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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째 날(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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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쟁이꽃동산과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숲쟁이 꽃동산의 한 밤은 길이 기억에 남을 이벤트중 이벤트였다.
더구나 석존 탄일 전야의 휘황찬란한 누리는 1954년의 같은 날을 불러왔다.
목발에 의지하고 8도를 유랑하다가 도착한 목포 유달산 허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연등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삼학도가 열아홉살 나그네를 어찌나 처연하게 했었는지.
타고난 낭인체질인지 집에서 보다 노숙때 더 숙면을 이루는데 간밤에도 그랬다.
참담했던 그 시절의 반추에도 불구하고 꿀맛 단잠이었으미까.
국가지정 명승 제22호인 숲쟁이 일대 산책으로 2555주년 석탄일(음4월 8일)을 열었다.
숲쟁이는 법성포와 홍농 사이 842번지방도로변에 조성된 숲이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쟁이'는 성(城)을 뜻하기 때문에 숲쟁이는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하며
옛부터 법성포구 파시로 몰려드는 보부상들이 이 숲에서 단오행사를 시작했단다.
뱃사람들의 무사 귀환을 비는 용왕제,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즐겼던 선유(船遊) 놀이 등
다양한 행사로 구성된 '법성포단오제'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성탄(聖誕)전야의 오색연등이 꺼진 법성사, 용화사가 공불시간 전이기 때문인지 잠자는
듯 고요하고 꽃동산 광장의 천막식당만이 이른 아침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한 아침.
배낭을 메고 나서는 늙은이를 부르는 소리가 식당쪽에서 들려왔다.
간밤에 막걸리 1병을 마시며 얼굴을 익혀 구면인 60대 주인부부의 아침식사 초대였다.
월요일이므로 평소라면 철수했을 텐데 석탄일에 대한 기대로 하루 더 영업한단다.
날로 더 악화되어 가는 경기에 시름이 깊어가지만 인심까지 그래서야 되겠느냔다.
해안선을 따라 남하할 수 록 후박(厚朴)을 더해가는 인심.
우리네 인심은 본래 이랬다.
첫 행선지는 당연히 백제불교최초도래지.
한반도 최초의 도래는 고구려로 되어 있으나(17대 소수림왕2년, AD372) 백제에는 12년
후인 384년, 15대 침류왕 원년에 인도 고승 마라란타에 의해 이곳 법성포에 상륙했단다.
외국문물의 해로를 통한 한반도 유입은 지리적 이유로 서해를 통해 이뤄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 외에는 올 것이 없는 동해에 반해 '최초'라는 접두사가 붙은 곳들이
모두 서해안에 있다.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충남 마량진과 '백제불교최초도래지' 법성포 등.
그러나 영국의 두 해군대령이 마량진을 목표로 항해한 것이 아니고 우연이었던 것 처럼
마라란타 역시 여기 법성포를 지목하고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탐험왕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마라란타보다 1108년이나 후에(1492년) 상륙한 카리브
해의 섬을 인도의 한 지역으로 착각했는데 하물며.
정확한 것은 마라란타 만이 증언할 수 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불가(佛家)에서 법성포도래지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지명연기설(地名緣起說)은 널리
쓰이는 고증 방법임에 틀림 없으나 그의 법성포 상륙에 대한 확증은 아니다.
이 곳의 지명은 아무포(阿無浦)에서 고려6대 성종(成宗/981~997) 11년(992)에 부용포
(芙蓉浦)로 개명되었고 조선조에 현 지명 법성포(法聖浦)로 다시 바뀌었단다.
불교색이 짙은 아무포로 불린 시기와 이 지명과 마라란타의 이곳 상륙과의 관련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세 지명이 모두 불연적(佛緣的)인 점에 무게를 둔다는 것.
법성포뿐 아니라 영광군 지명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본래, 백제때 무시이였는데...신라경덕왕16년에 무령군으로 개명했다가...고려태조23년
영광으로 개명((本百濟武尸伊...新羅景德王十六年改武靈郡...高麗太祖二十三年改靈光/
대동지지 영광편)한 이후 강현(降縣)과 복승(復陞)을 거듭했으나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시대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잦은 행정개혁이 있었음에도 '신령스럽다'는 뜻인 '靈' 자가
존속되어 왔으며 불교도래지일 뿐 아니라 원불교의 성지가 된 것이 우연일까.
