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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비德斐 선원(보리살타사랑)
 
 
 
카페 게시글
사찰소개 스크랩 중국 맥적산 석굴사원 (중국 감숙성 천수)
도쿄여우비 추천 0 조회 81 11.02.01 02:0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7082

 

 

 

 

 

 

 

 

 

제13호굴삼존대불입상

 

돌산을 조각하여 기초를 만들고, 찰흙과 지푸라기 섞은 것을 그 위에 붙여 불상의 모양을 만들었다. 하얀 피부는 석회가루를 칠한 것이다.

 

매표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큰 입상이 동쪽 절벽의 <제13호굴> 삼존대불입상이다. 

 

매표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큰 입상이 동쪽 절벽의 <제13호굴> 삼존대불입상이다.

 

제3호굴의 천불상이 있는 회랑

 

맥적산 불상의 95%는 철망안에 갇혀있다. 원형의 붉은 절벽에는 194개의 굴실窟室과 감실龕室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 굴감에 봉안된 불상은 현재 소상塑像 3,513구, 석상石像 3,662구로 총 7,200여구가 남아있다

 

 제3호굴의 천불상이 있는 회랑

 

제3호굴의 천불상이 있는 회랑이 이어진다. 우리가 지나가는 회랑의 벽면으로 2단, 회랑의 아래쪽으로 4단이 있는데 모두 합하면 총 6단, 297구에 이른다. 천개가 되지는 않지만 여하튼 많다는 의미로 천불상이라 이름 붙였나 보다.

 

제4호굴은 북위시대의 것으로 맥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장 큰 석굴이다.

 

제4호굴은 북위시대의 것으로 맥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장 큰 석굴이다. 정면의 벽에는 장식된 7개의 감실이 있는데 모두 여러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감과 감 사이에는 부리부리한 역사의 부조가 서 있는데 울퉁불퉁한 얼굴이 도깨비 같다. 굴의 양쪽에는 불상을 지키는 높이 4.5미터의 역사상(力士像)이 있으며, 그 위에는 작은 감실 안에 또 다른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4호굴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이곳에서 산 아래를 조망하는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100미터가 넘는 높이에 서니 붉은 직벽과 겹겹이 보이는 회랑과 계단이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제5호굴을 지키고 있는 천왕상. 소를 밟고 있다하여 우왕이라 불린다. 

 

제5호굴은 수당대인 7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곳이다. 3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중앙 감실의 입구에는 관을 쓰고 갑옷을 입은 천왕상이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고 있다. 소의 등을 밟고 있다하여 우왕이라고 불린다.
 

5호굴의 삼존불. 3개의 감 중 중앙에 있다. 수나라 때의 것으로 풍만하고 중후하다.

 

5호굴의 삼존불

 

 

 

 

 

  

철망 밖에 있는 불상들이다

 

 

 

 

불상과 함께 벽화들이 그려져있다. 불상과 함께 본생도本生圖나 서방정토변상도西方淨土變相圖와 같은 벽화도 대량으로 조성되었는데 벽의 탈락으로 현재는 1300㎡정도만이 남아있다

 

제98호굴 서쪽 절벽의 마애대불입상(磨崖大佛立像)

 

3개의 입상 중 하나는 표면의 흙이 무너져 내부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북위시대의 것으로 본존의 높이는 13.8m로 이마가 넓고 표정이 근엄하다. 이 불상은 후대에 중수를 거칠 때 멀리서 보아도 얼굴형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눈꺼풀과 입술에 깊은 음각을 새겨 그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이라 한다.

  

 

 

제 127굴 비천도

 

147호굴  약간 긴 얼굴과 물결무늬의 옷주름이 아름답다 

 

 

맥적산麥積山석굴

 

맥적산 석굴은 중국에서 4번째로 큰 석굴로서 감숙성 천수시 동남쪽으로 45㎞ 떨어진 숭산준령崇山峻嶺의 맥적산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울창한 산들과는 달리 기묘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맥적산은 홍사암紅沙岩이 층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맥적산麥積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나라 개원 22년(734년) 진주 대지진으로 절벽이 갈라지면서 서쪽 절벽과 동쪽 절벽으로 나뉘게 되는데 비교적 오랜 시기의 석굴은 서쪽에 연대가 하강하는 석굴은 동쪽에 있어 석굴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원형의 붉은 절벽에는 194개의 굴실窟室과 감실龕室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 굴감에 봉안된 불상은 현재 소상塑像 3,513구, 석상石像 3,662구로 총 7,200여구가 남아있다. 불상과 함께 본생도本生圖나 서방정토변상도西方淨土變相圖와 같은 벽화도 대량으로 조성되었는데 벽의 탈락으로 현재는 1300㎡정도만이 남아있다. 석굴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남아있는 문헌과 불상의 양식적 편년으로 미루어 진秦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석굴은 북위北魏(386~534)시기의 것이며 청淸(1644~1911)까지 연대가 내려가는 작품도 있다. 먼저 현존하는 석굴 중 가장 연대가 이른 원위석굴元魏石窟(북위말~동서위초)는 북위北魏 무제武帝의 폐불廢佛 이후 문성제文成帝의 불교 융성정책에 따라 개착된 석굴인데, 이러한 초기 석굴의 불상은 양식에 따라 초,중기로 나눌 수 있다. 당당한 체구와 역강한 조형성 등을 특징으로 한 초기의 불상과는 달리 중기 이후로는 세장한 얼굴과 수척한 체구가 특징적이다.

