 고속신선 건설 계획 등을 예정하고 있으며, 또한 호남고속철도의 경우 기본계획수립 용역 등을 거쳐 구체노선을 결정한 후 건설을 추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 간선철도의 경우 총 33개 사업 2,569km(완공 9개 사업 775.1km, 계속 7개 사업 422.3km, 착수 18개 사업 1371.7km)를 복선화ㆍ전철화하여 장기적으로 고속철도와의 연계운행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다. 그외 광역철도는 총 13개사업 363.4km(완공 4개사업 73.9km, 계속 6개사업 262.6km, 착수 3개사업 26.9km)를 건설하고, 도시철도는 총연장 233km(서울9호선ㆍ부산2ㆍ3호선등 지하철 7개, 경량전철 2개사업)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러한 사업들이 완료되는 시점에서의 우리나라 교통체계는 철도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시대로의 전기를 맞을 것이다. 지역발전을 촉진하고 도시교통난을 해소하여, 국토의 균형발전과 물류난 해소에 이바지하고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철도가 중추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전자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