굴비의 지존 법성포 굴비
기독교의 일부 독선적이고 극단적인 종파가 타 종교에 대해 적대적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으나 종교간의 대화 분위기 또한 성숙해 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예수와 석가모니의 탄일에 축하 메시지를 상호 교환하고 구국 기도와 사회 구원을 위한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하는 등.
나는 비록 불자는 아니라 해도 성탄일이므로 맘껏 축하하는 마음으로 역내를 일별한 후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법성포구로 갔다.
고려 성종때 조창(漕倉)이 건치(建置)되었으며 이태조 7년(1398)부터 조창 방비를 위해
수군만호의 지휘를 받는 수군이 상주하게 되었다는 법성포.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포구)바로 앞에서 돌아모여 호수와 산이 아름
답고 여염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해 사람들이 작은 서호라 했다. 바다 인근 여러 고을은
세미를 거두어 실어나르기 위해 모두 이 곳에 창고를 설치했다"(靈光法聖浦 海水潮到滙
渟於面前 湖山婉宕 閭閻櫛比 人謂小西湖. 近海列邑 皆置倉於此 爲捧米漕轉之所/擇理志
八都總論)고 이중환은 증언했다.
(서호는 마포~서강일대의 당시 이름이며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물 창고가 있던 곳)
삼국시대부터 이조말엽까지 해상교통에서 서해안의 대표적 항구였을 뿐 아니라 최상품
조기로 유명한 칠산어장에서 들어오는 만선 조기배로 파시를 이루었다는 포구다.
연원이 어떠하던 한때"여수에서 돈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보다 오래 전에
법성포구로 집결하는 보부상들의 입에서 "법성으로 돈 실러 가세”라는 말이 나왔단다.
급기야 법성인의 애창 굴비가(歌)로 정착되었으며 굴비의 지존의 위(位)에 오른 법성포
굴비는 영광 또는 법성포의 아이콘이 되었다.
칠산어장의 해체로 옛 영화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법성포와 굴비는 불가분의 관계다.
강원도의 대관령 횡계, 진부령 용대, 거진항 일대의 황태덕장마을과 비견되는 법성포의
굴비 이름에 유래가 있단다.
고려 중기의 문신(文臣), 권신(權臣), 척신(戚臣), 섭정(攝政)이었으며 이자겸(李資謙/?
~1127)의 난으로 불리는 정변으로 인해 영광에 유배된 이자겸이 주인공이다.
법성포에서 소금에 약간 절여서 통으로 말린 조기에 반한 그는 왕 인종(仁宗/17대 재위
1122~1146)에게 진상했다.
이 때, 조기의 이름을 굴비(屈非)라 명명했는데 전비를 뉘우치거나 용서받기 위한 증뢰
(贈賂)가 아니며 굴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란다.
이후 수라상의 단골 메뉴가 됨으로서 유명해졌다는 것.
목포~신안~무안~함평 길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영광의료원에 입원했던 2010년 4월
이후 2년만에 다시 들른 법성항이 퇴락해 가는 느낌이 들었으나 괴이쩍을 일이 못된다.
지방어항이며 예전에는 나주의 영산창(1512년 중종때 법성창으로 이관)과 함께 전라도
2대 조창의 하나였다지만 서해안 전체 어항의 현실이니까.
더구나, 사라진 어장의 대역이 없는데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칠산어장이 여전히 건재하다면 호수같은 앞바다가 어찌 한가하며 공유수면을 매립한
뉴타운이 저리 답보상태로 머물러 있겠는가.
백수해안노을길
40년 이상 한결같은 서울 J의 연통으로 그의 친구의 환대를 받고 굴비의 구입 탁송까지
도움도 받은 후 2년 전에 걸었던 백수해안도로를 다시 걷기 위해 법성포를 떠났다.
법성포구로 유입되는 와탄천(瓦灘川) 때문에 여전히 한참을 돌아야 하는 길이다.
