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학교 아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등 잠시 방황하다가 88올림픽 다음 해인 1989년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 광동종합고등학교에서 정규교사로 직무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구한말 춘원 이광수 8촌 형인 운허 스님이 민족교육에 큰 뜻을 두고 세운 불교종립학교이다. 설립 당시엔 지금 광릉수목원 옆의 풍광 좋은 곳에 있었으나 그 후 진접읍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으로 교사를 이전했으며 내가 근무할 무렵에는 인문계와 실업계가 공존하는 15개 학급의 종합고등학교였는데 이 지역에 개발의 붐이 일어나면서 현재 36개 학급의 인문계 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88올림픽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새봄 간절히 소망하던 국어교사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음은 여드름 피어나는 사춘기 소년 같이 부풀어 올랐고 가슴은 간헐천처럼 꿈을 향해 힘차게 솟구쳤으며 학교에서 함께 생활할 아이들의 영롱한 눈동자를 그려보니 심신은 벌써 교문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부임 초창기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다소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존의 선생님들과 친분관계도 자연스럽게 생기는 등 여러 상황에 익숙해지고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일을 실천한다고 생각하니 즐겁고 보람찬 나날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 때는 이곳이 비교적 계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시골학교여서 학부모님들은 학교생활 전반을 선생님들께 맡겼으며 아이들도 잘 따르고 순수했었고 선생님들은 자식이나 동생처럼 학생들을 위해 수시로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등 업무의 과다와 경중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했다
선생님들의 가장 고단한 일 중의 하나인 연구수업 을 할 때는 힘내시라고 격려의 예쁜 편지와 음료를 가져와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버스를 빌려 소풍 갈 때는 차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경치가 좋은 곳에선 추억을 기리는 시진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경기도 대부분 사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이 학교의 젊은 국 영 수 선생님들은 3~5년 정도 근무 해 경력이 쌓이면 서울 시내 사립 중고교나 경기도공립 중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세상 돌아가는 줄도 모른 나는 '학교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선생님을 믿어주시는 학부모님과 마음씨 고운 아이들을 두고 왜 학교를 옮길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1993년 내가 고3 상과 학급담임을 맡았을 때의 가슴 뭉클했던 장면이 핑크빛처럼 지나간다. 교정 여기저기 싱그러운 초목이 속삭이고 소년 소녀의 웃음소리가 우유 빛같이 울려 퍼지는 스승의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학급회장이 조용히 다가와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을 위한 조촐한 스승이 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천천히 입실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교무실에서 잡무를 처리하다 조심조심 앞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든 학급 아이들이 일어나 박수치며 반겨주었다.
탐스런 캐잌 위에 촛불을 붙여 애조 띤 스승의 노래를 부른 후 모든 아이들이 한명씩 나에게 다가와 예쁜 엽서 앞면에 감사의 글과 꽃 한 송이를 건네는 것이었다.
"선생님 스승의 날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순간 나는 감동이 파도처럼 일려와 세상 전부를 가 진 양 행복에 겨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점점 녹음은 그 기세를 더하고 마파람이 이는 후텁지근한 농염이 지나 하늬바람 하늘거리는 초가을이 오자 아이들은 하나 둘 취업문을 두드려 나가고 나는 미취업생 몇 명과 차가운 교실 귀퉁이 앉아 낙엽 같은 시간을 떨구고 있었다.
시간은 시나브로 흘러 이곳저곳에서 새봄을 알리는 내음이 풍기는 2월 초의 졸업식 날이었다. 강당에서 졸업식 행사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와 석별의 아쉬움을 담은 채 교무실에 있었다.
그런데 취업한 학급 아이들이 몰려왔다. 첫 월급 탄 기념이라고 하면서 자그마한 쇼핑백을 놓고 이슬 같은 눈물을 보였다.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 껴안아 주며 악수도 하며 사진을 찍고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하였다. 아이들의 정성이 궁금해 집에서 그것을 풀어보니 속내의 팬티 양말 장갑 손수건 등 다양했다. 아이들의 갸륵한 마음씨를 헤아린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한편 이렇게 떼 묻지 않은 아이들 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자 내심 진행하고 있는 일이 적절한가를 고민하며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그 때 나는 서울의 잠실여고로 학교를 옮기려고 면접을 본 후 확답을 받은 상태여서 적절한 시기가 되면 광동학교에 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광동학교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내심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 마음속이 복잡해져 있었다.
2월 말쯤 전근 간다고 말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자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아쉬워하면서도 앞으로 더욱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했다. 특히 교장선상님께선 운동장 조회를 소집하여 전교생 앞에 나의 영전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이별을 아쉬워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배려했다. 그날 저녁 퇴계원 음식점에서 나를 위한 회식 자리가 마련되어 선생님들과 이별주를 마시면서 마음을 달랬다.
잠실여고로 학교를 옮기고 새로운 분위기에 익숙해지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꽃피는 춘삼월 말의 어느 날!
퇴근 후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학교인 광동학교 졸업생이라고 통성명을 밝히고 통화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선생님 수업 들었던 0 0 0입니다.”
“반가워!”
"선생님 좋은 학교로 전근 가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그래 자네도 잘 지내지"
"취업해서 회사 다니고 있어요."
"잘 됐네. 나중에 얼굴 한 번 보자"
나는 그 제자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눈 후 좋은 날 반드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오면서 형언할 수 없게 머리가 무엇으로 한방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아마 여태까지 교단에 있으면서 이렇게 뒤가 켕긴 적은 처음이었다.
좋은 학교?
좋은 학교!??
과연 무엇이 좋은 학교의 기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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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광동학교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면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달궈져 온다.