다음 시기인 서위석굴西魏石窟은 크게 535년과 538년에 새로운 개착이 이루어졌다. “서위대통원년西魏大統元年(535)에 전각들을 다시 수리하여 절을 크게 일으켰다”라는 진주서응사재장불사리기秦州瑞應寺再葬佛舍利器의 기록을 통해 535년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때 127호가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538년에는 문제문황후文帝文皇后 을불씨乙弗氏가 맥적산 석굴의 비구니가 되고 그의 아들 무도왕원술武都王元戌이 진주자사秦州刺史가 되면서 석굴 개착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북주北周시기의 석굴은 황실皇室이었던 우문도宇文導, 우문광宇文廣 부자가 진주자사를 맡으면서 조성되었는데 특히 26,27굴의 천정 부분에 그려진 불화는 치밀한 구조와 우아한 형태로 당대 최고의 수준작으로 꼽히고 있다.

통일국가를 건설한 수隋에서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맥적산 석굴을 다시 한 번 크게 중창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불상은 13굴의 3존대불과 94굴의 소조 3존불인데, 이 시기의 굴과 감은 마제형馬蹄形의 평면에 돔형의 천정, 불상은 3존불이나 5존불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많다. 당唐, 송宋 이후로는 새로운 굴을 개착하지 않고 예전에 세워진 굴에 소조불塑造佛을 새롭게 조성하는 형식을 취한다. 북조시기에 만들어진 90,91굴에 송나라 때 개조된 제자상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제1굴은 열반동으로 와불상이 있다. 제3굴의 천불당은 세어보니 이름의 뜻과 달리 가로로 24개 밖에 되지 않는다.  제4굴의 상칠각불은 7개의 불상이다. 맥적산 석굴은 가는 철망으로 95% 정도는 갇혀 있다. 37굴 수나라 때의 협시보살은 아담한 체구에 두 손을 정성스럽게 모아 가슴에 대고 있었다. 수나라 불상의 특징은 체구가 아담하다는 것이었다. 불상의 겉옷은 체크무늬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43굴 금강역사는 어마어마한 체구에 불거져 나온 검은 눈동자는 까만 유리로 끼어져 있었으니  이 금강역사는 당, 송 때의 작품이라 했다. 또한 제43굴에는 매우 가련한 여인이었던 불상이 있다. 석굴이름은 서위 문제 원배황후 을불씨 묘굴(西魏文帝原配皇后 乙弗氏墓窟)이다. 원래 을불황후는 서위 문제의 비로서 12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성인이 된 자식은 태자 1명 뿐이었다.  그런데 몽골계 유목민인 유연족이 자주 국경을 쳐들어 오므로 하는 수 없이 왕은 을불황후를 출가 시켜 승려가 되게 하고 유연족 출신의 14세 여자와 다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유연족 출신 여인의 투기에 의해 결국 왕은 옛 왕비인 을불황후에게 자결토록 명하여 죽게 하였다. 또한 유연족 출신의 새 황후는 황후가 된지 2년 후에 산고(출산 고통)로 죽게 된다. 참으로 인과응보가 아닐 수 없다.  그 양 옆에는 조그마한 시종들이 서 있다.

 

 

중국 감숙성 천수(天水)


천수天水는 감숙성甘肅省 동부에 위치한 소도시이자 감숙성의 실크로드를 여는 첫 번째 도시로 서안에서 서쪽으로 328㎞, 난주蘭州에서 동쪽으로 350㎞ 떨어져 있어 서안과 난주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설화에 따르면 기원전 114년 한무제 한무제때 대지가 진동하여 갈라지더니 땅속에서 붉은 빛이 솟아나 하늘의 번개와 뒤섞였으며 이 때 하늘의 물이 땅의 갈라진 곳에 내려와서 호수가 되었다고 하여 그곳의 이름을 천수라 명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런한 창건 설화가 아닐지라도 천수는 위하渭河강가에 위치해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고 풍경이 수려하여 ‘소강남小江南’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秦(B.C. 221~207)의 근원지이기도 한 천수는 이처럼 풍부한 자원과 그에 따라 발달된 농업, 황하와의 연결에 따른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 등으로 통일국가의 저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천수는 감숙성의 제2의 공업도시이며 동서로 접해있는 북도北道와 진성秦城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 기차역을 중심으로 교통은 북도에 주요한 번화가는 진성에 밀집해 있다. 고도古都를 자랑하는 도시이니만큼 역사적 유적도 다양한테 천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맥적산麥積山석굴이나 시내에 있는 복희묘伏羲廟, 도교사원인 옥천관玉泉關, 한의 명장 이광 李廣(B.C. 183~119)의 묘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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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2.10 20:31

    첫댓글 감사합니다_()_

  • 작성자 11.12.11 10:08

    저도 감사 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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