길 개설에 열성적인데 반해 교량건설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거금을 투입해
만든 도로효과가 반감되고 있다.
백수해안도로는 일부구간에 77번국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든 영예로운 길이라 하나 내게는 평가절하의 길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탄력있는 흙길, 걷기 좋은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은 없으니까.
오죽했으면 멀고 먼 땅 이베리아 반도까지 가서 실컷 걷다 왔을까.
법성면 서쪽 하단인 와탄천 법백교를 건너서면 백수읍이다.
원불교 영산성지로 가는 남쪽 길을 버리고 군민생활체육공원을 지나 옥녀봉 자락으로
난 북쪽 해안로(14번군도) 따라 한시랑 들녘을 지났다.
고려때 한씨 성(姓) 시랑(侍郞/정4품으로 6부의 상서 다음 벼슬)이 유배되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란다.
한참을 걸어왔건만 법성항, 불교도래지가 지호지간이다.
다리 하나쯤 있을법 하건만 새 다리는 커녕 이왕 건설중인 홍농~백수 간의 교량은 물론
도로까지 지지부진한 상태다.
구수산 동북 기슭의 영광CC를 지난 해안로는 대신3교를 건넌 후 77번국도와 헤어진다.
해안로는 불과 2년만에 다시 걷기 때문인지 전번에 비해 감회가 많이 떨어지는 듯 했다.
그 때는 참으로 감격적이었는데.
함평 대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영광의료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처음 몇 시간은 뒤에서
달려온 차에 치인 순간 외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내가 누군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날 찾아온 경찰관의 말에 의하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떨어졌는데 아마 사망했을 것
이라는 목격자의 신고로, 시신을 유기했을지도 모른다 해서 함평 일원을 수색끝에 입원
중임을 확인했을 만큼 일막 광풍 끝에 걷는 걸음이니 어찌 아니 그랬겠는가.
갑작스런 충격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는 신경외과 의사의 진단대로 기억이 점차
회복되었으며 안면 찰과상일 뿐 골절부위가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메뉴 '우리의 이야기들' 395번글 참조)
집에 알리기를 거부하고 이틀간의 정밀검사에서 이상 없음을 확인한 3일째 날 퇴원하려
할 때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감지한 의사는 자상한 소견을 쓴 진단서를 내게 주었다.
이상 증세가 나타나면 즉시 입원하여 전문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관련 보험회사 직원이 달려와 좀 더 입원가료하라며 퇴원을 말리는 진풍경 속에서 병실
을 나선 나는 당초의 계획보다 지연된 대신 감격적인 걸음으로 이 길을 걸었던 것이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안겨 주었으며 나아가 이베리아 반도
에서 75일간, 2.060km 이상을 걷는 대장정을 완성하게 했다.
영광군이 백수해안로에 공을 많이 들였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연을 파괴한 것은 유감이지만 구수산자락 해변에 차로를 개설하고 바다에 더 밀착한
건강365계단 방부목인도를 만들고 우뚝한 곳에 3층전망대 칠산정(七山亭)을 세웠다.
이 길이 백수해안로의 노른자위 노을길이며 그 핵은 노을전시관이다.
관광 여독을 풀고 가라는 건지 해수온천랜드도 있다.
정유재란열부순절지 단상
노을길의 끝지점 바닷가(大新里墨防浦)에는 석조비각이 검푸른 서해를 응시하고 있다.
함평군 월야면에 거주한 동래, 진주 양 정씨 문중 부인들이 왜적을 피해 이 곳에 왔으나
다시 왜군을 만나자 굴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자며 모두 바다에 투신 순절했단다.
정유재란(1597) 때 일이며 그들을 기리려고 숙종 7년(1681) 여기에 순절비를 세웠으며
이름하여 영광정유재란열부순절지(靈光丁酉再亂烈婦殉節地)로 도기념물 제23호다.
열두 부녀가 순절했으나 이곳에는 함평의 양 문중 부녀 8열부의 순절비가 있고 네 분은
외지(출가한정씨와타성) 열부들로 각기 자기 고장에 정열각을 건립, 추앙하고 있단다.
당쟁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른 신하들과 사대부들, 이에 뇌동한 못난 왕 때문에 민초들이
임진왜란의 참화를 입게 된 것은 절통하지만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불과 5년 어간에 재발한 정유년의 참상이야 말로 군신이라는 자들에게 한 없는
증오를 퍼부어도 울분이 사그라지지 않을 일이다.
참혹한 전화를 입고도 개과하고 일심으로 대비하기는 고사하고, 나라와 백성의 고난은
안중에 없고 날로 더 간악하게 당파싸움에만 매몰되어 일어난 비극이기 때문이다.
해전의 완승으로 종전을 이끈 성웅을 정쟁의 제물로 삼은 것은 한 예일 뿐이다.
동양의 넬슨이라는 별명이 붙은 일본의 도고(東鄕平八郞/1848~1934/러일전쟁때 동해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제독까지도 자기를 "넬슨
제독(Horatio Nelson/1758~1805/Trafalgar해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국민적 영웅)에
비견하는 것은 좋으나 감히 이순신 장군에 비할 수 없다"고 했다는 군신(軍神)이었건만.
그로부터 313년후 그들(일본)에게 완전히 먹혀 36년이라는 질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해방은 되었지만 그들에게 빌붙었던 무리가 다시 판을 치고 급기야 소위 황국장교였던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간 국민을 핍박했는데도 영웅이 된 부끄러운 나라다.
오죽 심했으면 최측근에게 살해당했을까 마는.
한데, 이 '서남동 길' 글을 쓰는 시점에는 그 때로부터 겨우 33년 반도 못되어 그의 직계
비속이 다시 그 자리에 앉게 되는 한심한 나라다.
연좌제가 없고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민주국가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의식, 민족적 정서를 소중히 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민족의식과 정서에 올곧게 충실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아닌가.
남과 북의 분단으로는 부족한가.
동인과 서인이 싸우게 하고 노와 소, 남과 여가 편을 가르게 하는 등 저주받아야 마땅한
붕당, 당쟁을 부추겨 만들어낸 수치스런 사건이다.
게다가 민족의식은 어디 가고 반토막난 작은 땅덩더리가 합쳐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옛길 10대로의 하나인 '통영별로'를 걸을 때 함양에서 "김종직을 논단하고 유자광을
변호한다"(메뉴<옛길> 통영별로 12회글을 읽기 권한다)고 했다.
영남학파의 파두 또는 사림파 사조(士林派師祖)인 점필재 김종직을 원망한다는 뜻이다.
사림파를 적극 발탁하고'우리당'(吾黨)이라 부르는 등 붕당정치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 야고보의 포르투 길을 걸을 때 포르투의 한 대학교수 친구를 얻었다.
어느날 밤에 한국의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는 그에게 자신있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북분단상태가 장기화 되고 있지만 우리는 미구에 통일될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유한하나 민족은 영원하며 민족은 이데올로기를 능히 극복할 것이니까."
지난 연말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통해서(strongman's daughter) 한국에 중요한
선거가 있음을 알았다며 궁금해 하는 그의 e-메일에 나는 대답했다.
"Dishornorable!"이라고.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영국의 외교관, 대학교수였던 E. H. 카아(Edward Hallett Carr/1892~1982)의 말이다.
과거의 한 기록으로 끝나는 것은 역사일 수 없고 과거와 단절된 현재는 없다.
함석헌 선생은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라고 말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 시간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영원한 현재다.
하나님은 우리 역사의 볼륨이 치욕으로 커가도록 언제까지 방임하시려는가.
각성하게 하는 역사가 아니고 답습의 교재로 일관하고 있는 수치스런 역사 아닌 역사다.
비슷한 시기에 지구 저쪽에서도 유사한 사건들로 점철되었음을 어찌 모르랴.
그러나 그 쪽은 우리와 달리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획기적 변혁과 발전이 뒤따랐다.
이 다른 점이 우리가 수난당해 마땅한 부끄러운 민족으로 묶여 있고 그들이 선진국으로
부상하게 된 이유다.
최고의 은인은?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 열부순절지를 지나면 한동안 77번국도를 따라야 한다.
칠산정에서 서서남으로 아련하던 칠산어장의 일곱 산도(山島/일산도 ~ 칠산도)가 백수
해안공원에서는 정서쪽 지근으로 다가온다.
북으로 고창과 부안 곰소를 지나 모항에 이르는 저 거대어장이 사라진 것이야말로 이유
불문하고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백암해안전망대, 식당과 팬션의 이름인 노을 앞에서 차도를 떠나 영화제목일 뿐 실재의
섬이 아니라는 '마파도 가는길' 촬영지 동백마을을 지난다.
해안길이 어렵사리 이어지지만 석구미해수탕 앞에 이르면 더 갈 수 없는 해안이다.
서남동 길을 잠시 중단하고 귀가하기 위해 군서면을 거쳐서 영광읍으로 철수했다.
딸을 대리하여 거래하는 은행이 영업정지 당했음은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는 늙은 아내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그럴 수 밖에
없으며 3일이면 족하리라 예상했으나 2개월이 넘게 걸렸다.
영광의 해변을 걷고 있어야 할 5월 31일 오전에 복막염으로 S대힉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으며 촌각을 다투는 대장절제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귀가 다다음날 오후, 다시 길떠날 채비를 할 때부터 이상 징후를 보였는데 떠나야 하는
이른 아침(5월31일)에 맹장이 파열된 것이다.
다채로운(?) 병력(病歷)을 가지고 있으며 투병기록도 화려(?)하지만 참으로 참기 힘든
고통은 1941년 원시적인 의술로 개복수술한 때에 이어 71년만에 두번째다.
집도의사에 의하면 2년여에 걸쳐 앓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맹장염이 심각한 복막염으로
악화되었으며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단다.
그러니까, 탈장 수술의 후유증이 간헐적으로 괴롭힌 것이 아니라 맹장의 염증으로 인한
고통이었으며 상당 길이의 대장절제는 물론 소장까지도 그리해야 할 뻔 했다는 것.
국내에서는 물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수시로 괴롭히는 통증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달래면서 걷거나 아예 주저앉아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으며 바로 수일 전까지도 그랬다.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는데 출국 전에 받은 종합검진에서 왜 집어내지 못했을까.
아무리 무모하다 해도 알고도 강행할 수 있을까.
온종일 사람 구경 못하는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발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서남동 길이 국내라 하지만 인적이 없는 해변에서 그랬더라면?
하마터면 객사할 뻔 했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사망 순례자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특히, 의술이 열악한 20c 이전이 아니며 첨단의술의 시대에 사망했다는 비문을 읽을 때
에는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한데, 나도 그같은 비문의 주인이 될 뻔한 후에 비로소 그들의 사인을 짐작하게 되다니.
아무리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술이라 해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혼자 버둥거리다 숨을 거둘 수 밖에.
무엇보다 머나먼 타국땅에서 겪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국내라 해도 심산에 오르거나 인적없는 길을 걷는 중이었다면 타국땅과 다를 것 없으며
사람있는 타국땅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데 귀가한 후인 것이 가장 큰 다행이다.
그렇다면 내게 최고의 은인은?
피해를 입게 된 무수한 관계자들이 아우성치고 있지만 영업정지 당한 은행일 것이다.
<계 속>
첫댓글 아멘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두근거리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것은 왜 일까요. 감히 여행을 좋아 한다고 말하면서도.숱한 길들을 다만 지나쳐 왔을뿐 ㅡ주로는 외적인 풍광에서만 내 작품의 소재로서의 가치를 찾아 오기가 쉽상이었기에 선생님의 글들이 새삼 스럽고 달디답니다.
지역에서도 역사 연구. 해설가들이 있어 함께하며 삶에 풍성을 더하여 좋았는데 ㅡ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배우고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 있어 새로운 궁금증으로 설레고. 그 길과 여행을 꿈꾸게 하는걸 보면 아무래도 제가 모범생 체질 인가 봅니다.
건강 하시고 꾸준히 좋은 글들로 더 많이 가르쳐 주세요
긍정적으로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